북파 유격대, 백골 병단의 혈투.
- 제 1 편 -
빨치산 출신 김일성은 대남 도발에서 유격전을 특히 중시하였다.
6.25 전부터 100명 -300명 규모의 강동 정치 학원 출신들을
주축으로 하는 유격대를 남한에 파견했었고 전쟁 중에도
남한 후방의 유격전을 선동했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백골 병단 유격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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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주변에서 활동하던 공비들만 최고 전성기에는
일만 명이 넘었었다.
김일성은 유격전에 의한 남한 적화의 헛된 꿈을 1968년
울진 삼척 지역으로 120여명의 무장 공비들을 파견해서
거의 다 죽게 만든 망동 때 까지도 버리지를 않았다.
북한의 유격대 남파가 활발했던 대신[ 영등포 학원이니
수색 학원등이 있었지만] 전쟁 전 남에서 북에 보낸 유격대는
정보 수집 수준 임무의 극 소수였다.
실제로 개마고원 유격대 같은 자생 유격대도 있었으나 남한의
유격 활동은 매우 저조했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고 6개월 뒤에 남에서 북으로
대규모의 유격대를 파견한 일이 있었다.
백골 병단이다.
병력이 무려 600여명이 넘는 백골 병단의 지휘관은 후에 주월
한국군 사령관으로 유명했던 채 명신 장군이었다.
그는 중령으로 이 유격대를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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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명신 백골병단 사령관은 소대장, 중대장까지
공비 소탕전을 했었고 북진했던 6사단 대대장으로서 중공군의
기습에 산산 조각이 났을 때도 부하 두 명과 여러 사선을
넘고 넘어 탈출해서 구사일생으로 황해도와 강화도를 거쳐
충남 당진 석문항으로 살아 돌아 온 유격전의 풍부한 경험자였다.
다시 말하면 유격전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박학했고 경험도 많아
가히 유격전의 명수라 할 전문가였다.
채 명신 장군이 적진 속으로 지휘하고 들어갔던 백골 병단의
활약은 그 분을 유격전의 전문가로 군내에 인정받게 만들었다.
월남전이 격화 되면서 맹호 부대를 파견할 때 이구 동성의
군 추천에 의해서 박 대통령은 그를 맹호 부대장으로 지명했다.
주월 사령관 시절의 채몀신 장군.
그가 육군 중령으로서 백골 병단을 지휘할 때
나이가 스물 여섯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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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유격대는 징집된 민간인들로 급조한, 말이 안 되는
집단이었다.
백골 병단 결사 13연대원들이 귀환후 강릉에서 촬영한 사진.
이 사진은 글을 본 브라질 교포 이 동철님이 보내주신
전 백골 병단 13연대원이었던 아버님의 사진이다.
아버님 군에 다시 투신, 켈로 부대 요원을 거쳐
월남전까지 참전했었다.
이 13연대는 남하중이던 북한군 빨치산 사령관
길 원팔 중장을 잡아서 처단한 부대다 .
결사 13연대의 투입된 124명의 병력중 단지 58명만
살아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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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믿어지지가 않는 것은 이들 북한 파견 유격대원들이
명색이 정보학교라는 대구 7훈련소에서 받은 훈련은
단 3주간이었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제식 훈련이나 겨우 끝난 논산 훈련소
훈병들을 북파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육군 본부입장에서 유격대원들이 살아 돌아오리라는
기대는 아주 작았기에 소모품으로 생각하고 되는대로 적진에
투입한 이들 백골 병단 유격대원은 2개월의 악전고투를 하면서
단지 절반만 생환하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상상외의 전과를
거두었다.
백골 병단의 탄생에 관한 배경과 개략전인 작전 경과를
먼저 소개 하고 병단의 최대 전과라 할 수 있는 남파 유격대장
길 원팔 북한군 중장 체포 처단기를 병단의 전투 사례로서
소개한다.
