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해병의 일기 (2) - 45 + 수류탄

구름위 2013. 11. 25.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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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의 일기 (2) - 45 + 수류탄

 

 

이 글의 모든 사진은 미 해병대 베트남전 사진입니다...

 

 

수류탄 사고

 

다낭 외곽 1번국도상의 송 옌 강의 교량.

 

1965년 7월...

 

이 시기에 해병9연대 2대대 대대본부는

다낭 서쪽 541번 국도 상의 327고지 남쪽에 있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베트남 최대의 쓰레기더미가 있었다.

 

골프(G) 중대는 3일 동안 고무보트를 타고 강변정찰을 끝내고 후방으로 빠져

2일간의 휴식(R&R)을 하게 되었다. 그 휴식 후에는 다낭 남쪽 1번국도 상의

송옌 교량의 경계임무 24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송옌 강은 우리의 식수원이

되는 곳이기도 했다. 교량 아래와 북쪽에는 공병이 설치한 거대한 정수 장치가

24시간 가동되고 있었다.

 

그곳엔 교량 양쪽에 벙커가 하나씩 있고 벙커마다 남베트남 군 3명씩 들어가 있었다.

그 벙커 위쪽에는 50기관총이 장착되어 있고, 그 밑에는 비교적 큰 거주공간이 있다.

해병은 이곳에 임시 임무였고 그래서 주거공간 없이 붉은땅에서 지내야 했다. 교량은

길이가 100미터고 폭은 철도교량처럼 만들어져 좁았다. ‘I'빔 철골에 나무로 된 널빤지

통로가 있었다. 다리엔 60와트 전구들이 양쪽에 켜져 있어 마치 크리스마스트리 같았다.

 

내가 소속된 3소대는 교량에서 1일 주야 근무로 투입되었다. 소대는 두 개로 나뉘어

교량 양편에 자리했다. 우리는 주간에 다리를 통과하는 베트남인들의 신분증을 검사

했고, 밤에는 통과가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3.5인치 로켓 사수로 3인 팀은 교량 남쪽

벙커 근처에 있었다. 낮에는 헌병 역할을 했고, 벙커의 남베트남군은 모두 부사관들

이었다. 그 부사관들은 보기에 전투경험이 많아 보였다.

 

그들은 친절했고 우리가 같이 있는 것에 기뻐했고 정말로 환영했다. 오후 4시 30분,

민간인 통행의 거의 줄어들었고 벙커의 베트남군들은 같이 마시자고 우리를 초대했다.

그들은 거기에 좀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미군 간이침대와 모포, 판초, 단독군장, 헬멧

등을 가지고 있었고, 미제가 아닌 것은 그들의 미소와 럼주 병뿐이었다.

 

술병은 눈에 확 뜨였다.

 

난 벙커로 들어가 간이침대 하나에 앉고 세 명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럼주를

주면서 코카콜라도 하나 주었다. 코카콜라는 아마도 한 달 만에 먹는 것이었다.

좋은 시간을 보냈고 넘주의 효과는 천천히 나타났다. 우린 모두 웃었다.

 

2차대전 이후 폐기된 병기는 베트남에 엄청 흘러들어갔다

 

남베트남군 한 명이 나에게 2차대전 때 쓰던 ‘그리스건’이라 불리던 M3A1을 건네주었다.

난 전에 그걸 손에 잡아본 적이 없었다. 마치 열 살 때 크리스마스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내가 그 그리스건을 만져보고 있는데, 한 남베트남군이 내 45구경 권총을 지시하기에 난

커버의 조임을 풀고 권총을 건네주었다. 세 명 모두는 콜트 45구경에 관심이 매우 컸다.

왜냐하면 그들은 권총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오래된 콜트 38구경 리볼버였기 때문이다.

 

우린 마시고 즐거워했고 어두워지자

이제 벙커를 떠나 로켓팀으로 돌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돌아와 난 땅에 눕고 군장에 머리를 베고 잠에 들었다.

 

자정에 동료가 나를 깨우면서 시계를 보여주었다. 일어났을 때 난 여전히 럼주의

효과로 인해 약간 어지러웠고 그때 내 45구경 권총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난 그

남베트남군이 그걸 훔쳐갔다고 생각했고 화가 치밀었다.

 

난 탄띠에서 M-29 수류탄을 꺼내 안전핀을 뽑고 벙커 안으로 소리쳤다.

