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 생포하라 |
나는 1965년에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지금까지 25년 넘게 군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형태의 임무를 수행해 보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어 렵고 힘들었다고 기억되는 임무는 눈뜨고 멀쩡하게 살아있는 적을 생포 해 오는 일이었다.
1969년 10월경이다.
내가 소속되어 있던 맹호 사단에서는 월남군 작전지역과 접해 있는 북쪽의 산악지대에 많은 적이 활동하고 있어서, 연대 또는 사단규모의 작전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과연 이 첩보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작전에 투입될 부대규모를 결정하고, 작전지역을 선정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에 대한 적정과 지형을 판단할 수 있는 신빙성 있는 첩보수집이 요구되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겐 특히 계급이 높은 포로가 필요했다. 바로 이 첩보수집과 포로획득 임무가 우리 중대에 하달되었던 것이다.
원래 우리 중대가 위치한 지역은 주월 한국군 중에서도 가장 북쪽이었으며, ‘루시엠(Lusiem)’강을 전투지경선으로 하여 월남 정규군과 인접해 있었다.
원래 부대와 부대간의 전투지경선 근처에는 상급부대 지휘관의 입장에서 보면 거리가 멀뿐더러 관심도 적었기 때문에 대부분 많은 취약점을 갖고 있었다. 이 지역도 예외는 아니어서 적의 움직임이 많았다.
우리 한국군보다 기동력이 열세한 월남군은 전투지경선 지역에 대한 수색활동이 적극적이지 못하여, 우리나라의 폭이 큰 하천 정도에 불과한 ‘루시엠’강 건너편에는 활동 중인 적이 많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 지역을 황금밭이라고 불렀다.
적도 똑같은 군인인데다, 두 눈을 뜨고 총을 갖고 있는데 생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대장들과 머리를 맞대고 궁리해 본 결과 먼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자는 결론이었다.
강 건너 월남군 담당지역엔 산세도 험했지만 산거머리가 많았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징그러웠으나 이 놈이 있음으로 매복요원이 잠에 빠져들지 않았고, 근무자는 거머리 공포 때문에 기어들어오는 거머리를 적보다 더 지겨워했으니 중대장인 내 입장에서 보면 잠을 쫓아주는 감시병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오히려 유리한 조건으로 판단하였다.
천혜의 정글지역에는 나무숲이 울창하여 해만 지면 바로 밤이 되었고 행동과 주야 관측이 제한되었다. 특히 밤에는 별빛조차 차단되어 우리가 갖고 있던 야시장비인 야간투시경(starlightscope)으로도 잘 보이지 않았으며, 사격을 하더라도 움직이는 적이 가까이 있어도 나무에 가려 명중시키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계곡의 개활지 지역을 포로포획 지점으로 선정하였다.
개활지 역시 산속과 같이 제한사항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갈대와 비슷한 풀들이 무성하여 주야로 관측에 제한을 받았으며, 호를 파고 들어가게 되면 주간에도 10m정도의 거리조차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개활지는 비교적 산속보다 관측과 사격이 용이했고, 유사시 최저표척사가 가능하며 살상지대의 폭넓은 구성과 상호지원 및 지원부대의 접근이 수월한 점 등 많은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들어가려고 하는 ‘캇숀’계곡은 폭이 약 1~1.5km에 길이가 약 10km로서 양쪽 계곡의 산세가 험하고 높아서 개활지가 완전히 관측되었기 때문에 매복지점이 적에게 발각되는 날이면 적의 박격포 및 직사화기 세례를 받게 되고, 적이 독한 마음만 먹으면 우리를 섬멸시킬 수도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침투로를 선정하는 데는 두 가지 요소를 반드시 극복해야만 했다.
첫째는 침투 도중에 적과 조우해서는 절대 안 되었다. 적을 사살하던가 우리 측에 사상자가 발생하면 기지로 다시 되돌아와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며, 더욱 곤란한 것은 총성으로 인해 우리의 활동이 노출되기 때문에 적이 활동을 제한한다거나 경계를 철저히 하면, 출동 목적인 포로획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침투로는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적이 전혀 사용하지 않는 침투로를 선정해야만 했고, 적이 우리가 침투하리라고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침투해야만 했다.
두 번째 극복해야 할 문제는 우리 자체의 문제로서, 이동 간에 발생하는 행군소음을 어떻게 없애느냐 하는 것이었다. 중대기지에서 매복지점까지는 약 10km로서 주간에 정상적인 행군을 하더라도 약 3시간은 족히 걸렸는데, 야간에 이동하면 날이 밝아야 매복지점에 간신히 도착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매복 준비시간이 없게 되고, 자칫하면 적에게 발각되기 때문에 매복준비 시간을 최소한도로 잡더라도 먼동이 트기 한 시간 전에는 반드시 매복지점에 도착해야 했다. 빠르게 이동하자니 소음이 생기고, 완전히 은밀침투를 하자니 시간이 부족하고 매복 준비시간에 제한을 받았다.
총 멜방에서 생기는 덜그덕 소리, 수통에 매달은 정수제 달그락 소리, 조심성 없이 내딛는 군화소리 등 적막하고 고요한 들판에서 아무리 조심을 시켜도 발생하는 이런 종류의 소음은 극복하기 매우 힘들었다. 어쨌든 포로를 잡기 위해서는 소음을 극복하고 적과 조우를 피하는 한편, 매복 준비시간을 충분히 보장받기 위해 어느 정도의 모험은 감수하기로 했다.
중대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작은 강이 흘렀고 그 강은 산속으로 올라가다가 우리가 침투하려는 매복지점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강을 따라 침투하기로 했다.
강을 따라가게 되면, 강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때문에 조심해서 걸으면 우리의 이동소리를 은폐할 수 있었고 조우도 피할 수 있었다.
출발시간은 매복준비 완료시간을 고려해서 선정해야 했다. 최소한 새벽 5시까지는 매복준비가 완료되어야 적에게 관측당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시간에 맞추어서 기지 출발시간을 결정했다. 이동시간, 전투준비시간, 그 외의 어떤 지체시간 등 여러 가지 요소를 감안하여 석식 후 밤 8시부터 이동하기로 하고 출동준비를 했다.
매복지점 선정에 가장 중요한 것은 기습을 달성할 수 있는 지점을 잡아야 하고, 적이 반드시 통과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목을 선정하되 살상지대 구성이 용이하며, 아군의 개인 및 공용화기의 화력집중이 가능하고 퇴로 차단이 용이해야 한다.
강가에는 대나무와 잡목이 무성하여 우선 은신하기가 용이했고, 주야를 불문하고 물소리가 있어서 우리들의 행동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은폐시킬 수 있었으며, 특히 적과 접촉 시 우발적으로 긴급히 철수할 때나 중대로 복귀 시 침투해 들어온 강을 이용하면 주간에도 적에게 관측당하지 않고 신속히 움직일 수 있었다.
