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의 현상금 전단
- 허버트 프라이드맨 전직 상사.
현상금 전단물은 베트남전쟁에서 미국과 베트남 정보 모두 사용했다.
이는 심리전에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심리전
포인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플라인 중위의 현상금 전단 - A1E 스카이레이더 기가 날고 있다.
이것은 1966년 초기 현상금 전단이다. 그림은 스카이레이더 전폭기가 날고
있고 내용은 현상금 3만 5천 달라다. 미공군과 미국 정부는 추락한 조지
플라인 중위를 찾게 해주는 정보를 주면 3만 5천 달라를 주겠다고 현상금을
걸었다.
플라인 중위는 A1E 스카이레이더스 전투기를 몰다가, 1964년 9월 23일,
키엔 지앙 지방의 동 타이 부근에 추락했다. 당시 근처의 남베트남군
지휘관과 미군 지역 고문관 등이 구출하려고 했다. 전단의 뒤에는 미 공군
지휘관의 싸인이 들어 있다.
이 전단의 코드명은 SP-188.
그러나 노력에도 불구하고 플라인 중위는 추락장소에서 사라졌고, 전쟁이
끝나도록 구출되지도 포로로 등록되지도 않았다. 그는 1974년에 잔유물을
회수하였으나, 1976년 초에 확실히 신원이 확인되었다. 그의 항공기 조각은
베트남전 박물관에 보관되었다.
그 이전의 초기 전단은 그림이 없었고, 액수만 적혀 있었다. ‘3만 5천 피아스터’
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대상은, 1963년 11월 23일, 쌍발 항공기가 격추되었
는데, 미군 조종사가 낙하산으로 탈출하는 것이 목격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낙하산이 떨어진 곳 1마일 부근에 이 현상금 전단이 투하되었다. 이제 현상금의
반액 정도가 정보를 받고 지불되었으나, 발견된 것은 오직 낙하산뿐이었다.
그 외에 그 지역 수장이나 남베트남군 지휘관도 기타 다른 정보를 듣지 못했다.
아래의 전단은 암호명이 SP-61다. 그러나 내용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1967년
7월 인터내셔널 헤롤드 지는 이런 헤드라인을 실었다. "전단 1천 6백만 장이
살포되다. 내용은 추락한 미군 조종사를 돕게 되면 금 50냥을 준다"는 내용.
이 기사는 사이공의 누군가가 언급한 것으로 인용했다. "미국은 북베트남에
추락한 항공기 조종사를 도와 탈출 시킬 경우, 북베트남인에게 금 50냥을
준다는 내용이다. 그 금을 돈으로 환산하면 760달러다.” 그리고 전단의 색도
금색으로 북베트남에 살포됐다.
금은 어디가나 사람의 눈을 끈다.
전단 72 : 이 전단은 1인치 크기로 내용은, 현상금: 금 50냥이다. 이 전단은
닉슨에 의한 북베트남 폭격 당시에 뿌려진 전단이다. 전단 뒤에는 베트남
미국 대사 엘스워서 번커의 서명이 들어 있다. 내용은 이러하다:
"미군 조종사를 도와 탈출에 협조하면 금 50냥을 준다. 만약 미군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서 도망중인 것을 발견하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에게 다가
가라. 그리고 위해하지 않다는 것을 알리고 손을 내밀어라. 당신이 도울 수
있는 만큼 도와라. 군인들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숨겨주어라. 당신의 선택에
따라서 그가 자유와 함께 돌아갈 수 있다. 미군이 구출되고 나면 언제라도
요구할 시 금 50냥을 준다. 금은 어떤 화폐에도 가치가 있다. - 남베트남
미국 대사, 엘스워스 번커(서명) "
가끔은 미군 포로가 자신의 힘으로 탈출하기도 했다.
