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이지만 마치 1-2차대전과 같은 전투가
진행되는 내용입니다. 참호 고착전의 양상...
출처는 히스토리넷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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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ration Marauder
작전명 '약탈자'
Mekong Delta
폴 위드맨 선임하사는 호주군 왕립7연대 C중대 8소대였다.
그는 작전명 ‘약탈자(Marauder)’에서 소대 선임하사로서
대원들을 챙기고 있었다. 토마스 헌트 일병의 그를 거들었다.
미군 173공수여단이 베트남에 들어온 1년간,
여단은 3개국 대원이 모인 다국적 여단이 되었다.
3개국: 미군, 뉴질랜드군. 호주군
약탈자 작전 당시 호주군 소대 선임하사
173공수여단은 1년 전인 1965년 베트남에 들어왔고,
1966년 1월 1일 173여단은 메콩 델타의 소탕에 투입
되었다.
약탈자 작전은 곧 267베트콩 정규군 대대를 만나게 되고,
그리고 3일간 전투가 이어진다. 당시 1966년 1월 14일자
타임지는 이렇게 이 작전을 말했다.
“173공수여단 대원들은 이 작전을 통해 메콩 델타의 갈대밭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 지역의 베트콩대대로 인해서 남베트남
군은 6개월간 그 지역에 모험을 시도하지 않았다. 총 114명의
베트콩이 죽었고, 베트콩들은 수로를 따라 나 있는 벌통 같은
벙커로 전투를 벌였다.”
베트남에서의 첫 해 동안 173공수여단은
3개 국적의 병사가 연합된 여단이 되었다.
여단의 주 골조는
503공수연대의 1-2대대 두 대대였고,
1개 포병대대,
호주군 보병대대와 포대,
뉴질랜드군 포병 포대,
미군 17기갑의 기갑중대,
호주군 16기갑 병력이었다.
미군 공수부대원들은 자신들을 ‘스카이 솔저’라고 불렀다.
이 말은 대만의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호주군은 ‘Diggers’,
뉴질랜드군은 ‘키위스’라고 불렀다.
미육군 제173공수여단
173공수여단의 전신으로 찾으라면, 173여단은 미 보병87사단의 여단으로
1차 대전과 2차 대전에 참전했다. 그리고 1951년 부대는 임무해제되었다.
그리고 1963년 오끼나와에서 공수여단으로 재창설된다. 창설여단장은
글의 현재 시점과 같은 엘리스 윌리엄슨 준장이다.
173공수여단은 1965년 베트남에 들어왔다.
1965-66년 동안 173공수여단의 베이스는 비엔 호아 비행장이었다.
‘비엔 호아’의 뜻은 베트남 말로 ‘평화로운 국경의 땅’이라고 했다.
여단의 최초 임무는 비엔 호아 공항을 경계하고 지켜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달 정도 지나자 베트남 중부에 주력 베트콩을 소탕하라는
임무 확장이 이루어진다.
1965년 12월, 173공수여단은 지역 506베트콩대대를 격파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정보에 따르면 메콩 델타 지역의 바오 트라이(Bao Trai) 지역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베트콩 506대대는 비교적 무사하게 1년간 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이어 ‘동 탑’ 연대의 267베트콩 정규군 대대가
메콩 델타로 들어오게 된다.
여단장인 엘리스 윌리엄슨 준장은
이 Operation Marauder를 1966년 새해 시작과 함께 시작한다.
먼저 그들은 사이공 서쪽 53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바오 트라이의 비행장에 보급소와 지휘소를 세웠다.
같은 날 1월 1일, 여단의 503연대 1대대가
밤 코 동 강 서쪽에 헬기로 랜딩하여 서쪽으로
수색섬멸작전을 시작한다.
바로 뒤에,
호주군 대대가 강의 동쪽에 랜딩한다.
그들은 북동쪽에 대한 수색섬멸이 내용이었다.
쉽게 말해서 메콩강을 두고 양쪽을 다 수색섬멸하는 작전.