적진 속 계곡에 들어와 있으면 산 위의 적으로부터 관측되어 박격포 세례를 받는 것이 제일 큰 위험요소였고,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몸을 숨길 수 있는 강가가 제일 적소였다.
통상 야간매복을 나갈 때는 즉각 조명을 위해 수타식 조명탄만 휴대하고 나가는데, 이번에는 자체 생존을 위해 60mm 박격포를 휴대하기로 했다.
포탄은 고폭탄과 조명탄을 포함하여 각 개인이 배낭 속에 한발씩 휴대했다. 개인당 크레모아 한발, 수류탄 두발, 식량은 배낭무게 때문에 2박3일분을 휴대하기로 했고, 필요시 매복이 연장될지도 몰랐기 때문에 과자류는 전부 빼고 주식인 육류 중심으로 휴대하여 4박5일 이상 버틸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중대장의 군장검사가 끝나고 잠시 휴식을 하는 사이에 분대별 또는 개인별로 전투 시 필요한 물품을 더 휴대하고 출동했다. 예를 들면 수류탄, 크레모아, M16 실탄 등을 규정보다 더 많이 휴대하고 출동했다. 적과 교전 후 탄약이 소모되어도 즉각 재보급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특히 야간의 경우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밤을 버티게 되면 오로지 믿을 수 있는 것은 인접 전우와 자기 자신이 휴대하고 있는 총과 실탄뿐이기 때문에, 군장검사 시 휴대하고 나왔던 장비나 탄약류를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남모르게 덜어 놓고 나가는 행동은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
요즈음 부대에서 실시하는 천리행군이나 동계 행군 훈련 시, 많은 사람들이 배낭 속에 내용물을 가볍게 해서 행군 시 짐이 무거워 고생하는 것을 피하려는 모습이 가끔 발견된다. 그것은 적과 교전이 없기 때문이다.
적을 생포하기 위해서 매복자리를 정한 후, 중대기지에서 군장검사를 마치고 중대의 작은 연병장에서 매복지역과 유사하게 지형을 그려 놓고 실제 매복하듯이 병력과 화기를 배치해 보았다.
현지 지형을 가상하고, 지역에 예상되는 적정과 적의 접근로, 우리가 정한 예상 살상지역과 예측되는 각종 상황전개 등을 잘 설명해 주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첫째는 현지에 가서 생기는 어둠 속에서의 혼란을 예방하고, 둘째는 시간 절약은 물론 여러 가지 사항을 사전에 예측해 봄으로써 마음의 준비와 상황에 알맞게 대처할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있다.
적이 접근하는 방향에 따라 어떻게 조치할 것인가?
적에게 위치가 노출되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분대, 소대의 대략적 위치는 어디에 할 것인가?
살상지대는 어디에 설정할 것인가? 각 화기의 위치는?
적에게 박격포 사격을 받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등
모든 예측되는 사항을 전부 들추어내서 출동하는 대원들과 워게임을 해보아야 한다.
적 앞에서 활동시의 과오는 실패를 의미하며 작은 과오가 작전 자체의 실패를 초래함은 물론, 죽거나 부상당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최선의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우선 기지에서 강까지의 개활지만 무사히 통과하여 강 속으로 들어가면 적에게 발견되지 않고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할 것으로 믿고 야간이동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출동한 인원은 2,3소대장이 각각 2개 분대씩, 60mm 박격포 1개반, 중대본부 등 합쳐서 50여명이었고 중대기지는 화기소대장이 맡아서 지휘하기로 했으며, 인접해 있는 155mm 포대에 연락하여 기지방어 및 화력지원에 대한 세부적인 협조를 모두 마쳤다.
중대기지 근처에 위치한 마을 사람들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나무 없는 개활지는 피하고, 나무숲과 풀숲을 따라 강쪽으로 이동해 갔다.
떠나기 전에 그토록 단단히 주의를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배낭속의 깡통 삐걱거리는 소리, 총 부딪치는 소리, 군화소리 등 온갖 소음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게 했다. 소리를 지를 수도 없고, 집합시켜서 또다시 교육을 시킬 수도 없고......
이제부터는 강을 따라 접근해야 했다. 강가 대숲에서 잠시 쉬면서 본대의 엄호조 3명을 먼저 강 건너로 보냈다. 소형 무전기를 휴대하고 물속을 기어가듯 건너가더니 이상 없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중대는 강을 따라 전진을 시작했다.
강 양편으로 3명 1개조로 된 엄호조가 본대보다 약 20~30m 정도 전방에서 물속의 본대를 보호 및 유도해 주었고, 강을 따라 전진하는 본대도 강 양쪽으로 전개하여 서로 상대편 전진부대의 머리 위쪽을 경계해 주면서 전진하였다.
중대장인 나도 강을 따라 본대와 행동해 보았더니 처음 생각했던 대호 침투의 성공률은 높을지 몰라도 일단 상황이 발생하면 지휘통제가 힘들 것으로 판단되었다.
예상대로 전진속도는 느렸으며, 시간당 2km이상 전진해야 하는데 깊은 소(沼)가 있는 지역이나 바위지역에 봉착하면 잠시 정지하여 한 사람씩 장애물을 극복하자니 시간이 엄청나게 소요되었다. 더구나 중대장을 초조하게 만든 것은 장애물이 나타날 때마다 앞뒤의 병력들이 한 곳에 오물오물 모이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손짓으로 정리를 했다. 본대의 전진속도는 늦어지는데 엄호조는 정지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니 이에 대한 통제도 쉽지 않았다.
전진속도가 늦다고 해서 이제는 뭍으로 올라갈 수도 없었다. 엄호조 전진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무턱대고 개활지로 올라가면 엄호조에 의해서 사격당할 위험마저 있었다. 아군끼리 교전이 발생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감은 물론, 중대원들과 주위 사람들로부터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낙인찍혀 부대지휘도 못할 정도로 크게 창피를 당하게 될 판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걱정하던 적과의 조우도, 엄호조와의 오인도 일체 발생하지 않았고 계획한 대로 새벽 4시경 매복 지점에 무사히 도착했다.
도착해 보니 예상했던 대로 풀이 너무도 무성하여 매복지점 선정이 용이하지 않았다. 강폭도 좁아져서 폭이 5~7m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수량도 적었으며 계곡이라 물 흐름도 완만했다.
주변을 수색해 보았더니 강 양쪽은 많은 사람들의 왕래로 길이 반들반들하게 나 있었으며 강가에는 대나무 및 잡목이 우거져서 은신 매복하기에는 좋은 장소였고, 소로의 흔적과 상태로 보아서 먼동이 트면 곧 적의 왕래가 있을 것으로 예측되었다.
