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bat Skyspot Overview
베트남전이 가속화 되면서, 미 공군은 안 좋은 기상과 야간의 정확한 폭격이 필요해졌다.
당시 야간폭격과 모든 기상에 폭격이 가능했던 기종은 딱 두 가지로, A6 Intruder(침입자)
와 B-52였다. 그러나 A-6는 숫자가 적었고, B-52는 정치적으로 매우 신중히 사용되었다.
결국 미국정부는 B-52를 이용한 폭격을 1965년 6월 18일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정밀 폭격이 아니었다. 이는 해군의 폭탄 시스템 때문이다. 첫날 폭격에 27대가 출격해 1,
300개의 폭탄을 투하해 1 곱하기 2마일 블록을 초토화했다. 그런데 이러한 무차별 폭격에
문제가 생겼다. 미군 사상자도 생겼고, 학교와 병원 등에도 영향을 줘 민간인들이 피해를
본 것이다.
미 전략사령부는 좀 더 정확한 폭격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주로 적 레이더를 놓고 도상연습
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본 것이다. 중요한 건 폭탄 적재구 개방시점이었다. 고도, 지상 스피드,
항공 스피드, 바람을 염두에 두고 측정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정확도는 일정하지 않았다.
정밀폭격을 위한 새로운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이 연구를 통해서 주목할만한 폭탄의 종류가 개발되었다. (네이팜탄을 제외한) 이 폭탄은 C-
130을 포함한 모든 종류 항공기에서 투하가 가능했다. 1만 파운드의 M-121, 1만 5천 파운드
의 BLU-82/B는 랜딩존 형성과 기타 다른 목표도 공격이 가능했다.
1965년 10월 초에, 이 연구단은 F-100 전폭기를 대상으로 마타고르다(Matagorda) 섬 폭격장
에서 연구되었다. 이 연구를 통해서 Ground directed bombing은 오차가 상당히 감소되어 폭탄
표준오차는 30미터 안쪽으로 줄어들었다. 첫 번째 COMBAT SKYSPOT 사이트가 1966년 3월
베트남에 전개되었다. 이 방법은 점차 쓰임새가 넓어졌고, 전술항공 뿐이 아닌 B-52 폭격에도
적용되었다.
이 프로그램 자체도 COMBAT SKYSPOT라고 명칭이 부여되었다. 이를 통해 모든 B-52 폭격기의
아크라이트 작전(폭격)에서 약 75% 정도 적중률을 나타냈다. 불행히도 이에 관한 서류는 내가
갖고 있지 않으나, 믿고 안 믿고는 개인 재량에 맡기도록 하겠다.
이 전투 스카이포드 유도 사이트는 베트남과 태국의 다음에 장소에 설치되었다.
이는 내 최대한의 기억에 의한 것이다:
스카이 스포트, 남베트남 지시-레이더 사이트 장소
베트남 : 비엔 호아, 플레이쿠, 동 하, 다랏, 몽키 마운틴/푸 바이 붕 타우, 빈 투이.
태국: 나크혼 패놈, 우본Ubon, 우돈Udorn, 무크다한.
물론 이것이 당시 전부는 아니었다.
마나고르다 섬의 제7분견대는 스카이스포트를 위한 훈련학교를 만들었다. 이 학교 교육생
들은 모두 동남아시아로 갈 사람들이었다. 1970-71년에는, 마타고르다섬이 너무 멀고 병참
이 힘들어, 텍사스 주의 오스틴 공군기지로 옮겼다. 이때 제50분견대가 맡으면서 수용량이
커졌다. 이 프로그램에는 부가적으로 TSQ-96 장비를 유지보수하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COMBAT SKYSPOT는 1966년 초부터, 라오스, 캄보디아, 남베트남, 북베트남의 주 전투에서
모두 사용되었다. 북베트남의 최북단만이 레이더 한계로 인해 할 수 없었다. 이 프로젝트의
존속기간은 짧았지만 효과는 좋았다. 그러나 라오스에서는 오폭도 많았다.
B-52의 직접 폭격은 케산의 해병대 기지와 콘 티엥의 SKYSPOT 사이트에 의해서 유도되었다.
이때도 사실 폭격의 오차로 인해서 많은 사건이 포함되어 미군 보병이 사망하곤 했다. 전사자
벽에도 이로 인해 죽은 사람이 많았고, COMBAT SKYSPOT도 의문에 눈초리를 받게 되었다.
COMBAT SKYSPOT 사이트들은 약 1만 건의 임무를 해냈다. 미 공군, 미 해병대, 미 해군, 남베
트남 공군, 라오스 공군의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모두 대상이었다. 당시 심사숙고 끝에 대부분
의 사이트들이 AN/MSQ-77을 사용했고, 태국의 우돈과 우본 공군기지는 AN/TSQ-96을 사용했
으며, 태국 나크한 패놈은 AN/MSQ-81와 AN/TSQ-96를 모두 사용했다. 이 나크한 패놈과 우돈
공군기지는 모두 HEAVY GREEN이란 프로젝트에 의해 움직였다.
그러나 전쟁 후반부에, 이 시스템이 정말로 쓸모가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일어났다.
특히 캄보디아에서.
캄보디아에 있던 그 대다수가 목표가 아닌 사유지에 잘못 떨어지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스카이포트는 미 공군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쓰였다. 그러나 남베트남 공군의
사용도는 적은 편이었다. 가끔 특별한 경우 캄보디아침공에서 사용되었다. 남베트남군이 람손
719작전(캄보디아 영내 공격)을 할 때 Skyline Ridge가 동원된 것이다. 그 외에 라인베커 I단계
작전, 콘 티엔, 케산, 안 록, 콘텀, 물론 68년 테트 공세 때도 이 사이트들이 사용되었다.
스카이 스포트 프로젝트용 레이더 사이트
--------------------------------
CIA와 라오스 비밀작전,
The Battle for Skyline Ridge, 1971-1972
William M. Leary, Ph.D.