그리고 이 글은 채명신 장군의 자서전 ' 사선을 넘고 넘어'
와 백골병단 결사 11연대 작전참모였던 전인식 선생이
썼던 '적진 800리의 혈투'를 참조했슴을 미리 밝혀둔다.
이야기는 유엔군이 중공군의 공세에 몰려 서울을 내놓고
철수했던 1951년 1.4 후퇴 전으로 올라간다.
미 8군의 정보국은 전부터 한국 육군 본부 정보국에게 남한에는
북한 빨치산들이 우글거리는데 왜 당신들은 북한에 같은 꼭 같이
게릴라 부대를 보내서 운용할 줄을 모르느냐고 채근해왔다.
모든 것을 미군에게 꽉 잡혀있던 국군에서야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업무는 육본 정보국에 떨어졌고 정보국 장교 중
이 극성 중령이 지휘 하도록 지명되었다.
이래서 북파 유격대가 번갯불에 콩 구어 먹듯 조직되어서
북으로 파견되었다.
말로만 연대라는 부대명이 붙은 결사 11연대, 결사 12연대,
그리고 13연대의 3개 연대로 구성되어 있다.
각대 인원은 11연대가 378명, 12연대가 170명,
13연대가 124명이다.
총 600명이 넘는 대부대였다.
구성을 보면 게릴라전의 기본도 모르는 대 병력 편성이었다.]
유격전은 분대, 또는 소대 규모로서 광 면적에 다발적으로
투입해야 하는 것으로서 병단 사령관이었던 채 명신 장군도
이 엉터리 발상을 비난했다.
[이는 역시 게릴라 전의 전문가가 없던 미 8군 정보국의
주먹구구식 부탁을 육본이 들어 준 것이 아닌가 한다.]
상식으로 생각 안 되는 것은 이들이 거의 대부분 자의 또는
타의로 군에 모집된, 장정들이었다는 것이다.
추진자 이 극성 중령은 전방에서 병력을 뽑아오기도 힘들고,
그럴 병력도 후방에 없어서 훈련소에 입소한 장정 중에서
북으로 보낼 유격대원들을 차출했다.
[600여명의 생명이 걸린 중대한 이 업무를 적어도 참모총장
정도의 힘 있는 사람이 진두지휘 한 것이 아니라 육본이
별다른 힘도 없는 영관 장교에게 네가 다 알아서 추진하라고
떠맡긴 인상이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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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중에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나 의용 경찰 출신등을
학력을 기준으로 장교로 임관하고 나머지를 사병으로 편성했다.
11연대장은 병단 사령관이었던 채 중령이 직접 지휘했지만
12연대나 13연대는 역시 신병 중에서 선발한 사람이 임명되었다
연대장이니 대대장이니 하는 직책도 유격전에 대해서는 이들
사병들과 다를 바 없는 장교들에게 주어졌다.
이들 장교 계급은 백골 병단이 극적으로 생환 한 뒤에
없던 일로 부정 당하는 어이없는 엉터리였다.
어차피 죽으러 가는 인간들에게 인심이나 쓰자는 것으로 보인다.
북에서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채 명신 중령이 유격대 편성에
도움말을 주기위해서 초빙 되었다가 차마 이런 아마추어 부대를
그냥 사지로 보낼 수 없어서 대장 직을 맡았다고 그의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에서 회고했다.
백골 병단이라는 유명한 유격대 명칭은 따로 북파 되었던 연대가
적 후방 퇴곡리에서 에서 조우해서 함께 휴식하던 1951년 2월 21일
세 연대를 통합 지휘하던 채 명신 중령이 명명한 것으로서 지금도
존재하는 3사단 18연대의 별칭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지금의 백골 부대 명칭은 한 신 장군이 연대장이 되면서
명명한 것이다.
유격대에게 부산 피복창에서 만든 북한군 누비옷 군복을 입고
무기도 아식 보총과 따발총등을 지급받았다.
