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 Air Operations in Laos, 1955-1974
William M. Leary
<지도 설명>
붉은 밑선 - 인접국들
라오스 내 붉은색 네모 칸 - 몽족 근거지 롱 티엥과 PDJ 고원지대
붉은 동그라미 -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이다.
북베트남군이 목숨 걸고 빼앗을만한 위치였다.
거대한 규모의 준군사적 작전들이 동남아시아의 작은 왕국 라오스에서 CIA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후 13년 이상, 미 중앙정보국은 토착민들을 북베트남군에 대항하게 조력하여 북베트남을 수막힘
상태로 몰아넣곤 했다. 결국 라오스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넘어갔지만, CIA는 라오스에서의 성과에
큰 자부심을 가졌다. 중앙정보국 디렉터(DCI) 리차드 헬름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건 우리 정보국의 주요 작전이었다..... 그것은 인력의 파워였다.
특별히 검증된 사람들의 능력. 그 일은 매우 위험했고 매우 어려웠다.
또한 우리는 훌륭히 해냈다."
Air America란 것은 미 중앙정보국이 은밀하게 소유해 운영한 항공사로 라오스의 작전에서 매우
긴요한 자원이었다. 1970년 여름에 이 항공사는 쌍발엔진 수송기 24대와, 또 다른 24대의 단거리
착륙용 항공기(STOL)와 헬기 30대를 가지고 라오스 작전에 헌신적으로 운영되었다. 이 항공사엔
총 300명의 조종사와 부조종사, 기계공, 항공운항자들이 있어 태국과 라오스 사이를 오갔다.
1970년 동안 에어 아메리카는 약 4천6백만 파운드의 식량(주로 쌀)을 라오스로 운송했다. 헬리콥터
운항시간은 매달 4천시간에 이르렀으며, 또한 이들은 만 여 명의 병력과 피난민을 수송했다. 그리고
긴급 의료수송과 라오스 내 미군조종사 구출에도 관여했다. 이들은 호치민 루트 감시 정찰팀을 침투
퇴출시키기도 했고, 야간 투하 임무도 수행했다. 심지어 이들은 호치민 루트에 폭탄을 투하하기도
했다. 호치민루트에 대한 질 좋은 정찰사진을 찍기도 했고, 야간투시경을 쓰고 수많은 비밀작전도
수행했다. 에어 아메리카 없이는 미 중앙정보국이 라오스 작전을 결코 할 수 있었다.
편견
에어 아메리카의 이미지는 사실 좀 그릇되어 있다. 1990년 이들을 그린 영화가 만들어져 좀 이해가
됐다. 물론 이 영화에서 냉소적인 CIA 직원이 마약을 비엔티안으로 운송해 몽족 장군에게 전달하는
이상한 장면이 연출됐지만 말이다. (몽족 지도자 방 파오 장군을 모델로 놓고) 영화에선 CIA 직원이
아편을 헤로인으로 공장에서 제조하는 장면도 나오고, 그걸 에어 아메리카가 운송한 것으로 그렸다.
그리고 아시아인 장군은 미국에 전쟁을 협조하면서 자금을 횡령하는 것으로 영화는 그렸다. 그러나
라오스에서 공산당과 반공주의자들이 실제로 싸웠다는 팩트는 영화를 통해 인식할 수 있었다. 물론
영화는 전투가 그 아편지대를 놓고 싸운 것처럼 그리고 있다.
영화에서 에어 아메리카의 조종사들은 피격된 항공기를 착륙시키는 등 매우 기술이 좋게 그렸으나,
기본적으로는 무언가 야생의 숙달되지 않은 사람들처럼 그렸다. 일부는 정신병자처럼 그렸다. 그런
이미지로 인해서 에어 아메리카의 조종사들은 경멸의 대상이 되곤 했다.
A Bum Rap
에어 아메리카는 라오스에 오래 머물면서 마약 거래에 관여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특히 영화는
크리스토퍼 로빈의 1979년 책 ‘에어 아메리카’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나, 영화가 개봉된 이후 로빈
은 자신의 책을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자세한 것이 틀렸기에 책의 주제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이
책과 영화는 모두 라오스 난민들이 마약거래하는 것을 CIA가 용인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아예
마약거래에 에어아메리카를 기본수단으로 사용했다고 하는 거다. 그러나 영화가 조종사들에 대해
서는 동정적으로 그린다.
로빈은 사실을 근거로 했으나 무언가 부족한 부분은 알프레드 맥코이의 1972년 글에서 인용되고
있다. ‘동남아시아 헤로인의 정치성’. 그는 1970년-71년의 아편 수확기에 에어 아메리카가 어떻게
관계했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이때 아편들이 라오스북부 산악의 방 파오 장군 본부인 롱 티엥으로
운송되었고, 그곳에서 장군의 마약 실험실에서 헤로인으로 제조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 20년 간의 조사에 의하면 에어 아메리카는 마약 거래에 관여하지 않았다. 조셉 웨스터
메이어는 1965-75년 동안 라오스에서 외과의사면서 공중보건의로 일했던 사람이다. 그는 ‘양귀비,
파이트, 사람들’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미국이 운영하는 항공사는 결코 라오스 안으로나 밖
으로 마약을 운송한 적이 없다. 미국 조종사들은 그 운송으로 이득을 내려고 하지 않았다. 모든
비행기에는 분명히 라오스의 마약이 조종사나 상관이 모른 채 조금씩 실려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
한다. 실제로 동남아의 모든 삼륜자전거, 메콩강의 삼판선, 그리고 태국-중국 사이를 오가는 모든
전도사의 지프차에도 마약은 항상 존재했다."
전 중앙정보국장 윌리엄 콜비는 정보국이 1960년대에 이에 관해 잘 몰랐다고 증언했다. 이 마약이
주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베트남 미군들의 마약문제가 부각되면서부터였다. CIA의 라오스에 관한
주 관심사는 전투를 지속시키는 것이었고, 마약은 정책에 없었다.
그 시작은?