E. 머톤 카울터 - 조지아 대학교 역사학 교수 (현 명예교수)
1971년 12월에서 1972년 5월까지,
베트남전쟁 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투 중 하나가 있었다.
장소는 북부 라오스. 월맹군 12개 대대가 넘는 병력이, 한 거점을 공격했다. 거점은 1만
명의 라오스인, 태국인, 몽Hmong 산악족들이 방어하고 있었다. 몇 명은 이 전투가 바로
Skyline Ridge를 위한 것이란 것이었다. 이는 미국이 전쟁범위와 제한범위를 약간 넘어선
행동 때문이었다.
베트남 전쟁 역사가들은 이 전투를 주요한 전투가 아니라 부정하는데, 이는 이 전투가 전체
전쟁의 결과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란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 Skyline Ridge를 위한
이 전투는 기억할만한 것이다. 이는 미 CIA가 오랫동안 아시아에 개입한 가운데 거둔 최고의
결과물이기도 하고, 기간은 짧았지만 일시적으로 라오스 내 반공전선의 짧은 승리기도 하다.
1971년 이 라오스에서의 비밀작전은 더 이상 비밀이 되지 않았고 이후 10년을 더 끌게 된다.
1962년 7월의 제네바 협정에 따라서 라오스는 중립국이 되었고, 미국의 개인적인 역할은 현지
민들을 훈련시키고 고문해 주는 역할만 가능했다. 제네바협정의 발인을 통해서 라오스에 존재
하는 모든 외국군인들은 철수해야 했고, 이때 미국은 총 666명을 철수시켰다.2 그러나 미 중앙
정보국은 이와 대비해 총 9명의 준군사조직원을 남겨, 태국의 특수부대 성격인 제99경찰항공
증원부대(PARU)를 훈련시켰고, 라오스북부 몽족 역시 훈련시켰으며 지원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라오스 내 CIA의 주 프로그램이 되었다.
1963년과 64년에 라오스에서 전투가 발생하자, 워싱턴은 라오스 왕립육군을 훈련시키기 위해
들어간 고문단 병력의 철수를 신중하게 고려했다. 수도 비엔티안의 미국 대사인 레오날드 운거
는 이것에 반대했다. 그는 1964년 6월 본토에 유선으로 의견을 보냈다. "기억을 떠올려 61-62
년의 경험으로 보면 MAAG [Military Assistance and Advisory Group]는 행복하지 못했고, MAAG와
화이트 스타 [Special Forces] 팀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높은 직업적 의지를 발휘했다. 그러나
아직 라오스 왕립육군(FAR)의 뼈대 자체를 건실하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다."
운거 대사의 추천으로 인해, 워싱턴은 라오스 공산주의자인 패테트 라오(Pathet Lao)와 후원자
인 북베트남이 라오스내 존재를 제네바 협정 위반임을 알았으나 공식적으로 모르는 척 했다.
그렇다고 공식적으로 부인하지도 않았다. 무능력한 라오스 육군엔 최소한의 지원만 해주기로
했고, 같은 시간, CIA는 라오스북부 몽Hmong족을 지원하고 훈련/무장시키는 걸 하기로 했고,
자원자 전투병력으로 된 남부의 병력도 지원하기로 했다.
CIA는 최소한의 인원만 라오스에 남아 있었고, 운거 대사의 뒤를 이어 윌리엄 L. 설리반이 대사로
들어갔다. 운거는 이렇게 말했었다. "군수품을 주고 준군사조직을 조직하는 일은 별로 마음이 내
키지 않는다. 그 조직으로 전세를 역전할 수는 없다. 결과적으로 라오스의 일부 조각만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지원제대는 태국에 두어야 하고 태국과 비밀 협정을 맺어야 한다.”
미국 정치계는 나중에 CIA가 주도한 라오스 내 비밀 작전이 주위 환경과 잘못 고용한 첩보원들
때문에 망했다고 비판했다. 제네바 협정의 준수를 위해, 미국 해외협력국장 알렉시스 존슨은
의회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CIA는 우리가 가진 유일한 수단이다.” 1969-73년 동안 라오스 대사
를 역임한 가들리(McMurtrie Godley)도 동의했다. 그는 1971년 이렇게 증언했다. "라오스를 포함
하는 CIA 작전들은 자신들이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 일이 대통령에 의해 재가 받았음을 강조한
것이다.
1964-1967년 사이, CIA는 전투 중심부인 북부 라오스의 몽족 육군을 지원했고, 이들은 패테트
라오와 북베트남 병력에게 매우 효과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최고 정점의 단계인 1967년
여름이 되었고, 라오스 육군과 몽족이 맞은 1966-1967 겨울 건기 시즌의 적(월맹군과 페테트
라오)의 공세는 별로 강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앙정보국도 낙관적인 마음을 갖고 있었다.
몽족 군대(Hmong forces)는 당시 CIA와 유선으로 교신을 하고 있었고, 전쟁에서 점차 높은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북부 라오스에서 힘의 균형이 전술적으로 변화하자, 이들의 지위가
영구적으로 변화했다.”
불행히도, 북베트남군은 이 ‘위험’을 감지했다. 1968년의 시작인 1월에 북베트남은 주 병력을
라오스로 새롭게 보냈고, 이를 통해 패테트 라오를 추방하고 자신들의 전쟁의 주역이 되려고
했다. 3월에 미 중앙정보국은 약 35,000명의 북베트남군이 라오스에 들어왔고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보고했다.
(잇빨 주: 북베트남이 감지했다는 이 ‘위험’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CIA가 주도한 라오스 준
-군사조직의 주 활동지역은 사실 호치민 루트와는 좀 떨어져있다. 그러나 이들이 세력이 강해질
경우 라오스로 통하는 호치민루트도 위협 받을 수 있었다. 라오스 자체는 국토가 넓고 망치 형태의
복잡한 지형이며, 또한 자연에 비하여 인구수나 밀집도는 약한 편이었다. 태국-라오스-북베트남/
남베트남 영토 일부의 국경으로 중간에 샌드위치가 된 라오스를 도울 수 있는 나라는 미국의 지원
을 받는 태국뿐이었다.
