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줄루 소대의 마지막 전투 (Navy SEAL)|베트남전쟁

구름위 2013. 11. 25.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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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lu Platoon’s Final Fight in Vietnam

 

‘이것은 말로 표현하기 뭐한 작전,’이었다.

미 해군 지휘관 중위 그랜트 텔퍼의 말이다.

 

 “우리는 베트남 전개기간인 6개월 동안 부상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텔퍼 중위의 네이비씰 줄루(Z)소대는 1971년 1월 곧 본토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리고 재난이 닥쳤다. 5명의 씰 대원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연기되었다. 그중 3명은,

사실상, 의료상의 기적이 없이는 살아나기 힘들었다. 텔퍼 중위가 이 기적 같은 이야기를

회고한다.


그는 1941년 7월 시애틀에서 태어났고 그 지역에서 자랐다. 시애틀 대학 예비학교를 졸업

하고, 그는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스키도 매우 잘 탔고 풋볼팀에서 뛰었으며,

수영을 아주 잘했다. 그는 워싱턴 호수에서 중간의 섬까지 3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수영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미 해군 네이비 씰 팀의 대원들과는 달리 그는 어려서 총을 쏘거나

사냥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해군 사관학교에서 그는 첫 해, 항상 기숙사 모포 속에서 후레쉬를 비추어가면서 공부했다.

그로 인해 시력이 떨어졌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키클롭스였다. (키클롭스: 외눈박이) 그의

야간 시력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래서 안경을 쓰지 않고는 사격을 하기 힘들었다.


SEAL 훈련 동안, 텔퍼는 베트콩들이 사용하는 57밀리 무반동총을 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준기이 위치 때문이었다. 안경 없이는 이런 화기를 쏠 수 없었다. 그러나

전장에서는 안경을 쓸 수 없었다. 그것이 반짝여서 노출이 되었고, 저격수가 되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의 오른쪽 눈은 정말 안 좋았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적응하기 위하여

야간훈련을 더 했다.

 

 

(1968년의 미 네이비 씰 대원, 육중한 M-60의 화력과

 위장포로 된 베레모가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1971년 1월 말, 그의 소대가 마지막 작전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특별히 행복하지 않았다.

중위는 보통 야간작전을 했으나, 소대는 근 한 달간 주간에 작전했다. 베트남 재정착민

들을 지원해야 했기 때문이다.


1970년 말 동안, 남베트남 정부는 An Xuyen 지방의 주민들을 재정주 시키기로 결정했다.

베트콩을 무서워해서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카 마우 반도의 ‘남 캄’ 지역으로의 이주였다.

 

줄루 소대는 남 칸의 미해군 공병지역 베이스에 있었다. 물에 떠 있는 기지였다. 줄루 소대는

남 칸에 새로운 막사에 들어가서 이주민들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을 주로 주간에

이동시켰기 때문에 씰 대원들도 주간 행동에 익숙해졌다.


줄루 소대는 주기적으로 해군 헬기를 타고 주간에 남 칸 동쪽의 ‘농장지대’라고 하는 곳에서

자주 작전했다. 이곳에서 남베트남군/민간군사조직과 베트콩 게릴라 사이에 전투가 번번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베트콩들은 민간인의 이주를 방해했다. 씰은 이들을 훈련시키기도 했으나,

이런 임무 때문에 자신들이 노출되기 시작하자 작전에 불안감을 느꼈다. 그들의 주간 작전은

사실상 광고나 다름없었다. 텔터 소대장은 이렇게 말했다.

 

 “주간 작전에서 헬기까지 타고 기도비닉을 유지하기는 힘들었다.”  


재정착민 이주도 돕고 정찰도 계속했다. 그래서 주간 수색의 전술도 높아지기는 했다.

줄루 소대의 대부분은 본토로 돌아가기 위해 이미 짐을 꾸려놓고 있었다. 이들은 위험한

작전으로부터 안전하게 모두가 귀국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남베트남군은 부가적인 정찰을 청했고, 텔퍼 중위는 주간 작전을 준비했다. 그는 먼저 부유

기지의 미해군 경공격헬기부대 씨울프의 지휘관을 찾았다. 그들은 두 대의 씨울프 헬기가

화력지원에 동원된다고 알려 주었다.