에어아메리카의 진짜 이야기는 사실 1950년에 시작한다. 미국 당국이 아시아 지원을 위해 CIA를
내세우면서 비밀작전을 위한 수송수단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1950년 8월에 중앙정보
국은 Civil Air Transport (CAT) 란 회사의 자산을 사들였다. 이 항공사는 2차대전 당시 중국으로
운항하던 항공사였고, CAT는 여전히 아시아에서 상업비행을 하고 있었다. 상업비행이라 안가는
곳이 없었다. 결국 이 항공사의 법인을 통폐합하면서 비밀작전을 위한 것으로 바뀌게 된다. 과거
CIA는 한국전에서, 이런 방법으로 중국 본토로 100회나 위험한 비행을 했었다. 민간항공기들로
스파이와 보급품을 투하했다.
프랑스에 대한 지원
CAT는 점차 인도차이나의 공산주의 폭동세력과 싸우는 프랑스를 지원하는데 말려들게 된다.
1953년 4월, 프랑스는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부탁을 했다. 미 공군의 C-119 수송기를
통해서 탱크와 기타 중장비를 라오스의 힘겨운 프랑스군에게 보내달라고. 그리고 필요한 장비
목록을 같이 보냈다.
그러나 미군 관계자들은 인도차이나에 개입하는 걸 마음내켜하지 않았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오히려 프랑스를 도우려는 마음이 컸다. 결국 CAT 조종사들이 미 공군의 수송기 C-119를 모는
형태가 되었다. 5월 초에, CAT 조종사들이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에 도착해, 항공학교에서 친숙
하지않은 C-119에 대해 72시간 단기교육을 시켰다. 5월 5일, 그들은 6대의 수송기를 몰고 하노이
외곽의 프랑스 군 공군기지로 날아간다. (지아 람 공군기지)
작전명 ‘SQUAW’는 다음날 시작되었다. 이 작전은 7월 16일까지 계속 됐고, CAT조종사들은 라오스
내의 프랑스군 병력에게 많은 양의 공중투하를 했다. 그러자 베트민(Vietminh)의 공세가 약해졌고,
기상까지 나빠지자 CAT 조종사들은 돌아왔다. (베트민: 호치민이 해외에서 돌아와 베트남 북부에
만든 최초 민족주의 정당. 나중에 북베트남 인민전선으로 변모한다.)
인도차이나의 전쟁은 프랑스에게 최악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1953년 11월 프랑스 공수부대가
디엔 비엔 푸에 점프했고, 이는 라오스에서 15킬로미터 거리의 베트남 북부였다. 프랑스 장군
Henri Navarre는 베트민 군대가 미끼를 던져 그곳으로 유도해 막강한 화력으로 격파한다는 계획
을 가지고 있었다. 이 잘못된 계산으로 프랑스군은 하노이에서 22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있어야
했다. 프랑스는 고립된 병력에 항공기로 보급품을 투하할 생각이었다. 당시 베트남의 공중수송
지휘관인 장 루이 니코트는 승무원의 부족으로 육군의 보급을 제대로 댈 수가 없었다.
그러자 미국 정부는 1954년 1월 초, CAT에게 인도차이나로 가서 프랑스 당국과 만나라고 지시
한다. 그러자 CAT는 24명의 조종사를 보냈고, 그들에게는 미 공군이 정비하는 12대의 C-119가
주어졌다. 작전은 하노이의 캇 비 공항에서 디엔 비엔 푸로 날아가는 거였다. 베트민은 그곳에
총공세를 가하고 있었다. 3월 13일부터 5월 7일 함락될 때까지 CAT조종사들은 고립된 프랑스군
에게 총 682회의 공중투하 임무를 해냈다. 수송기 한 대가 5월 초에 추락했고 두 명의 조종사는
죽었다. 또한 다른 많은 C-119들도 강한 대공포 사격을 받아 조종사들도 중상을 당했다.
CAT의 인도차이나 작전들은 디엔 비엔 푸가 함락될 때까지 계속됐다. 5-8월 동안 C-119들은
고립된 프랑스 전초기지들에 보급품을 투하했다. CAT 역시 C-46 12대를 받아 작전명 ‘꼬냑’을
시작했다. 그 작전은 1954년 7월 21일 제네바 협정이 조인되면서 북베트남 민간인을 남베트남
으로 실어 나른 작전이었다. 이들은 8월에서 10월초까지 약 2만 여명을 북에서 남으로 실어 날
랐다. 이때 북에서 활동하던 CIA 요원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북에서 준군사조직을 형성하려고
했으나 무익한 것이 되어 퇴각했다. 위도 17도 위쪽의 미국인들은 반드시 나와야 했다.
라오스에 대한 관심
1954년 제네바 협정으로, 베트남은 위도 17도를 경계로 나뉘었고 라오스가 독립국임을 확인했다.
라오스는 메콩강 지류에 있던 비엔티안을 수도로 라오스왕립정부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프로 공산
주의자들인 패테트 라오는 북부지방에서 재규합했고 중부까지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프랑스는
라오스 왕립육군(FAR)을 훈련시키기 위한 소규모의 병력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라오스 독립은 미국도 의견을 같이 했고, 대신 라오스 정부가 공산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
했다. 라오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언급에 따라 동남아시아의 도미노 이론(존 포스터 듈레스)의
하나라고 묘사되었다. 라오스가 본질적인 가치는 적었지만, 동남아시아에서 냉전의 중심적인 지정
학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라오스는 남/북베트남을 포함해서 총 6개국과 국경을 대고 있었음.
잇빨 주) 만약 라오스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떨어지면 도미노처럼 넘어갈 것으로 생각된 것이다. 그
다음은 태국이 유력했다. 태국이 공산당에 넘어가면 동남아시아는 완전히 공산주의에 넘어갈 것
으로 간주되었다.