식량이라고는 단지 2주 분의 미숫가루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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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들도 다 들고 내려오는 무전기도 구하기가 힘들어 겨우
두 대만 전 부대에 지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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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단에 주어진 임무는 산악이 많은 동부 전선에 적 부대 후방
에 침투하여 유격전을 하며 적 대부대를 교란하라는 것이다.
무책임한 군부대의 관료주의와 무지함이 죽음으로 내몬 이
결사부대는 한국군이 중공군의 침공으로 남쪽으로 내몰렸다가
다시 반격에 오른 2007년 2월1일 당시 최 전선이었던
강원도 영월에서부터 적진으로 침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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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사 11연대가 먼저 침투하고 일주일 뒤 결사 12연대가 침투했다.
그리고 며칠의 날짜를 두고 결사 13연대가 투입되었다.
전방에는 북한군 2개 군단 병력, 즉 잔인한 최 현 중장의 군단과
105전차 여단을 지휘하고 서울을 점령했던 유 경수가 지휘하는
군단의 대병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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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경수에 대한 김일성의 총애가 남달라서 궁금했는데
전 인식 선생의 저서에서 이 자가 김일성의 동서라는 것을
밝혀 놓아서 수긍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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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군단 병력의 북한군 배후를 600여명의 아마투어 부대가
몰래 파고 든 것이다.
유격대는 북진하는 국군 -수도 사단과 3사단-의
전방 수색대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기도 했지만 적 전방
2-30키로의 후방, 때로는 50키로 후방에서 작전을 했었다.
백골 병단이 활약한 곳은 말했듯 지금 강원도 북방 산악지대이다.
유격대는 필설로 못하는 고통을 겪었다.
강원도 산간에 몰아친 혹한도 북한군 못지않은 적이었고
만성적인 식량부족도 부대의 존속을 우려하게 할 만큼의
공포꺼리였다.
더구나 피아 안 가리고 적전선 후방에 퍼부어대는
미 해군 함재기의 폭격 역시 공포스런 적이었다.
당시 미 항공모함 부대가 동해안에서 작전중이어서 강원도
동부의 항공 작전은 이 항모 부대 관할이었다.
함재기의 오폭은 세 차례나 있어서 수십 명의
유격대원들이 저 세상으로 갔다.
백골 병단에게 집요한 폭격을 가하던 미 해군
스카이 레이다 공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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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투 후 최초의 유격대 사상자도
북한군이 아니라 함재기의 오폭이었다
그러나 부대는 곧 도저히 아마추어 부대라고 보기 힘든
전과를 올리기 시작한다.
결사대는 분산된 적 소 부대를 기습해서 전멸시키기도 하고
지역의 악질 빨갱이들이나 공산당 추종자들을 차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도처에 간이 검문소를 설치해놓고 내왕하는 적군을
잡아 처치했다.
유격대에 걸려든 북한군 중에 북한군 군관들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여자 군관이었다.
적에 관한 귀중한 정보들을 획득해서 후방으로 급송해서
미 공군 공습목표나 군 작전의 중요한 자료가 되게 하기도 했다.
최 현 군단의 위치를 알아내서 이를 급습하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위치를 확인하고 기습을 시도하다가 너무 경계가
삼엄해서 중도에 단념했으나 적 군단의 위치를 후방에 통보하여
공습을 가하게 했다.
특히 포로가 된 북한군 대위에게서 동해안 방어를 맡은
독립 여단인 적 69여단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알아내서
북진하던 수도 사단에게 이 부대가 섬멸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아마추어 유격대가 거둔 최대의 전과는 1951년 3월 17일
강원도 깊은 산골 군량밭에서 김 일성이 직접지시해서 남파하던
북한 남파 유격대 제 5지대장 길 원팔 과 그 참모장
강 칠성 대좌를 잡아서 중요한 정보를 빼내고 처단한 것이다.