1963년 10월 29일, 미육군 특전단 닉 로우 중위가 CIDG 프로그램으로 들어
왔다가 매복을 당해 포로가 되었다. 그로부터 62개월 후, 심한 고문과 이질 등
의 병에 걸린 상태에서, 그는 풀려나지 못하고 고문을 당하다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했고, 계속 고문회피기술로 저항하면서 생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포로
순간부터 탈출을 꿈꾸었다. 몇 번의 탈출이 있었으나 결국 잡혀서 고문을
당했다.
마침내 1968년 12월, 그는 여전히 공산주의 세뇌를 거절했고 탈출하려고 하자,
월맹군은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1968년 12월 31일, 캠프 근처 숲에 나와서
일을 하던 중, 상공에 미군 헬기가 나타났고 그는 보초를 때려눕히고 개활지로
뛰었다. 헬기는 그를 발견했고 구출했다. 그는 검은색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릭 로우 중위의 전단 (탈출 직후의 사진)
닉 로우 탈출 직후 살포된 전단의 앞면과 뒷면...
스탠리 새들러는 ‘저항의 중단’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 육군 특전단 닉 로우 중위는 미국 심리전단에 매우 좋은 기초자료가
되었다. 그는 베트콩이 만든 대나무 우리에서 5년을 보냈고, 그를 억류
하고 있던 자들은 매우 혼란스럽고 당황해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안전지대란 곳에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공격을 하고 있었고, 그들의 간부
들은 떨어져 있었고, 또한 미군과 남베트남군보다 약해 보였다. 결국 그
들은 포로를 들키기 전에 죽이기로 결정한다. 닉 로우 중위가 탈출하자
마자 그는 그를 억류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귀순을 종용하고, 잘 대해줄
것으로 전단에서 약속했다."
그가 탈출하고 18시간이 지난 후에, 닉 로우의 글이 복사된 전단 10만
장이, 그가 있었던 U Minh숲에 살포되었다. 다른 미군 포로를 데려오면
베트남돈으로 60만 피아스터를 주겠다고 쓰여 있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대의 전사와 간부들에게"
“나는 닉 로우 중위다. 1968년 12월 31일 탈출하여 미군과 남베트남군
에게 돌아왔다. 난 지금 병원에 있고 기분이 매우 좋고 내 친구들을 만
났다. 난 당신이 그립고 잘 대우받기를 바란다. 그 대신에 땅에 쓰러지는
일이 없기를 빈다. 며칠간 나는 똑똑히 보았다. 잡혀 있을 때, 미군과
베트남군은 사기가 낮다고 말했었다. 진실이 아니다. 베트남군은 싸울
준비가 되어 있고, 미군 헬기는 강하다. 당신들은 이길 수 없다. 난 호소
한다. 남베트남군이나 미군 헬기 승무원들을 보면 결코 두려워하지 마라.
그들은 당신은 때리거나 죽이지 않는다. 나는 약속한다. 당신들에게
우리는 잘 대해줄 것이며, 모기장, 옷, 음식 등을 잘 줄 것이다. 나는 살고
싶고 당신도 살고 싶을 것이다. 만약 다른 미군을 남베트남 쪽으로 데려
오면 당신은 60만 동을 받게 될 것이고, 대우도 잘 받을 것이다.....
- 닉 로우 중위.”
닉 로우는 5년 간의 포로생활을 책으로 썼고,
대령까지 진급했으면 그린베레의 전설이 되었다.
제10심리전대대
닉 로우의 전단의 명칭은 10-070-6이다. 여기서 앞의 10이란 제10심리전
대대를 말한다. 사이공 근처의 4군단의 제4 심리전그룹의 대대다. 이 대대는
1971년 4월 베트남을 떠날 때까지 활동했다.
베트남인 보트에 전단을 나누어주는 미군대원.