 

"where the FUCK's my .45 - you Fucking Gooks."

 

남베트남군 3명은 자다가 내가 수류탄을 들고 있다는 것에 놀라 간이침대에서

튀어나갔다. 동료가 벙커로 따라 들어와 내 수류탄을 움켜쥐었다. 그가 베트남군

한 명을 벙커 밖으로 끌어냈다. 내 동료는 현명하게 나를 진정시켰다.

 

문제가 생겼다.

 

안전핀이 어디 있지?

 

정말 정신이 없었다. 벙커에 들어가기 전에 핀을 뽑았었다. (사실 수류탄을 쓰려고 하면

누가 핀을 어디 정확히 두겠는가) 여전히 수류탄은 내 손에 있었고 동료는 사방을 기면서

그 염병할 안전핀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날은 무월광이고 교량의 전구빛은 길게 그림자

를 그리고 있었다. 핀을 찾기에 충분한 조명이 아니었다.

 

한 15분 정도 되었을 때, 난 수류탄을 도로 옆의 빈 풀밭에 던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동료는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했지만 해가 뜨려면 6시간 남았는데 밤새도록 수류탄을

들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침을 기다리는 건 불가능했다.

 

난 로켓반 팀장이 된지 2주 만에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Fire in the Hole!"

 

그리고 난 최대한 힘을 다해 도로 넘어 풀밭을 향해 던졌다.

결국 수류탄을 폭발했고 사상자는 없었다. 그래 보였다.

 

수류탄이 폭발하고 나서 교량의 등은 깜빡 거리더니 곧 나가버렸다. 그때 불빛이라고는

교량 밑 정수장치에서 나오는 작은 불빛뿐이었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소대 선임하사가

갑자기 나타났다. 나는 암구어를 했고 그는 응답을 했다. 이어 선임하사는 폭발에 관해

물었다. 난 천성적으로 거짓말을 모르는 사람이고, 결국 진실대로 말했다.

 

"이야기가 깁니다. 국들이 내 권총을 훔쳤고, 그래서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선임하사가 말했다.

"넌 취했다. 나와 가자. 넌 체포될 거다."

 

"정정합니다. 난 수류탄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난 한 병장에게 넘겨져 밤새 경계를 받았다. 아침이 되자 병장은 차를 몰아 날

중대본부로 갔다. 오스본 대위는 좋은 중대장이었고 난 그 밑에서 6개월 훈련받고

캠프 펜들턴의 1사단 1대대에서 같이 근무했었다. 그러나 오스본 대위도 돌아와서

이야기를 듣더니 방법이 없다며 대대장에게 가라고 했다.

 

군법에 회부될 수도 있다고 했다.

 

난 그때까지 내 행동이 그렇게 큰일인 줄 깨닫지 못했다. 술에 취했고 정부지급품인

권총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발전기로 작동되는 교량의 전원 장치를 고장나게 했고,

결국 ‘전투지대 반역행위(Treasonous Acts in a Combat Zone)’로 몰릴 가능성을

느꼈다. 대대장 지휘소 근처 한 집에 들어가 비무장 보초의 관리를 받으며 기다렸다.

 

난 죽을 듯이 무서웠다. 군사법정?

반역죄(Treason)? 어떻게 되는 거냐?

 

에이 개같은,

 

그놈의 안전핀만 찾았어도 이 꼴은 안 당하는 건데...

 

그날 저녁 교량 근무를 선 중대원들은 맥주 두 개와 탄산음료 두 개씩을 받았다. 난

당연히 못 받았다. 다음날 아침 9시, 난 무장한 보초와 함께 대대본부를 향해 걸어갔고,

거기서 주임상사의 결정을 6시간이나 기다렸다. 오후 3시 다시 양 옆 보초와 함께 다시

본부지역에서 나왔다. 부동자세를 얼마나 오래 할 수 있는지 연구하는 것 같았다.

 

이후 2일 이상 이 보초들은 내가 어딜 가던 따라다녔다. 좋은 점이 있다면 야간보초는

면제되었다는 거다. 다음 날도 전날과 같았다. 대대본부로 가서 또 6시간을 기다렸다.

그날 밤에는 중대 분대장들에 한해서 맥주 두 개와 소다수 두 개를 또 받았다.