이런 분쟁이 일어난 이유는, 미국이 북베트남과 인접한 라오스 영토내에 전자/통신 사이트를 (미
공군의 항공전 유도를 위한) 만든 이유도 있지만, 미국이 라오스를 통하여 북베트남 자체를 위협
하려는 전략의도가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북베트남은 라오스 공산당을
지원하고 키웠다. 국가 라오스 자체의 지휘력이나 국방력은 당시 매우 약했다.)
전통적인 라오스 자연 속에서 대규모 병력의 교전이 불가피해졌다. 북베트남군은 지원을 위한
비포장도로들을 장악했고, 건기 시즌에 공세를 시작했다. 이 전투는 초겨울에서 초봄까지 이어
졌다. 미국이 후원하는 라소의 부대들은 그에 대한 응답으로 여름에 우기 시즌 공격을 감행했다.
이들 부대들은 CIA의 항공사나 다름 없는 Air America의 헬기들을 이용해서 기동성이 매우 강해
졌다. (CIA는 몽족과의 교신 케이블을 1967년 7월에 개통했다)
북부 라오스에 전략상으로 가장 중요나 곳은 자레스 고원지대(Plaine des Jarres :PDJ)란 곳으로,
이곳은 원형의 평지로 약 500평방 마일의 크기였고 평균 고도는 해발 3,500 피트였다. 이 PDJ는
목초지와 나무들이 이어지는 고원지대인데, 이곳에서 강렬한 전투들이 이어졌다. 한쪽이 방어
하고 한쪽이 공격하지만, 그 입장이 계절에 따라서 바뀌었다.
라오스 몽족의 정치/군사 지도자 방 파오. 그러나 멜 깁슨이
주연한 영화에서는 매우 부도덕하게 피상적으로 그렸다.
이 PDJ를 넘어서 남쪽으로 가면 일련의 고산지대가 이어지고 이를 넘으면 바로 메콩강 저지대가
나온다. 그곳은 수도 비엔티안의 행정권이었다. 고산족인 몽족은 바로 이 산들을 강력한 지도자인
방 파오(Vang Pao) 아래 뭉쳐 장악하고 있었다. 그의 본부는 롱 티엥 계곡이란 곳에 있었는데, 이
곳은 미국 측에 리마-20 사이트라고 잘 알려진 곳과 같은 지역이다. PDJ에서 남서쪽으로 20마일
거리였다. Skyline Ridge는 롱 티엥 북쪽이었고, 그 계곡은 몽족이 장악하고 삼 통에는 대규모 피
난민 수용소가 있었다. 이 계곡은 8km의 좁은 곳으로, 북서쪽에 구불구불 도로가 좀 있을 뿐이고
완전한 산악/정글 지대다.
1970년 1월, 북베트남군은 PDJ를 향해 강력한 공격을 개시했다. 당시 몽족 방어군들은 2년간의
힘든 전쟁으로 많이 쇠약해져있는 상태였다. 당시 라오스 대사 가드리는 몽족의 상태가 북베트남
공격을 막기에는 매우 비관적이란 의사를 밝혔고, 대사는 라오스로 진주한 북베트남군 집중점에
B-52폭격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 요구는 닉슨 정부의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고민했다.
누구도 라오스의 허약한 불균형 상태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헨리 키신저는 이렇게 말했다.
"난 라오스에서 확전을 시킬 생각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우리 자산의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지원 정도였다. 당시 남베트남에서는 우리가 철수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닉슨은 라오스 대사의 폭격요청을 계속 받고 있었다. 2월 17일에는 라오스
정부 자체가 지원을 요청했고, 결국 미군은 작전명 ‘GOOD LOOK’이란 이름으로 PDJ에 대한 B-52
첫 폭격을 시작한다. 이후 약 3년간 미국의 B-52는 라오스에 총 2,518회 출격했고, 58,374톤의
폭탄을 북부 라오스에 투하했다.
B-52 폭격은 적의 공세를 지연시켰다. 그러나 멈추지는 못했다. 2월 21일 북베트남군은 PDJ을
넘어 들어서기 시작했고, 몽족의 거점인 삼 통과 롱 티엥을 위협하기에 이른다. 에드가 뷰엘은
북부라오스에 들어가 있는 CIA 지역 최고 책임자로, 몽족은 최후의 1인까지 저항할 것이라고 말
했다. 몽족 지도자 방 파오는 당시 지난 10년간 전쟁으로 잃은 것보다 더 많은 병력을 이 6개월
동안 잃었다. 방 파오는 말했다. "우리는 계속 뛰고 있고, 또한 죽어가고 있다."
CIA는 뷰엘의 의견에 동의했고, 몽족이 매우 잘 싸운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 잘 싸웠
지만, 지난 해에 잃은 전력은 복구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명백히, 공중폭격은 충분치 않았다.
결국 무장이 충분하지 않은 몽족은 인력자원 보충으로 버티고 있었고, 라오스 상황은 점점 나빠
졌다. (CIA의 한 장교는 ‘인도차이나의 재고조사’란 책에서 이렇게 추산했다. 1971년 총 2,259명이
죽고 5,775명의 몽족이 부상당했다)
라오스 정부는 계속 태국에 병력을 요청했고, 태국은 정규군이 아닌 자원자를 모집해서 보내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키신저는 이렇게 보고서에 썼다. "격렬히 저항하다", 그리고 다른 나라가
직접적으로 도와줘야 한다고 했다. 닉슨 대통령은 어쨌거나 허가했다. 3월 17일 북베트남군은
몽족 근거지 삼 통에 도착하고 있었고, 이와 동시에 300명의 태국인 병력도 롱 티엥에 도착해
몽족 부대에 합류했다.