베트남에서 현상금 프로그램은 끝이 없었다. 미군 참모총장은 1966년 11월에
"Operation Fast Buck"을 만들었다. 그는 한국전에서의 경험을 생각했다. 한국
전 당시 미군은, 어떤 공산당 미그-15기 조종사에 대해 넘어오면 5만 달러를
현상금으로 걸었다. 미그-15기의 결점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단 귀순만
해도 같은 액수를 주겠다는 것. 베트남전에서는 대상이 미그-21기로 바뀌었
고 첫 번째는 금액이 15만 달러로 늘었고, 두 번째는 2만 5천 달러였다. 미국은
격추되어 바다에 떨어져 귀순한 월맹군 조종사에게 2만 5천 달러를 주었다.
1969년 10월 31일,
심리전 회보 볼륨 410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1969년 10월 3일, 남베트남군의 정치전 파트의 장성은 새로운 보상금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새로운 것에 의하면, 남베트남은 남쪽에 오게 되는
월맹군 조종사, 선장, 승무원 등을 푸짐한 보상을 한 뒤에, 그들의 배나
비행기와 탱크, 무기에 관해서는 따로 보상을 해준다고 한다. 귀순자들은
그들의 가지고 온 장비의 종류에 따라서 금 100냥에서 1,000냥까지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귀순자를 환영하며 그들이 안전하게 자유세계에서 살수
있도록 돕겠다고 한다."
그때 금 100냥은 미국톤으로 1만 1천 달러였다.
MACV-SOG
보상 프로그램 시행 3년 뒤,
MACV-SOG 지휘관은 기록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현지민에 대한 즉각 보상 프로그램은 계속될 것이다. 미군 포로나
실종자를 돕는 사람들은 정보와, 장비 회수, 기타 조건에 따라서
보상을 받는다.”
1971년 동안, 미군은 총 1,925달러를 미군 복귀와 정보 제공 등의
명목으로 보상했다. 1972년 초반에는 400달러가 나갔다.
미군은 1971년에 남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에 이 보상 프로그램을
광고하려고 총 9천 8백 30만 장의 전단을 살포했다. 1971-72년 사이에
이런 작전은 ‘갈색 종마/물소 자국/코끼리 걸음’ 등의 이름으로 지속됐다.
그리고 문맹자가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들이 들어갔다. 1972년에는
앞의 추산과는 다른 3천 2백 만장의 전단이 살포됐는데, 공인된 화폐로
주겠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미국인 송환에 5천 달러, 미국인 송환에
따른 정보제공에 5백 달러, 사체 송환에 4백 달러, 장소나 믿을만한
증거에 150달러를 주었다. 그리고 베트남 화폐로 지급이 가능하다고 썼다.
이런 선전물과, 귀순자용 무사통과 전단은 미국의 ‘미국 연합 공중사무소
(JUSPAO)’의 관할이었다. 사무소는 1965년 7월에 만들어졌다. 이 사무소는
프랑스가 물러가는 1954년에 시작되었고, 이후 11년간 점차 업무가 증가했다.
이는 논쟁거리였다. 미국과 베트남의 이해관계가 애매했기 때문이다. 이는
상부의 미 대사관과 기타 기관에 연계되어 있었다.
총기 보상 프로그램
JUSPAO는 북베트남에 투항하라고 광대한 캠페인을 벌였다. 남베트남의
투항권고 프로그램인 ‘치우 호이(오픈 암)’과 돈이 연관되어 있었다. 남베트
남은 이 것을 1963년에 시작했다. 그리고 65년부터는 미군과 함께 했다.
이를 통해서 10억 장 이상의 전단, 포스터, 잡지와 스피커를 통한 권유가
수 천 번이나 방송되었다. 역사상 최대의 선전선동이었다.
1969년에만 100억장의 전단이 살포됐다. 그래서 총기까지 반납을 하면
보다 금전적인 보상과 대우를 약속했다. 그리고 베트콩이 단체로 귀순을
하면 보너스도 약속했다. 이 프로그램은 성공을 거두었고 1969년 확장
하게 된다. 그러나 1969년 12월 31일 이 프로그램은 중단된다. 보상금이
남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베트남군에게 총기를 반납하고 보상금을 받는 그림의 전단.