밤을 이용하여 마을에 다녀오는 적이 있다면 먼동이 트기 전에 반드시 통과할 것이므로 양쪽 소로에 고참병을 중심으로 경계병을 배치하는 등 부지런히 매복준비를 시작했다.
이번에도, 통상 적의 첨병은 말단 사병이나 안내원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첩보를 갖고 있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여 첨병은 그대로 통과시키고 본대를 습격하기로 했다.
적이 죽으면 안되기 때문에 살상지대에 적의 중심제대가 들어오면 엉덩이 아래부분을 쏴서 쓰러뜨리고, 반항하지 않는 이상 확인사살이나 제 2탄, 제 3탄의 사격을 못하도록 철저하게 사전교육을 했다.
또한 통로별로 살상지역의 최초 사격자를 분대장 급에서 임명하고, 소대장은 전체적인 지휘를 위해서 최초사격을 못 하도록 했다.휴대하고 간 박격포는 지형 여건상 관측소와 사격진지를 따로 운영하지 않고 우리가 위치한 좌측의 산 능선 돌출부에 위치시켰다.
적의 접근을 조기에 발견하기 위하여 박격포 반원에게는 관측요령에 대한 많은 준비를 시켰다.
통상 우리가 배운 관측요령은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좌에서 우로, 의심나는 곳은 중첩해서......등
원칙적인 점도 중요하지만 이번 경우는 좀 달랐다. 소로가 계곡을 따라 종으로 나있고 계곡을 가로지르는 횡적 소로망도 거의 없을뿐더러, 지역 전부가 원시림이요 잡초가 무성하여 소로가 아닌 곳은 사람이 다닐 수 없었다. 설령 적이 접근하고 있다 해도 자세히 관측하지 않으면 아무리 산 위에서 내려다 보더라도 큰 나무와 키를 넘는 숲을 통해 적을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적을 발견하고 보고 후 준비시간까지 포함하더라도 10분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하여 중대의 매복지역에서 500m정도 떨어진 곳의 소로지역을 선정, 쌍안경 두 개를 이용해서 두 명의 병사가 고정감시토록 했다.
나무와 풀이 키를 넘는 이런 숲속에서는 움직이는 적을 발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매복지점에서 가까운 소로상에 쌍안경의 초점을 고정시켜 놓고 감시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매복작전 시 장애물 구축에 관해서 몇 가지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통상 주야를 막론하고 장애물을 설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유의해야 할 사항은, 장애물 설치로 인해서 매복위치가 노출당하는 경우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주로 조명지뢰를 설치하는데 야간에 설치하였다가 주간으로 전환되기 직전에 제거하고 밤이 되면 다시 설치하는 것이 현명하다. 가끔 야간에서 주간매복으로 또는 주간에서 야간으로 전환시 부주의로 터뜨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작전의 경우 조명지뢰는 일체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적이 밟아 터뜨리든, 우리의 실수로 터뜨리든 적의 안방에 들어와 앉아 있는 우리로서는 위치 노출로 인한 포탄세례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간혹 경험 없는 초급지휘자들은 적의 접근을 조기에 경보한다는 생각에서 적 예상접근로나 계획한 살상지대 중앙에 조명지뢰를 설치하는 우를 범하는 경우가 있다.
통상 소부대 전술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나면 거의 습관적으로 사계청소를 실시한다.
이는 정규전에서 방어 시 적 포병의 공격 준비사격, 항공기 공격, 박격포 사격 등으로 방어진지가 혼란하고 어수선한 상황이라든가 이미 진지가 적에게 노출되어 돌격부대가 진지에 돌입하는 그러한 상황에서는 과감하게 사계청소를 해야 하지만, 이번과 같이 정밀매복을 실시하는 경우, 과도한 사계청소는 야간에는 문제가 없지만 주간매복으로 전환 시 주위환경과 조화가 되지 않으므로 적 첨병에 의해서 발각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시들어 버린 나뭇가지나 풀도 정리되지 않으면 적 첨병에게 곧 발각되므로 사소한 것이지만 반드시 유의해야 한다.
매복준비를 거의 먼동이 트고 난 새벽 5시 반 정도에 마무리가 되었다. 한 시간 남짓할 동안 위치 선정에서부터 호파기까지 얼마나 조마조마하게 마음을 조였는지 모른다.
전혀 전투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가장 취약한 시간이라 준비도중에 제발 조우가 없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랬다. 경계병을 철수시키고 나니 어느 정도 안심이 되면서 어떤 적이든 올 테면 와보라 하는 자신감이 새로워졌다.
각 호별로 근무하면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일부는 가면(假眠)을 취하면서 주간 매복근무에 들어갔다. 포로를 잡기 위한 준비를 내 나름대로는 다 했다고 생각했다.
과감하게 조명지뢰는 한 발도 설치하지 않았으며 기타 측면 방호나 경계를 위한 장애물도 일체 설치하지 않았다. 크레모아 또한 살상지대(포로획득 지역)에는 한 발도 설치하지 않았으며 살장지대 전후로 하여 적의 접근방향에 따라 바깥쪽으로만 설치했다. 어찌 보면 지극히 무모한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
적의 첨병을 쏘는 병사는 가장 비겁한 행동이라고 교육도 철저히 시켰다. 피아 공히 첨병은 어렵고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므로 비록 적이라 하더라도 그의 용감성과 희생정신을 존경해야 하며 절대 쏴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교육시켰다. 장교나 지휘관을 포로로 획득하기 위해서 짐을 짊어지거나 AK소총 또는 공용화기를 소지한 자는 쏘지 말고, 권총을 휴대했거나 전투복을 입었으되 군복이 깨끗한 사람을 골라서 쏘도록 했다.
대대와 협조한 후 155mm 포대를 포함하여 사거리가 미치는 포병으로 하여금 각종 상황에 맞는 화력지원 계획을 수립하였고, 유사시 탈출을 위해서 우리가 침투할 때 이용한 강을 따라 탈출로와 재집결지도 선정한 뒤 미리 교육시켰다.
아침 햇살이 몹시도 따가웠다.
정글화를 벗어서 햇볕에 말리고 퉁퉁 부은 발가락도 말렸다. 호 안에서 다리를 쭉 펴고 드러누웠다.
옆 능선의 뾰족한 돌출부에 올라가 있던 화기소대 60mm 박격포 포반장으로부터 다급한 목소리로 무전이 왔다. 약 2km 전방에서 강 옆 소로를 따라 수 명의 적이 우리 쪽으로 이동해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쌍안경으로 500m 지점을 고정감시 하면서 강을 따라 전방을 관측한 결과, 풀이 이상하게 흔들리기에 자세히 따라가면서 살펴보니 사람이 움직였다는 것이다.