Skyline Ridge를 위한 첫 번째 전투는 1970년 3월 20일이었다. 북베트남군은 고지대를 점령하고
롱 티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몽족은 적시에 도착한 증원군에 감가했고, 미국의 전술폭격도 이
와 함께 시작되었다. 북베트남군의 공격은 잠시 실패했다. 결국 3월 26일 월맹군은 전방 거점을
포기하고 다시 PDJ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미군 Skyline Ridge용 레이더 사이트는 몽족의 근거지
안에 있었다. 잇빨 주)
1970년 우기 시즌이 되자 항상 그랬듯이 몽족은 다시 공세로 전환했다. 그러나 결과물은 적었고
오히려 피해는 매우 컸다. 라오스 정부는 몽족 부대와 정부군의 힘이 떨어지자 불안해했다. 6월
에 태국정부는 북베트남군을 북쪽으로 밀어내기 위하여 정규군을 좀 더 보내줄 수 있다고 라오스
정부에 통보해왔다. 태국 정부는 북베트남군이 메콩강에 도달하는 것을 막고 싶었고, 태국 정부
는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대규모 정규군을 라오스로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태국은 전쟁의 주역으로 등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방콕에서 ‘자원자’
대대를 모집했고, 이를 지휘하는 것은 정규군의 장교와 하사관들이었다. 이 부대에 대한 지출은
미국 정부가 책임지기로 했다.
건기가 되자 월맹군은 다시 나타났다. 1970-71년 사이 겨울의 월맹군 공격은 전 해에 비하여 훨씬
더 강력했다. 다른 지역에 도로를 뚫어 기동로와 보급로를 보완했고, 북베트남군은 약 8,500명의
병력으로 롱 티엥의 몽족을 공격했다. 1971년 2월 중순 최고로 위험해졌고, 롱 티엔 계곡에 월맹군
의 122밀리 로켓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미 공군은 이 북베트남의 진격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동남아시아의 군수품이 급감하고
있는 가운데 하루 평균 60회의 출격을 했으나, 그 전해에 비하면 반 정도 분량이었다. 2월 14일
에는 안 좋은 사건이 일어났다. 한 F-4D 팬텀기가 2개의 CBU-24 클러스터 폭탄을 800미터 상공
에서 목표에 투하했는데, 아군 오폭이 되어버려 몽족 한 명이 죽고 7명이 전사했고, 롱 티엔의
CIA 막사가 박살이 났다.
적의 포위공세는 두 달간 더 이어졌다. 4월 중순 몬슨이 다가와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전투의
파고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태국에서 온 대대들로 보강된 CIA가 지원하는 부대는 강해졌고, 몽족
지도자 방 파오는 4월 말에 Skyline Ridge 부근을 청소하기 위하여 반격을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
들 부근에 근접항공지원까지 요청했다. 몽족 입장에서는 그보다 더 나쁠 일 도 없었다.
II
1971-72년 겨울 Skyline Ridge에 대한 월맹군의 대규모 공격이 임박했다. 전 대사 운거는 미국이
개입할수록 전쟁은 팽창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라오스 내로 보면 미국인 규모는 여전히
작았다. 한 CIA 직원의 말로 인용하면, 태국의 우돈 공군기지, 군인의 아내, 라오스 내의 기술자
까지 포함 모든 미국인은 결코 225명을 넘지 않았다. 그 안에는 90명의 장교가 포함된다. (중앙
정보국에서 은퇴한 한 장교의 말에 의하면, 태국과 라오스의 CIA 총인원은 300-400명이었다고
한다. 꽤 많은 수치였다.)
라오스 내의 명령구조의 맨 위는 결국 대사 가들리였다. 그는 미 대통령의 대리권을 가지고 모든
군사작전을 조직하고 결정하고 명령했다. 미국 대사 가들리는 자신의 일에 흥미를 가지고 매우 열
정적으로 일했다. 그는 매일 오전 9-10시 사이에 대사관에서 작전회의를 주재했고, 지난 24시간에
대한 정보를 듣고 작전상황을 결정했다.
운거의 첫 번째 계획과 일치하게, CIA 최고 본부는 이 실행본부를 태국에 뒀다. 태국 우돈 태국군
공군기지에는 이륙장 부근에 2층짜리 건물이 있는데, 이곳은 라오스에서의 작전을 관할하는 CIA의
건물로 명칭은 제4802연합연락제대였다. 이 제대장은 로이드 랜드리라는 사람으로 지난 10년 넘게
라오스 작전에 관여했던 사람이다. 한 하급 장교는 이렇게 그를 표현했다. "그는 보스처럼 굴었고,
무뚝뚝하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어려운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한번 시작하면 끈질겼다."
랜드리의 작전참모는 조지 모튼으로, 그는 그린베레 출신이며 그린베레 베트남 초기 작전에 토대를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다른 CIA officer들은 공중작전, 사진촬영과 통신 정보, 전투결과 분석, 우돈
공항에 있는 미 7공군 13전대 본부에 대한 요구 등을 하고 있었다. 랜드리는 라오스에 들어온 태국
군대 조직을 관장하는 ‘333본부’의 비툰 야사와디 장군과 매우 긴밀한 협조를 잘 해냈다.
우돈 공항의 CIA 지역본부는 다른 여러 곳의 지부를 관할하고 있었다. 파스케, 사바나켓, 롱 티엥,
루앙 프라방, 남 리우. 그리고 가장 중요한 롱 티엥에 다섯개 하부조직을 가지고 있었고, 주 지원에
해당하는 곳은 군사제2구역으로, 그 지역엔 몽족 지도자인 양 파오 장군이 있었다. 조셉 존슨이란
사람이 롱 티엥의 CIA장으로 몽족과 태국부대에 지월을 연결해주고 있었다. 그는 에어 아메리카
항공기의 활동도 지시할 수 있었다. CIA의 항공사라고 할 수 있는 곳은 두 곳으로, 하나는 에어
아메리카, 다른 하나는 대륙항공사(Continental Air Services)였다. 그의 작전참모인 제롤드 다니엘스
는 양 파오 장군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다른 관계자로는 미 공군의 제시 스코트 소령이 옹 티엥에
머물면서 폭격을 유도하고 있었다. 그는 "갈가마귀"란 호출명으로 무전기를 직접 들고 유도했다.
