駐越 한국군에 중국인
첩보 부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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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속초에서 배를 타고 러시아 자르비노 항구를 거쳐
중국 연변으로 놀러 간일이 있었다.
오후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항해하는 배안에서
옆자리의 이 선생이라는 중국 화교와 친해졌다.
중국 식당을 경영하다가 딸에게 물려주고 은퇴한 이 선생은
용돈벌이 삼아 중국을 오가며 작은 무역을 하고 있었다.
하얼빈으로 가는 중이라는 이 분과 훈춘에서 식사를 겸해
한잔 한 인연으로 그 뒤에도 한국에서 자주 만났었다.
작년에 작고하셨지만 그 분은 나에게 아주 흥미론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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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서울 한성[한성]화교학교 동창이 있었는데 이 친구를
30년이 다 흐흔 90년 말에 우연히 만났었다.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나타났냐고 하니까 그는 주저하다가
그간 무엇을 했는지는 말해 주었다.
사이공의 주월 한국군 정보 부대에서 정보원으로 일하다가
베트콩에게 납치되었다는 놀랄 비화였다.
납치후 그는 중국으로 보내졌다
중국에서 12년간 교도소 생활을 포함해서 수형 생활을 하다가
타이완에 돌아온 것이 80년대였다.
그 친구로부터 자주 만나면서 여러 이야기를 했는데
이 선생의 그 중 몇 가지를 기억하고 있다가 나에게 들려주었다.
나는 그 흥미로운 이야기를 내 노트에 기록하여 두었지만
울프 독 블로그를 시작하면서도 거기에 대한 글을 쓰기가
주저되었다.
군 복무시 월남 참전 선배들로 부터 월남에 북한 공작원이
들어와 한국군 지역에 돌아 다니며 공작을 하고 베트콩들과
사진을 찍은 것이 입수된 바 있다.
이 사진은 주월군에게 배포되어 이 자를 발견 즉시 체포하거나
사살하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말을 들은 일은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국적이 타이완인 사람이 한국군에
근무 할 수가 있을까?
군에 있을 때 월남전에 참전한 선배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비슷한 이야기도 들어 본 바도 없었다.
들은 풍월을 사실인양 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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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며칠 전 TV를 보다가 이 선생이 들려준 그분의
동창 이야기는 능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라는 판단을 했다.
TV는 한국전에 한국 거주 화교들이 참전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장개석의 타이완[자유중국]과 이 승만의 한국 정부는 북한을
지원하여 참전한 중공군에 대항하는 중국인으로 구성을 한
합동 첩보부대를 창설했다.
TV는 이 한중 함동 첩보 부대가 SC 부대라는
부대 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주었다.
주로 부여된 임무가 중공군을 상대로 하는 전선 선전 활동,
정보 수집, 그리고 중공군 포로들의 취조와 포섭 공작이었다.
한국에서 활동하던 중국인 첩보 부대 총원은 400여명이나 되었다.
나는 이 보도대로 한국전쟁에서 한국과 타이완사이에
정보 협력관계가 있었다면 내가 들었던 월남전에서의
중국인 정보원의 활동도 능히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선생이 전하는 말도 분명 신빙성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던 것이다.
대륙에서 단 2년의 전투 끝에 어이없게도 대만으로
쫓겨 간 장개석은 절치부심하며 본토수복을 꿈꾸었다.
철저한 내부 숙청으로 부정부패를 쓸어냈고 보안부대의
강화로 정부와 군의 스파이들을 청소해냈다.
여기에 더해서 대만의 경제를 개혁한 것이 성공해서
국민들의 생활수준도 나아지기 시작했다.
[본토에서 구축함으로 실어온 90억 달라 규모의 중국
중앙은행 보유금도 큰 역할을 했다.]
한국 참전 대만 정보부대의 활약으로 15,000명이나 되는
중공군 포로가 중국 아닌 대만 행을 택한 것도 장 개석으로
하여금 자신감을 가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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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 내전 때 무더기로 모 택동군에게 항복하던 장 개석군의
무참한 모습을 생각해 보면 커다란 반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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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에 간 포로들은 정부로부터 정착이나 취업에 여러 편의를
받아서 잘 정착을 했었고 이중에 부자가 된 사람이 많았다.
이들이 나이가 들어 중국 본토 고향을 방문하고
돈을 펑펑 써대자 고향에서 같이 출전하여 용감히 싸우고
부상까지 당하고 돌아온 중공군 노병들의
가난한 삶과 비교되었다.
중국 노병들은 격노해서 불평했다.
“ 조국을 배신한 매국노놈들은 저렇게 잘 살고 목숨을 내놓고
싸운 애국 열사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 현실이 통탄스럽다.“
라는 작은 소동들이 있었다.
그러나 대만으로 간 포로들은 대만 정보기관의 철저한 감시와
수사를 받아 이중 사상이 의심되거나 과거 범죄를 저지른
자들 2,000명 가까이가 처벌을 받았다.
- 이들 중에 과거 장개석 군에서 복무하다가
사고를 치고 - 상관 살해-모 택동 군으로 도망쳤다가
UN군의 포로가 되고 다시 타이완으로 돌아 왔다가 처벌받은
한 엉뚱한 병사의 이야기는 센세이셔널하게 보도되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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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신감을 바탕으로 장개석은 본토 수복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여러 비밀 작전을 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한국 정보기관과의 긴밀한 유대였다.