미군이 더 위험한 서쪽을 맡았다.
503연대 2대대는 타오 트라이 여단 기지로 이동한 후에 503연대 1대대에
대한 증강을 준비했다. 만약 호주군 1대대가 접전이 벌어지면 그 대대를
증원할 수도 있었다. 만약 첫 날 교전이 일어나지 않으면 2대대는 강 남쪽
에 랜딩할 예정이었다. 그곳에서 북쪽으로 이동해서 호주군 대대와 연결할
계획.
작전의 시작
1966년 새해 첫 날 173공수여단은 라오 트라이에 아무런 사고 없이
지휘소를 만들었다. 503연대 1대대장 존 타일러 중령은, 랜딩한 뒤 바오
트라이 기지에서 날아올 준비포격을 기다렸다.
정오가 지난 잠시 뒤, 랜딩한 503연대 1대대는 경미한 저항을 받으면서
강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30분이 지난 후 대대의 B중대가 자동화기로
무장한 50-60명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강변의 벙커들에 숨어
있었다.
짧은 교전으로 B중대는 3명이 부상당했다. 포격과 공중폭격이 요청되었다.
한 시간 뒤에 이들 베트콩들은 교전을 회피하고 남쪽으로 도주했다.
같은 날, 알렉스 프리시 중령이 지휘하는 호주군 대대는 강 동쪽에 랜딩하여
이동하는 중, 적과 조우했고, 프리시 중령은 많은 벙커가 있다고 보고했다.
모든 부대는 논들이 많아서 기동에 힘들어하고 있었다. 범람한 사탕수수밭도
있었다.
십자형의 농토구역은 많은 시냇물과 수로가 있었고, 1.5미터에서 5미터짜리
길이에, 1미터에서 1.5미터의 깊이들이었다. 강 옆에는 1미터짜리 제방들이
있었고 제방 옆은 논이었다. 제방을 따라서 수풀과 나무들이 있었다.
적이 없는 많은 벙커들이 도랑과 논들을 따라서 발견되었다. 벙커들은 시계가
좋은 곳이 만들어져 있었다. 1월 5일 타임지는 수색섬멸이 그런 지역에서
얼마나 어려운지 좋은 자료가 된다고 이 작전을 취재했다.
“어둡고 음산한 갈대밭이 수로를 따라서 가슴 높이로 자라 있었다.
악취가 나고 있었고, 역겨운 곳이었으며, 진흙의 냄새도 좋지 않았다.”
작은 숲들과 마을들이
이 수로와 물기 많은 땅을 따라 형성되어 있었다.
이 미군대대와 호주군 대대는 적과 큰 교전이 없었기 때문에 예비대(503-2대대)
투입을 검토하고 있지 않았다. 첫날 작전을 톰 리드는 이렇게 요약했다.
“팔팔한 적과 전초전을 벌였지만, 그리고 여전히 새해 첫날,
작전 첫날부터 저격수의 사격을 받았지만, 베트콩은 습지로
후퇴한 상태였다. 오후 늦게 약간의 게릴라들과 교전이 있었다.”
그 결과, 503연대 2대대는 바오 트라이에서 밤을 보낸다.
다음날 아침인 1966년 1월 2일, 503연대 2대대장 조지 덱스터 중령은 예정된
강 남동쪽에 공중강습을 준비한다. 이 2대대는 수색섬멸을 벌이다가 호주군
대대와 만나야 했다.
덱스터 중령은 A-B중대를 내세우고 C중대의 1개 소대를 예비대로 남겨
놓았다. C중대의 나머지 두 개 소대는 바오 트라이에 16기갑 D중대에
배속이 되어 여단예비대로 남아 있었다. 만약 적의 징후가 있으면 여단은
이 기갑과 보병으로 된 부대를 밀고 들어갈 작정이었다.