길 원팔의 중요한 위치는 그가 적어도 전쟁 발발 무렵에는
유명한 남부군의 총 사령관 이 현상 동격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가 있다. [그러나 1950년 말 훨씬 연장자인
이 현상이 남한 빨치산들의 총 사령관으로 임명된다.]
백골병단 결사 11연대 작전 참모였던 전 인식 선생이 쓴 저서에서
길 원팔의 체포와 처형 과정을 모두 발췌해서 정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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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골 병단은 3월 16일 군량밭이라는 지역으로 진출하고 이 지역을
점령하고 주민 아무도 탈출하지 않도록 단단히 봉쇄하였다.
다음날 3월 17일
결사 제 13연대 수색 정찰 요원과 식량 조달 요원들은 먼저
서쪽 마을을 정찰한 뒤 동쪽 마을로 들어 왔는데 부락 외딴 집에
보초 같은 한 놈이 서성대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수색 요원들은 늦은 사전에 특별한 정보가 있어서가 아니라
적의 주 저항선 으로부터 30킬로 상당 떨어진 이곳 후방 지역의
산간오지 마을에 보초까지 서 있는 것은 분명 예삿일이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수색 조가 먼저 보초가 서있는 그 집으로 접근해서 앞에서
동초를 서고 있는 북한군에게 의젓하게 말을 걸었다.
“책임자 동지를 만나러 왔소.”
보초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는 듯했다.
대원들의 몰골이 역전의 북한군 용사로 보였을 뿐만 아니라
그중 한 사람은 군관 계급장을 달고 있으니까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리라.
집안으로 들어선 수색 팀은 다짜고짜로 방문을 확 열어 제치면서
“실례하오!우리는 남조선 괴뢰 도당의 낙하산 부대가
침투했다는 정보가 있어 놈들을 소탕하러 중앙에서 왔소.“
“동무들은 왜 아무런 연락도 없이 여기에 있소?
동무들의 신원을 확인해야 겠수다.“
날쌘 동지 2명은 이미 방에 들어가 벽에 기대어 둔 장총과
따발총을 순식간에 걷어 치웠다.
방안에 누워있던 두목 급으로 보이는 놈은 일행을
쳐다보더니 비스듬히 일어나며 무엇을 찾는 것 같았다.
이를 재빨리 제지하고는 방석 밑을 확인하니 소련제 떼떼
권총이 숨겨져 있었다.
[길 원팔이 가졌던 권총은 나중에 채 명신 사령관이 소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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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은 매우 용의 주도한 놈이었으나 대원들의 기민한
행동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이 놈들 이게 무슨 짓이냐?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우리는 중앙에서 왔소. 남조선 괴뢰도당의 낙하산 부대를
토벌하러 왔던 말이외다.
동무들은 신분을 확인 할 때까지 잠자코 있소!”
우리 대원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인민군 여자 군관이 갑자기
나서더니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동지께서는 몸이 불편 하시오!”
그때까지 놈들은 우리 대원들을 아군인지 적군인지 몰라
반신반의 하는 것 같았다.
밖에 서 있던 보초병은 대원들이 방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곧 체포되었고 방안에서의 소동도 순식간에 끝났다.
간단히 4명 모두를 체포한 것이다.
이때 생포한 적군 요원은 약간 나이가 들어 보이는 병약자 1명,
여 군관 1명, 15세 정도의 소년 1명, 보초병 1명 등 4명이었다.
그 뒤 가세한 식량 조달조 병력에 길원팔의 참모진과
무전병등 7명이 모두 생포 되었고 무전기 1대도 노획하였다.
오른쪽 팔이 하나 없는 외팔이 군관과 소녀 1명은 나중에 현장으로
달려가 잠복했던 13연대 작전관 김 용구 중위 등 수색조에 의해서
생포됨으로서 모두 일당 13명 전원이 생포 된 것이다.
만약 두목 급 적을 생포했다고 해서 그대로 그곳을 떠났다면
강 칠성 대좌를 생포 할 수가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조직적인
큰 반격을 당할 뻔했다.