 

제리는 우리 로켓반 사수였고 분대장이 되었다. 그는 해병 중에 해병이었고 항상 앞장

섰고 책을 읽지 않는 특징이 있다. 그는 총명하지 못한 지휘관을 싫어했고 또한 마시는

걸 좋아했다. 직업군인도 싫어했다. 그는 우리 중에 참 탁월했다. 그러나 베트남에 도착

해보니 우라지게 좋은 해병대원은 지천에 널려 있었다.

 

 

그날 밤 엄청난 맥주를 마셨다. 제리는 소다수와 맥주를 교환한 모양이었다. 소다수

하나에 맥주 두 개 그런 식으로 맥주를 모아 그날 진탕 마셨다. 그렇게 퍼마시며 놀다가

문득 제리는 내 불행한 상황이 떠올랐다. 그의 알콜섭취 상태는 위험한 지경까지 갔다.

결국 그는 나를 군사적인 기계뭉치 속에서 빼내기로 결정했고, 소대장 텐트를 부수듯이

들어가 내 석방을 요구했다. 소대장은 날 진정시키라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고 제리를

내보냈다. 내가 봐도 제리의 영혼은 외출해 있었다.

 

몇 시간 후, 난 그 소동 때문에 깨어났다.

제리를 중심으로 함께 해병 10명 정도가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퍼붓고 난리가 아니었다.

 

제리는 술에 취해 내가 받는 취급에 매우 화가 나 있었고, 중위와 면담에서도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결국 자기 손으로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제리는 3.5인치 로켓에 실탄을 장전

하고 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대대본부를 날려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다음 날 아침, 같은 방식으로 대대본부를 향해 고지 위로 걸어갔다.

 

제리, 나, 그리고 몇 명. 상병 하나는 소대장에게 욕설을 했고, 다른 한 상병은 술 취해

제리가 로켓 장전하는 걸 도왔다. 우리 네 명은 대대장 텐트 앞에서 서 있었고, 난 겁이

무척 났다. 하루 종일 서 있을 것 같았다. 제리는 겁먹은 날 보더니 말했다.

 

"긴장 풀어, 내가 최악으로 갈 거고, 넌 괜찮을 거야."

 

내가 대답했다.

“넌 반역죄로 군법에 가지는 않을 거야. 술 취한 것뿐이니까.”

 

"걱정 마, 최악이라고 해봤자 저들이 뭘 하겠어? 베트남에서 베트남으로 보내?"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갑자기 스트레스가 풀리고 위안을 받았다.

제리 말이 옳다! 사형분대가 날 쏘겠는가, 해봤자 얼마나 최악이겠는가.

 

대대장은 마지막에 날 구해주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본부에 먼저 들어가 모두 일병

으로 강등 당했다. 난 경직됐다. 난 상병이었고 나도 한 계급 강등당할 것 같았다. 주임

상사가 불러 들어갔다. 왜 그렇게 바짝 말랐냐고 물었다. 주임상사는 내가 18세고 알콜

경험이 많지 않고 기후도 개 같으니 그럴 수 있다고 했고 대대장에게 가보라고 했다.

 

대대장은 나를 일등병으로 강등한다고 했다. 그리고 잃어버린 45구경 권총과 탄약

일곱 발을 포함해서 38달러 85센트를 배상해야 하고, 일병의 월급은 72.50달라였고

매달 전투수당이 55달러였다. 또한 2주간의 여분의 ‘고된 근무’를 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해병대에 남아 있는다는 뜻이었고, 대대장의 새로운 변소를 파는 일 없이

야전으로 다시 나갔다.

 

그게 다였다.

 

난 어렸고 교훈을 하나 얻었다.

 

그날 제리는 리 로버츠는 나에게 중요한 하나의 교훈을 가르쳐주었다.

 

내 인생에 길게 갈 교훈을.

 

"그래서 최악의 일이 생겼을 때는 제리 리 로버츠를 생각하자.

 난 해냈고, 난 어디서도 해낼 수 있다!"

 

결국, 정말로 얼마나 안 좋았을까?

 

그들은 날 베트남에서 베트남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제리 리 로버츠는 며칠 후에 다시 상병을 복원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8월 2일 캄 네에 대한 공격에서...

 

제리와 함께 5명이 전사했다... 이런 염병할...

 

               By: 밥 니너 (해병3사단 3연대 3대대 G중대. Vietnam 1965 -1966)

 

출처: 미 해병 3연대 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