1971년 미국은 베트남에서의 철수를 가속화했다. 닉슨은 1969년 아시아의 전쟁은 아시아인들이
해야 한다고 천명한 바 있었다. 1970년 말에 이미 병력은 28만 명으로 줄어 있었고 빠르게 감소
하고 있었다. 라오스도 이 영향을 받았다. ‘아시아의 전쟁은 아시아인들이...’란 닉슨의 말은 방어
적인 행동을 의미했다. 사실 죽은 케네디가 그러했었다. 닉슨은 라오스는 마치 과거 서부시대처럼
태국, 공격적인 북베트남과 중국까지 합해서 어떤 완충물 작용을 하는 중립국이 되기 바랐다.
(라오스는 중국, 미얀마, 캄보디아, 북베트남, 남베트남, 태국과 모두 국경선을 대고 있다. 잇빨 주)
중앙정보국은 B-52폭격과 태국인 자원자부대의 투입을 닉슨에게 요구하고 있었지만,
1971년까지 미국이 중립국 라오스에 개입할 의도가 없었다.
1971년 초, 라오스 정부는 몽족 지도자 양 파오에게 2군사구역에서 최대한 넓게 구역을 확보해
보라고 명령했다. (CIA가 만든 준군사조직에 라오스 정부가 요청을 하는 것은, 그만큼 라오스
정부군이 약해서 그렇다. 무장/훈련상태는 오히려 정부군보다 이들이 높았다. 잇빨 주.) 미국의
지원이 떨어지기 전에 양 파오 군대가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길 원한 것이다. 당시 이들은 7월
1일 이후 미군 전투기가 하루에 평균 32회나 출격해서 협조를 받는 군대였다. 양파오는 부응하여
6월에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 그는 공중기동 자원(미군이 지원하는 항공기 헬기)과 전술폭격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일개 몽족 지도자가 PDJ 고원지대의 적을 밀어내고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적(월맹, 라오스 공산당)의 건기 시즌 공격을 강할 것 같지 않았다. 양 파오는 고원지대에
다섯 개의 포병 거점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잇빨 주: 몽족의 지도자인 양 파오는 고원지대에 주둔하는 라오스 육군의 대대장이었다.)
태국병력과 함께하고 연계된 이들의 화력지원진지는 확실하게 주목을 받았다. 그때까지 월맹군은
낙관적인 시나리오로 그냥 공격해서 포병거점과 전술항공력을 파괴하겠다고 생각했다. 월맹군이
공격할 것 같다는 불길한 정보들이 우돈 공항의 CIA 지부로 계속 날아들었다. 11월 초, 통신정보를
통해 북베트남군 130밀리 장거리포 16문이 북부 라오스로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하노이를 통해 얻은 CIA는 월맹 육군 정규군 최고 장군 중에 하나인 레 트롱 탄이 그 해 건기시즌
공세를 직접 지휘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고고도 정찰사진에서도 대규모의 병력과 보급품이 6번
국도를 따라서 PDJ 고원지대로 향하는 것을 찍어냈다. 엄폐된 많은 차량들이 가고 있었다. B-52와
F-4 전투기가 도로를 폭격해도 이동량은 줄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적의 공세는 멈출 수 있다는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새로 부임한
제2군사지역 담당 정보장교인 제임스 파커 주니어는 태국군 포병진지에서 12월 초에 들어가 감명
을 받았다. 그 화력진지의 105밀리와 155밀리 포는 한번에 2-3방향의 목표물을 쏠 수 있었다. 북쪽
거점을 가서도 태국군 지휘관으로부터 낙관적인 견해를 들었다. 그는 난공불락(impregnable)이라
고 표현했다. 진지는 반지고리 형태로 만들어져 포격거점-벙커-박격포좌-철조망과 지뢰로 구성
되어 있었다. 지원 포대들은 몇 초 안에 포를 쏠 수있다고 자랑했다. 그리고 공중조명, 건쉽, 전술
항공 지원이 부르면 바로 오게 되어 있었다.
12월 15-16일 밤에는 PDJ에 불빛만 약간 보였다. 17일이 되자 주간에도 일대에서 연기가 올라왔고,
태국 거점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한 전투가 약간 있었다. 그리고 저녁 6시 35분이 되자, 오랫동안
예기한 적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월맹군은 소련제 130밀리 장거리포를 처음으로 사용해 태국 포병
진지를 포격했다. 태국의 포는 사거리 9마일, 월맹군은 16마일 사거리의 싸움이었다. 북베트남군은
모든 태국군 거점을 동시 포격했다. 그리고 탱크를 앞세워 보병이 고리 형태의 전선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최북단의 거점이 떨어졌고 다른 거점들도 굉장한 압력을 받았다.
적의 공격은 12월 18-19일 동안 계속 됐다. 전술항공은 이 방어거점에 계속 하고 있었는데, 이때는
잠시 미 공군이 부재중인 상태였다. 방 파오와 태국군은 공중지원을 계속 요청했고, CIA는 태국 우돈
의 미 공군을 계속 압박했다. 특히나 보급품이 절실히 투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가들리 대사는
사이공에 있는 미7공군 본부와 접촉했고, 그때 최대한의 미군 항공기를 동원하여 수색구조 작전을
요청했다.
12월 18일 오후, PDJ의 태국거점을 위해 작전하던 F-4 팬텀이 미그21기에 의해 격추당했다. 라오스
에서의 공중전으로 추락한 첫 번째 미국 전투기였다. 다른 두 대의 F-4는 그 미그기와 교전을 벌여
북베트남 국경 쪽으로 밀어냈다. 그러나 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팬텀기들의 연료가 모두 떨어졌고,
결국 네 명의 승무원은 사출좌석으로 탈출했다. 그런데 다음날 다른 팬텀기 한 대가 PDJ 동쪽에서
대공화기에 맞아 다시 격추되었고, 미 공군은 대대적인 수색 구조작전을 시작했다. 이 구조작전은
자연스럽게 PDJ에 대한 전투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태국 방어군에게 시간은 멀어져 가고 있었고, 12월 20일 아침, 모든 포병거점이 함락되었다.