미국의 원조
1950년의 협정에 따라 미국은 라오스에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했었다. 제네바 협정이 체결되자
이 지원은 더 확대되었다. 1955년 수도 비엔티안에 경제적지원을 위한 ‘미국작전임무센터(USOM)’
가 설치됐다. 55년말이 되자, 프로그램 평가 사무소(PEO)란 것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은퇴했거나
예비역 상태인 미군 장교들이 그것에 참여했고, 이것은 군사고문단의 형태를 띠게 된다. USOM은
결국 군사원조 단체로 변모했다.
1975년 이전의 인도차이나
항공사 CAT는 곳 USOM의 원조 프로그램에 관여하게 된다. 1955년 USOM 사무소는 라오스의 흉작
이 들어 일부 지역에서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런데 이런 굶주림에 허덕이는 지역
들이 외딴 오지에 산악이라서, 필요한 쌀과 소금을 공중으로 수송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CAT의
C-46 수송기 세 대가 태국 우돈 공항에 도착했고, 그곳이 보급품 수송의 원점이 되었다. 9월 11일
공중수송이 시작됐다. 그 달 말까지 CAT는 총 25개 지역에 200회의 운송임무를 수행했고 약 1천 톤
의 비상식량을 전달한다. 이 CAT는 결국 미국 원조프로그램을 위한 ‘에어 아메리카’로 후일 바뀌게
된다.
1957년 7월 1일부터 CAT는 라오스에 영구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CAT 조종사 블루스 블레빈스가 C
-47을 몰고 비엔티안에 도착해서 미국 대사관과 접촉했다. 그러나 라오스의 항공운항은 당시 매우
원시적이었고, 수도 비엔티안조차 철판을 깔아 활주로를 만든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전투기를
위해 건설했던 비행장을 보완한 것이다. 기초적인 항공운항로 지도도 없어 결국 프랑스의 측량지도
를 사용해야 했으며, 오직 무전기를 통해 항법을 했고 비엔티안에는 23와트의 전 방향 비콘이 설치
되어 라오스 항공 직원들이 운영했다. 이 라오스 상업항공은 그냥 이름뿐이었고 아무 것도 없었다.
1957-1959년 동안, 불안정한 라오스 상황으로 인해 미국은 라오스 육군에 더욱 지원을 증강했다.
그리고 1959년 3월 26일 CAT는 이름을 '에어 아메리카‘로 바꾼다. 이름을 바꾼 첫번째 이유는 일본
에서 운항하는 항공사와 이름이 혼동될까 그런 것이다. 항공사의 C-47과 C-46은 더욱 빈번히 긴급
요청물품을 싣고 비엔티안에 착륙했다. 조종사 브레빈스도 매우 바빠졌고 특히 고립된 라오스육군
의 기지들에 수많은 공중투하를 했다. 조종사들도 1958년 10월에 도착한 CIA 직원들과 점차 가까워
졌다. 그들은 먼저 라오스의 콩 레 대위가 지휘하는 낙하산대대에 고문관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브레빈스에게 종종 보급품과 사람의 수송을 부탁했다.
1959년 여름에는 처음으로 미 육군 특전단이 라오스에 모습을 보였다. 그들의 암호명은 ‘Hotfoot’
였고 아서 "Bull" 사이먼 중령이 지휘관이었다. 사이먼 중령은 12개의 이동고문관팀을 데리고 들어
와 비엔티안, 사바나켓, 루앙 프라방, 파크세 등에 보냈다. 그 당시 라오스육군과 패테트 라오 사이
에는 17건의 전투가 발발한 상태였다. 이로 인해 CIA는 부가적인 공중수송력을 미국에 요구했다.
(사이먼 대령: 나중에 손타이 습격을 총 지휘한 인물)
공중보급의 증가
1959년 8월 CIA 본부는 두 명의 조종사에게 헬리콥터 조종훈련을 받기 위해 일본으로 보냈다.
당시 그 지역 CIA 작전 부담당관은 로버트 루셀러트였는데 그의 상관인 허그 그런디가 타이페이
의 사무실로 그를 호출해 메시지를 하나 보여주었다. 그 내용은 헬기를 보내달라는 것으로 "come
out of the blue."란 말을 사용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라오스에서 회전익기의 사용이 시작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결국 4명의 CAT 조종사가 일본과 필리핀으로 가서 미 공군의 H-19A헬기 조종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CAT는 일부러는 아니지만 1960년 3월까진 라오스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H-19로
작전하는 건 제한이 있는 상태였으나 높은 고도의 라오스에서 이동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일반
적으로 이 항공기들은 중앙정보국 직원들이 만남을 위해 변경지역에 태워주거나 심리전 전단을
투하하기 위해서였다.
1960년 6월에, 에어아메리카 작전에 헬기가 완전히 라오스 작전기종으로 자리 잡았다. 헬기가 에어
아메리카의 능력이 검증된 것은 아니었으나 조종능력은 가능했다. 루셀도트나 CIA 모두 조종에만
능숙하다면 작전에 유용하리라 생각했다. 루셀도트는 네 번이나 오키나와로 미해병대 항공단으로
가서 H-19을 훈련받고 자격을 취득했다. 그리고 그 해 말에 미 해병대는 H-19를 대신할 신형 UH-34
헬기 4대를 주었다.
The Helio Courier
같은 시간 에어 아메리카는 라오스에서의 프로펠러 항공기를 향상 시키려 노력했다. 그로 인해
에어 아메리카는 STOL aircraft를 도입했다. 해리 애더홀트 소령은 미 공군장교로 CIA에 고용되었
는데, 그는 Helio Courier에 관한 개발을 감독했다. 이 항공기들은 총탄피격에 유리하고 외딴지역
우둘투툴한 지형의 임시 활주로에 사용이 용이하다고 생각된 것이다. 이러한 Helio Courier의
유용성을 맨처음 적용한 것이 바로 이 라오스의 CIA다.
