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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의 일기 (1) - 동성훈장|베트남전쟁

구름위 2013. 11. 25.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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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해병의 일기 (1) - 동성훈장

 

동성훈장 이야기

 

By; Bob Neener

 

    (해병9연대 2대대 골프 중대. 1965년 9월 13일)

 

다낭에 상륙하는 미 해병대. 사진 맨 아래 두번째 주인공이 사용하는 로켓발사기가 나와 있다.

 

 

우리는 베트남에 있을 때 많은 마을들을 점령하고 주둔했다.

이 점거 프로그램은 참 좋은 것이었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1965년 이 프로그램은 중요 지점의 마을을 점거하는 것으로, 미군은 군사적인 성취도를

높이고 베트남 정부는 시골까지 마을을 보호하고 영향력을 넓히는 일석이조였다. 농부들

은 자신의 가족을 보호하고 또한 자신의 논과 수확물도 보호받고 싶어 했다.

 

이 프로그램의 문제는, 그 많은 마을을 점거하기엔 보병이 모자랐다는 것이다. 우린 며칠

혹은 일주일 동안 마을에 머물면서 일대를 주야로 수색해서 베트콩들을 찾아 없애주었다.

그러나 떠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이런 문제를 완전히 해소하기 위해서는 베트남의

모든 마을을 동시에 점거해야 했을 거다.

 

그 대신에 우리는 베트콩을 추적하며 마을과 마을을 이동했고, 그때 그들을 퇴치했다고 믿었

으나 베트콩들은 다시 돌아와 우리 등 뒤에 섰다. 많은 시간 우린 들어가는 마을이 전에 왔던

마을임을 깨달았다. 거기에서 유혈이 있었고 친구들을 잃었다. 안 트락(An Trach) 지역도 내

기억에 잊혀지지 않는 뜨거운 지역이었다.

 

1965년 9월 13일, 해병3사단 9연대 2대대 골프(G)중대는 안 트락에 들어갔다.

 

내 생각에 우리 2대대는 마을의 삼각지대를 모두 점거했다고 생각한다. 안 트락 / 옌 네 /

레 손, 이 세 마을은 삼각형을 이루며 지형에 있었다. 그냥 평범한 농촌과 논이 지형의 대표

적인 모습이다. 안 트락과 레 손은 모두 송옌강 서쪽에 있었고 서로 1마일 정도 떨어져 있었

다. 옌 네는 서쪽 1마일 거리 철도 근처. 옌 네에는 가톨릭교회 뾰족탑이 나무 위로 솟아 있어

수백 미터 거리에서도 보였다. 안 트락은 이 1마일 중간에 있다. 세 마을은 55고지란 곳에서

3마일 다낭에서는 10마일 거리다.

 

우리 소대는 지휘소를 회반죽으로 만들어진 오래된 교사(schoolhouse)에 잡았는데

작았지만 정말 좋은 지휘소CP였다. 상당히 많이 이용했다. 당시는 몬순 기간으로

폭우가 쏟아지고 그친 늦은 오후에 그 마을에 들어갔다.

 

9월 13일 아침, 우리 소대장 찰스 셔우드 중위는 소대급 주간 정찰을 한다고 말했다.

안 트락에서 시작해 논을 따라 다른 삼각형 다른 두 마을을 들러 돌아오는 것이 행로

였다. 거의 원을 그리며 도는 꼴이 된다.

 

우린 오전 10시에 출발해 저녁 5시에 들어올 것으로 예상했다. 첫 번째 이동로는 아무 일이

없었고 우린 왼쪽으로 틀어 옌 네로 향했다. 거기서 우린 우리가 가는 쪽 앞 숲에서 저격수

사격을 받았다. 논들에는 가끔씩 나무들이 뭉친 지역이 있었다. 결국 우린 엄폐하면서 가기

위해 나무들이 있는 안쪽으로 들어가서 이동했다.

 

이어 대나무들이 자라 있는 개활지를 통과하는데 베트콩 2-3명이 우리를 향해 총을 쐈다.

앞으로 움직이자 저격수 총알이 더 날아왔고 이번에는 총알이 매우 가깝게 날아왔다. 논을

횡단하는데 우리 분대장이 저격수 한 명을 발견했고 그가 도망치자 뒤에서 45구경 권총 딱

한 발을 쏴서 등을 맞췄다. 45구경 권총은 한 방이면 사람을 쓰러트린다. 그만큼 예비로 갖고

있기에 좋은 총은 없었다. 그때 난 죽은 베트콩을 처음으로 직접 목격했다.

 

(당시 난 베트남에 온 지 2개월 반이 지난 상태였고, 적에게

쏘기는 쐈으나 맞는 걸 본 적이 없고 항상 가보면 도주했다.