 


1월 29일 밤,

텔퍼와 넬슨 소위는 맥주를 마시면서 두 대의 헬기로 작전을 준비했다.


그 같은 날 저녁, 텔퍼 중위는 소대원들에게 경계태세를 유지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5명의

씰 대원에게 작전에 참가시켜서 필수 작전장비들을 챙기게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은 맥주를

3깡으로 제한시켰다. 대원이 탈이 나면 작전에 지장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기는 높았다. 줄루

소대의 이전 58개 작전에서 아무런 사상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1971년 1월 30일, 오전 9시 30분, 텔퍼 중위와 넬슨은 헬기를 타고 베트콩 베이스 의심

지점에 침투했다. 한 강의 북쪽 1.5킬로미터 지점이었다.


정오가 되었을 때, 텔퍼 중위는 기지에 있던 나머지 5명의 대원에게 출동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헬기 조종사에게 작전을 브리핑하고 협조를 당부했다. 중위는 대원들에게 비교적

적은 탄약과 폭발물만을 휴대하라고 지시했다. 한 베트콩 거점을 제거하는 것뿐이었다.


오후 1시 30분, 6명의 분대가 남 칸의 베이스로부터 헬기로 이륙했다. 텔퍼 중위는 더 태우고

싶었지만 헬기 탑승인원에 제한이 있었다. 맑은 날씨 속에서 헬기는 침투지점 20킬로미터

북동쪽에 랜딩 했다. 원래 계획한 지점에서 1.5킬로미터 거리였다.


게리 로랜스, 그는 자동화기 사수로 텔퍼 중위 옆에 앉아 있었다. 그가 갑자기 헬기 엔진음을

뚫고 고함을 쳤다. “아로요가 맞았어!” 텔퍼 중위는 총소리를 듣지 못했다. 마르커스 아로요는

무전병이었다. 아마도 어떤 헬기의 파편조각에 맞은 것 같았다. 중위는 놀라서 소리쳤다.

 

“무엇에 맞은 거야!” 하면서 아로요를 보았고, 분명히 맞은 것 같았다.


도날드 퓨트렐은 자동화기 사수였고, 큰 의무낭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로렌스가 아료요에게

다가갔다. 그는 분명히 AK-47 7.62밀리 탄환으로 왼쪽 어깨를 맞았다. 둘은 아로요의 군장과

상의를 벗기고 압박붕대를 감았다. 첫 번째 쇼크 후에 그의 고통은 점차 늘어났다. 그래서 몰핀을

놓았다. 그 동안 텔퍼 중위는 조종사에게 기수를 돌려 남 캄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분대는 아로요를 남 캄에서 내려 대기하던 앰뷸런스에 실었다. 씰팀은 충격도 받고 화도 났다.

지난 6개월간 부상자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중상자였다. 그 원인도 매우 야릇

하고 초자연적이었다. 헬기 조종사와 승무원들은 헬기에 총구멍을 찾았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분명히 야로요의 어깨에는 1인치 크기 두 발의 AK-47 총구멍이 나 있었다. 아마도 총알은

탑승칸의 열려진 문으로 날아온 것 같았다. 그러나 통계적으로 너무 불합리한 것이었다.


실려가던 아료요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내 역할은 누가 하지?” 이 시점에서

작전은 조금 새롭고 감정적이 되었다. 당시 네이비 씰 대원들의 룰이 있었다. 공격을 당

하면 그 지역에 빠져나와 다시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델퍼 중위와 소대원들은

그 작전으로 베트남에서 유일무이한 욕구불만을 느꼈다.


1월 30일,

침투는 그들의 베트남에서의 마지막 작전이었다.

 

씰 팀은 복수를 하고 싶어 했다.