(STOL : 짧은 이륙 및 상륙의 아주 짧은 통로 필요조건을 가진 항공기를 기술하기 위하여
이용된 기간을 위한 약어. 이-착륙이 짧은 소형 경항공기를 뜻한다. 아래 사진. 잇빨 주)
실제 라오스에서 사용되었던 기종이다. (이것은 '메릴의 습격자'에서도 힌트를 얻는 것)
에어아메리카는 이 헬리오 크루저를 1959년 가을부터 라오스에서 사용했다. 그러나 시작은 별로
좋지 않았다. 이 경항공기의 엔진은 매우 번덕스러웠고, 시동을 걸 때는 가끔 베이퍼락(vapor lock:
내연기관에서 연료의 증기로 인해서 공급관이 막히는 현상 : 위키파이)이 걸리기도 했다. 또 진흙
바위조각 등으로 인해서 랜딩기어가 고장 나기도 했고 방향타도 자주 고장이 나서 개량해야 했다.
그래서 조종실력이 민감해야 했다.
그래서 에어 아메리카가 이 기종을 버리려고 했는데, 이것을 살린 것이 애더홀트 소령이었다. 소령
은 이 기종의 능력을 믿었다. 당시 CIA는 이걸 중단하고 경쟁 항공사인 Bird & Son에 이를 넘기려고
했었다. 그러나 1960년 초 루셀도트와 로날드 스터핀, 그리고 애더홀트 소령이 이 기종을 매우 능숙
하게 조종을 발전시켰고, 잘만 운영하면 괜찮은 기종이란 것을 CIA도 인정했다.
반공주의자에 대한 지원
1960년 8월, 아이젠하워는 언론에서 “라오스는 참 혼란스런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당시 라오스는
내전이 일어났는데, 이는 같은 낙하산부대 내의 내분이었다. 중립주의자였던 지휘관 콩 레와 우익이
었던 포우미 노사반 장군이 충돌한 것이다. 그러자 라오스 공산당 패테트 라오는 콩 레를 지원했고,
포우미 장군 뒤에는 미군과 CIA가 있었다. 당시 태평양함대 사령관이었던 해리 펠트 제독은 이렇게
불평했다. "포오미는 조지 워싱턴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반공주의자다. 이것이 바로 라오스의 슬픈
현실을 말해주는 증거다."
포우미 장군은 자신의 주둔지인 사바나켓에서 비엔티안으로 행군을 준비했고, 그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날카롭게 비판받았다. 당시 미 육군 그린베레가 포우미 장군의 병력에게 강력한 훈련을
시켰고, 에어아메리카도 이 일에 방콕으로부터 보급품을 지원했었다. 또한 포우미 장군의 가까운
친구였던 태국 국무총리는 태국의 엘리트부대인 경찰공중지원부대(Aerial Reinforcement Unit)를
보내 포우미 장군을 돕게 했다.
격렬한 전투 끝에 12월, 포우미 장군은 콩 레를 비엔티안에서 몰아냈다. 밀려난 콩레는 설상가상
소련의 항공기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그는 북부에서 고원지대 Plaine des Jarres (PDJ)로 퇴각한
다음, 지역에 비행장을 건설했다. 소련의 출현은 미 군사당국에 경종을 울렸다. 태평양 함대 펠트
제독은 12월 19일 연합참모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중재에 관해서 심각하게 현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라오스 북부를 포기하거나 아니면 중재를 반드시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자 해군참모부에서도 라오스를 잃어서는 안 된다며 연합참모장에게 그해 마지막 날 이야기
한다. "우리는 태국과 함께 동남아시아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세계가 도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증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기관은 만약 아시아가 공산화된
다면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군이 라오스 중재에 들어갈 준비를 하면서, 연합참모장은 필리핀 수빅 만에서 긴급구성부대를
준비했다. 새해가 되자 미국 전함들은 항구를 나와 북으로 향했다. 그날 아이젠하워는 미국이 중재
는 성공시키지만, 절대로 미군이 전투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때 아이젠하워는
고산족인 몽족(Hmong)을 훈련시켜 무장시키자는 CIA의 제안을 접하게 된다.
The PARU Program
몽족에 대한 프로젝트는 중앙정보국의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고, 이 일에는 CIA 전문가인 제임스
라이어가 맡았다. 그는 2차대전 참전자이면서 한국전이 발발할 때 중앙정보국에 들어온 사람이
었다. 그는 당시 태국에 들어가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에 대비한 태국 경찰병력에 민간인 교관
을 하고 있었다. 특히 변경 태국 경찰초소들이 공산게릴라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오지다
보니 증강병력은 일주일이나 걸렸다. 그래서 긴급을 위한 낙하산 훈련을 제안했다. 그러나 태국
육군은 그러한 전투부대 창설에 굉장히 민감하게 생각했고, 그래서 라이어는 부대의 새 이름을
경찰항공증강부대(Police Aerial Reinforcement Unit: PARU)라고 지었다.
라이어는 PARU 프로그램에 주도적 역할이 된 것을 기뻐했다. 그는 태국남부에 훈련장을 만들어
새로운 최고 엘리트부대를 위해 가혹한 훈련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PARU 프로그램은 자칫하여
CIA의 지원을 중단시킬 위험이 있었다. 이 일의 중재는 CIA 극동사단의 지휘관인 데스몬드 피츠
제럴드가 중재에 나섰다. 1960년 PARU 병력은 400명의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부대규모였다.
Enter Vang Pao
몽족을 위한 무장 프로그램의 핵심은 몽족의 군사적 지도자인 방 파오(Vang Pao)였다. 그는 라오스
군의 지휘관이기도 해서, PDJ에 주둔하는 라오스육군 제10보병대대장이기도 했다. 재주 좋고 야심
많은 방 파오는 미국에게 주목받고 있었다. 1957년 4월, 미국은 방 파오를 마닐라의 정찰병 유격
학교로 보내, 약 6개월간 대-게릴라전훈련을 시켰다.