이미 기지에서 출발하기 전, 월남군부대와 협조했기 때문에 우군일리는 없으니 적이 분명했다. 약 20여 명으로 맨 앞의 첨병과 본대와의 거리는 약 10~20m 정도이고 개인간격도 전술적으로 유지하지 않은 채 마음 놓고 접근한다는 것이었다.
산 위에서 운동장의 축구 중계방송 하듯이 보고해 왔다. 본대는 짐을 진 사람이 많고 일부는 짐을 지지 않았으며, 정규군 복장에 AK 소총을 휴대하고 권총을 찬 사람도 있다는 것이었다.
권총을 찬 녀석은 접근하는 쪽의 분대장이 사격하도록 하고 만일 실패시 다음 매복조에 선임하사가 위치하고 있으므로 그에게 쏘도록 지시했다.
산 위에서는 다시 “400m 전방, 300m 전방, 200m 전방, 100m전방”하면서 중계를 계속했고, 100m 전방에 왔다는 보고와 함께 사격준비를 위해서 무선중계를 끝냈다.
이제 수 분 내에 상황이 전개되고 ‘탕탕탕’총소리가 나면 불과 몇 초 사이에 전투가 전부 끝난다. 죽을 녀석은 죽고 살 녀석은 살아서 도망가게 된다.
긴장된 순간이 흐르면서, 소총을 잡은 손은 떨렸지만 소로를 향한 M16 소총의 조준구가 매섭게 표적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 분이 흘러갔다.
소로를 응시하면서 한 순간 한 순간 지나갈 때마다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대한 기대와 사람을 죽인다는 두려움마저 엄습해왔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100m 전방까지 왔다는 적이 나타나질 않는다. 적이 오다가 별안간 방향을 바꾸었나? 우리의 매복진지가 노출되어 도망가고 있는가? 아니면 전방에 이상한 점을 발견하여 무엇을 확인하고 있는가?
별의별 생각이 다 나면서도 도대체 상황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코 앞에 적이 있으니 무전기로 ‘소대장, 분대장’을 부를 수도 없었고, 큰 소리로 적이 어디 갔느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중대장인 나로서도 뾰족한 대책이 만무했다.
‘수색을 해야 하나? 사격을 해야 하나? 예상되는 적의 위치에 박격포 사격을 할까?’
온갖 생각이 다 떠올랐다. 그러나 적이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접근하고 있는 이상 끈기와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는 방법 외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기다리기로 했다.
나도 소대장도 박격포 반장도, 옆에 긴장하고 엎드려 있는 전령도, 무전병도, 숨죽이며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모두 중대장의 명령이나 지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적이 준동하는 지역에 왔다 뿐이지 적보다 훨씬 유리한 상황에 있고 더구나 우리는 호를 파고 그 속에서 기다리고 있으며, 적은 완전히 노출되어 있지 않은가!
사실 우리 처지는 불리하지도 겁을 먹을 상황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것 자체를 즐겨야할 판이었다.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과 공포 그리고 무엇이 잘못되지나 않는지, 두려움 속에서 시간이 흘러갔다.
적이 와 있으리라 판단되는 지점에서 별안간 “땅”하면서 총소리가 났다. 그것도 단 한발의 총소리였다. 그리고는 또 조용했다.
전방의 소대장에게서 무전이 왔다.
무전으로 두서없이 “중대장님 조용히 기다리십시요”하더니 또 감감 무소식이다.
전방이 안 보였으니 소대장이 하라는 대로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한동안 적막이 흐르면서 숨소리조차 크게 쉬는 사람이 없었다.
얼마를 더 기다렸더니 소대장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전방을 확인하기 위해서 수색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총에 맞아 쓰러진 여자를 들처업고 왔다.
얼굴은 통통하게 살이 쪄 있었고 키는 월남 여자 중키에 유난히 눈이 새까맣고 컸으며 검정색 아오자이를 아래위로 입고 대나무로 만든 모자를 쓴 채 머리는 기다랗게 늘어져 있었다. 전형적인 월남여자 모습이었으며, 나이는 23세.
두 아이의 엄마이며 이름은 ‘마이'(MAI)였다.
병사가 쏜 실탄이 엉덩이 바로 윗 부위를 맞추고 여자 음부 바로 위로 관통해 나갔다. 총을 맞고는 무의식적으로 몇 미터 뛰어 달아났으나 엉덩이뼈가 부서졌는지 이내 쓰러지고 말았다.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오물통이 함께 터졌는지 냄새도 고약했다. 얼굴이 하얗게 되어 무서움에 질겁한 채 와들와들 떨면서 “따이한”, “따이한” 하면서 연신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살려달라는 모양이었다.차라리 죽은 적을 보는 게 낫지 여자가 재수 없이 이 모양이니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재수도 없거니와 불길한 생각마저 들었다.
여자를 끌고 중대장호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내 호 뒤쪽에 여자가 들어갈 수 있도록 널따랗게 호를 파 눕히고, 하의 바지와 피가 흥건히 고여 있는 삼각팬티도 벗겼다. 여자의 본능인지 몰라도 상처부위를 벗기지 못하게 앙탈을 부렸다.
그래도 벗겼다. 여자의 앞부분은 엉덩이를 관통하고 앞으로 튀어나온 실탄에 의해 마치 어린애가 가지고 노는 종이 팔랑개비처럼 회전하는 방향으로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이미 핏덩이가 굳어 엉겨있는 상처 주변을 위생병이 소독약으로 깨끗이 씻고 압박붕대로 상처부위를 묶어주고 바지만 다시 입혔다.
사격한 병사는 당시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호에 엎드려 첨병을 기다리고 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여자가 불쑥 나타났다. 접근하는 것을 보고 있는데 첫 번째 호 앞을 지나서 두 번째 분대장 호 앞을 지나갈 무렵(이 분대장은 권총을 찬 후미의 장교를 사격토록 임명된 사람임), 이 여자가 별안간 걸음을 멈추고 무엇이라고 중얼거리더니 뒤로 돌아섰다. 그때는 적 본대의 선두조차 첫 번째 호 앞에 다다르지 않았을 때였다.
뒤따라오는 본대를 정지시키고 AK소총을 든 녀석과 함께 앞으로 와서는, AK소총을 든 적은 우리 배치선 반대방향으로 갔고 여자는 풀 속을 뒤지면 호 쪽으로 접근했다.
계속 호 쪽으로 접근하는데 쏠 수도 없고 안 쏠 수도 없는 판에 가슴을 쏘자니 포로가 죽어버리면 안되겠고, 살려 잡기 위해 다리를 쏘자니 움직여서 조준이 흔들리고, 여자의 음부 부분을 정면으로 쏴야 하는데 차마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어 돌아서면 쏠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 앞으로 더듬더듬 뒤지면서 오더니 풀밭에서 측방으로 깔아놓은 크레모아 선을 잡더니 “꽥”소리를 지르며 자기 쪽을 보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돌아서서 달아나려고 하는 여자의 엉덩이를 조준해서 쏴 버렸노라고 덤덤하게 얘기했다.
