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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의 명장|베트남전쟁

구름위 2013. 11. 25.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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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한 나라에도 명장은 있다. 문제는 그런 능력을

위에서 어떻게 정확히 관리하고 지원하느냐도

적지 않은 전투력의 관건인 것 같다.

 

전의 테트 공세 당시 '후에'시의 전투에서 언급된

당시 남베트남 보병1사단장 느고 광 트롱 장군에

관한 글입니다.

 

 

 

가장 영민한 지휘관 :  Ngo Quang Truong

 

 


느고 쾅 트롱(Ngo Quang Truong)은

버지니아 페어맥스에서 2007년 1월 22일 암으로 사망했다.

 

이때 버지니아 주 정부는 특별한 추모행사를 가졌다.

베트남전 당시 남베트남군에서의 공훈 때문이었다.

그는 동남아시아를 통 틀어 가장 뛰어난 장군 중에 하나였다.

 

부르스 팔머 장군은 그의 책 ‘25년 간의 전쟁’에서 그를

“터프하고, 경험이 많은 전투 지휘관.”라고 표현했고,

또한 “남베트남군 중에서 최고의 야전 지휘관이다.”라고

평가했다.

 

1968-1872년 사이 베트남사령관을 지낸 클링턴 아브람스 장군도

그가 미군 사단장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트롱은 1929년 메콩 삼각주의 키엔 호아에서 태어났다. 미 타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예비군 장교 학교를 들어갔다. 그리고 1954년 남베트남군

장교가 되었다. 트롱은 이후 낙하산 학교에 들어갔고, 이후 12년간 공수

여단에서 근무했고, 이후 5공수대대 1중대장을 역임했다.


1955년 그는 사이공 정부에 반항하는 빈 욱옌의 강변 해적을 진압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그는 중위로 진급했다. 1964년, 그는 소령으로 진급

했고 5공수대대의 대대장이 되었다. 그때 그는 쾅 나이 지역의 비밀지역에

헬기랜딩으로 공격을 감행했고, 베트콩의 본부를 파괴했다. 당시 그는

카리스마적인 명성이 생겼고, 또한 부하들을 잘 돌보는 지휘관이기도 했다.


그리고 1965년에는 베트콩 7사단의 있던 옹 트란 산에 랜딩공격을 했다.

그의 대대는 2개 베트콩 연대와 2일간 격전을 치렀고, 그의 대대원들도

희생이 컸다. 이 작전으로 인해 그는 다시 중령으로 진급했고, 큰 훈장을

받는다.


이후 1965년 말, 그는 공수여단의 참모장이 된다. 그는 이러한 비전투보직

에서는 염증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사이공에서도 알려질 정도로 용기와

공명함이 알려지게 된다. 1965년부터 75년까지 남베트남 참모총장을 지냈던

카오 반 비엔 장군은 그를 이렇게 표현했다.

 

“공수사단에서 제대로 된 최고의 지휘관 중 하나였다.”

 

 

 

 


1966년, 중부 베트남에서 격렬한 시민 혼란이 일어났다.

 

그는 후에 시의 보병1사단장으로 지명받는다.

 

트롱은 원래 불교도였는데, 불교도의 전투거부를 통제해야 하는 불쾌한 일을 겪는다.

그래서 트롱을 지휘관으로 사이공이 임명한 것이다. 당시 1사단의 평판은 매우 나빴고,

트롱은 부대에 가자마자 모델링을 통해서 다시 부대를 개편한다. 그리고 결국 남베트남

최고 사단으로 변모시킨다. 당시 그 전술1군단지역에 있던 미 해병 제3상륙군의 로버트

커쉬맨 장군과 군단장 리차드 스틸웰 장군은 “트롱의 노력으로 남베트남 1사단은 마치

어느 미군부대와도 견줄만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라고 평했다.


미군 역사는 트롱을 ‘헌신적이며, 겸손하며, 상상력이 풍부하고, 전술적으로 뛰어나다,’

라고 기록했다. 웨스트모어랜드 장군도 “트롱은 남베트남 지도자급에서 가장 능력 있는

높은 레벨에 속한다.”라고 평가했다.


1967년 트롱은 보병 1사단 병력으로 투아 티엔 지방에서 많은

베트콩 게릴라들과 전투를 벌여 그 공으로 준장으로 진급한다.


1968년 테트 공세 당시는, 그는 보병1사단장으로 후에에서 혈전을 벌였다.

이 테트 공세 2일 전에 호에에 있던 투옹은 ‘무언가 이상한 기운을 느낀다,’

라는 생각으로 모든 병력에 경계태세를 발령했다. 하룻밤에 지나 아무 일이

없자, 그의 고문관이 떠났으나 그는 계속 경계태세를 유지했다.