이들 13연대의 장병들이 거물급 체포 작전에서 발휘했던
민첩성과 노련함은 이들이 단지 3주간만 훈련을 받고 전방에
투입된 현재의 신병[新兵]이라고
볼 수가 없는 놀라운 것이다.
이들 인민군들은 모두 계급장을 달고 있지도 않았고 군복만 입고
있었으므로 정체를 전혀 알 수 없었으나 보초병이 있던 것으로
보아 직감적으로 거물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군량 밭으로 압송해서
13연대 본부에서 백여 미터 떨어진 병단 사령부에 인계했다.
유격대 백골 병단의 혈투
- 제 2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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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죽음의 적지로 가는 유격대 간부들에게 국방부 장관이
준 장교 임관장. 적진 투입 환송식에서 정일권 총장은
살아서 귀환하면 2계급 특진 시켜 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정작 귀환한 대원들에게 국방부가 내놓은 것은 '없던 일로 하자는
딴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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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군량 밭은 아군의 작전 지역인 오대산 지구로부터 적어도
30키로 상당은 될만한 적 후방지역이었다.
백골 병단 사령부로 호송되어 온 생포자 13명을 조사한
채 사령관과 참모들은 깜짝 놀랐다.
놈들이 소지했던 문서에서 엄청난 비밀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인민군 총사령부에서 전선 사령관에게 보내는 메시지,
북괴 중앙당의 지령문서 등 특급 기밀 문서가 수두룩했다.
이때 생포된 일당 중 방안에 의젓하게 누워 있다가 생포된
자는 소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당 군사부 제 2 비서겸
북한군 중장 길 원팔[吉 元八]이었다.
그는 빨치산 제 5지대장 겸 남조선 빨치산 총사령부란 직함도
함께 가지고 있던 거물이었다.
길 원팔의 참모장으로 있던 외팔이는 강 칠성[[姜 七星]
북한군 대좌로서 중국 인민 해방군 출신이었다.
해방 전 일본군과의 격전으로 오른팔을 잃은 그는 왼손만으로도
권총의 명사수였다고 한다.
인민군 중위였던 여자 군관은 남한 출신으로서 서울의 H여대
4학년을 다니다가 자진 월북했던 붉은 아가씨였고 소년과 소녀는
심부름하는 아이들이었다.
그 밖의 일당은 참모진과 통신 군관등이었다.
길 원팔은 체포되었을 당시 북한군 후방에 만연했던
발진티푸스를 앓고 있다가 많이 완치가 다 된 상태였다.
북한은 이가 옮기는 발진 티프스를 미군이 북한에 가한
세균전으로 악선전했다.
그는 6.25사변의 발발과 함께 빨치산으로 남하하여 경북 지방에서
활동했었다.
중공군이 참전하고 전선이 바뀐두 북으로 소환되어
김일성으로부터 영웅 칭호와 함께 국기 훈장 1급을 받고
진급한 뒤 남반부 빨치산의 전력과 투쟁 강화를 위해서
대남 빨치산 사령관의 자격으로 다시
남하 중에 병이 걸려서 요양 중이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유격대가 적지 투입전 지급받은 일제 99식 소총.
그러나 실탄이 얼마 없어서 빈총으로 메고 다닌
대원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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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원팔의 프로필은 이렇다.
그는 평북 덕천군 덕천면 덕천리 출생으로 아버지는
철도국에 근무했었다.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스가모 고등 상업고등학교를 거쳐 일본 중앙대학교에 재학중
8.15를 맞아 귀향했다.
일본 중앙 대학교는 국군 연대장인 한신 장군과 사단장
김 종오 장군이 학병으로 끌려가기 전 재학했던 대학교로서
법학과가 유명하다.
재학시 부터 좌익 사상이 있던 그는 조선 노동당에
가입해서 대남 공작사업에 종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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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음날 아침,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옥수수 광에 가두어놓은 생포 여자 군관이 심야에 탈출해
버린 것을 발견하였다.