오전 8시의 2대대 랜딩에 앞서 덱스터 중령은, 포격, 공중폭격, 건쉽사격
으로 랜딩존을 청소해 달라고 요청했다. 먼저 건쉽의 사격을 하고 떠나자
이번에는 포병이 적의 거점으로 예상되는 곳에 준비 포격을 했다. 그러나
덱스터 중령은 랜딩 시각 마지막 5분 전에 마음을 바꾸어, 예상 랜딩존 북
서쪽 500미터 지점으로 수정해서 랜딩했다. 이것은 정말 지혜로운 결정
이었다.
B중대가 먼저 랜딩해서 남서쪽으로 이동했고 측면에서 간헐적인 사격을
받았다. 그리고 A중대가 랜딩하자 적의 사격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두
대의 헬기가 많은 관통을 당했고, 한 명의 헬기 기총수가 이로 인해 전사
하고 출구에 있던 공수부대원 1명이 부상당했다.
랜딩 후에 A중대는 B중대의 왼쪽인 남쪽으로 전개했다. 그러나 상황은
급변했다. 100미터에서 300미터 거리의 수많은 벙커에서 베트콩들이
엄청난 사격을 하기 시작됐고, A와 B중대는 옴짝달싹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503연대 2대대가 만난 것은 267베트콩 정규군대대였다.
베트콩 정규군 대대의 응전
A중대와 B중대가 연결하기로 되어 있는 곳에는 베트콩이 콘크리트로 축성한
벙커가 있었고, 이를 통해서 기관총을 미군에게 쏘고 있었다. 이 기관총에 B
중대는 직격을 당했고 왼쪽의 소대에서 사상자가 점차 늘어갔다. 이 B중대의
중대장은 레스 브라운리 대위로, 부임한 지 2주 밖에 되지 않았었다. 거기다
공중지원 항공기가 떨어트린 폭탄이 B중대로 떨어져, 4명이 전사하고 6명이
부상당하는 불운을 겪게 된다.
A중대도 기동을 하려고 했으나 광대한 사격을 받고 있어서 아무런 특별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A중대는 여전히 늪지와 논의 진흙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가능한 모든 엄폐물에 모두 붙어 있었다. 카르맨 카베자 대위는 (나중에
중장까지 진급) 포격을 요청했다.
그러나 아군이 너무 붙어 있다고 생각한 대대본부는 이 포격을 보류했다.
A중대장 카베자 중위는 자신 중대의 박격포를 사용하려고 했으나, 이들도
개활지 논에서 사격을 받으면서 고착되어 있었다. 포격요청은 계속 했다.
결국 미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그때 유별난 숙명이 목격되었다. 미 공군의
세스나 O-1 버드독 정찰기가 낮게 날고 있었는데, 포격의 일제사격 탄막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공중에서 ‘펑!!’하는 소리가 났고, 병사들은 고개를 들어
상공을 보았다. 날아오던 포탄이 정찰기의 꼬리 부분에 맞은 것이다. 정찰기는
밑으로 하강해서 추락했고, 조종사는 바로 전사했다.
오전 10시 30분, 대대장 덱스터 중령과 여단본부는 이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16기갑 D중대와 거기에 배속된 503연대 C중대 두 개 소대를 발진시켰다.
그리고 정오 쯤 되어 16기갑의 장갑차량들이 진흙밭을 뒤뚱거리면서 503연대
2대대 2킬로미터 거리에 나타났다. 같이 온 C중대 2개 소대도 진흙밭으로
무겁게 걸으면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은 오후가 되도록 그 근처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 C중대원 중에 하나인 짐 모톤 상병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걸린 이유는, 거름과 퇴비 더미,
그리고 계속해서 도랑을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힘겹게 전투지역으로 들어오자 많은 양의 소총사격을
받았고, 추락한 정찰기를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그동안
A중대 카베자 대위는 C중대의
증원군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작전 1년 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다.”
1966년 1월 3일,
뉴욕 타임즈는 이 전투를 이렇게 요약했다.