 


후에(Hue)시의 구정공세 전투는 1968년 1월 31일 새벽 3시 30분에 시작되었다.

월맹군 6연대의 2개 대대가 후에를 공격하고, 월맹군 4연대가 퍼퓸강 일대의

맥브이 구역을 공격했다. 트통 장군은 먼저 즉각반응중대를 출동시켜 사단

본부를 방어케 하고, 3연대는 후에 시 북쪽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남베트남군 공수대대 3개를 보강한다. 그의 사단 본부는 후에의 성채

북서쪽 끝에 있었다. 다음날, 트롱 장군은 성채를 모두 되찾기 위하여 반격을

명령한다. 이때 미해병대가 남쪽에서 작전을 시작한다.


2월 4일, 미해병 1연대 1대대가 5연대 2대대와 함께 월맹군이 장악한 지역에

house-to-house 전투를 시작한다. 2월 9일, 후에 시의 제방 남쪽이 완전히

평정되었다. 남베트남 1사단은 2월 12일 강의 북쪽을 공격했고, 1사단은 2개의

남베트남 해병대대가 보강되었다. 트롱 사단장은 미군에게도 지원을 요청해

미해병5연대 1대대를 지원받는다. 미국과 남베트남 해병대와 남베트남 육군은

계속 진압작전을 후에 시에서 계속했다. 시가전의 연속이었다.


1968년 3월 2일, 후에 전투는 공식적으로 끝났다. 후에 시의 절반 가량이 파괴

되고 피해를 입었다. 남베트남 육군과 해병대는 총 384명이 전사했고, 1,830

명이 부상당했다. 미해병대는 총 142명이 전사하고 857명이 부상당했다. 미

육군은 후에 시 외곽 전투에서 74명이 전사하고 507명이 부상당했다.


트롱 장군은 훌륭한 지휘를 발휘했고, 또한 그의 병력들도 조용한 가운데 인상

적인 전투를 했다. 트롱 장군과 같이 작전하면서 친구가 되었던 미군 중장

커쉬맨은 트롱의 후에 전투에 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사방이 월맹군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살아남았다.

 월맹군은 한번도 트롱 장군의 CP를 점령하지 못했다.

 물론 후에 시의 성채의 나머지는 그들이 점령하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테트 공세 전투 후, 트롱 장군은 소장으로 특별진급 된다.

 

그리고 1970년 8월,

그는 메콩 델타 칸 토에 있는 4군단장으로 취임한다.

 

1971년 6월에는 중장으로 다시 진급한다. 이 4군단은 사이공 남쪽의

메콩 델타를 책임지는 구역이었다. 트롱 장군은 취임하자 베트남과

캄보디아 국경선의 전초기지들을 다시 재정립했다. 베트콩의 활동을

막고 보급물자의 유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트롱 장군은 4군단의 3개 사단을 연대 단위의 전투단으로 만들었고, 지역의

전통적인 베트콩 거점들을 공격해서 파괴했다. 매우 꼼꼼하고 성실한 스타일의

이 트롱 장군은 ‘귀신처럼 활동하고 위장하는 적’을 상대해야만 했다. 그는 그

지역의 민간군사조직의 능력을 발전시켰고, 이 민간 군사조직의 자체적인

메콩 델타에 대한 방어계획을 완벽하게 만들었다.

 


1972년 3월 30일,

북베트남은 이른바 ‘부활절 공세(Easter Offensive)’를 시작한다.

 

이 공격에는 월맹군 14개 보병사단과 26개의 개별적 연대가 가담하여,

병력은 12만 명이 넘었고, 1,200대의 탱크와 기갑차량을 동원했다.

월맹군의 목표는 광트리 북쪽의 컨텀과 안 록이었다.


공격은 매우 날씨가 좋은 금요일에 시작되었다. 전술1군단 지역의

비무장지대 남쪽의 화력지원진지들이 월맹군의 강한 포격을 받았다.

 

다음날, 월맹군 B-5 Front(남베트남 내 인민전선)의 3개 사단이 비무장지대

남쪽 화력지원진지를 공격한다. 상대는 싱싱한 남베트남 3사단이었다. 남

베트남군은 3대 1의 병력 열세였고, 월맹군은 남쪽으로 밀어부쳤다. 남베트남

군의 화력지원진지가 계속 격파되면서 4만 명의 월맹군이 광트리에 밀어닥쳤다.

결국 광트리의 남베트남군은 후퇴한다. 이 전투를 통해서 남베트남군 3사단은

흩어졌고 전투제대로써의 기능이 사라져버렸다.