1959년 말에 라오스에서 전투가 일어나자, 힘이 세진 방 파오는 공산당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어
했다. 몽족은 과거 프랑스에 협조를 했는데, 이로 인해서 많은 핍박과 박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포우미 장군도 돕고, 또한 미 그린베레팀이 PDJ 외곽에서 이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만약 PDJ
가 함락되면 방 파오는 고원지대 주변의 산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방 파오가 포우미 장군의 도움을 원하는 동안 태국의 라이어는 자신의 프로그램을 몽족의 지휘관
까지 팽창시킬 생각을 했다. 1959년 12월 말, 라이어와 방 파오가 만났고, 이 자리에서 방 파오는
공산주의자들과 끝까지 싸우던가 이 나라를 떠나겠다고 말했다. 만약 미국이 무기를 지원해준다면
방 파오는 병력을 1만 명까지 쉽게 끌어올려 싸울 수 있다고 말했다.
몽족 지도자에 큰 인상을 받은 라이어는 비엔티안에서 CIA 극동사단장 피츠제럴드를 만나러 베트남
으로 갔다. 둘은 저녁을 먹으면서 이야기했다. 피츠제럴드는 라이어에게 PARU 프로그램을 라오스
푸오미 장군에게도 해주라고 했다. 푸오미 장군은 라오스 정부군의 반란세력인 콩 레와 싸우고 있
었다. 콩 레는 내란을 위해 라오스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았다. 라이어는 몽족지원에 대한 윤곽을
그렸다. 피츠제럴드는 그 내용을 써서 워싱턴으로 보낼 수 있냐고 물었다.
라이어는 좋은 생각이라면 곧바로 18페이지 분량을 작성해 전송했다. 라이어의 계획은 펠트 제독과
국방부장관도 찬성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미군 자신이 라오스 전투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CIA의 계획은 허가했다.
Backing the Resistance
몽족 1천 명에 대한 훈련과 무장의 전권을 위임받은 라이어는 마지막으로 방 파오를 다시 방문
했다. 그리고 무기 공중투하를 유도했다. 1961년 1월 에어아메리카는 300명의 훈련병을 위한 무기
를 처음으로 투하했다. 그러나 자신의 PARU팀과 다시 헬리콥터를 타고 날아오던 라이어는 몽족캠프
근처에서 불시착했으나 부상자는 없었다. PARU 팀은 3일간의 훈련 프로그램으로 몽족을 교육시켰다.
주로 화기사용과 매복훈련이었다. 라이어는 방 파오에게 300명의 훈련병 중에서 20명을 무전병으로
훈련시키고 싶다고 했다. 이 선발된 사람들은 태국 남부의 훈련소로 이동해서 추가 훈련을 받았다.
몽족은 PDJ 고원지대에 흩어져 살았는데, 이들 간에 통신수단을 만들어 효과적인 작전이 되기를
라이어는 바랐던 것이다. 라어어는 당시 필요했던 헬기콥터와 경항공기를 사용하는 에어아메리카
에 눈을 돌렸다. 그러나 3월에 케네디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콩 레와 패테트 라오
가 비엔티안으로 가는 도로를 점거해 수도를 위협하고 있었고, 라오스의 왕족 수도인 루앙 파람방
또한 같은 상황이었다. 케네디는 미 해병대 헬기인 UH-34 14대를 에어 아메리카에 주는 것을 승인
했고, 이 헬기의 조종사는 미 해병, 육군, 해군에서 자원한 조종사들이 몰게 되었다.
1961년 3월 29일, 조종사 클리어렌스 애베이디가 이끄는 16대의 UH-34 헬기가 에어 아메리카의
새로운 기지가 된 태국 북부 우돈 공군기지에서 40마일을 날아 비엔티안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
헬기들은 파 동에서 라오스 공산당과 싸우고 있던 몽족 부대에 쓰이기 시작했다. 5월 30일, 에어
아메리카의 헬기가 처음으로 추락했다. 두 명의 미국인이 탄 이 헬기는 몽족에게 보급품을 전달
하러 다가 악천후 속에서 추락했다.
파 동에서 밀려난 방 파오는 남서쪽 15km 지점인 파 카오로 본부를 이동했다. 7월에, 당시 미국
안보 고문관인 에드워드 랜스데일 준장이 케네디 대통령의 군사보좌관인 멕스웰 테일러 장군에게
(과거 101사단장) 보고서를 보냈다. 당시 몽족 진영엔 13개의 PARU 팀과, 그린베레 9명이 있었고,
CIA 직원도 9명이 몽족프로그램에 가담하고 있었다. CIA 두 명은 비엔티안서 근무했다. 당시 몽족
은 9천 명의 병사들이 게릴라 작전을 위하여 무장되어 있었고, 약 4천 명을 더 늘일 수 있다 했다.
1965년도 LIFE 잡지에 기고된, 산악 오지에서 현지민 고문관으로 파견된 그린베레 대원.
에어아메리카의 협조 아래 몽족 병력은 점차 증가했다. 산악지형으로 인해 몽족들이 흩어져 살고
있는 것을 잇기 위해 라이어는 여러 지역의 비행장의 체인을 만들고 그것들을 빅터 사이트(Victor
Sites: 나중에 Lima Sites)라고 불렀다. 그 사이트들은 경항공기들이 운항했다. 1961년 4월 윌리엄
앤더세빅이 비엔티안에 도착하자 경항공기 프로그램은 전환을 맞는다. 그의 감독 하에 경항공기
근거지들이 빠르게 확산된다. 앤더세빅은 적당한 지역을 골라 현지민들을 동원해 나무를 자르고
평탄화 작업을 시켜 긴급한 물자를 받게 했다. 그리고 여름이 되자 이 급조 활주로를 통한 몽족
지원은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또한 에어 아메리카는 몽족 전투부대에 들어가고 싶은 자원자들을 각 마을에서 실어다 날랐다.
라이어는 당시 책임 보조로 에드거 M. 뷰엘을 고용했다. 인디아나 주 농부 출신인 뷰엘은 1960년
에 국제자원봉사자의 일원으로 라오스에 들어왔었다. 뷰엘은 일에 능력이 있었다. 부엘은 먼저
몽족의 근거지에 쌀을 투하하는 것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The Diplomatic Track
몽족의 프로그램이 확장되는 동안 케네디는 외교적으로 라오스 문제를 풀 방법을 모색했다.