그래서 사격의 위력을 본 적이 없었다)

 

죽은 베트콩은 나보다 어린 소년 같았다. 그러나 더 생각할 필요 없었다.

그는 죽은 적이었고, 오직 좋은 적이었다!

 

(He was just a dead enemy, the only good enemy!)

 

우린 옌 네를 향해 계속 전진했고, 우린 검은 파자마에 AK-47을 들고 우리 앞을 뛰어가는

사람을 몇 명 목격했다. 그들이 뛰어가는 방향은 우리 다음 목표인 옌 네였다. 그런데 당시

“먼저 쏘기 전에 쏠 수 없다,”는 교전수칙이 강제적으로 실효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을

봤어도 명령 없이 발포할 수가 없었다. 이 수칙은 오류였음이 나중에 증명된다.

 

1965년 7월에 발효된 이 교전수칙은, 미군이 남베트남군에게 오인사격하는 걸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사실 아군에 대한 오인사격은 전쟁에서 수도 없이 일어난 추한 부산물이고,

이를 위해 위에서 만든 이 교전수칙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특히 미군은 이 수칙

으로 힘들어했다. 이 수칙은 오히려 적에게 유리했다.

 

30분이 지나, 이번엔 다른 무장한 베트콩 무리가 논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게 보였다. 이번에

셔우드 중위는 그들에게 M-79 40밀리 유탄 두 발을 쏘라 했다. 그들은 분명히 AK-47을 들고

있었고 반시간 전에 우릴 쏜 놈들 같았다. 그러므로 소대장은 이미 그들에게 공격을 받았고

그게 응사라고 결심한 듯하다. 교전수칙을 면밀히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비무장지대 근처를 이동하는 미 해병3사단 병력. 왼쪽 앞에 로켓발사기가 보인다. 소대 공용화기였다.

 

M-79를 쏘자 베트콩들은 즉시 우리 앞을 횡단하던 걸 중단하고 사라져버렸고, 우린 작전을

다시 재개했다. 우린 옌 네 부근에 도착했고 삼각형 서쪽 끝에 왔고 남쪽으로 가다 다시 동쪽

레 손으로 가게 되었다. 옌 네는 우리 왼쪽이었고 기다란 가톨릭교회 첨탑이 보였다.

 

거기엔 자연적으로 형성된 관계수로 도랑이 숲과 평행으로 이뤄져 있었고 교회는 거기서 90도

방향이었다. 소대 전체가 그 도랑에 도착했을 때, 적은 일제사격을 시작했다. 우린 우리 전방,

옌 네 남쪽을 향해 소총과 기관총을 응사했다. 소대는 모두 도랑으로 들어가 사격했고 M-60은

가장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쐈다. 이때 60사수가 총에 맞았고, 조수가 기관총을 이어받는 과정

에서 또 총에 맞았다.

 

밥 레임케와 나는 3.5인치 로켓팀이었고, 소대장 셔우드는 우리에게 적 기관총을 잡으라고

명령했다. 레임케와 나는 사격을 위해 도랑에서 뛰어나와 풀밭으로 달렸고 오른쪽 앞 마른

땅에 도달했다. 우린 로켓 후폭풍이 걸리지 않도록 소대와 이격해야 했다.

 

(3.5인치 로켓포는 무반동 화기고 양쪽이 뚫려 있다. 스위치를 당기면 전기식 점화로 1/10

볼트 전기가 흘러 11파운드의 로켓이 발사된다. 로켓을 쏘면 로켓추진에서 나오는 후방폭풍

은 150도 각도로 분사된다)

 

난 사수가 아닌 장전수였다. 내가 원래 사수였기 때문에 레임케는 목표와 거리에 대해 나와

의견을 교환하면서 사격했다. 우리가 나오자 우릴 향해 사격이 쏟아져 소총탄들이 마구 날아

왔다. 우린 일단 엄폐했고 베트콩들은 우리가 다시 이동해 모습을 드러낼 때를 기다렸다. 우린

적 기관총이 어디 있는지 몰랐다. 그래서 상황을 보려고 긴 코끼리풀을 통해서 관측했다.

 

길이 하나 있었고 옌 네의 끝이었으며 마을은 우리 왼쪽 앞 300미터에 있었다. 작은

초가집이 여러 개 모여 있었고, 거기서 100미터 거리에 교회가 있었다. 기관총은 분명히

총알이 날아오는 앞 어디엔가 있었다. 총알은 사방을 때렸고 적은 우리 옆구리에 있었다.