SP-769
전쟁 초기 JUSPAO는 SP-769 전단을 준비했다. SP는 "Special Project"를 의미했고,
결국 이를 통해서 이 전단이 미국인들이 찍어냈다는 것을 알리게 됨을 깨달았다. 결국
이 코드가 전단에서 삭제되었다. 매우 잘 만들어진 전단이었다. 두 베트남 민간인이 총
을 남베트남 군인에게 반납하고 통용화폐를 받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가격이 적혀 있
다. 권총은 800 피아스터, 그리스건은 2천, 박격포는 사이즈에 따라서 8천에서 1만,
중기관총에서는 구경에 따라서 5천 동에서 6천3백 피아스터를 주고 있다.
Leaflet SP-3863
이 전단에는 RPD 기관총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귀순자 안전패스 기능도 있다.
그리고 기관총의 가격이 7천 5백 동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렇게 쓰여 있다.
“당신은 이 전단을 안전패스로 사용할 수 있다. 이 전단이 꼭 없어도 당신은
환영받는다. 1. 좋은 대우 2. 시민증 발급 3. ‘귀순센터’에서의 건강관리 4.
가족과 다시 만날 수 있고 5. 매일 30 피아스터와 좋은 음식을 받고 6. 귀순
센터를 떠나서는 매달 200피아스터를 받고 7. 무기를 가져오면 500-7,800
피아스터를 받을 수 있고 8. 군복은 1천을 주며 9. 고향으로 가는 귀향비 1천
피아스터를 준다 10. 직업을 찾아주며 11. 6개월분의 쌀과 미래를 주거를
위한 1천, 가구를 위한 2천 피아스터를 준다."
모든 충성스러운 베트콩들에게...
남베트남은 당신에게 보상과 지원을 약속한다
- 매일 의 쌀과 음식 그리고 24피아스터
- 당신의 아내에게 똑같은 음식과 24 피아스터
- 자녀를 위해서 매일 각 자녀에게 12피아스터
- 모든 무기에 관해서는 아래와 같이 보상한다
권총 800, AK-47이나 M-1 1천, SKS 7.62밀리
자동소총 1천 2백, M-3 그리스건 2천, RPD 경기관총
3천 5백, 30기관총 5천, 51밀리 중기관총 6천 3백 피아스터.
새로 추가된 무반동총은 1만 5천에서 2만 피아스터. (구경에 따라서)
JUSPAO Leaflet # 2500
이 전단은 2,500 피아스터를 현금으로 받고 고향에 도착하는
베트콩을 그리고 있다. 내용은 이러하다:
“남베트남 내에 있는,
월맹군과 베트콩의 병사와 간부의 자유세계 귀순을 환영한다.”
그리고 뒤에는 긴 글이 있다.
“남베트남 정부는 매일 30피아스터의 음식과 매달 200 피아스터를
보장한다. 무기와 군복에 따라서 추가로 더 받게 된다. 그리고 1천
피아스터의 정주금과 가족에게 다른 수당을 지급한다. 6개월의 쌀과
집 가구의 구입비를 지원한다.”
2991 전단은 2990과 비슷하나,
특별히 높은 계급의 공산당 간부나 그룹에게 보상을 말한다:
“특별한 상. 모든 개인(민간인, 군인, 정부 고용자 등)이나 그룹이 귀순할
경우 현금을 받는다. 그리고 상급자에 의해서 권유를 받거나 같이 귀순을
하면 그 계급에 따라서 보상금을 지급한다. 만약 지휘관이 부대를 권유
해서 같이 투항할 경우, 그 지휘관은 20-70% 그 부대 크기에 따라서 보
너스를 받는다. 보상금은 3일 이내에 그 지역 수장 등을 통해 지급된다.
그리고 권유한 사람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뒷면에 가격이 나와 있다.