생존한 태국군 병력은 월맹군에 밀려 남쪽으로 무질서하게 퇴각했다. Continental Air Services
의 조종사 에드워드 디어본은 태국거점에 물품을 공수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그 장면을
이렇게 보고했다. "지역시간 오후 1시, 화력지원진지에서 우리는 부상자들과 생존자들을 실어
나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반 나이란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2주 전에 비하면 정말
비참한 처지였다. 대부분 심한 충격을 받고 또한 부상을 입고 있었는데, 이 충격은 서로에게
계속 전파되었다."
북베트남군은 PDJ 남쪽 산악지역으로 밀고 들어왔고 롱 티엥으로 향했다. 당시 몽족 부대와
태국군 방어부대가 Skyline Ridge를 따라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월맹군은
약간 지연은 시켜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1971년 12월 31일, 오후 3시 30분, 북베트남군은
롱 티엥을 향해 포격을 시작했다. 130밀리를 포함한 포탄이 일대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야간
으로 이어지면서 계곡의 보급품 저장소가 크게 파괴되었다.
Skyline began에 대한 지상공격이 시작되고 며칠 후, 19,000명의 북베트남군이 이 전투에 뛰어
들었다. 그들의 상대는 1만 명의 몽족/태국인/라오스인 방어부대였다. 북베트남은 네 개의 방향
에서 포크형태로 공격했다. 주공격은 북쪽이었고 Skyline Ridge를 겨냥하고 있었다. 강력한 전투
속에 월맹군은 3km 길이의 중요 거점 능선을 손에 넣었고, 대공포대를 그곳에 설치해 방어자가
미국의 공중보급을 차단하려고 했다.
남쪽에서 포크 형태로 월맹군은 공격하면서 드디어 무선국에 대한 새퍼 공격을 실시했고, 계곡에
있는 레이더 사이트 저장소도 공격했다. 이어 동쪽과 서쪽의 공격으로 롱 티엥을 결국 완벽하게
포위했다. 같은 시간, 결국 삼 통도 떨어졌는데, 그곳에는 북부 라오스 임무를 위한 미국의 USAID
mission 본부도 있었다.
1972년 1월 12일, 라오스 공산당인 패테르 라오는 공식 라디오를 통해서 ‘라오스의 애국적인 군대’
가 롱 티엥을 점령했다고 보도했다. 2일후 하노이의 공식신문인 콴 고이 난 단은 ‘위대한 승리’라는
기사를 실었다. 1천 명의 적을 죽였다고 신문을 주장했고, 항공기 10대를 격추시켰으며, 10문의
대형포를 비롯해 수백정의 병기를 노획해서 파괴했다 주장했다. 롱 티엥, 관 고이 난 단의 함락은
전쟁의 승부처를 가르는 전환점이 되었다. "비엔티안에서 라오스와 미국 당국자들 사이에 혼란이
나타났다."
하노이의 승전 보도는 조금 이른 감이 있었다. 1월 중순, CIA는 다시 태국 증강군을 더 들여와
1,200 단위의 비정규전부대 몇 개를 라오스 남부에 더 만들었다. 이들은 라오스 정부의 엘리트
정규군으로 만들려고 계획 중이었다. 1월 말에, CIA가 이끄는 라오스 병력이 백병전까지 하는
모진 전투를 한 끝에, 월맹군으로부터 Skyline을 되찾았다. 1/2에서 1/3 정도의 병력 희생을
감수하면서. 롱 티엥은 위험에서 단기간 벗어났다. 월맹군의 130밀리 포 사정권에서만 벗어난
것이다.
그 동안 미 공군은 잘 위장된 월맹군 포병들을 사냥했다. 나머지 병력들은 롱 티엥에 깊은 참호
를 파고 다음 공격을 기다렸다. 월맹군은 당시 근 두 달 동안 B-52 전술항공폭격으로 애를 먹고
있었다. 이때 몽족들도 일부 규합해서 월맹군의 보급선에 매복 공격을 가했다. 모두는 월맹이
공세에 필요한 물자를 축척하지 못하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1972년 3월 월맹군은 다시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때 월맹군의 중전차인 T-34 탱크까지
삼 통으로 가는 도로로 진격시킬 의향이 있었다. 태국의 CIA 장교인 마이클 잉햄은 태국 군사2
구역에서 월맹군 포로를 잡아 심문해서 그 의도를 알게 되었다. 결국 그는 그 도로를 따라 대
-전차 지뢰를 매설했다. 그러나 월맹군 새퍼들이 대부분의 지뢰를 제거했고 태국군거점 부근에
만 일부 남아 있었다. 3월 30일, 두 대의 T-34 탱크가 도로를 따라 내려오다 대전차지뢰가 폭발
해 멈춰버렸는데, 이 전차 두 대는 롱 티엥으로 가는 도로에 자연스런 도로차단물이 되어버렸다.
Skyline Ridge를 따라서 4월 말까지 강력한 전투가 이어졌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결국 그곳을 장악하지 못하자, 북베트남은 여기서 작전 중인 사단을 뒤로 빼서,
남베트남에서 시작되는 이른바 ‘부활절 공세’로 병력을 돌렸다. 5월 19일 닉슨은 가들리 대사
에게 축전을 보냈다. "올해 라오스에서 공산주의자들의 건시 시즌 공세는 무력화 되었다. 지칠
줄 모르는 임무에 대한 당신의 노력이 있어 가능했다. 당신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무시무시한
일을 해냈다."
가들리 대사와 그의 CIA 선도 병력은 능력을 넘어 강한군대와 싸워 인상적인 승리를 거뒀다.