추격대가 급파되었으나 그녀의 종적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 녀는 길 원팔이 인솔하고 남하하던 남파 빨치산 5지대가
주둔했던 인근 북서쪽의 가리산리 방향으로 도주했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쪽의 상황을 다 파악한 그녀가 탈출에 성공한다면
최악의 상태가 아닐 수 없었다.
백골 병단은 즉각 철수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길 원팔의 일당과 그간 백골 병단이 군량밭에 주둔하면서
체포했던 50명의 북한군과 내무서원에 더해서 인민 위원장,
민청위원장, 그리고 세포 위원장등 지방 악질 공산당 분자들을
합쳐 모두 70명이 넘었다.
이들을 방면하기도, 호송하기도 불가능한 철수 작전에 이들을
할 수없이 모두 처단하기로 하였다.
유격대가 철수를 개시하기로 한 3월19일 오후 8시보다
두 시간 전인 오후 다섯 시쯤 간이 군사 재판이 열리고
길 원팔과 그 일당들에게 총살형이 언도되었다.
단지 길 원팔의 시동 격이었던 최 모 학생만은 너무 어려서
처형에서 제외되었다.
최 모 학생은 채 명신의 심부름하는 시동으로 신분이 바뀌어
유격대와 동행해서 남한으로 왔다.
그는 평강군 인민 위원회에서 와병 중이던 길 원팔을
돌봐 주도록 파견했던 중학교 2학년 학생으로서 그의 아버지는
전직 교사였다.
채 사령관은 이 소년을 남한으로 데려와 계속 돌봐주었다.
이 아이는 나중에 서울 명문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시내 유수 대학의 대학 교수까지 되었다.
길 원팔은 처형 전 그의 아버지가 넘겨주었다는 회중 시계를
꺼내서 정보 참모인 최 윤식대위에게 넘겨주었다.
강 칠성 대좌도 처형되었는데 그가 김일성에게 받은
국기훈장 3급 메달은 유격대가 가지고 나와 육본 정보국에
전달하였다.
이 메달은 정보국장 이 극성 중령이 잘 보관하고 있다가
전쟁 기념관에 백골 병단 코너에 전달하였다.
그는 죽기 전 마지막 소원으로 남쪽을 보고 죽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처형당했다.
채 명신 사령관을 그의 회고록에서 길 원팔의 처형을 아쉽게
생각하는 글을 남겼다.
데리고 남하하는 것이 바람직했지만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는 것이다.
나중에 북한군의 추격이 극렬하였고 병단이 몇 번의 위기를
겪은 사실을 보면 남한으로의 압송은 불가능했을 듯하다.
모 군간부가 30여년이 흐른 뒤인 1987년, 지금은
남한 땅이 된 군량밭을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40여채의 큰 동네였다던 군량밭이 단지 서너채의
미니 마을로 변한것을 보았다.놀랍게도 길원팔의
총살 사건을 기억하던 노인이 아직 생존하고 있었다.
노인은 유격대가 철수하고 길원팔의 부하들인 빨치산
부대원들이 길 원팔과 강 칠성의 사체를 가져갔다고 말해주었다.
토벌 경찰이 사살한후 남한 섬진강가에서 화장해서 강에 뿌린
이 현상의 가묘가 지금 북한 평양의 열사능에 있다.
월북했던 이 현상의 처만 묻혀 있다,
위와 같이 길 원팔의 사체가 확실하게 수거되었다면
이 현상의 예와 같이 북한 어느 곳이건 길 원팔의 묘소가
혁명 열사의 묘소로서 존재할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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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가진 작전 명령서가 체포 당시 압수되어 지금도
육본에 보관중이다.
이 것은 전쟁이 발발하기전인 1950년 3월 김일성이 그에게
발령한 것으로서 이 작전 명령서가 그때 이미 그가 남쪽의
침투해서 영남 지방에서 활약한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가 백골 병단에 처단된 후 북한이 다시 남쪽으로 남파한
거물 유격대장이 유명한 남 도부 중장이다.