소대장에게 적이 접근한 소로를 따라 포복으로 접근, 전방 400~500m 정도를 수색해 보라고 지시하고 총을 쏜 병사가 있던 호 쪽으로 포반장과 함께 가보았다. 아무리 서서 보고, 걸어오면서 봐도 매복지점은 발견될 수가 없었다.
여자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월남어 통역병을 통해 최초심문을 해보니 두 아이의 엄마요, 마을에서 장사를 하며 시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남편이 베트콩인데 밤에 찾아와서 군인들을 안내해 달라고 해서 따라나섰으며 남편도 같이 왔다가 달아났다고 했다.
같이 숲을 뒤지던 그 녀석이 남편이었다. 그 녀석 직책도 안내원이었다. 정확히 20명이 왔는데 인솔자는 보급을 담당하는 월맹정규군 장교였다.
어떻게 알고 숲을 뒤지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코를 가리키면서 “냄새”라고 답변했다.
빌어먹을 것, 모두 전장정리를 잘 했는데 그놈의 냄새에 대한 정리를 잘못한 것이다.
기가 막혔다. 떡을 입안에 넣고도 삼키지 못한 꼴이 되고만 것이다. 나머지 19명의 적은 모두 도망갔고, 그 적이 우리의 위치를 알고 갔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개망신이 아닐 수 없었다. 냄새 정리를 잘못한 대원에 대한 배신감과 내 자신에 대한 자책감이 막심했다.
냄새, 숲과 나무가 울창한 정글에서는 이 냄새가 한군데 모여서 오래 머문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건조한 곳에서는 곧 냄새가 상승하고 마는데 우리가 매복하고 있던 지역은 강 좌우이기 때문에 습기가 많아 공기가 무거워 유통이 안 되고 냄새가 고이는 곳이었다.
더구나 아침에는 공기가 더워지기 전이라 정글속의 공기는 움직이지 않는다. 거기다가 병사들은 밤새도록 걸어왔으니 얼마나 땀을 많이 흘렸겠는가? 우선 옷에 찌든 썩은 내 나는 땀 냄새, 이 냄새가 지독했다. 밤새 걸으면서 흘린 땀에다 진지 구축 시 수통의 물을 먹고 또 땀을 흘렸으니. 게다가 아침에 싸놓은 소변, 쉬지도 못하고 호파는 주변에다 전부 실례를 했을 테니 그놈의 찌린 내가 얼마나 진동했겠는가?
대변에서 퍼지는 구린내, 잡초가 많은 지대라 대충 풀과 흙으로 덮었을 것이다. 이 구린내 나는 똥냄새.
다음엔 담배였다.
군장 검사 시 전부 조사해서 한 개비도 없던 것이 헤쳤다가 다시 모이면 전투화와 철모, 소총 손잡이와 빈 깡통, 심지어는 사타구니 속에 감추어서 온다. 행군 시 한 대도 못 피웠으므로 M16 소총 손잡이 속에 감추어 가져온 담배를 호 구축할 때 피워댔을 것이 분명했다. 이놈의 담배연기 냄새!
이런 냄새를 정글지역에서는 ‘인내’라고 하는데 한국군이 월남 사람이 다니는 지역에 가면 이 냄새를 금방 알 수 있듯이 이들도 역시 우리 냄새를 잘 맡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월남 여인은 흘러 펴진 냄새구역(Smelling Pocket)을 통과하다가 우리의 냄새를 맡았던 것이다.
냄새를 추적해서 적의 위치를 발견하기 위해,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안 마셔서 비교적 남자보다 감각이 예민한 여자를 첨병으로 세웠던 것이다. 적이지만 참으로 영리한 놈들이었다. 거의 십수 km를 걸어오면서 인적이 없는 야생지역에서 숲 냄새, 흙 냄새, 물 냄새 등을 맡으면서 새벽길을 걸어온 이 여자에게 발견된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상황을 요약해서 대대에 보고했다.
부상으로 생포된 여자포로는 첩보가치가 없다는 내용과 이왕 들어왔으니 오늘 밤을 넘겨보고 철수 여부는 내일 아침에 재판단해서 건의를 드리기로 했다.
매복위치가 노출되어 매복 장소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적이 접근하던 쪽으로 추진하는 경우와 측방이동 또는 우리가 침투한 쪽으로 옮기는 경우를 놓고 숙고해 본 결과 적이 달아난 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기로 했다.
우리 병사가 단 한발만 사격했기 때문에 총성으로 인해 우리의 위치가 노출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밤에 계곡 속에서 난 단 한발의 총성은 산울림 현상으로 어디서 난 소리인지 분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적은 통신수단이 지극히 원시적이고 부족했기 때문에 상황 전파가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도망간 적들이 산속으로 들어가 보고하려면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나 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빠른 시간 내에 자리를 옮기기로 결심했다.
대대에서는 중대장 복안대로 움직이라는 지시와 포로는 가치가 없으니 따로 복잡하게 후송하지 말고 현지에서 응급처치와 최초치료를 잘 해서 내일 아침 상황에 따라 조치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마이 아줌마는 적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며 단지 남편을 따라나왔다가 ‘따이한’ 총에 맞았다며, 남편도 남편이지만 어린 두 자식을 생각해서 제발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위생병 판단에 의하면 상처부위의 출혈은 처음보다 좀 적은 것 같았으나 내일 아침까지 도저히 이 여자의 생명이 지탱하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저격을 피하기 위해서 나는 계급장과 명찰이 없는 정글복을 입었는데도 이 여자는 내가 중대장인 것을 눈치 채고는 “따이한 따위, 따이한 따위”(한국군 대위) 하면서 자기 좀 살려 달라고 했다.
지금은 나도 결혼해서 가정이 있고 처자식이 있어서 옛날과는 생각이 다르지만, 그 당시는 총각인데다가 소대장 시절을 정글에서 보내다 보니 성격도 꽤나 거칠어져 있었고, 살생을 해봐서인지 애걸하는 모습이 그냥 덤덤하기만 했다.
새로운 매복지점을 찾기 위해 약 600m 전진했을 때, 박격포를 올려놓기에 적합한 봉우리가 있는 지역이 있어서 그 곳에 자리를 정하고 빠른 동작으로 매복준비를 했다. 60mm 박격포반도 최초 위치했던 곳과 비슷한 봉우리에 자리를 잡았다. 적을 못 잡은 분대장과 대원이 이번에는 꼭 잡을 테니 최초 위치에서 다시 근무토록 기회를 달라고 하여 배치는 처음과 똑같이 했다.