“중대장 2만 5천 불, 부중대장 2만 불, 게릴라 소대장 1만 5천 불,
게릴라 부소대장 1만 불, 게릴라 분대장 7천 불, 게릴라 부분대장 4천불.”
2993호 전단에는 더욱 구체적이다.
“지역 도당 비서 25만 불, 지역 부 비서 12만 불,
정치위원 6만 4천 불, 도당원 3만 6천 불.”
246심리전 중대가 101공수사단의 로고가 들어간 전단을 만들기도 했다.
101. REWARD. 101.
“우리는 베트남에 주둔중인 미군입니다. 우리 미군은 베트남을 돕고 평화를
찾으려고 합니다. 성공적인 작전을 위해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선량한 민간인을 명령에 의해서 보호해야 하고, 또한 다음과 같은 경우에
보상금을 드립니다: 지뢰, 공산주의자들의 근거지나 베이스, 터널, 무기를
숨긴 곳, 부비트랩, 매복의 계획 등. 미군 101공수사단 병사들에게 접촉하고
이 전단을 보여주세요. 그러면 영어로 곧 알아보고 당신을 보호하고 도울
것입니다. 그리고 정보에 따라서 충분한 보상을 받으세요.”
이 101사단의 전단은 여러 가지 버전으로 영어와 베트남어로 쓰여 있다.
이 외에 미 25사단의 것도 있고, 무기로 보상을 받고 무기가 숨겨진 곳
으로 말하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뒷면에는 전단을 가지고 온 미군 병사
들에게 주의사항이 적혀 있다.
“미군 병사들은 주의하라. 이 전단을 가지고 온 사람은 가까운
미군 장교에게 데려가야 한다. 전단을 가져온 사람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 철도나 도로에 폭발물을 발견해서 온 사람은 500
달러를 상금으로 주어야 한다.”
남베트남 육군 5사단의 것은 구체적이다.
베트콩 캠프, 동굴, 터널, 무기, 탄약, 지뢰 등...
그리스건이 유난히 비싸군요.
제6심리전대대
베트콩 테러리스트 현상금 전단 # 6-083-68
6심리전대대가 만든 베트콩 특정인 현상금 전단이다.
그는 베트콩 테러리스트들의 두목이었다. 사진은 아래...
“베트남 돈 5만 피아스터를 건다. 느구옌 반 락, 별명은 탐 누이.
53세. 키는 168. 권총으로 무장. 그는 보통 30명을 데리고 다닌다.
가끔 미첼린 고무농장에 나타남. 지역 베트콩의 부지휘관. 이 자에
관한 정보를 준 사람은 보상금을 받고 새로운 사업과 인생을 살
기회가 주어진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 다른 지방으로 이주를 시켜
준다. (보복 때문인 듯) 타이 닌, 기아 딘, 사이공 등으로 이주할 수 있다.”
그리고 뒷장에는 이 전단을 가지고 온 사람을
여단 정보 장교에게 데려가라고 영어로 쓰여 있다.
6-168-68
제6심리전대대가 만든 것으로, 특별히 4번 국도와 새퍼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모든 부대의 정보장교는 이 내용에 주목하고, 새퍼 팀을
죽이거나 생포하는데 정보를 준 사람에 관해서 1만 피아스터를 지급
하라고 되어 있고, 4번 국도에 지뢰를 발견해서 아려주면 5천 피아스타
를 주게 되어 있다.
베트콩 테러리스트 현상 수배 전단...
지역 수장인 투 중령이 두 명의 전직 베트콩에게 무기에 대한 댓가로 보상금을
주고 있다. 미군과 호주군 장교가 지켜보고 있다.
7-157-68 전단:
“박격포, 대포, 로켓 포지션을 파괴할 수 있는 정보, 병력 집중점,
통신사이트, 차량이 주기된 곳, 보급품이 있는 곳을 알려주면 10만
피아스터를 준다. 선량한 시민이 총기에 죽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무기와 탄약에 관한 정보를 주면 보상금을 줍니다. 경고합니다.