1961년 6월 비엔나에서 소련 후루시초프를 만난 케네디는 라오스가 ‘독립국이자 중립국’임을
인정하고 돕기를 부탁했다.
1962년 7월 23일, 제네바에서는 ‘라오스가 중립국임을 선언’하는 내용이 조인되었다. 이와 동시에
연합정부가 구성되며, 모든 외국인 병력들은 10월 7일까지 철수하도록 명시되었다. 미국은 66명
의 군사고문단과 참모를 철수시켰고 에어아메리카도 몽족에 대한 물자투하를 중지했다. 이에 미국
정부도 라오스의 공산주의자 모니터를 위한 CIA 직원 2명만 빼고 모두 철수시켜 제네바협정을 지키
도록 했다.
1963년 에어 아메리카의 작전은 급격하게 감퇴했다. 에어 아메리카는 오직 여름에 매달 40톤의
식량만 몽족에게 보급했고 다른 비행은 중단했다. 63년 5월 우돈 공항의 UH-34 헬기도 18대에서
6대로 줄었다. 비행시간도 제네바 협정 전에는 매달 2천 시간이 넘었고 투하도 600회가 넘었었다.
헬기 조종사 패리 캐스터린은 부모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여기는 37명이나 있는데, 할 일이
없어요... 이제 우린 더 이상 라오스에서 비행이 불가능합니다."
협정 파기
CIA의 두 직원은 보기에 너무 조용하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CIA는 명백히 알게 되었다. (제네바
협정을 어기고) 북베트남군 7천 명이 여전히 라오스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오히려 북베트남군은
장악지역을 넓히고 있었다. 그러면서 중립주의자들과 몽족을 공격하고 있었다. 몽족의 탄약 재고는
즐어 들었고, CIA 극동사단장 윌리엄 콜비는 공중보급의 재개를 요청했다. "내 요구는 점차 당연해질
겁니다. 현재 고산지대에서 우리 직원 두 명이 관측을 하고 있고,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본부도 ‘방어목적’이라는 제한 아래 마음 내키지 않으면서 보급비행을
허가했다. 이것은 결국 ‘비밀 재보급작전’이 되어 버렸다.
격렬한 전투
1963년 동안 하노이는 오히려 병력을 더 라오스에 투입했다. 그러자 하노이 정부도 몽족 병력의
증가를 CIA에 허가했다. 몽족은 본부를 롱 티엥 계곡으로 옮겼다. 63년 말이 되자 몽족 부대는 2만
명 수준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게릴라로 활동하면서 월맹군 보급소를 파괴하고, 트럭을 매복하고,
도로에 지뢰를 매설하면서 북베트남군의 증강을 방해했다. 그러자 에어 아메리카도 점차 역할이
팽창됐다.
조종사 캐스터린이 11월 부모에게 보낸 편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 지금 쌀만 나르고 있어요."
1964년 3월 강력한 규모의 전투가 라오스에서 발발되었다. 월맹군과 페테트 라오 군대가 PDJ를
공격한 것이다. 5월 중순이 되자 공산당들은 전략지역을 장악했고, 이미 비틀거리는 연합정부를
와해시키려고 했다.
(잇빨 주: 만약 몽족이 동진해서 북베트남에 들어오면, 북베트남은 그 영토
안에서 아래 위로 잘리거나 바다로 몰린다. 북베트남은 라오스가 매우 걸렸다.)
Search and Rescue
군사적인 중재를 심사숙고 하던 린든 존슨 대통령은 해군과 공군에 정찰기를 띄워 PDJ를 촬영하고
그 내용을 하노이에 보내자고 했다. 그 전갈의 내용은 "문제해결을 위한 미국의 메시지."였다. 6월
6일, 해군 정찰기 한 대가 PDJ 상공에서 격추됐다. 그러나 미군의 정찰구조부대는 라오스에 들어갈
능력이 없었고, 에어 아메리카가 그 임무를 맡았다.
조종사인 찰스 클러스만에 대한 구조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그는 나중에 자신이 탈출했다) 결국
에어 아메리카가 해내야 했다. 그러나 에어 아메리카의 조종사들은 그런 위험한 수색구조 임무를
위해 준비된 상태가 아니었다. 1965년 첫 반년 동안 이런 임무들은 점차 어려워졌다. 당시 미 공군
은 북베트남의 북서쪽까지 폭격 범위를 넓히고 있었다.
에어 아메리카의 헬기, 수송기, T-28는 격추된 미군의 승무원들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민간인 조종사들이 구조 한 건당 1,500달러는 받는다는 루머까지 떠돌았다. 이 이야기는 비엔티안
의 미 공군무관으로 인해 파생된 얘기였다. 그가 라오스에서의 조종사 구조에 관해서 미군조종사
들에게 브리핑을 하면서 공군기지와 항공모함을 돌았는데, 그때 “라오스에서 여러분들은 걱정할
것 없어요. 우리 에어 아메리카 조종사들은 천 오백 달러만 주면 그리로 날아가니까...”라고 농담
했던 말이었다.
물론 이 루머를 들은 에어 아메리카 조종사들은 분노했다. 1965년 6월, 특별히 북베트남 안쪽 먼
곳까지 갔던 두 대의 헬기가 격추되었다. 그러나 그 헬기 안에 에어 아메리카 승무원들이 성공적
으로 구출한 미 공군의 F-4C 팬텀기 조종사 두 명의 타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에어 아메리카
한 헬기 조종사는 이렇게 썼다: "우리가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면서 행동하는 것에, 분명히, 공군은
고마워하지 않았다... 왜 공군은 우리를 1,500달러에 구조를 하는 미친놈들로 만든 것일까. 우린
받은 게 없다. 그냥 속만 아플 뿐."
Not Very Secret
1965년은 ‘라오스의 비밀전쟁’이란 말이 유명해진 만큼 거대한 군사활동이 나타난 해였다. 전쟁은
최고 크기로 확장되었으나 1969-70년이 될 때까지는 미국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제 전쟁
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전투에 관한 내용이 종종 방콕 포스트, 뉴욕 타임즈 등의 신문에 실
렸다.