 

우리 눈에 오른쪽에 오두막은 또렷히 보였으나 조용했다. 교회 첨탑도 보였고 그 뾰족한

종탑은 저격수에게는 최고의 위치였다. 그러나 거기도 조용했다. 아무 이유 없이 그 교회

첨탑을 로켓으로 날려버릴 수는 없었다. 우린 왼쪽 앞에 있던 오두막을 조준하기로 했다.

 

로켓팀마다 총 여섯 발을 가지고 있었는데 세 발은 고폭탄, 세 발은 백린탄WP이었다.

알루미늄 깡통에서 로켓탄을 하나 꺼냈다. 로켓팀은 한 발을 꺼내서 휴대하고 나머지는

군장의 깡통에 넣고 있다고 필요하면 꺼내 썼다. 난 고폭탄 로켓을 하나 꺼냈다. 가지고

다닌 지 한 달이나 지난 거였다.

 

우리 앞의 점토로 된 오두막을 먼저 조준했다. 숲 앞에 오두막 몇 개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점토와 회반죽이 되어 있었다. 생각해보니 로켓이 문이나 창문으로 날아갈 경우 집 밖으로 나

가서 터질 것 같았다. 회반죽이 된 가옥은 분명히 다른 오두막에 비해 소총탄의 방호가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라임케는 내 생각과 조금 달랐다. 문이나 창문을 맞출 정도로 정확히 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목표 거리에 관해서 나와 의견을 나누었는데, 그는 300미터였고 난 275미터 정도라고 생각

했다. 항상 그랬다. 라임케는 맨날 나와 사거리가 틀리다. 동기라서 두들겨 팰 수도 없었고,

쏴보면 항상 서로가 주장한 사거리 중간이 맞았다. 

우린 275로 합의를 보았고 라임케는 마그네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난 탄을 빼서 구리밴드에 모래 같은 게 없나 닦았다. 이어 다시 넣고 라임케가

방아쇠를 당겼으나 발사되지 않았다. 불발탄(DUD round)이었다. 결국 우리 위치만 드러났고

강력한 사격이 다시 날아왔다.

 

우리는 오른쪽 풀이 긴 곳으로 기었다. 기어가서 난 새로 백린탄을 하나 꺼냈다. 고폭탄의

구리밴드에 문제가 있을 것 같기도 했고, 마구 불살라 버리는 백린탄의 위력이 더 좋을 것

이라 생각했다. 백린탄은 대인탄으로 매우 살벌하다.

 

결국 그걸 넣고 다시 격발했다.

그러나 다시 DUD, 발사되지 않았다.

 

이제 큰 문제였다. 결론적으로 문제는 우리가 가진 것이 DUD Rocket Launcher란 뜻이다.

아마도 마그네토(고압자석발전) 스위치가 고장 난 것 같았다. 매일 오후 비가 왔고, 우린

매일 밤 그걸 청소했었으나 베트남의 몬슨 기후 끔찍한 습도가 원인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콩들에게 주목받고 있었고, 결국 우리는 도랑을 향해 최대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라임케가 먼저 뛰고 내가 뒤따라 뛰었다. 도랑 끝에 도착할 무렵 적 기관총이 우릴 따라오기

시작했고 이어 모든 적 화기가 불을 뿜었다. 우리가 가장 선명한 미군 타켓이었고 그건 정말

영화와 같았다. 우리 뒤로 거대한 총알무리가 땅을 때리고 있었다.

 

라임케가 도랑으로 다이빙했고 나도 뒤를 이었다. 총알 하나가 내 머리 바로 옆을 지나가면서

핑 소리를 냈고, 윙 소리가 하나 끝나면서 내 방탄조끼 어깨에 한 발이 따닥 하고 때렸다. 난

도랑으로 다이빙했고 그걸로 인해 정말 죽을 뻔했다. 약간 자세가 틀렸으면 내 머리가 쪼개질

뻔했다. 도랑에 들어와 쳐다보니, 250미터 앞 점토 오두막 오른편에 토루가 하나 있고 연기가

나는 적 기관총이 있었다. 조금 전에 우리가 로켓을 쏘려고 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이제 모두는 정말 미쳤다. 소대 전체가 도랑에서 꼼짝도 못했고 부상자를 후송시켜야 했다.

우린 명백한 타켓이었고 우리 로켓발사기는 멍텅구리가 됐다. 우리도 상대가 어디 있는가

알았지만, 필요한 것 로켓발사기의 ‘작동’이었다. 그러자 라임케가 소대 뒤로 가서 2소대

로켓발사기를 빌리기로 했다. 그 기관총을 박살내고 싶었던 거다.