낮에는 아무런 징후나 상황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푸캇’비행장에서 이륙한 패텀 전투기만 몇 번 상공을 지나갔다. 계속 찾아대던 대대망 무전기도 가끔 이상유뮤만 묻고는 조용했다. 각 조에서 한 명씩만 근무하고 나머지 대원은 잠을 잤다.
포로인 마이 여인의 처리가 보통 골치 아픈 것이 아니었다. 위생병이 새로운 매복지역으로 여인을 옮겼다. 중대장 뒤쪽의 위생병 호 옆에 별도로 깊고 넓은 호를 파고, 위장도 해 놓았다.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고 지혈은 되지 않았다. 옮기면서 다리가 움직이게 되니 출혈이 다시 심해졌다. 차라리 죽었으면 묻어버리면 그만인데 아직 살아 있는 목숨을 그대로 묻어버릴 수도 없었고,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모습이 너무 애처로웠다.
위생병에게 여자가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항시 감독하고, 소리를 지르면 입을 압박붕대로 묶어버리라고 지시했다. 아무리 해도 안되는 경우에는 총소리를 내지 말고 그대로 묻어 버리라고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지나치다고 여겨지나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월남어 통역병이 위생병과 함께 공모하여 마이 여인에게 소화제를 지혈제라고 속여 먹이면서 용기를 주려고 무척 애썼다. 소리를 지르면 제일 먼저 당신부터 죽이지 않을 수 없으니 제발 조용히 참아달라며 오히려 통사정을 하였고, 내일 아침이면 우리가 철수할 때 헬리곱터로 한국군 병원으로 후송 보내주겠다며 안심시키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져 갔다. 밤을 위해서 특별히 몇 가지 준비를 해야 했다. 우선 포로를 잡기 위해서 야간조준경을 장착한 소총으로 접근로를 조준하면서 계속 감시토록 해야 했다. 낮에는 포로획득이 용이했지만 밤이면 야간조준경을 장착한 소총이 아니면 적을 생포할 수 없었다. 출발하기 전에 영점사격을 실시하여 예행연습까지 시켜서 큰 문제는 없었지만 전 대원이 야간조준경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조준경이 없는 대원에게는 소로를 지향해서 야간사격 구역을 명시해 주어야 했다.
살상지역을 제외한 측방지역에서는 사격 후 달아나는 적을 살상하게 위해서 크레모아를 추가로 설치했으며 야간조명시 병사들의 노출을 방지하기 위해서 흙으로 얼굴을 위장했다.
마이 여인은 먹을 것을 주어도 먹지 않고, 계속 헛소리만 중얼거리다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는 위생병의 보고를 들은 후, 잠시 졸고 일어나니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마음속으로 명복을 빌었다.
소리를 지르는 것이 걱정되어 달래려고 지어준 소화제와 말라리아 예방약을 지혈제로 알고 먹은 가련한 여자, 소리를 지르면 너 먼저 죽일 수밖에 없으니 조용히 버티다가 내일 아침에 우리와 함께 헬기로 철수해서 한국군 병원으로 후송 보내준다는 말을 그대로 믿고, 아프다는 앙탈 한번 없이 고통을 꾹 참아준 마이 아줌마는 죽었다.
거머리를 막으려고 몸을 둘둘 말았던 판초우의와 함께 마이 여인을 땅에 묻었다. 23세를 한 생애로 가족도 남편도 시부모도 아이들도 없는 전쟁터에서 적군인 우리들의 옆에 누워 짧은 한 생애를 끝마쳤다.
이 여자가 과연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알고 이 싸움에 뛰어들었을까......
나는 그 후 이 마이 여인의 죽음으로 많은 심적 고통을 받았다. 거리를 지나가다가 마이 여인과 비슷하게 생긴 여자만 보며 당시 그 여인의 애처로운 죽음이 더욱 생생하게 기억되고는 했다. 전방에서 대대장 시절, GOP에서 밤새 순찰을 돌고 지친 몸으로 새벽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잠을 자면 몇 번씩 꿈에 나타나 살려달라고 애걸하다가 별안간 드라큐라같은 귀신으로 변해 달려드는 바람에, 식은땀을 흘리고 헛소리를 지르다가 침대에서 방바닥으로 떨어진 일까지 있었다. 소위 가위에 눌리는 일이 많았다.
그 당시 대대장 주변의 근무병들은 그런 나를 잘 이해해 주었다.
꿈을 꿀 때는 아예 소주를 좀 마시고 잠을 자곤 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지금도 기억은 생생하나 그 고약한 꿈은 더 이상 꾸지 않는다.
마이 여인이 숨을 거두자, 시작부터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앞일이 걱정되면서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면서 좀 졸았을까, 이상한 소리에 정신이 바짝 들고 긴장되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60mm 박격포반이 위치한 봉우리 뒤쪽에서 꽹과리 소리가 나지 않는가? 등골이 싸늘하고 머리털이 솟으면서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맞은편 산과 계곡에서도 꽹과리와 피리소리가 들렸다. 고요한 침묵만이 흐르던 계곡이 요란스런 소리 때문에 산울림과 뒤섞여서 온 천지가 진동했다.
문득 전사 시간에 중공군이 함화공작(喊話工作)-중공군이 6.25때 북과 피리 등을 사용하여 아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려는 심리전의 하나-의 한 방법으로 피리와 꽹과리를 이용한다는 기억이 났다. 이것은 필시 우리를 공격하기 위한 전위행동이거나 다른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한 기만술책이라고 판단했다.
매복위치는 정말 잘 옮겼다.
대대장님께 상황보고를 한 후 중대 잔류인원에게는 필요시 중대기지의 물차를 타고 와서 강에서부터 우리의 철수를 엄호하도록 준비명령을 하달했다.
포병에게는 적의 꽹과리 소리가 나는 지역의 좌표를 불러주었고, 요청 시 포대별로 분산사격을 실시해서 동시에 제압시킬 수 있도록 조치했다.
꽹과리 소리가 뜸해지더니 이번에는 고함을 지르고 야단들이었다. “따이한, 따이한!”하면서 포위되어 오도가도 할 수 없으니 전부 손들고 나오라는 소리였다. 날더러 항복해서 투항해 오라는 소리였다.
한편으론 겁도 났지만 오기도 생겼다. 상황이 이쯤 되고 보니 여기 와 있는 나보다 대대에서 더 야단들이었다.
한국군 중대장이 적에게 포로가 되는 날이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전병 녀석이 철없이 “우리는 지금 적에게 완전히 포위 되었습니다”라고 보고를 하였기 때문에 연대에까지 보고 되어 연대장님이 상황실로 나오시고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연대와는 거리가 멀어서 무전교신이 되지 않았으나, 대대를 통해서 연대장님 지시라고 포로를 안 잡아도 좋으니 필요하면 한시라도 빨리 빠져나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또한 이 밤중에 APC와 기타 병력을 투입해서라도 중대장을 구출해야 한다고 지시하신 모양이었다.