줄루 소대의 나머지 대원들은 격앙된 상태로 다시 두 번째 이륙을 했다. 텔퍼 중위는

아로요가 맞은 곳에 반드시 랜딩해 보기로 했다. 씰팀과 항공기 승무원 모두 아로요가

맞은 총알은, 당시 지상의 풀과 나무로 엄폐된 도랑에서 올라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은 원래 목적지에서 2마일 서쪽이었다. 텔퍼 중위는 넬슨 중위가 지휘하는

씨울프 건쉽에게 말했다.

 

“만약 사격전이 일어나면, 도랑 남쪽에서 북쪽으로 사격을 가해주시오.”


씰팀은 도랑의 서쪽에 랜딩하기로 했고,

그 옆에는 수평으로 다른 도랑이 있었다.


아로요가 빠지면서 분대의 화력은 급감했고 통신도 그러했다. 아로요는 CAR-15 소총에

40밀리 유탄발사기를 달고 있었고 또한 훌륭한 통신병이었다. 줄루 소대의 부소대장은

토마스 리처드 소위였는데, 그는 정찰 시에 스토너 경기관총을 휴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리차드는 또한 P-77 무전기를 메고 있었다. 리츠드 소위도 아로요가 후송되었을 때

부상을 목격하고 자극 된 상태였다.  

 

 

 


남 칸에서 다시 이륙한지 15분 정도 되었을 때, 씰 분대는 남서쪽의 새로운 목표에 접근

하고 있었다. 델퍼 중위의 분대는 오후 2시 30분 랜딩했다. 위치는 이전 비행에서 총격을

받은 논의 개활지 도랑에서 250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넬슨이 통제하는 두 대의 씨울프

건쉽 두 대가 몇 분 거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침투는 매끄러웠다. 텔퍼의 팀은 랜딩해

50미터 정도 북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북쪽으로 이동하자마자 소총사격이 분대 주변으로 날아왔다. 총격은 조금 위험한

편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목표인 도랑 사이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텔퍼 팀과 150미터

거리였다. 총의 종류는 여러 개의 AK-47이었다. 이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그 지역에서

그 자동화기를 쓴다는 것은 베트콩 정규군이나 잘 무장되고 훈련된 지역 베트콩일 수

있었다. 당시까지 씰 팀은 기관총사격을 받은 적이 없었다.


텔퍼는 P-77로 씨울프 헬기를 불렀고, 도랑 남과 북에 모두 강하게 때려달라고 했다.

씨울프는 곧 나타났고, 로켓과 미니건을 쏘기 시작했다. 텔퍼 중위는 당시 야자나무

근처에서 헬기를 향해 총을 쏘는 베트콩을 목격했다. 그때 퓨터렐이 로켓 파편인지

야자나무 파편인지를 얼굴에 맞았다. 씨울프의 공격으로 소음과 연기 그리고 잡물들이

날렸다. 건쉽 공격은 인상적이었다. 베트콩들의 사격이 사라졌다.


헬기에서는 개활지에 두 명의 베트콩이 죽은 것처럼 쓰러져 있는 것이 보인다고 했다.

도랑의 동쪽이었다. 그리고 옆에 총도 보인다고 했다. 그리고 적어도 한 명이 북쪽으로

도주하는 것을 보았다고도 했다. 돌이켜보면 헬기에서 넬슨이 말한 것은 작전에 결정

적인 것을 묘사한 것이었다. 씰팀은 간파되었고 사격을 받았다.  텔퍼 중위는 씰팀을

위험 속으로 인도할 명백한 가능성에 직면했다.


그러나 두 개의 것이 그를 고민하게 했다. 첫 번째, 그는 아로요에게 중상을 입힌

베트콩의 확실한 증거롤 갖고 싶었다. 둘째, 베트콩 두 명이 죽고 한 명이 도주

한다는 것에 고무된 것이다.


텔퍼 중위는 건쉽에게 북쪽으로 달아나는 베트콩은 놔두라고 말했다. 정찰팀은

수풀로 커버된 도랑을 따라서 천천히 이동했다. 그 옆 수평으로 전에 베트콩이

있던 도랑이 나 있었다. 50미터 동쪽이었다. 중위는 분대의 무드에 만족했다.