미국은 이 성공으로 인해서 라오스가 중립을 유지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CIA 국장인
윌리엄 콜비는 관계자들에게 훈장을 수여하며 1974년 2월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기여한
것은 전투뿐만이 아니다. 또한 라오스에서의 성공적인 작전뿐만이 아니다. 정말 곤란한 시간
들이었다. 롱 티엥의 상황은 정말로 위험했었다." 결국 라오스 내에 각종 계파가 참가한 연합
정부가 합의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연합정부는 막간의 간주곡에 불과했다. 공산주의자들이
국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IA는 라오스에 대한 결과물에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CIA Director인 리차드
헬름스는 나중에 이렇게 진술했다. "이는 정보국을 위한 핵심 작전이었다... 그것의 인적자원의
힘이었고, 특별히 검증된 인력의 힘이었다. 그것은 위험했고, 그것은 어려웠다. 그리고 우리는
훌륭히 해냈다."
헬름스는 1961년 피그만 사건에 대한 무능력을 비판했다. CIA가 주도한 라오스 내의 전쟁은 북
-베트남군과 패테트 라오의 수막힘을 만들어 냈었다. 미국인의 희생도 적었다. 8명의 CIA 오피서
가 그 전쟁기간 동안 죽었지만, 4명만 적의 사격에 의한 항공기 추락사였다. (항공기 사고로 죽은
CIA 오피서 4명 중 2명은, 에어 아메리카의 헬리콥터를 타고 1965년 8월 라오스에서 우돈기지로
가려고 메콩강 위를 날다가 추락했다. 부가적으로 약 8명의 오피서와 3명의 정보국 고용인이 에어
아메리카 C-46을 타고 가다가 C-46 수송기가 추락해서 1961년 8월 죽었다. 그들은 현 CIA 건물
로비에 무명으로 기념하고 있다.)
라오스인, 태국인, 몽족은 역시 희생이 매우 컸다. 특히 몽족의 희생이 커서 이 여파는 전쟁
후까지도 남아 있었다. 비엔티안의 CIA 부장으로 있었던 더글라스 블라파브는 1964-66년
동안 몽 족이 미국과 연결되는 과정을 모두 지켜봤었다. "그들이 치른 대가에 비해 결과는
절대로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몽족을 희생으로 몰아넣은 동맹 미국에 관해선 신랄한
비판도 했다."
Skyline Ridge를 위하여 싸운 라오스 반공전선의 승리는 비슷한 예가 없다.
베트남에서 조차도, 그러나 전투의 승리는 종결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는
그저 전쟁 최후의 결과를 지연시킨 것뿐이었다.
미 CIA 본사 현관에 있는 무명 순직 직원 기념물
-------------------------------------
몽족에 관하여
총 인구: 4-5백만 명. 중국에 3백 만명. 베트남 78만, 라오스 46만, 미국 22만. 태국 15만.
언어 : Hmong어, Mong어.
종료: 샤머니즘, 불교, 기독교와 기타.
연대기: 몽족은 중국과 동남아시아에 퍼져있는 산악족으로 18세기에 이르러서 정치적인 마이너 그룹이 되었다. 몽족은 라오스 내전에서 라오스 공산당 패테트 라오와 싸운 것으로 유명하며, 1975년 패테트 라오가 집권하면서 몽족은 일종의 응징보복을 받았다. 이때 많은 수가 해외로 피난했다.
몽족은 두 가지 부류로 나누는데 ‘하얀 몽족’이라 불리는 Hmong Der와 비슷한 종족인 Mong Leng다. 그 이전에는 표기가 없었는데 1950년대 라오스에 로마식 알파벳이 도입되면서 그렇게 표기되었다. 서로의 언어는 방언 격으로 조금 틀리나 일정한 대화가 서로 가능하다. 문화는 약간 다르다. 하얀 몽족의 경우는 언어에 들이마시는 호흡에 말을 싣는 기음(氣音)이 있다. 이외에 다른 몽족으로는 검은 몽족, 옷을 입지 않는 몽족 등등이 있다. 중국 고서에는 기원전 1세기부터 이들의 기록이 등장한다. 베트남에서는 메오Meo족이라고도 부른다. 이들에게 프랑스인들은 산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Montagnard라고 불렀다.
1960년대 몽족의 장군인 방 파오(Vang Pao)는 미 CIA의 도움을 받아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게 되고, 당시 부대는 60%가 몽족이었다. 이들은 특수게릴라부대를 만들어 호치민 루트를 공격하는 일까지 감행했다. 그리고 격추 미군 조종사를 구하는 일도 했다. 방 파오 장군은 군사제2구역이란 형태로 롱 티엥에 본부를 투고 싸웠고, 그 안에는 잘 알려진 미군의 Lima Site 20도 포함된다. 롱 쳉은 점차 라오스 내 제2의 도시가 되었고, 그 안에 은행, 비행장, 학교까지 들어섰다. 그러나 라오스 내전 말기 그곳은 함락되고 방 파오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빠지던 당시 라오스 왕국은 라오스 공산당과 몽족에 의해서 버려졌다. 그래서 보복과 박해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일부 몽족은 평화로운 삶을 위해 메콩강을 타고 태국으로 들어갔고, 몽족이 월맹에 점령당하자 엄청난 피난민이 태국으로 넘어와 미국이 수용소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피난가지 못한 몽족은 패테트 라오 공산정권 당시 대부분 재교육캠프로 끌려가 보통 3-5년을 있어야 했다. 여기서 많은 몽족이 노동과 학대로 죽어갔다. 일부는 오지의 고산지대로 도피했다. 미 중앙정보국에 협조한 공로로 미국에도 많이 건너갔다.
일부는 또한 페테트 라오와 (적화된) 베트남군에 게릴라전술로 계속 저항했다. 그 저항전을 ‘차오 파’라고 부른다. 클린턴 대통령 당시 몽족의 이러한 반공행동의 대가로 상당수를 미국에 받아들였다. 중앙정보국의 이른바 ‘비밀전쟁’을 인정한 것이다. 앨링턴 국립묘지에는 몽족의 구역이 생겼고, 그때 싸운 몽족 베테랑들이 죽으면 여기에 매장해주었다.