탄약에 손을 대지는 마세요!”
“포좌에서 포를 발사하기 전에 알려줄 경우 5-10만 피아스터,
대포나 박격포는 5-10만 피아스터, 75밀리/82밀리 무반동총은
2-2만 5천, 소총은 각 10달러.”
여성이 모델로 등장한 전단. 베트콩 가족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4370
남베트남 정부가 지속적인 포로교환을 원함
1971년 10월 베트콩이 미군 병장 존 섹스톤을 록 닌에서 풀어주다.
1971년 10월 남베트남 정부는 그 댓가로 북베트남 중위를 그 일대에서 풀어주다.
남베트남 정부는 포로 병사를 그들의 가족에게 돌려보내는 것을 원한다.
이 전단은 남베트남, 라오스, 탐보디아에 살포됐다. 그러나 미군 심리전단은
이 내용을 거부했다. 사람들은 섹스톤 병장이 어떻게 풀려났는지 놀랐다. 내용
은 이러하다:
미육군 존 섹스톤 하사. 그는 아무런 통보 없이 캄보디아 국경 베트콩 포로
수용소에서 풀려났다. 그는 한 월맹군 병사가 그를 호위했는데 한 마을 근처
에서 그를 놔두고 캄보디아를 향해 자기 길을 갔다고 한다. 섹스톤은 검정
파자마를 입고 있었고, 그는 월맹군이 쓴 편지를 소지하고 있었다. 그 편지
에는 이 포로에 상응하는 자신들의 포로를 풀어주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상부는 섹스톤에게 이러한 내용에 입을 다물라고 지시했다. 섹스톤은 이후
누구를 만나도 이 내용에 함구했다.
논쟁거리였다. 월맹은 분명히 두 명이 고위 장교의 송환을 원하고 있었다.
한 명은 노동선동가 레 반 호아이, 한 명은 최고 테러리스트 수장 느구옌 반
타이였다. 그는 사이공에서 테러를 지휘하면서 5년 간 수백명의 베트남인과
미국인을 죽거나 다치게 했다. CIA는 그들의 석방을 반대하고 그저 같은
하사관 급을 풀어주라고 논쟁을 벌였다. 월맹은 1966년 사이공 북부에서
붙들린 외국인 사무소 더글라스 램시를 풀어주면 어떻겠냐고 제의해왔다.
그러나 CIA는 테트 공세 당시 붙들린 CIA 간부 중 한 명을 풀어달라고 응답
했다.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Marine Leaflet 94-66
내 기억에 해병대는 자신들의 손으로 전단을 만든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경우가 있다. 미육군에 의뢰하여 찍은 전단이다.
“베트콩은 마을과 주변에 항상 지뢰와 부비트랩을 만들어 놓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선량한 주민들을 죽이고 있다. 지뢰를 주민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뒷장
"보상금 : 겁 많은 베트콩들은 많은 부비트랩을 설치해서 양민의 희생
되고 있다. 미 해병대에 그들이 숨은 곳을 알려 달라. 그러면 엄청난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 해병대는 당신의 자녀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
할 것이다.”
LAOS
베트남전 동안 미군 지상군과 공군은 라오스 근처에서 비밀작전을 수행
했다. 미군은 라오스 현행 화폐로 도안된 전단을 만들어, 패트 라오, 민간인
등을 대상으로 뿌렸다. 라오스에 추락한 미국인과 라오스 조종사를 돌려
보내면 보상금을 준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힌두교 신화에 영향을 받은 코끼리
로고를 넣기도 했다. 제목은 ‘수백만 마리의 고끼리와 파라솔의 땅’이다.
“라오스 정부 국무총리 소바나 푸마는 지급 약속을 한다. 월맹군이나
패트 라오가 억류 중인, 라오스 정부군이나 미군 포로에 관한 정보를
주면 10만 킵(kip)을 준다. 미군 포로를 돌려보내는데 협조하면 150만
킵을 준다. 이 종이를 가지고 있다가 보상금을 타라.”