미 의회도 잘 알고 있었고. CIA Director 리차드 헬름스는 이 점을 지적했다. 그로 인해서 정보국은
자주 자금사용에 관해 의회에 정기적으로 보고해야 했다. 또한 상원의원들이 라오스를 직접 방문
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믿었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싸고 좋게 미군보다
잘 싸우고 있다는 것을.’
CIA는 라오스의 군사작전에 거대한 책임이 있었고, 그 총 책임자는 라오스 미국대사였다. 작가
찰스 스티븐슨은 그것을 “윌리엄 셜리번의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셜리번은 1964년 12월부터
1969년 3월까지 라오스 대사였다. 셜리번은 효과적인 작전이 되기 위하여 이 모든 것을 자신이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냥 쌀주머니만 투하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그걸 잘 몰랐다," 미
국무부 차관이었던 윌리엄 번디의 말이다. 셜리번은 두 가지 예하 상황을 이해해야 했다.
첫 번째,
단편소설 같은 제네바협정의 골자는 라오스가 소련과 연결되지 않도록 하는 의도가 있었다.
두 번째,
미 정규군 지상군이 관련되어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보면, 셜리번과 다음 대사인 맥머트리 가들리는 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우돈(Udorn) 기지의 활동
비엔티안의 미국대사는 라오스 CIA 지부장의 전술내용에 책임이 있었다. 전쟁을 감독하기 위한
최고 본부는 바로 태국의 우돈 공군기지였다. 우돈의 태국군 공군기지 활주로 옆에 위치한 제
4802연합연락분견대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CIA의 라오스 군사작전센터였다. 라이어는 1968년
여름에 이 분견대장이 되었고, 그 이전에는 분견대 대리로 로이드 랜드리라는 사람이 오랫동안
일하고 있었다. (태국에는 우돈과 우'본' 공항이 있음. 가끔 헛깔림. 잇빨 주)
라이어나 랜드리 모두 우돈 ‘333본부’의 비툰 야사와디 장군과 돈독한 관계를 쌓았다. 이 333은
라오스에 파병하는 태국군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이 장군은 개인적으로 라오스와 태국 양쪽 국무
장관과 친분이 있었다. 한 CIA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라오스 프로그램에서 유일한 단 하나의 중
요한 플레이어다."
기상과 전쟁
전쟁 초기는 계절과 관계가 있었다. 건기 시즌이 오면 (10월부터 5월) 북베트남과 패테트 라오는
공세를 취해, 라오스 북부의 몽족과 정부군을 압박했다. 그러나 우기인 몬슨 시즌이 오면 (6-9월)
반공 군사세력이 에어아메리카의 항공력을 이용해 적 지역 깊은 곳까지 공격했다. 상황은 베트남
의 거울과 같았다. 라오스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습관이 하나 있었는데, 보급라인을 확실히 해둔다는
거였다. 그리고 몽족이 처음으로 이 보급라인에 게릴라 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쟁에 자연의 반영은, 서로 적당한 정도의 손실만 주는 이점이 있었다. 1965-66-67년
동안 에어 아메리카의 조종사는 급증했지만 사망자는 딱 11명뿐이었다. 그리고 적의 공격으로
죽은 사람은 오히려 5명뿐이었다.
북베트남의 압력
전쟁의 양상은 1968년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북베트남은 페테트 라오와 함께 참을성 없이 행동
하려고 했다. 그것은 라오스에서의 새로운 대규모 전투로 인도했다. 그들은 건기 시즌에 공세를
시작했다. 3월 중순, 이들은 루앙 프라방 북쪽의 전략적인 계곡을 점거했고, 미 공군이 북베트남
폭격에 사용하던 항법 사이트를 성공적으로 공격했다. 그리고 PDJ 고지대의 강한 거점들에 있던
몽족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1968년 3월 21일, CIA는 ‘국가 특별 정보평가(SNIE)’라는 최고 등위의 법안을 워싱턴에서 상정했는
데, 이는 주로 라오스의 공산당에 대처하기 위한 법이었다. 라오스에 월맹군 35,000명이 존재함에
도 불구하고, CIA의 분석은 하노이가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남베트남으로 향하는 호치민
보급루트이며, 1962년 제네바 협정을 파괴할 의도가 없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다음 행동은 SNIE가 옳다고 평가됐다. 월맹군의 공세는 5월의 몬순이 시작되면서 종료됐다. 몽족은
매우 큰 피해를 입었는데, 약 1천 명을 잃었고 그 중에는 상급지휘관들도 매우 많았다. 들어온 신병
은 약 300명뿐이었다. 그 중 30%는 10-14세 소년들이었고, 다른 30%는 15-16세였고, 나머지 40%
는 30세가 넘은 병사들이었다. CIA 대원 뷰엘에 따르면, 그 중간 연령대는 모두 죽었다고 기록했다.
공세와 반격
몽족의 힘이 줄어들자, 미국은 항공화력과 더불어 인력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1965-68년
사이에 라오스에 대한 미 공군의 출격은 하루에 10-20회가 평균이었다. 1969년에는 하루 300회
출격을 기록하기도 했다.
1969년 우기시즌이 되자, 방 파오는 게릴라전술을 버리고 월맹군 / 패테트 라오에 대해 대대
적인 공세를 발진시켰다. 공중폭격을 증가시키며 PDJ의 적 거점으로 밀고 들어갔다. 이 ‘About
Face’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몽족은 1960년 이래로 PDJ 모든 지역을 손에 넣었고, 1,700톤의
식량과 2,500톤의 탄약, 그리고 640정의 총기를 노획했으며, 25대의 소련제 PT-76 탱크까지
노획했다.