남한의 좌익들. 맨 아래 중앙이 남 도부, 하 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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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도부는 본명 하 준수, 경남 함양 출신으로 일본에서
대학교를 중퇴했고 가라데의 고수였다.
징병을 피해서 지리산에서 은둔 생활 중에 일찌감치 좌익
유격 활동을 하다가 월북했었다.
그는 영남 지방을 거점으로 했지만 지리산 거점의 이 현상보다는
미온적인 활동하다가 전쟁이 끝나고 대구시내에 잠입하던 중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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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철수를 감행했던 백골 병단에게 길 원팔 부대인
5지대원의 근간이 된 대병력이 공격해왔다.
지방 내무서원 병력과 길 원팔의 휘하 5지대원 뿐만 아니라
전방에서 차출된 32 사단등 일개 사단 병력이 백골 병단의 뒤를
물고 추격했다.
백골 병단은 전선을 돌파해서 남한으로 복귀할 때까지
열흘 넘게 적 대병력의 엄청난 추격을 받았다.
백골 병단 유격대의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더구나 3월 날씨치고 대단한 동장군이 몰려왔다.
백골병단은 우선 적의 허점을 찌르기 위해서 북상해서
용대리까지 갔으나 여기서 적 사단 병력의 공격으로
할 수없이 다시 동남방으로 방향을 틀었다.
용대리가 병단이 북상했던 최북단이었다.
이 최 북상 지점인 용대리에는 백골 병단 전적비가 서있다.
용대리 전투에서만 대원 40명이 산화하였다.
부대는 천신만고 끝에 백담사 입구까지 철수하였다.
이 곳은 당시 적지였다.
약간의 휴식을 취한 부대는 설악산을 지나 소청봉 근처에서
1951년 3월 24일 야영을 하였다.
이 야간 숙영에서 적의 야습을 받아 큰 피해를 보았다.
부대는 남으로 철수하던 다음날 새벽 1951년
적에게 또 다시 매복 기습을 받았다.
기습해온 부대는 길 원팔의 부대인 빨치산 5 지대원들이었다.
악에 바친 그들의 공격은 극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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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부대 철수 중에 폭포 위에서 벌어진 전투는 유격대를
섬멸 직전의 큰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부대는 큰 타격을 입고 가까스로 탈출을 할 수가
있었다.이 폭포 주변 기습에서 60여명이 전사했다.
부대는 계속 철수해서 1951년 3월 25일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박달령 남쪽 설피밭에 이르렀을때 다시 적의 공격을 받고
혈전을 벌려야 했다.
적의 공격과 함께 닥친 엄청난 추위로 부대는 적진 침투 이래
최대인 120명의 인적 피해를 입었다.
동사와 탈진에 의한 아사자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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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전에서 11연대 2대대장 윤 창규 대위의 장렬한
최후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부상을 입고 걸을 수가 없어서 들것에 실려 부대원과 함께
철수 중이었다.
그러나 적의 공격으로 부대가 큰 위험에 빠지자 더 이상
부대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최후를 스스로 마지했다.
그는 적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야! 이 새끼들아! 내가 대대장이다!”
적의 지휘관인 듯한 자가 부하에게
지시하는 소리가 들렸다.
“ 저놈을 생포해라 !”
적들이 접근하며 “손 들엇 !“하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큰 폭음이 적의 비명 소리와 함께들려왔다.
윤 대위가 접근하는 적과 함께 수류탄으로 자폭했던
것이다. 그는 국군 현역 부사관 출신으로 대대장을 자원했던
사람이었다.
유격대는 소련제 수류탄을 지급 받았다.
윤대위가 자폭했던 수류탄은 북한군이 사용했던
위 세 종류 수류탄중 한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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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신창이가 된 백골 병단은 3월 28일 인제군 기린면 방동리의
작은 외딴 산골마을로 후퇴헤서 겨우 약간의 휴식을 취했다.