 

(B-5 Front: 조금 설명이 복잡한데, 월맹군은 이러한 식으로

 각자 파트에 대한 넘버를 붙여서 관리했다. 쉽게 말하면 이는

 육해공 남베트남내 전력 등을 순서로 해서 먹인 넘버인데,

 군사 정권이 각 파트를 군대 식으로 배열시킨 것과 비슷하다)


1972년 5월 1일, 월맹군은 광트리를 점령했고,

이것은 첫 번째 공격지역의 핵심도시였다.

월맹군은 도시 일대를 지배하기 시작했고,

남쪽으로 공격을 계속 시도했다. 


당시 대통령 느구엔 반 티우는 1군단장 호앙 옥안 람 장군으로부터

‘북베트남군의 전진을 막을 수 없다.’라는 보고를 받는다. 그러나 티우

대통령은 1군단장에 트롱을 임명한다. 그는 베트남 남부를 떠나 다낭에

5월 3일 도착했다. 역사가 루이스 소어리는 강한 카리스마의 ‘트롱 장군이

부임함으로써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그의 존재 자체가 전술

1군단지역의 희망을 다시 떠오르게 했다,’라고 표현했다. 


트롱 장군은 빠르게 지휘권을 인수했고, 바로 방송을 통해서 모든 이탈 군인은

자신의 본대로 24시간 안에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복귀하지 않으면 총살이라고

엄명했다. 그는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후에를 지킬 것이며, 월맹군을 격퇴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는 손수 뽑은 참모들을 후에로 불렀다.

 

시 후에는 월맹군의 포위공격으로 패닉 상태였다. 상황을 진정시키고 그는

월맹군의 전진을 막기 위한 포괄적인 방어계획을 세웠다. 같은 시간, 그는

남베트남군의 재건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는 모든 베트남군 부대에

재교육을 실시했다. 그리고 미국이 준 새로운 장비를 이용해서 프로그램을

가속화했다.


5월 중순, 후에의 방어는 견고해졌고, 상황은 안정되었고, 부대들의 분위기도

일신되었다. 트롱은 3개 사단을 이용하여 잃어버린 영토에 대한 반격을 시작했다.

미군의 화력이 돕고 있었다. B-52가 폭격을 시작했고, 미 공군의 근접항공지원도

시작되었다. 미 해군과 해병대의 전투기와 폭격기들도 동원되었다. 미제7함대도

포격을 해주었다.


결국 트롱은 도로를 따라 북상하여 월맹군 6개 사단을 격파하고 광트리를

9월 16일 수복했다. 비무장지대 근처의 많은 화력지원진지들도 되찾았다.

10월말이 되자 1군단은 안정되었다. 광트리는 수복되었고 콘텀과 안록도

견고해졌다. 그곳은 부활절 공세 월맹군의 심장과 같은 지역이었다. 그는

당시 비참한 상황이었던 그곳의 상황을 개인적 리더쉽으로 되돌려 놓았다. 


1975년, 트롱은 다시 거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베트남 중부지대의 남베트남군이

월맹군의 맹공에 무어진 것이다. 티우 대통령은 트롱에게 후에를 죽음으로 사수

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후에의 방어를 강화했고 꼭 사수할 것을 다짐했다.

 

 


당시 남베트남 티우 대통령과

군사 최고지도자들은 사이공에서 일주일간의 토론을 벌였다.

 

그들은 서로를 비난하고 있었고,

불가능한 전투명령과 제안을 채택했다.

 

이 토론 동안,

트롱은 사이공으로부터 후에를 버리라는 명령을 받는다.

 

당시 트롱은 후에의 방어가 여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명령이므로 후퇴준비를 했다.

 

그러나 후퇴를 실행하기 마지막 몇 분 전에 다시, 어떠한 댓가를 치르더라고

후에를 사수하라는 명령이 다시 내려왔다. 당시 타임지의 한 통신원은 이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것은 요요현상과 같았다. 처음에 티우 대통령은 후에에서 후퇴하고

 다낭에서 방어하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명령을 취소하고 후에를 방어

 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마음을 바꾸어 또다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혼란이 찾아왔다. 어쨌거나 트롱은 새로운 명령을 따르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후에에서의 후퇴는 중부 고원지대에서 재난으로 이어

지게 된다. 엄청난 포탄이 떨어지고 있는 가운데, 트롱의 부대들은 서로 떨어져

있었다.

 

다시 작전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고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이 후에 시에서의

철수는 크나큰 실수였다. 예하 부대들의 지휘력이 떨어졌고, 제대들이 무너졌으며,

부대원들이 자신의 가족들을 챙기는 바람에 총체적인 혼란에 빠졌다. 