“ 여덟 시간 동안 미군 병사들은 도랑의 진흙구덩이에 쪼그리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폭탄, 네이팜탄, 박격포탄이 적 진영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오후 4시 정도, C중대 2개 소대는 503연대 2대대와 연결되었고 덱스터
대대장은 모든 3개 중대에게 남서쪽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엄청난
사격이 교차되었으나 대대의 진행은 느렸고, A 중대가 가장 결과가
좋았다. 공격 한 시간 만에 A중대 2소대의 5명이 적의 거점을 넘어
콘크리트 벙커 근처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들을 한번에 몰살시켰다.
A중대가 베트콩 267대대의 방어선을 뚫은 것이다. 그러나 A중대장
카베자 대위가 복부에 총을 맞았고 지휘권은 부중대장에게 넘어갔다.
린 랜캐스터 중위였다. 카베자 대위는 린 중위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 가장 먼저다. 그리고 부상자들을 후송시켜라.”
방어선이 A중대에게 뚫리자 베트콩들은 여러 방면의 습지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B와 C중대는 각자의 섹터에서 문제를 겪었다.
메콩 델타의 습지와 물 때문이었다. 한 병장은 이렇게 기자에게 말했다.
“참 처음이요. 난 보병이지만, 수기 신호를
물 속에서 해야 했으니. 이리 수영해서 건너오라고...”
C중대의 모톤 상병은 베트콩의 박격포탄이 떨어지던 것을 기억했다. 그는
쓰러졌고 나머지도 엎드렸다. 그러나 조 레브란크 하사가 그들을 모두 일어
나게 해서 늪지를 향해 뛰게 했다. 모톤 상병도 뛰었으나, 바로 뒤에 뛰던
로버트 스미스 상병이 갑자기 쓰러졌다. 모톤은 소리쳤다.
“스미티! 빨리 가자!”
그러나 스미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눈에 총을 맞았다.
몇 주 전 모톤과 스미스는 비행장의 외곽에서 같이 근무를 선 적이 있었다.
스미스는 성경을 꺼내서 몇 절을 읽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가 나를 키웠어. 그리고 할머니와 나는 독실한 신자야.”
모톤은 그에게 말했다.
“성경을 계속 읽어. 그러면 집으로 돌아가게 해 줄 거야.”
라고 말했었다. 모톤은 당시 깨달았다.
“이 작고 좋은 친구는 죽었구나...”
그 옆에서 머리에 총을 맞았던 렌즈 병장도 있었으나 그는 나중에 살아났다.
모톤은 의무병을 고함쳐 불렀고, 나머지 대원들은 적이 숨은 마지막 도랑을
향해 공격을 계속 했다. 잠시 후, 베트콩들은 모두 뒤로 빠지더니 서쪽의 밤
코 동 강을 향하여 뛰기 시작했다. 미군들은 도랑을 기어올랐고, 당시 베스터
리드 상병은 너무 놀랐다.
“서쪽으로 사라지는 적을 보고, 그렇게 숫자가 많을 줄은 정말 몰랐다.”
베트콩 생존자들은 후퇴하면서 총 98명의 시체를 남겼고, 6명의 부상자와
많은 장비를 방치했다. 베트콩 267대대는 503연대 1개 중대에 의해서 뚫린
것이다.
일대를 점검하면서, 한 발의 미군 포탄이 베트콩 267대대의 지휘소에 정확
하게 떨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의 끝에 503연대 2대대의 모든 3개 중대가
도랑에 모였다. 그리고 남서쪽으로 향했다. 리드 상병은 그날 밤을 기억했다.
“사람들이 악담을 퍼붓는 말에 잠이 깼다.
우리가 자고 있던 도랑으로 물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덱스터 대대장은 그날 밤 남서쪽에서 주간의 전투가 성공하기 이전에 남서쪽
베트콩의 방어선에 야간 공격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방어망이 뚫리자
야간 공격을 그만두었다. 덱스터는 굉장히 훌륭하고 용감한 지휘관이었고,
상황판단에 매우 빠른 장교였다.