그러나 승리는 잠시였다. 1970년 1월이 되자 북베트남은 2개 사단을 동원해서 잃어버린 거점을
모두 되찾았고, 오히려 몽족의 베이스인 롱 티엥을 압박하기에 이른다. 이때 처음으로 B-52가 적
의 공세를 늦추려고 사용되었다. 당시 라오스 내 월맹군은 67,000명에 이르렀으나, CIA는 여전히
월맹군이 중대한 행동을 할 생각이 없다고 판단했다.
"북베트남 공산당의 최대 목표는 역시 남베트남이다.”
그러나 CIA는 1970년 4월 이렇게 추측했다.
“결국, 라오스는 그들 손에 떨어질 것이다.”
Losing Ground
1971년 몬슨시즌에 몽족의 마지막 대규모공세가 나타났다. 이 공세는 증강된 태국군 자원대대의
조력을 받지않고 했다. 방 파오는 PDJ를 7월에 다시 되찾았고 그곳에 태국포병을 위한 강한 포병
거점을 만들었다. 방 파오의 목표는 PDJ를 건기 때까지 지키는 거였다. 1971년 12월, 북베트남은
이 고원지대의 포병진지에 대해 공격을 개시했다. 북베트남은 탱크와 130밀리 대포를 사용했는데,
이 대포는 태국군의 포보다 사정거리가 훨씬 길었다. 월맹군은 빠르게 PDJ을 다시 되찾았다.
1971년 마지막 날과 1972년 첫 달은 롱 티엥의 몽족 근거지가 굉장한 압력을 받았다. 이 기간에
에어아메리카의 희생도 엄청났다. 12월에만 24대의 항공기가 지상사격에 맞아 불이 났고, 그 중
3대는 추락했다. 그 12월에서 4월 동안 6명의 에어 아메리카 승무원이 라오스에서 사망했다.
라오스 남부의 전투도 심각했고, CIA는 현지민 병사들을 모집, 훈련, 감독하고 보수를 주었다.
CIA가 원하는 것은 특수 게릴라부대였다. 1971년 전략적으로 중요한 볼로벤스 고원에서 강한
전투가 폭발했고, 에어 아메리카는 이곳 병력에서 필수적인 보급품을 날랐다. 그러나 1971년
말 월맹군은 메콩강 동쪽 팍송이란 마을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1972년 4월 24일, 에어 아메리카의 비행작전 부책임자가 텔렉스를 이용해서 모든 승무원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는 우리 생명과 부상이라는 섬뜩한 통행료를 지불했다,"
그는 당시 모든 사실을 재평가하고 있었다. "우리의 작전비행은 바로 포기하지않는 직업정신이다.
우리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장소와 환경에서 작전했다. 외딴 지역, 산악지대에서 현대적인
통신이나 항법장비도 없이 적의 사격을 받으면서 물자를 전달했다. 거기다 날씨와 바람은 수시로 변
했고 우리는 적응해야 했다. 급조 비행장과 랜딩존은 아마도 새로운 사례가 될 것이다." 그는 모두
에게 항상 준비하고 훈련해야 극단적인 상황에 대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Closing Down
같은 시간 CIA는 에어아메리카는 점점 운항이 위험해졌다는 것을 깨달았고, CIA 지부장 헬름스는
이 항공사의 운명을 결정해야 했다. 결국 1972년 4월 21일, 항공작전이 어렵게 되었다고 판단한
헤름스는 본사와 장황한 토론 끝에 에어아메리카에 운항을 중단하고 회사 운영권을 포기하는 것
으로 결정났다. 그러나 에어 아메리카 자체는 동남아시아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존속되었다.
1973년 1월 27일, 파리협정이 조인되면서 미군 병력이 철수하게 되었고,
라오스 역시 수도 비엔티안에서 정전협정에 조인을 하게 되는데, 구성원은
각 계파가 모인 연합정부였다.
이렇게 전쟁은 끝나고 있었지만 에어 아메리카는 여전히 사람들을 잃고 있었다. CIA는 이제
항공회사를 폐업하기로 결정했지만 역설적으로 2년 동안 인적 피해는 더욱 엄청났다. 1972년
4월에 헬름스는 명령을 받아 에어 아메리카를 떠나게 해야 했지만, 오히려 1974년 6월까지
라오스 작전에서 총 23명의 승무원이 사망했다.
1974년 6월 3일, 마지막 에어 아메리카 항공기가 국경을 넘어 태국으로 갔다. 비엔티안에
있던 에어 아메리카 직원은 워싱턴에 이렇게 통보했다. "... 라오스의 에어아메리카는 아무런
사건 없이 떠났다. 수년간 작전했던 그들의 목구멍에는 무언가 한 덩어리가 삼켜졌다... 우린
라오스에서 죽거나 실종된 사람들에게 슬퍼하며, 오늘을 즐길 수 없음에 유감이다."
총 100명의 에어 아메리카 승무원이 라오스에서 죽었다.
우돈 공항의 본부는 6월 말에 폐쇄되었다. 베트남에서의 작전은 사이공이 함락될 때인
1975년 4월까지 계속됐다. 철수한 에어아메리카는 태국에 일단 머물렀으나 결국 해산
되었다. 회사는 1976년 6월 30일 완전히 문을 닫았고, 그리고 2천만 불 이상의 자금은
미국으로 귀속되었다.
A Distinguished Record
CAT/Air America는 CIA를 위하여 놀랍게 일했다. 숙련된 조종사들은 비밀작전에서 요구되는
모든 것을 아시아에서 해냈다. CIA는 58개의 항공망을 만들어냈고, 이를 존속시킨 것은 본질
적으로 에어 아메리카였다.
라오스전쟁 동안, 에어아메리카는 가장 위험하고 필수적인 작전들을 해냈다. 이 항공사가
군사부대처럼 조직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목숨을 걸고 수년간 작전했다. 어떤 조종사는
10년을 넘게 여기서 활동하기도 했다. 적의 사격 등의 환경에서 조종사들은 비범한 비행과
결심으로 행동했다.
영화란 것은 진실을 그르치거나 오도할 확률이 존재한다.
William M. Leary - 조지아 대학 역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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