U.S. reward leaflet .114 for Laos
한쪽은 베트남 말, 한쪽은 라오스말로 써 있다.
그림은 미군 포로를 탈출시킨다는 내용이다.
“15만 킵 현상금. 왕립 라오스군과 미군 조종사를 돌려보내는데
협조하면 15만 킵을 현금으로 준다. 이에 관한 정보를 주면 10만
킵을 준다.
전쟁 후의 전단
POW Publicity Fund Reward Leaflet
여전히 베트남에서는 이런 전단이 있나? 대답은 ‘맞다.’ 이다.
1987년 미국 포로 선전기금은 250만 달러의 보상금을 만들고, 조종사
한 명 당 10만 달러를 상정했다. 이는 21명의 공화당 의원들이 상정했다.
그 중에는 과거 미해군 포로였던 유진 맥다니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
고 전 북부 캘리포니아 의원 빌리 헨돈도 있다. 이는 하노이의 미국 실종자
사무소를 포함한 모든 동남아 관련국가 기관에 통보했다. 심지어 브루나이,
홍콩에도 통보했다. 그리고 그 해당 미군의 명단도 같이 첨부되었다.
“당신이 공항에서 우리를 보게 되면, 전단을 가지고 있다가 당신은 그것을
지프로 열리는 (우리의) 백에 넣어라! 우리는 알라스카를 경유하는 대한
항공을 타고 도착할 것이다. 아마도 30시간을 걸릴 것이고, 알라스카에서
얼마나 기다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공항에 도착하자 그의 가방에 전단을 넣으려고 사람들이
다가섰다. 그런데 한 두 사람이 아니었다. 반대 면에는 베트남말이 쓰여
있고 미군포로 보상금 기금이 표시되어 있다. 그림의 배색에는 러시아
화폐가 배경그림으로 있다. 그리고 기금의 공증인인 미국인 의원들이
이름도 있다.
같은 조직에서 나온 전단에는 러시아 화폐로 배경그림이 된 것이 있는데,
베트남과 라오스에 뿌려졌고, 그림은 5루불의 그림이다. 그리고 “미국인
포로를 국제 적십자사에 인도하면 240만 달러를 주겠다,”고 영어로 쓰여 있다.
1987년 9월, 메콩강에는 지프로 열리는 비닐로 방수처리된 전단이 부유하고
있었다. 계획은 실패였다. 이것은 개인적인 것으로 포로/실종자 일곱 개의 가족
들이 개별적으로 만든 것이다. 헨든과 기자이자 실종자 활동가인 도나 롱은 이렇
게 말한다.
“만약 우리의 시도가 알려지면, 오히려 그들이 남은 포로를 죽이거나 가택
연금을 시킬 것 같았다. 다음날, 좌절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메콩강으로
가서 라오스 쪽의 물살에 전단들을 살포했다. 이것은 자발적인 일이었으나
국제적인 뉴스가 됐다. 그것은 자포자기의 가엽은 시도였고, 태국의 보트를
타고 나왔다.”
1988년 7월, 베트남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던 린 햄프톤은 베트남으로 갔다.
그녀는 플로리다 대학의 간호사 학교를 졸업하고 1967년 베트남으로 갔었다.
그녀는 투이 호아의 91후송병원의 외과에 근무했다. 6개월 후, 다시 사이공
근처의 롱빈의 93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그녀는 1990년 이 경험을 책으로
썼다. 힘프톤은 여행에서 3천 동을 블랙마켓에서 사고 손으로 쓴 메시지를 복사
해서 배포했고, 워싱턴의 맥다니엘 대위의 전화번호를 적어 두었다. 그녀는
하노이를 돌아다니면서 은밀히 선전했다. 그녀는 이 작전의 이름은
'Dong the Cong I.'이라고 했다.