아무도 다가올 재난을 예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외로, 제임스 로랜드는 중위의

전진 명령에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완전히 죽었는지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원 간격을 더 벌려야 합니다. 한 명이 안전하게 가면 뒤따라오십시오.”


날은 뜨거웠으나 습하지는 않았고, 하늘에는 솜털 같은 하얀 구름이 가득했다.

팀은 조용히 도랑을 따라서 북쪽으로 이동했고, 이어 오른쪽의 또 다른 도랑으로

계속 이동했다. 보기에 베트콩 거점은 비어 있는 듯 했다.  로랜드는 다른 도랑으로

이어지는 곳으로 천천히 가로질렀다. 그리고 마지막 대원인 올리버 헤지가 통과할

때까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로랜드가 포인트맨으로 베트콩이 있던 도랑에서 20미터 정도를 더 나갔다. 텔퍼 중위는

그 뒤 6미터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포인터 로랜드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본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마른 논으로 떨어졌다.

 

날아온 총알이 로랜드의 복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관통해서 나갔다.  총알은 오른쪽

등 쪽을 뚫고 나갔다. 당시 그는 C-4 플라스틱 폭약 덩어리를 휴대하고 있었는데,

기적적으로 폭약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땅에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그는 등에

총알을 한 방 더 맞았다.


로랜드가 맞은 총알은, 소련제 시모노프 SKS 7.62밀리 반자동소총도 아니고,

토가레프 51권총도 아니었다. 이때 다른 대원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총과

AK-47이 날아오고 시작했다. 적들은 바로 앞의 나무와 수풀로 은폐된

도랑에 있었다.

 

그들은 엄폐하는 대신 사격을 시작했다. 텔퍼 중위는 본능적으로 쓰러진 로랜드를

돕기 위해 앞으로 나갔다. 그렇게 네 발자국 정도 앞으로 발을 디뎠을 때, 다른 총알이

오른쪽에서 날아와 그의 복부를 때렸고, 결국 그도 로랜드 옆에 쓰러지게 된다.


로랜드와 같이 텔퍼 중위도 조금 유별난 부상을 입었다. AK-47 7.62밀리 총탄이

중위의 왼쪽 도랑에서 날아와 때렸고, 그는 도랑과 논으로 쓰러졌다. 무릎을 관통한

총알은 간단했지만, 다음에 날아온 구경이 큰 총알은 그를 죽일 수도 있었다. 중위는

방향을 90도 꺾었다. 그는 젊은 소위에게 경고를 하려고 했고 그때 넓적다리에 다시

총을 맞았다. 총알은 넓적다리 대동맥 바로 옆에 맞았다. 만약 총알이 반 인치 정도만

더 돌고 들어갔다면 델퍼 중위는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처음에 중위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몇 초가 지나자 그는 다리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텔퍼는 도랑으로 기어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양쪽이 총알이 같이 교차해서

날고 있었다. 그가 기어서 돌아온 것은 매우 용감한 행동이었다. 그는 양쪽 다리와

복부에 총을 맞았다. 상태가 이렇게 되자 텔퍼는 지휘권을 부소대장인 리차드

소위에게 넘겼다. 중위는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 시작했다.


텔퍼 중위는 기어서 도랑으로 돌아왔고, 기차드 소위가 정찰 무전기를 들었다. 소위는

즉각적인 비상퇴출을 요청했고 랜딩존은 그들 위치에서 80미터 뒤쪽이었다. 퇴출

장소는 넓고 마른 논이었다. 소총탄이 계속 날아와 애처로운 소리로 공중을 가로

질렀다. 총알이 가까운 땅바닥을 파고 있었고, 두 장교는 베트콩의 사격이 왼쪽에서만

날아오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오른쪽에서도 날아오고 있었다. 씰팀은 더 이상

오래 엄폐할 곳이 없었다. 문제에 봉착했다.