 

우린 도랑 뒤로 해서 가야만 했다. 거리는 30미터밖에 안 됐지만 온통 진흙이라 발이 깊게

빠졌다. 웅크리고 새로 발을 옮길 때마다 힘을 써야 했다. 결국 우린 완전히 일어서서 전통

적인 해병대 저속구보로 뛰기 시작했다. 적의 모든 총이 우릴 향해 발포했고 총알이 우리

사방에 떨어졌다. 그러자 셔우드 중위가 엎드리라고 고함을 질렀다. 뒤에 도달하자 다시

도랑으로 뛰어들었다. 야단법석이었지만 우린 새 로켓발사기가 얼마나 필요했는지.

 

셔우드 중위는 우리 의견에 그린라이트를 주었고, 로켓발사기를 가지고 있던 사수는

우리에게 발사기를 넘기면서 매우 이상하게 기뻐했다. 이제, 다시 총알 안 맞고 되돌아

가야 했다. 적 기관총망을 부수고 싶었다.

 

그런데 다시 목표 거리에 관해 라임케와 내 의견이 달랐다. 난 225미터로 생각했으나

라임케는 250에 가깝다고 했다. 난 그냥 225로 쏘자고 했다. 만약 사거리가 모자라도

백린탄을 쏘면 앞에 떨어져 연기가 나면서 기관총 사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

이었다. 그 시간을 이용해서 2탄을 쏘면 된다는 거였다.

 

결국 라임케가 푹 일어서더니 조심스럽게 겨냥하여 로켓을 발사했다. 거대한 ‘꽈릉!’하는

소리가 나면서 로켓이 발사됐다. 다음 일어날 일은 우리도 상상이 안 됐다. 일단 봤다....

라임케 말이 옳았다. 로켓은 25미터가 모자라 앞에 터졌다. 싸울 틈도 없었다. 우린 다시

아까 그 풀밭을 향해 뛰었고 이때 난 두 발을 휴대했다. 하나는 백린, 하나는 고폭탄.

 

우리가 쏜 백린탄으로 인해 연기가 앞을 가리고 있었고, 다시 그 장소로 가 백린탄 연막이

사라지기 전에 고폭탄을 장전하고 라임케가 발사했다. 눈이 엄청 커졌다. 정말 ‘direct hit’였다.

중공제 30기관총 하나가 박살이 나서 조각이 되었고 베트콩 두 명이 죽어 있었다.

 

우리가 기관총을 잡자 전투는 빠르게 종반으로 치달았다. 이 모든 일이 걸린 시간은 45분

이었으나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기관총을 잡자 공중에 있던 세스나 정찰기가 무전

으로 알려왔다. “베트콩 21명이 마을 뒤로 도주하고 있다. 155밀리 포로 잡아보겠다.”

 

우리는 지휘소에 저녁 7시 30분 도착했고, 라임케와 난 즉각 지휘소로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지휘소에 들어가니 소대장 셔우드 중위 옆에 중대장 오스본 대위가 탁자에서

보고서를 쓰고 있었다. 우린 차렷을 했고, 그러자 셔우드 중위는 왜 그때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냐고 물었다.

 

우리가 2소대의 로켓발사기를 얻으려 뛸 때,

소대장은 분명이 ‘명령’이라면서 엎드려 엄폐하라고 했었다.

우린 명백히 그 말에 따르지 않았다.

 

셔우드 중위가 “만약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라고 말할 때

 

중대장 오스본 대위가 말을 잘랐다.

 

“하지만, 너희 소대장은 너희 둘에게 은성훈장을 상신했다.”

 

중대장은 축하한다면서 소대장과 함께 우리 세 명에게 그만 나가보라고 했다.

나와서 셔우드 중위는 명령에 따르지 않았을 때 정말로 화가 났었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한 전투행위는 칭찬받아 마땅하다면서 악수를 해주었다.

 

*** 난 자랑스럽게 동성훈장을 탔다. 원래 은성훈장으로 올렸으나, 사령부는 우리가

본래 임무를 했던 것이란 이유로 한 단계 낮추었다. 그러나 내 생각에 동성훈장이 된

것은, 기관총을 두 번이나 시도해서 잡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둘 다 참 이상한 경험이었다. 로켓은 교전에서 거의 쏴보지 못했다. 그 전투 두 달

전에 두 개를 쏜 것이 전부였다. 항상 좌절했던 것이, 쏘려고 앞으로 나가면 항상 뒤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라임케와 나는 이 상황을 둘 다 게임처럼 즐겼다.

우리가 볼을 던질 차례라고 생각했다.

우린 사실 공포로 인해서 탈진지경이었다.

그러나 그게 내 일이었고 우린 훈련받은 대로 했다.

 

1965년 9월 13일,

부상자는 5명이었으나 전사자는 없었다.

 

이후 난 3연대 3대대 리마중대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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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다낭 근처의 한 미 해병 소총소대. 영화 풀메탈자켓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