대대 작전과장이 ‘어찌하면 좋겠냐?’고 오히려 내게 물었다. 고맙기 한이 없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한밤중에 움직이다가 적의 역매복에 걸리는 날이면 우리 중대를 구출하기 위해서 오는 병력마저 큰 희생을 치르게 되기 때문이었다.
적이 노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대로 밤을 버티기로 결심했다. 두세 번 계속 물어왔으나 야간철수와 구출작전 모두를 거부했다. 단지 출동을 위한 준비만 부탁했다. 적과 싸움이 시작되면 포사격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공포와 공황(恐惶)에 대한 통제였다.
매복 도중에 종종 있는 일로서 공포와 무서움에 시달리던 병사가 공황의 단계를 넘어서면
자제력을 잃고 벌떡 일어나 소리 지르며 호에서 뛰쳐나와 신음하면서 와들와들 떨거나 총을 마구 난사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러는 날이면 그때는 큰일이다. 박격포 반장에게 병사를 달래고 자신감을 넣어주라고 지시한 후, 중대원이 배치된 호를 전부 기어 다니면서 엄지손가락을 펴서 네가 최고라고 표시해 주고는 어깨를 어루만져 주면서 적이 오면 실탄을 아끼라고 귀에다 대고 이야기했다. 어깨도 토닥거려 주고 코도 잡아당겼다.
그러는 사이에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무전병은 중대장이 믿음직스러웠는지 바싹 뒤에 붙어서 신나게 따라다녔다. 내가 내 호로 돌아왔을 때까지도 그놈의 꽹과리와 고함 소리는 계속되었다.
우리가 적에게 밀려서 전장을 이탈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면서 먼저 부상자를 빼내고 배낭과 식량은 버린 후 크레모아는 전부 터뜨리며 실탄과 수류탄은 적에게 한 발도 넘겨주어선 안 된다고 지시하였다. 60mm 포탄도 다 쏘아버리고 포신은 수류탄을 넣어 파괴해 버린 뒤 이탈하도록 지시했다.
밤 10시경으로 기억된다. 전방에 적이 출현했다.
낮은 목소리로 “마이, 마이”하면서 우리에게 포로가 되어 죽은 마이 여인을 계속 불렀다.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 ‘도깨비에 홀린 것이 아닌가? 죽은 마이 여인의 한이 꽹과리와 함성으로 변신해서 이 골짜기를 시끄럽게 하고, 이제는 산귀신이 되어 나타났나’ 하는 불안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중대원 역시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입이 바싹 바싹 말랐고, 호 앞에 작은 돌이 굴러 떨어지는 것이 마치 바위가 구르는 소리 같았다. 이때 나의 귀는 천리 밖의 소리를, 내 눈은 천리 밖의 적을 보고, 내 코는 천리 밖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 만큼 아주 예민해 있었다.
계속 부르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죽은 여자의 남편이 틀림없어 보였다.
혼자 올리는 절대 없었고, 저놈 뒤에는 분명히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서 많은 병력이 뒤따라오고 있을지도 몰랐고, 우리의 사격을 유도해서 위치를 노출시킨 다음 곡사화기 세례를 퍼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제일 중요한 것이 사격에 대한 통제였다. 적이 코앞에 올 때까지 일체 사격을 금지시켰다. 우리가 매복지점을 거의 600m 정도 옮겼는데 잘 들릴 정도로 부르는 것을 볼 때 아마 저 친구는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을 잘 모르는 것으로 판단됐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갔다.
무서움에 떨어서 자제력을 잃고 소리를 지르거나 총을 난사하는 병사가 나올까봐 걱정이 되었고, 속이 바싹바싹 타고 피가 말라 들어가는 것 같았다.
별안간 전방에 섬광이 번쩍하면서 “꽝”하고 폭음이 터졌다. 크레모아 아니면 수류탄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더 이상의 총소리는 나지 않았으며 ‘마이, 마이’하며 부르던 소리도 멈추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초조와 불안 속에서 침묵의 몇 분이 흐른 뒤 소대장에게 ‘마이, 마이’부르면서 접근하던 적을 사살했다는 무전이 날아왔다.
지금부터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했다.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적은 분명히 세 가지 방법 중 하나를 택할 것이었다.
첫째는 우리를 유린하기 위하여 총공격을 할 것이다.
이 경우 적이 우리의 위치를 정확히 모르고 그런 무모한 짓을 할 리가 없다. 그러므로 적이 공격해오면 크레모아와 수류탄을 동시에 사용하고 일제히 기습사격을 가한 후, 짐을 버리고 X반도와 소총만 휴대한 채 철수로인 강 속으로 뛰어들어 신속히 이탈해야 한다. 적이 아무리 소총사격을 가한다 하더라도 강 속이 지면보다 훨씬 낮기 때문에 총을 맞을 염려없이 안전하게 이탈할 수 있다. 설령 초기에 적과 접촉하더라도 적은 노출된 상태이고, 우리는 호 안에 있기 때문에 적보다 훨씬 유리하고 안전하다. 또한 교전 시는 크레모아와 수류탄으로 집중공격하고, 소총 기습사격을 가하면 최초 제파의 격퇴가 가능하며, 적이 재편성하여 다시 공격하더라도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그 틈을 이용해 우리는 신속히 강 속으로 뛰어들어 이탈하는 복안을 수립했다.
두 번째는 곡사화기 사격을 가할 것이다.
섬광이 번쩍하면서 상황이 종료되었고, 주간에도 사격은 한발만 했기 때문에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정확히 모를 것이다. 탄약보급에 엄청난 어려움이 있는 적이 정확한 위치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곡사화기 사격을 할리는 만무했다. 그러나 만일 적들이 사격하면 호안에 엎드리고, 내가 직접 우리 포병사격을 유도하기로 했다.
세 번째로 우리에게 접근한 적이 우리의 위치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 버티고 있다면 나도 소리 내지 말고 그대로 앉아서 버티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날 밤중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정이 넘어서면서 적의 꽹과리와 피리, 고함소리도 조용해졌다.
첫 번째 근무자가 있던 호로 살금살금 기어가서 병사가 주는 야간조준경을 들고 가리키는 방향을 뚫어지게 보았다. 불과 15m정도 떨어진 거리에 허리 아래가 동강 난 시체 하나가 비스듬히 나뒹굴어 있었고, 양 다리가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병사의 말에 의하면 전방에서 ‘마이, 마이’ 하면서 사람 부르는 소리가 나기에 야간조준경으로 전방을 계속 주시했는데, 대나무바구니와 소총을 든 적이 소로의 좌우측을 확인하면서 접근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병사가 매설해 놓은 크레모아를 잡기에 순간적으로 그 병사는 크레모아 격발기를 눌렀고 그와 동시에 그 마이 여인의 남편은 허리부분이 두 동강 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분명히 우리가 자리를 옮긴 것을 모르고 다시 자기의 아내를 찾으러 왔던 것이다. ‘마이’여인이 총에 맞아 부상당해 도주하다가 쓰러졌던 지점을 이 근처로 알고 다시 찾아왔던 것이 분명했다.