스토너 경기관총을 가진 로렌스와, M-60을 가진 퓨터렐은 텔퍼 중위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중위는 로랜드를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로렌스가 로랑을 따라서 총을 쏘는

가운데, 퓨터렐이 텔퍼 중위에게 응급조치를 했다. 사방 모든 곳에서 베트콩의 총알이

때리고 있었다. 당시 헤지와 리차드도 열심히 쏘고 있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텔퍼 중위는 아로요의 40밀리 유탄 한 발을 쏘았고, 5.56밀리 탄창

하나를 비웠다. 그리고 아로요의 베스트에서 탄창을 찾던 중, 베스트에서 인스터매틱

카메라를 발견하고 놀랐다.


그 당시는 상황이 벌어진 지 7분 정도 경과한 시점이었다. 시간은 오후 3시 3분이었다.

텔퍼는 구출작전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의 부상이 있고, 로랜드는 아마도 죽은 것 같았다.

잠시 후 상황은 드라마틱하게 더욱 안 좋은 쪽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퓨터렐은 벨트탄을

어깨에 걸치고 M-60을 쏘고 있었는데, 7.62밀리 총에 맞았다. 퓨터렐이 소리쳤다.

 

“나, 가슴에 맞았어!”


총알은 가슴 왼쪽을 때렸고, 돌면서 관통했는데 파편이 일 인치 정도 심장과

왼쪽 폐 중간에서 사라졌다. 가슴의 동맥과 정맥 부근이었다.


텔퍼 중위는 그의 다리를 잡고 뒤로 끌어냈다. 중위는 처음으로 전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는 리차드 소위에게 소리쳤다. “헬기를 이곳으로 불러!” 그러나

순간 리차드 소위는 “악!”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면서 오른손을 흔들었다. 그는 다시

한번 7.62밀리 탄에 맞았고, 몇 분 만에 네 명의 사상자가 났다. 


로렌스와 헤지의 엄호를 받으면서 부상당한 씰 대원들은 도랑을 넘어서 북쪽으로

기었다. 남쪽의 도랑에 베트콩이 몰려 있었다. 누군가 100미터 떨어진 남쪽의 작은

집에서 총알이 날아온다고 목격했다.


세 명의 중상자, 로랜드, 텔퍼, 퓨터렐은 본인이 보다 높은 도랑을 기어서 넘어갈 수

이동할 수 없었다. 손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리차드 소위는 큰 도랑으로 기어 넘어갔다.

 

(리차드 소위는 나중에 미해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이 된다.)


수송헬기가 몇 미터 앞에 랜딩했다. 대원들은 고통스럽게 헬기로 향했다. 그때

헬기에 오르던 대원들은 뜨거운 총기에 손가락과 팔뚝에 화상을 입었다. 텔퍼

중위의 부상은 매우 복합적이어서 위험했다. 헬기는 이륙할 때 몇 방 총에 맞았다.

그리고 그들을 실은 반댄스(Barndance: 시골무도회) 59호 헬기도 공식적으로 베트남

마지막 작전이었다.


4명의 중상자는 일본의 미공군 병원으로 응급후송되었다. 거기서 군의관은

텔퍼, 로랜드, 퓨터렐이 목숨을 부지하기 매우 어렵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험난한 역경을 이겨낸 대원들은 점차 회복되었으나 상처는 완전히 치유

되지 못했다. 그들은 병원에서 정말 치명적인 작전이었음을 말했고, 이후

작전에 다양한 변화가 이로 인해서 생기게 되었다.


베트남 첩보원이 며칠 후에 보고한 바에 의하면, 총 65명의 베트콩 중대가

줄루 소대가 전투를 벌인 지역을 점거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중 약 30명이

1971년 1월 30일, 이 씰팀과 전투를 벌인 것으로 알려졌고, 나중에 다른

베트콩들이 합류하였고 이 시점은 씨울프 헬기가 나타난 시점이었다.

 

줄루 소대원들이 생존한 것은 행운이었다. 베트콩들은 매우 완강했고

미군 건쉽들도 모두 총격을 받았다.


2002년 베트남 매거진에 러셀 스톨피가 기고한 글.

그는 해군 역사센터에서 여러 참전자들을 인터뷰하여 기고했다.

  

(작전을 준비 중인, 베트남전 미해군 네이비 씰 대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