마침 이때 북한군의 두개 군단이 아군의 공세에 총퇴각
중이었기 때문에 적의 추격이 완화되었다.
병단은 1951년 3월 30일 드디어 적전선을 뚫고 북진하던 국군
7사단 3연대로 귀환 할 수가 있었다.
병단을 창설할 때 647명이던 부대원으로서 전선을 뚫고 돌아온
부대원은 단지 260명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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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루한 북한 군복에 뼈만 남은 백골 병단 원들이 강릉으로
이동해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낙오했던 대원들이
계속 귀환하여 최종 생환자는 출발할 때에 비해서
43.7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귀환 불능자만 364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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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날림 기초 군사 훈련만 받고 적진에 투입되었던 아마튜어
유격 부대는 다 전사하리라는 예상을 뛰어 넘어 두 달 간의
혈전을 되풀이 하면서 남하 중이던 길 원팔 일당을 처단 한 것을
비롯해서 적 309명을 체포 처단하였고 적 174명을 사살했다.
그리고 본연의 임무인 군 정보를 획득해서 북진 중이던 군이
적을 섬멸함에 큰 이바지를 했다.
60일 간 적진에서 기동한 거리가 320키로가 된다.
비록 희생은 컸지만 세계의 어떤 전문 유격 훈련을
받은 부대라 해도 이와 같이 커다란 전과를 올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적지에 투입해서 대부분 돌아온 죽을 줄 알았던 부대가 전과를
올리고 절반 정도가 살아 돌아왔음에도 군 당국은 이들
영웅 급의 유격대원들에게 아주 냉정했다.
이 작전이 미 8군의 요청으로 이루어 졌다지만 정 일권 총장을
통해서 국방부 장관인 신 성모 장관이 다 재가 했던 바였다.
군번이 비록 임시였다지만 정부 당국이 전부 인가한 것이었다.
채 사령관은 병단이 극적으로 귀환 한 뒤에 대구의 육본과 국방부
장관 신성모 장관을 만나서 대 활약을 한 유격대의 처우에 대한
요청을 했다.
임시지만 부여한 계급을 인정해주고 정규군에 편입 시켜달라는
요청이었다.
보고를 받은 신 장관은 딴전을 폈다.
“그게 말야, 쉽지가 않은 모양이야.”
채 사령관의 분노 섞인 항의에도 군은 마이동품이었다.
병단은 해체 되었다.
백골 병단의 역사를 썼던 전 인식 선생은 자신이 진짜 소령인줄알고
고향에 돌아가서 소령으로 행세하다가 군 수사 당국에 붙잡혀서
고문 섞인 심문을 받아야 했다.
병적마저 없어져 다시 군에 입대하여 군복무를 하고 제대해야 했다.
백골 병단원의 태반이 목숨을 건 임무 수행을 하고도
군복무 인정을 받지 못해 다시 군에 가야 했다.
더구나 살아 돌아온 대원들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다.
호국의 별로 산화한 대원들의 유가족은 그 유해는커녕
그 전사 통보마저 받지 못한 가정이 숱했다.
많은 유가족이 백골 병단 의 노력으로 그 위패가 동작 동
국군묘지에 안치되고 연금을 받게 된 것은 38년이 휠신 지난
1980년대 말이 되어서였다.
연금을 받던 전사자 부모님들은 이미 천명에 드신 분들인지라
연금을 받은 지 몇 년 못 살고 돌아가신 분들도 있었다.
백골 병단 간부들은 다시 정식으로 군에 입대해서 직업 군인의
길을 가신 분들이 많았다. 브라질 교포 이 동철님이 보내 주신
백골 병단 13연대원인 아버님이 귀환 다음해인 1952년 11월 23일
켈로 부대 전우들과 촬영했던 사진
역시 군 생활시 촬영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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