다낭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다낭은 당시 월맹군 2개 사단으로부터 도시가 포격

당하고 있었다. 트롱은 바다로의 직접탈출을 노력했다. 그러나 아수라장이

되었고, 군인과 민간인 모두 남쪽으로 빨리 도주하려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다낭은 1975년, 3월 30일 월맹군에 함락되었다. 3백만명 피난민이 생겼고,

4개의 정규군부대가  붕괴되었다. 이 중에는 붕괴된 부대 중에는, 최고 정예로

꼽히던 남베트남 제1보병사단과 해병사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트롱은 당시 필사적으로 후에에서 버티고 싶어 했었다. 그러나 사이공의

티우 대통령의 명령으로 병력들이 방어를 할 수 없는 상태로 위치되어

버렸다. 다낭이 함락되자, 그와 참모들은 베트남 해군의 함정을 타고

후퇴했다. 트롱의 병력의 황폐화는 그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고, 특별히

제1보병사단이 그랬다.


그가 사이공에 도착하자, 그가 신경성 쇠약으로 입원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트롱과 같이 근무를 했었던 미군 장교들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듣게 되었다.

결국 트롱 장군은 사이공이 함락 될 때, 가족들을 모두 챙겨 미군 선박을 타고

미국으로 떠났다.


트롱 장군의 가족은 약간의 이유로 가족을 헤어져 있어야 했다. 그의 아내와

아들은 아칸소에, 그의 딸과 둘째 아들은 시애틀의 주정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의 막내아들은 4세였는데 영어를 할 줄 몰랐다. 그는 캘리포니아에 머물렀다.

몇 주가 지나서 가족은 다시 합치게 되었다.


가족히 모두 합류하자 트롱과 가족들은 버지니아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트롱은

미육군 전사중앙기록소를 위하여 여러 개의 베트남 전쟁에 관한 책을 저술했다.

1983년, 그는 미국시민이 되었다. 그리고 은퇴하는 1994년까지 미국 철도협회의

컴퓨터 분석가로 일했다.


남베트남이 함락되어도 트롱의 평판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노만 슈왈츠코프 장군은 1992년에 발간한 자서전에서 그를 일컬어,

“내가 알고 있는 인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전술지휘관이다. 그는 15년

동안 그의 경험으로 지역/전술적인 것을 아주 간단하게 정리했다.

트롱은 자신들이 지금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다.”라고 기술했다.


슈왈츠코프는 또한 이렇게 부가적으로 덧붙였다.


“그는 나의 군사적 재능과 다르다. 그는 150센티미터 정도에 매우 마른

사람이다. 어깨에는 군살이 있었고, 머리는 체구에 비하여 컸다.... 그의

얼굴은 마르고 강하게 보였다. 그리고 항상 입술에 담배를 물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그의 참모들과 병사들에게 존경받고 있고, 그의 능력을

알고 있는 북베트남 장군들은 그를 두려워했었다.”

 


남베트남의 대부분의 장군들은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고 승진했다.

그러나 트롱은 결함이 없고 정직했다.  그를 아는 가까운 친구들은

그를 ‘스파르타인 같은 금욕주의자’라고 말한다.

 

그와 가까웠던 커쉬맨 중장은 그가 양복을 입은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4군단장 시절의 칸 토에서 그의 아내는 수수한 관사 마당에서

돼지를 키웠다. 커쉬맨 장군은 그를 나중에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상상력이 풍부했고, 항상 부대를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병사들과 자신의 가족들 거주상태가 비슷했다.”


그는 겸손하고 이기적이지 않은 성품으로 그의 직업에 헌신했다.

그러나 군인으로써의 충성심은 매우 열렬했고, 예하 장병들의

편의를 도모했다. 한번은 비가 오는 가운데 적의 포탄이 엄청나게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는 진흙탕 속에서 병사들과 같이 버티면서

지휘했다.

 

그는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했고, 취미를 즐기지 않았다. 트롱은

자신의 조카에게 안전한 보직을 주라는 요청을 거절했고, 대답도

하지 않았으며, 그의 조카는 전투에서 전사했다.


결과적으로 트롱 장군은 좋은 평판을 받을만했고 뛰어난 장교였다.

그리고 미군과 남베트남군 장교들 모두에게 존경받았다. 느고 광

트롱(Ngo Quang Truong)의 인생은 국가에 대한 자신의 헌신이었다.

아마도 전사들은 평화중에도 자신의 책무를 다하는 것 같다.



제임스 윌뱅크스 교수가 2007년 베트남 매거진에 기고한 글.

 

(미육군 장성참모학교 군사역사 학과장.

그는 안 록 전투에서 미군 군사고문관으로 은성훈장을 수여받은 바 있다.)

 

(마지막 즈음에, 미국 항공모함으로 탈출하여 안도의 한숨을 쉬는 남베트남 국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