6.25전쟁을 매개로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맺어진 한국과
타이완의 정보기관 사이는 상당히 긴밀했었다.
그 예를 들자면 바람이 서쪽으로 부는 계절이면 타이완
정보부대가 한국군 수원 비행장을 빌려서 중국 쪽으로
비라 풍선을 날려 보냈었다.
대륙의 연안기습에 나섰던 대만 특수 부대가 귀환 길에
모선과 독킹에 성공 못하자 무조건 한국 영해로 들어와
표류하다가 구조 된 일도 있었다.
그리고 대만 공군의 비밀 비행대 흑묘[black cat]부대가 운용하던
U-2 고공 정찰기가 전북 군산 미군 비행장에서 출격하여 중국
동북지방 상공으로 정찰 비행을 날아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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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생 말씀은 타이완 대사관 소속 정보관과 한국 관계자는
정기적인 미팅을 주로 지금 프라자 호텔 뒤에 있었던
화교 거리 옆에 있던 음악 다방 대호에서 가졌다고 했다.
이 미팅에서 월남에 5만 병력을 파견했던 한국군은 타이완에
월남 파견 한국군 정보 부대에서 일할 중국인 정보 요원을
파견해주기를 요청했다.
타이완은 이에 응하고 한국어가 능숙한 화교 청년 중에서
똑똑한 청년들을 선발하고 훈련시켜 타이완 군 소위로
임관시킨 후 한국에 파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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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한국군에 특수 군속으로 비밀 입대했다.
이렇게 선발된 화교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이들은 다시 한국군에게서 파월을 위한 특수 훈련을 받고
월남으로 보내졌다.
※훈련장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양평 근처라고 하는데
그 무렵의 파월병력 훈련장은 화천의 오음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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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수미상의 화교 부대는 월남 사이공과 각처로 흩어져서
첩보 활등을 개시했다.
월남에는 중국인들이 대단히 많았었고 이들 중에 상당수가
베트콩에 가담하여 월남 정부를 대항하여 투쟁했다.
월남에 파견된 화교 첩보원들은 이들 재월 중국인을 상대로
첩보망도 구축하고 정보도 수집했었다.
그러나 월남에 파견된 화교 정보대원 청년들의 운명은
순탄하지가 못했다.
정보 대원중 두 명이 정보 활동하다가 베트콩들에게
의심을 받고 납치되었다,
그 중 조 씨라는 청년은 월남 사이공시의 중국인 거리
[초론 구]에 침투했다가 베트콩에게 발각되어 체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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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 씨라는 다른 청년이 피납 된 곳은 어느 곳인지
이 씨는 말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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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북베트남을 걸쳐 중국 대륙으로 끌려갔다.
중국의 정보 당국은 두 사람은 엄중하게 심문했다.
두 사람은 재판에 앞서 전향을 강요받았다.
중국의 집요한 회유에 지친 호 씨는 전향서에 사인하고
전향했다.
즉 중국의 공민이 되어 중국에 충성을 다 바치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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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 씨는 꿋꿋이 버티었다.
결과 그는 12년의 형을 선고 받고 교화소에서 형을 살았다.
호 씨는 중국 공민이 되고 나서 중국 당국의 강권에
결혼까지 했다.
조 씨는 12년의 형을 마치고 동북지방의 어느 농장에서
생활하다가 대만으로 귀환했다.
그가 타이베이의 공항에 도착했을 때 타이완 정보기관에서
보낸 벤츠가 나와서 그를 영접했다.
그는 자신이 타이완 군의 장교로서 결코 조국을 배신하지도 않았고
중국에 협조하지 않고 교도소에서 12년이나 수형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여러 증거를 내놓으며 낱낱이 증명했다.
타이완 정부는 그의 투쟁 공로를 인정하고 상당히 거액인
위로금과그 사이 밀린 월급을 그에게 지급하고
연금도 지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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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절한 호 씨는 대만으로 돌아 갈 수도 없고 물론
아무런 보상도 못 받았다.
그는 한국인들이 많이 오는 칭타오로 이주하여
음식점을 하고 있다.
한편 중국에서 교화소 생활을 했지만 타이완 정부로부터
크게 포상을 받은 조 씨는 얼마 전 다시 중국으로 가서
하얼빈에서 식당을 하면서 한국과 대만을 오가는
노후 생활을 유유자적 즐기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 조금 이상한 삶이지만 중국이나 대만이
그의 거주에 대해서 더 이상 문제 삼지를 않고
연금 생활을 하는 그 자신도 생활비 비싼 타이완보다
중국이 더 생활하기가 편해서 택한 길이라고 한다.
아시아 각국에서 화교가 그 나라의 경제권에 크게
진출한 사례가 없는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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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화교들은 한국이 화교들의 경제 활동에 너무 제약을
가하는 면이 있었다고 불만을 말하기도 한다.
그런 불만이 있을 수 있는 화교들중의 상당수가
한국의 격동하는 역사와 같이 운명을 같이 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사는 화교들은 병역의 의무가 없다.
그러나 동작동 국군묘지에 잠든 한국 참전 화교들만
세 명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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