그는 나중에 전투를 회고하면서 야간 공격을 시켰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
다고 한다. 만월이었고, 충분히 상대에게 공포감을 심어줄 수 있었을 것
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1968년에 전투내용을 미 육군 보병학교에
논문으로 내려고 준비했었다.
덱스터 대령은 267베트콩대대와 싸웠다. 그러나 나머지 베트콩 506대대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병력의 예비대까지 모두 투입되었고, 3명의
중대장 중에서 2명이 전입 온 지 2주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병력들은 지쳐
있었다.
503연대 2대대가 싸우는 동안 1대대는 적의 저항이 경미했다.
그들은 매우 광대한 터널망을 찾아냈으나 그 안에 베트콩은 없었다.
강 동쪽의 호주군 대대도 적의 저항은 경미했다. 작은 규모의 베트콩들이
괴롭혔으나 소총사격으로 물리친 상태였다. 특이한 사건도 있었다. 나중에
호주군 대대장 밥 그린은 책에서 이 내용을 언급했다. 한 베트콩이 있었는데
호주군은 그를 ‘H&I (일종의 주기적으로 괴롭히는 사격을 의미) Charlie’라고 불렀다.
그는 이 호주군 대대본부를 굉장히 괴롭혔다. 그 옆에 마치 섬처럼 물로
둘러싼 지형 가운데 마른 땅이 있었다. 그린 대대장은 이렇게 언급했다.
“그 한 명의 베트콩은 물로 둘러싸인 곳에서 우리를 향해 총을 쏘았다.
그는 톰슨 기관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총을 쏘고 물 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다른 장소에 나타났다.”
결국, 호주군 프린스 어브 웨일즈 경기갑부대의 대위가 궁리를 했다.
모든 기갑차량의 기관총을 물가에 조준시켜 놓은 뒤에, 이 베트콩이
나와서 총을 쏘는 순간, 화염을 보고 기관총을 발포시켰다. 결국 그
베트콩은 기관총에 의해서 죽었다.
1월 3일 한밤중, 덱스터 대대장은 중대들에 명령을 내려서 동이 트자마자
남서쪽으로 공격하라고 했다. 여명이 트자, 중대들이 움직였다. 그런데
갑작스런 비극이 C중대에서 일어났다. 포병 관측병인 제리 모톤 병장은,
적 거점으로 예상되는 곳의 제원을 산출해서 무전으로 뉴질랜드 포대에
오차 수정을 위한 백린탄을 한 발 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포탄들이 C중대원의 머리 위로 날아갔고,
모톤 상병은 문제를 직감하고 무전기에 대고 소리쳤다.
“사격 중지, 사격 중지!”
모톤 상병, 의무병 제리 레비, 조지 고해건 상병, 조니 그래햄 병장은
근처 도랑에 같이 쪼그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고해건
상병이 담배를 주어 피웠다. 그때, 그래햄 병장은 “꽝!!”하는 소리를
들었고, 논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포병의 포탄 두 발이 C중대 중앙에 떨어진 것이다. 그래햄이 동료들을
쳐다보니, 모톤은 죽은 것처럼 의식이 없었고, 고해건은 머리에 상처를
입고 죽어 있었다. 그는 베트남의 신병으로 하루 전에 전입온 사람이었다.
그래햄 병장이 기억하는 것은 고해건 상병이 조지아 출신의 결혼을 했
다는 것 뿐이었다. 의무병 레지는 다리가 일부 날아갔고 온 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중대에 나머지 7명도 부상을 당했다. 그 중에는
중대장 프레드 헨첼 대위도 포함되었고, 그래햄 자신과 리드 상병도
부상을 입었다.
베스터 리드 상병은 포탄이 터지는 순간 자신이 공중으로 날아갔음을
기억했다. 그는 복부에 부상을 입은 상태로 6미터 정도를 날아갔다.