---------------------------------------
Combat Skyspot Overview
몇 경우를 제외하고 스카이포트가 해당 병사들에게 특별히 벅찬 임무는 아니었다. 전쟁은 길어졌고
이 사이트 대원들도 이에 영향을 받았다. 최악은 더위와 권태였고 가족과 떨어져 있다는 문제였다.
이 관계자들은 그래도 보병에 비하여, 진짜 침대에서 자고 뜨거운 물에 샤워를 했으며, 뜨거운 식사를
제공받고 있었다. 태국에 있는 사이트들이 가장 편했다.
그러나 이들도 임무의 반복으로 다른 곳과 떨어져 있는 문제는 역시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진짜 전투
를 해보지 못했고, 정찰을 하거나 치열한 랜딩존에 가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사이트들은 사실
적의 공격에 먼 곳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는 자연 속에 묻혀 있었지만, 전투작전 못지않게 전상자도
꽤 나왔다. 특히나 어리석고 잘못된 명령으로 인해서 이 천진난만한 비전투원들이 도살되는 일이 발생
했다. 이들은 산악에 떨어져 있었기에 공격당하면 개인적인 용기와는 별개로 생존이 쉽지 않았고, 가끔
명령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동 하의 사이트에서 1966년 6월 5명이 죽었다. 이들은 항공기를 타고 가다가 안전지대에서 재급유를
받아야 했는데, 명령에 의해서 동 하 사이트 활동을 완벽히 관측하라는 명령으로 인해서 죽었다.
태국 포우 다 티의 사이트는 1968년 3월 11일 잃었다. (HEAVY GREEN/Lima Site 85):
사이트의 지휘관인 제리 클레이톤은 공격을 받을 당시 그곳에 없었다. 그리고 12명이 전사했다.
미 공군에서 가장 용감한 대원이 받을 수 있는 훈장은 미 공군 십자훈장(Air Force Cross)이었는데,
대상은 미 공군과 그 상황에서 용감히 행동한 외국인에게도 수여할 수 있었다. 그 상황은 아래와
같다: 미군의 적군과 교전을 벌인 경우, 미군 전투작전에 연관된 외국군인인 경우, 미군이 교전중이
아니라도 우방국가에서 전투에 참가한 경우. 1960년 이전, 미 의회가 미 공군 십자훈장을 만들 당시,
병사는 영웅적 행동으로 수훈십자훈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시절, 많은 공군대원들이 책무를 넘어서는 용감한 행동을 했지만, 오직 20명만 미 공군 십자훈장
을 받았다. 1975년 이후에는 딱 한 명만 받아서 토탈 21명이었다.
사이트 장 에크베르그(Etchberger)는 1933년 함부르크 태생으로, 아주 길고 우수한 군사경력이 있
었다. 그리고 그는 제1043레이더평가전대에 들어갔다. 그는 OPERATION HEAVY GREEN을 위해 라
오스로 들어갔다. 북베트남 폭격을 위한 레이더 사이트의 장으로, 이는 최고기밀에 비밀작전의 일환
이었다. 제네바 협정에 따라서 라오스에는 미국 외교관 외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는 사실 미
공군이 추천하고 국방성이 ‘공식적’으로 선택한 인물이었다.
1968년 3월 11일, Lima Site 85의 사이트 장(지휘관인)이었던 주임상사 리차드 L. 에크베르그는 이
레이더 사이트를 공격으로부터 방어진지로 전환했다. 그러나 Lima Site 85는 적 지상군에 의해 월경
당했다. 적은 더 높은 지대에서 지속적이고 압도적인 포격을 퍼부었다. 그의 모든 부하들은 죽거나
부상당했고, 사이트 장인 에크베르그는 계속해서 응사를 하면서 끝까지 저항했다.
이 전투 동안 사이트 장 에크베르그는 계속해서 근접항공 폭격과 구출요청을 자신의 비상무전기로
요청했다. 그 폭격유도로 인해서 아군의 구출대가 사이트에 접근할 수 있었다. 공중 구조대가 도착
했을 때, 에크베르그는 적 사격에 노출된 채, 세 명의 부상당한 부하를 헬기에 케이블로 달아 올렸다.
마침내 그가 구조되었을 때 그의 부상은 매우 심각했다. 헬기들도 계속 사격을 받고 있었다. 전투의
정점에서 그도 목숨이 위험해졌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생존한 대원 3명을 탈출시키고 자신도 탈출했다.
에크베르그 주임상사는 사후에 퍼플 하트와 미 공군 십자훈장을 받았다. 그는 1981년이 지난 뒤에
미 국방성으로부터 전사(killed in Action)로 기재되었다. 2010년 9월 21일, 미 오바마 대통령은 최고
훈장을 추서로 내렸다. 그의 아들이 백악관에 초대되어 수여식이 거행되었다.
마지막 스카이스포트/아크라이트 임무는 1973년 8월 15일이었고, 태국 우본 공군기지 레이더가
유도했다. 그러나 불안정한 비콘으로 인해서 술에 취한 사이드와인더 미슬이 아군을 공격하는 일
까지 일어났다. 목표는 남부 캄보디아의 애매한 타켓이었다.
미국 위스콘신에 이 몽족 전사들에 대한 기념비가 있다.
미국으로 이주한 몽족 전사들이 기념식을 위해 모인 사진.
한 몽족의 현대 사진. 남베트남 안에는
'검은 몽족'이라 불리는 검은색 옷을
입는 산악족 들이 많았다.
'전쟁..... > 베트남 전쟁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병대 죄수부대 캡(CAP :combined action platoon)|베트남전쟁 (0) | 2013.11.25 |
---|---|
CIA 라오스 비밀 작전 - 2. Air America|베트남전쟁 (0) | 2013.11.25 |
적 게릴라본부 일망타진|베트남전쟁 (0) | 2013.11.25 |
적을 생포하라 (0) | 2013.11.25 |
영악한 적의 전술|베트남전쟁 (0) | 2013.1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