그는 ‘마이’여인과 같이 월맹정규군을 이 산속으로 안내하다가 아침에 우리 병사가 쓴 총에 아내를 잃고 그대로 도주하여 산속 어디엔가 있는 그들의 소굴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 속에서 아내를 구출하고 복수하겠다는 적개심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밤이 어두워지자 대나무 광주리에 방망이 수류탄 몇 발을 얻어 담고는 소총을 들고 찾아 나섰던 것이다.
엄청난 증오심, 아내를 찾겠다는 열망이 죽음을 초월해서 나서게 했을 것이다. 비록 적이고 우리를 쏘기 위해서 이곳에 왔지만, 그의 죽음 앞에 경건히 조의를 표하고 저승에서나마 사랑하는 내외가 다시 만나 깊은 부부애로 행복하게 살기를 빌었다.
땅거미가 걷히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이곳에서 버틸 수 없었다. 새벽에 전장정리를 하고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시체 주변을 수색하고 전방을 확인했다. 약 40여 명의 적이 접근했다가 철수한 흔적이 있었고, 나무 뒤쪽과 흙더미 뒤쪽 굴곡이 있는 지표면에는 적이 엎드려 있던 흔적이 있었다.
밤새도록 서로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다가 적은 덤벼들 호기를 포착하지 못해 그냥 돌아가버린 것이 분명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군인이 충돌해서 코앞에 적을 두고도 싸우지 않았으니까......
‘마이’여인의 남편 호주머니를 뒤졌다. 지갑 속에 비상금 얼마와 가족사진이 나왔다. 그 사진은 환하게 웃는 ‘마이’여인의 모습과 함께 어린 아들과 딸의 모습, 넥타이를 맨 죽은 남자의 모습이 아니던가! 두 아이는 고아가 되었다. 지금 그 애들 나이는 24~25세 정도 되었을 것이다.
광주리에는 방망이 수류탄과 미제 세열수류탄이 10발 정도 있었으나 한 발도 던져보지 못했으며, 그가 갖고 있던 AK소총에는 착검된 상태에서 실탄이 장전되어 있었다.
시체를 끌어다가 ‘마이’여인을 묻었던 자리를 파고 합장해 주었다.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어 머리 쪽에 박아 놓았다. 시체를 찾아다가 장사를 잘 지내주라는 표시였다.
우리는 침투한 강을 따라 철수하기 시작했다. 철수 시 적과의 조우나 역매복에 대비하기 위하여 새벽에 중대기지에서 약 20여 명의 중대원이 개활지를 통과하여 강 하류 쪽에서 중대철수를 엄호토록 했다.
약 2시간 가까이 개울을 따라 철수했을 때 우리가 매복했던 지점에서 폭음이 발생한 것을 청취했다. 시체를 뒤지다가 시체 밑에 매설한 수류탄 부비츄랩이 터진 모양이었다.
중대 엄호조도 중간에서 연결되어 중대기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포로를 잡으러 출동했다가 포로는 잡지 못하고 적사살 2명, AK소총 1정, 구멍 뚫린 수류탄 몇 발을 노획하여 돌아왔다. 비록 얻은 것도 눈에 보이는 것도 얼마 없었지만 많은 전장교훈을 얻었다.
중대 식당에서 분대장급 이상이 모여서 이번 작전에 대한 자체 분석과 토의를 실시했다. 전장이나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전술토의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며 이를 통해서 싸우는 기술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전장에서의 상황전개는 적의 행동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불확실한 안개 속에 있다. 따라서 적진 깊숙이 들어가서 활동하는 경우,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대하여 끊임없이 예측해야 한다. 이 예측은 적 진술에 기초를 두고 판단해야 하며 아주 치밀하고 건전하고 상식적이어야 한다. 지휘관에게 정확한 예측능력이나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전술적 지식이나 시간과 공간의 통제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 실패를 초래한다.
정보나 예측이 오리무중일 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거나 당황하지 말고 과감하게 행동하는 것이 적에 대해 기습효과를 달성할 수 있고 또한 성공의 확률도 훨씬 높기 마련이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아무리 과감하게 상황에 대해 조치하더라도 적에 대한 지식과 전장의 전투기술에 기초를 두어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만용이 되고 만다.
다음으로 적의 심리적인 함화공작을 슬기롭게 극복해야 한다. 이는 아군으로 하여금 공포심을 최대로 조장하고 판단을 흐리게 하여 실제보다 병력이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일종의 기만작전이다.
이러한 심리전은 각급 제대에서 모두 사용하며, 2~3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기만조가 측후방에서 징, 꽹과리, 북, 나팔, 피리, 함성, 횃불 등을 이용, 주력 부대의 행동인 것처럼 기만하여 정상적이고 건전한 판단을 못하도록 만든다.
이에 대한 최상의 대책 역시 적 전술에 대하여 충분한 교육과 예행연습을 통해 감각을 숙달시켜야 한다. 병사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 무감각할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하지만 그 정도로 되려면 많은 경험이 축적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 작전에서도 심야에 적들이 꽹과리, 피리, 징, 함성 등으로 우리를 기만하고 유인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지만 중대원이 동요하지 않고 중대장 명령대로 차질 없이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출동하기 전, 유사한 상황 하에서 예행연습을 하면서 전개될 상황을 미리 예측했고 공포와 불안이 엄습해 오는 심야에 직접 각 병사의 호를 기어 다니면거 격려한 것이 제일 중요하지 않았나 생각되었다.
마지막으로 사격에 대한 통제이다.
주야매복에서 성공의 열쇠는 적의 첨병을 통과시키고 본대를 살상지대까지 유인하여 대량으로 기습사격을 함에 있다. 불필요한 사격을 하거나 첨병을 보고 놀라서 사격하는 경우는 본대를 놓치게 되고 실탄을 쓸데없이 낭비하게 된다.
포로획득 작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 실패를 통하여 차기 작전 시에는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는 값진 경험을 했다. 단지 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남편을 따라 나섰다가 전장에서 희생된 ‘마이’여인과 아내를 구하려다 쓸쓸한 초원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친 그의 남편에 대한 인간적인 죄책감이었다.
희생된 부부의 저승에서의 해로와 명복을 간절히 빌면서 ‘마이’ 여인 두 자녀의 훌륭한 성장을 바란다. 당시 전투를 수행하는 중대장직에 있었던 나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자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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