톰 티어드 통신 특파원은 이 장면을 이렇게 기고했다.
“폭발이 있고 나서 의무병 레비가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기어갔다. 그런데 또 한발이 터지면서 폭풍이 휘몰아쳤다.
제리는 여전히 치료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무병 제리는
눈을 내려 자신의 몸을 한번 보고는 그대로 쓰러졌다. 그는
치명적인 중상이었다.”
C중대는 기동을 중단했다. 여단 참모는 바로 뉴질랜드 포대에 연락을
했고, 뉴질랜드 포대의 지휘관인 돈 케닝 소령은 즉시 포격 데이터를
점검했고 잘못되었음을 찾아냈다.
503연대 2대대의 지휘부는 당시 C중대 북동쪽 600미터 지점에 있었고
이 사고를 무전기로 들었다. 덱스터 중령은 무전기로 나에게(기고자)
이렇게 말했다.
“이봐, 헨첼 대위가 부상을 당했다.
그러므로 이제 자네가 C중대장이다!”
덱스터 중령은 부상자들을 후송하고 다시 공격을 재개하라고 명령했다.
대대 작전장교인 딕 테리 소령이 같은 명령을 반복했다.
나는 혼자서 C중대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나는 중간에 방향이 잘못
됐다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나는 늪지의 진흙을 밟고 있었고, 내 주변의
물에 가끔 총알들이 때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내 머리 위로 총알이
“피융!”하고 날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총소리가 나는 왼쪽을 보니
몇 명의 베트콩이 우리 C중대 측면으로 향하고 있었다. 난 생각했다.
“저 놈들은 나를 장난감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나를 쏘는 것도 아니고...”
어떤 경우건, 나는 최대한 빨리 C중대를 찾아야 했다. 잠시 후, 나는 C중대에
도착했고 치료를 받고 있는 헨첼 대위로부터 몇 분간 상황설명을 들었다. 난
부상자들을 둘러보았고 가장 위중한 부상자부터 후송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때 난 의무병 레비를 보았다. 그는 정말 치명적인 중상이었고, 1소대 의무병이
그를 돌보고 있었다. 나는 1소대 의무병에게 ”그를 어떻게 해줄 방법이 없나?“
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슬프게 머리를 가로지었다.
적의 사격이 집중되는 가운데 중상자의 후송이 시작되었다. 두 명이
리드 상병을 들것으로 들고 헬기를 향해 뛰었다. 리드는 다리에 맞았고
양쪽 다리의 무릎 아래가 부러져 있었다.
난 재빨리 지휘부를 재편성하고 각 소대에 무전을 보냈다. 남서쪽으로
공격이었다. 결국 C중대도 A와 B중대를 따라잡았고 대대 전체가 계획
대로 공격하게 되었다.
그렇게 2대대 전체가 밀어붙이고 있을 때, 오후 3시 정도가 되자 적의 사격이
중단되고 그들은 남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503연대 2대대는 같은
연대 3대대가 야간방어선을 만들었던 밤 콩 동 강가까지 도달했다. 그날 밤 2
대대는 탄약을 재보급 받고 피해 상황을 체크했다. 지난 36시간 동안, 16명이
전사하고 67명이 부상당했다.
그날밤 로스 엔젤레스 타임지의 잭 포이시가 503연대 2대대와 합류했다.
그는 밤 동안 한 상병과 같이 있었다. 휴식 장소는 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 상병은 이렇게 불평했다. “항상 이렇죠 뭐.”
그때 기자에게는 죽음과 같은 포탄들이 떨어졌다. 포이시 기자는 이렇게 썼다.
“포탄이 떨어지는데 상병은 곧 잠이 들었다. 그는 군인이었다.
슬픔도 아닌 고난도 아닌 그런 표정으로 그는 자고 있었다.”
1월 4일, 503연대는 소대 단위 분할 정찰을 나섰다. 그리고 저녁에 몇 가지
중요한 적의 접촉결과가 보고 되었다. 다음날도 같은 작전이 개시되었다.