Hand Stamped Reward Message
Dong the Cong II호 작전은 1988년 10월 3일 시작되었다. 베트남 참전자인
짐 콥과 도나 롱은 태국으로 가서 Homecoming II Group를 만들었다. 그리고
적어도 1천 달라를 보상한다는 스탬프를 찍었다. 돈을 바꾸어서 태국돈 5/10
바트짜리로 많이 휴대했다. 러시아 돈도 유통되고 있었다. 그들의 계획은 보트
를 빌려, 라오스로 들어가는 메콩강에 방수처리 된 전단을 방류시킬 예정이었다.
그들은 태국 보트 소유자에게 은행의 현금 잔고를 보여주고, 돈과 잭 다니엘 술을
주어 라오스 어촌으로 갈 예정이었다.
라오스로 들어가기로 과감하게 결정하자 그들은 일부 은행권을 나누었다. 이들은
과정을 사진과 비디오로 남겼다. 그들이 떠날 준비를 하자 두 명의 총을 든 군인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은 경찰서에서 그들을 8일간 구금했다. 도나는 전쟁이 끝났
는데 실종자를 찾는 것이 여성으로써 무슨 죄냐고 항변했다. 그러나 계속된 심문
에서 국제법을 어겨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했다. 그 동안 나머지 멤버 5명은 태국
을 떠났고, 보트를 빌려 현금이 섞인 5천장의 전단을 메콩강에 흘려보냈다. 결국
태국 해군에게 적발되어 4시간 동안 잡혀 있었다.
짐과 도나는 9일 비엔티안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12명 정도의 라오스 무장군인이
나타나서 그들에게 눈가리개를 시키고 어떤 건물로 데려갔다. 라오스 군인들은
둘의 머리에 총을 겨누기도 하면서, 그것이 미군 포로를 다루는 방법이었다고
농담도 했다. 도나는 사무실 같은 곳에 잡혀 있다가 결국 감방으로 갔다. 그녀는
이후 30일 동안 두 번 미국 영사관 직원과 만났다. 그리고 법적인 효력이 있는
판사의 심문도 받았다. 그 심문관은 머리가 좋았고, 도나는 나중에 그가 KGB라고
말했다.
도나는 결국 ‘국제법 위반과 라오스 국민을 괴롭힌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들은 그녀가 미국 정부를 위해서 일하며, 많은 사람들이 돈을 위해서 미군포로
를 찾게 했다고 말했다. 결국 두 미국인은 1천 5백 불을 내면 라오스에서 풀어주
겠다고 했다. 미국 대사관은 이 돈을 거부했고 좀 더 신중하게 벌금이 부과되어야
한다고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참전자의 날에, 베트남 참전자들은 라오스 미국
대사관이 돈으로 거래했다고 항의를 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둘은 단순침입의
이유로 풀려났다.
강물에 현상금 전단을 던지는 햄프톤
도나는 라오스에서 풀려나 태국으로 갔고, 그러자 태국의 한 대위가 일주일
간 구금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도나는 몸도 아프고 해서 호텔로 가서 의료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 41일간 라오스 공산당 치하에서 있었다고 대위
에게 항변했다. 만약 일주일간 태국 감옥에 있으면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고,
대위는 그녀를 풀어주었다.
1989년 2월, 홈커밍 그룹은 전 의원인 빌리 헨든의 선도아래 베트남 어선으로
타고 하이난 섬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6-7백 개의 전단이 든 풍선을 베트
남과 라오스를 향해 날렸다.
미국 정부는 2006년 공식적으로 보상금제도를 다시 만들었다. 언론에 공개된
바에 의하면, 미국 정부는 이라크 태생 미군 통역관이 바그다드에서 3주 전에
납치되었는데, 2006년 11월 11일, 5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다. 그는 41세의
예비군으로 미시건 출신이었고, 10월 23일 이라크에 있던 아내 집을 방문했
다가 총을 든 범인들에게 납치되었다. 납치자들은 25만 달러를 요구했다.
베트남전, 헬기에서 전단을 뿌리는 심리전 부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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