1월 5일 이른 새벽에 다시 정찰이 시작되었다. 전날 저녁, C중대 2소대 분
대장이 야간방어선을 위해 참호를 파다가 베트콩이 파묻은 것들을 발견했다.
브리우닝 자동소총, 탄약, 기록서, 하얀색 햄머와 낫이 교차하는 붉은색
공산당 깃발 등. 모든 물건들은 파란색 프라스틱 낭으로 방수 처리되어
묻혀져 있었다. 그것을 발견하자 덱스터 중령은 여단의 폭발물 처리반을
불렀다. 그리고 이어서 베트콩들이 땅에 묻은 총기와 탄약을 더 발견했다.
1월 6일, 2대대는 506지역베트콩대대의 버려진 본부를 발견했다. 그 일대는
엄청난 지뢰와 부비트랩이 설치되어 있었고, 여단 폭발물 처리반에 헬기를
타고 날아왔다. 처리반이 조심스럽게 작업을 했고, 6정의 자동소총, 400개
의 수류탄, 많은 양의 실탄이 발견되었다. 57밀리 무반동총탄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7천 장에 달하는 서류였다. 분대 급의 명단까지 나와 있었고,
공산당 간부의 이름들도 나와 있었고, 훈련 서류, 지도, 상장과 서신들도 있었다.
506베트콩대대는 소규모 그룹으로 나뉘어서 일대를 떠난 것으로 추측되었다.
1대대와 호주군 대대는 교전이 경미한 편이었다. 호주군 대대는 두 명의 베트콩
을 사살한 것과, 탄약과 쌀을 다량 발견한 것이 전부였다. 가장 큰 것은 베트콩
소대와의 교전이었다. 그들은 교전 후 달아났다.
1966년 1월 8일, 미 173공수여단의 약탈자 작전은 종료되었고,
Operation Crimp이 시작되어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미군 사령부의 약탈자 작전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았다.
‘베트콩 267정규군대대는 전투에서 1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남겼고,
이 대대는 대량의 신병을 받고 재무장하기 전에는 다시 전투를 하기
힘든 부대가 되었다. 506대대도 정보에 의하면 전투지역 남쪽으로
후퇴했다.’
미군의 전통인지 미군 공수부대의 전통인지는 모르나, 전사자가 생기면
군화/소총/철모로 묘비처럼 세우고 기념식을 한다. 이때 주임상사가 나와
전사자의 이름을 세번 명령으로 부른다. 그래서 응답이 없으면 (당연히
없고) 공식적으로 전사를 선언한다. 그 이름을 부를 때 병사들이 많이
눈물을 흘린다. 이 전통은 아프칸과 이라크에서도 여전히 보이고 있다.
대령으로 퇴역한 글쓴이 토마스 페어리는 베트남전에
여러 번 참전했고, 나중에 101공수사단 정찰소대장을
했고, 이후 173공수여단의 중대장으로 근무했다. 그리고
남베트남군 공수대대 선임 고문관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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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공수여단은
1963년 만들어져 베트남전 최초 미 육군 지상군 병력으로 들어갔다.
1966년 8월 말에 503연대 3-4대대가 여단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9월에
약 3천 명의 여단이 된다. 그리고 6년간 베트남전에 참전한다. 베트남에서
총 13개의 전투에 참가했고, 13명의 최고훈장 수여자가 나왔다. 32개의
수훈십자훈장, 1736개의 은성훈장, 전상메달은 6천개를 받았다.
1,790명의 대원이 전사했고, 여단은 본토로 돌아와 1972년 1월 켄터키
포트 캠벨에서 임무해제 되었다. 그리고 28년이 지난 2000년 6월
이탈리아 빈센자에서 재창설되었다. 유럽지역 즉각반응군으로 임무를
받았다. 그리고 2차 이라크 전에서, 터어키를 경유하여 이라크 북부
크루드족 지역에 전투강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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