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후반후에 미국 정부는 군부에 물었다. "전쟁에 이길 수 있는가?"
그러자 군부가 대답했다. "이길 수 있습니다. 단, 1개 군단이 더 필요합니다."
베트남전쟁은 하나의 벡터로 보고 판단하기 매우 힘들다. 미국 군산복합체의
전쟁지연과 무기소모 의지는 현재에도 나타나는 미국이 치르는 전쟁의 매우
심각한 요소 중에 하나다. 군산복합체는 미국 언론을 장악한 유대인 그룹과
함께, 어떤 사람이 미국 대통령이 되어도 힘을 잃지 않는다. 대통령 후보들은
이미 그들과 쇼부를 봐야 한다.
베트남 땅이 섬이었다면 분명히 미국이 승리했다. 그러나 치고 빠지고 약하면
제3국으로 도주하고, 강하면 제3국을 통해서 들어오는 전쟁은 미군은 미치게
만들었고, 꽤 광활한 땅에 주둔군은 부족했고 남베트남군은 한계가 있었다.
베트남전에서 가장 고생한 부대를 굳이 따지자면 미 해병대와 101공정사단이다.
해병대는 월맹군의 직접 포격을 받으며 DMZ 바로 밑에서 싸웠고 같은 북부의 101
사단은 거대한 구역을 헬리본으로 작전했다. 기본적으로 미군 사단들은 해안지대
에 본부를 두었으나 101만은 내륙에 있었다.
처음에는 우습게 생각했다가, 점차 미 육군 특전단 그린베레가 만든 외딴 격오지
의 캠프(보통 2개 중대형 방어진지)는 매우 중요해졌다. 특전단이 호치민 루트의
종착지점에 주로 캠프를 지었기 때문이다. 이 캠프 중에서 월맹군의 과감한 지상전
으로 '함락' 당한 곳은 대표적으로 어샤우와 랑베이다.
악명 높은 어샤우 계곡의 그린베레 캠프는 1966년 3월에 점령당했고, 랑베이는
1968년 테트 공세 후반부에 점령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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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베이 캠프 함락 개요]
1968년 테트 공세 동안, 남베트남의 랑 베이(Lang Vei) 특전단캠프는 보구 엔 지압의 북베트남군
사단 연대급에 의해 강력하게 공격 받았다. 이 캠프는 미육군 그린베레 A-101팀과 CIDG 병력이
주둔한 곳으로, 이 격렬한 공격에 북베트남은 탱크까지 동원했다.
1968년 초 테트 공세에서, 월맹군이 결국 후에를 잃자, 지압 장군은 멀리 분리된 미 해병대의 케산
캠프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는 고도 후에(Hue)에서 미군병력을 빼내려는 부가적인 이유도 있
었고, 케산에 대한 공격은 라오스 국경을 통한 호치민 루트의 보급로를 더욱 공고히 하기위한 것이
기도 했다. 월맹군은 디엔 비엔 푸에서와 같은 승리를 꿈꿨다.
1968년 베트남에서, 이 랑베이는 5특전단의 한 A-camp 중 하나였고,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
었으나, 곧 타임지와 뉴스위크지 1면을 장식하게 된다. 이러한 A-team 캠프는 CIDG 타격대와 남베트
남 특전단(LLDB), 미 육군 특전단 1개 A팀이 주둔했다. 원래 캠프는 1962년 케산 지역에 먼저 만들어
졌으나 1967년 12월 A-101 팀이 들어오면서 케산에서 랑베이로 이동했고 케산은 미 해병대가 들어왔
다. 이 랑베이 캠프는 1967년 5월 4일, 북베트남 정규군의 공격으로 버려졌다가 이후 1km를 이동해서
포위전에 더욱 견고한 캠프를 만들게 된다.
캠프가 완성되자 101팀이 9월에 들어가서 작전을 시작한다. 랑베이는 라오스 국경에서 1.5km, 비무장
지대에서 35km, 9번국도를 타고 9km 거리에 미 해병대 케산기지가 있었다. 랑베이의 임무는 라오스국경
과 비무장지대를 감시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호치민 루트 중 하나였다. 101팀장 프랭크 윌로우비 대위의
지휘 아래, 브루(Bru) 산악족 4개 소총중대, 남베트남인으로 된 3개 전투정찰소대, 그리고 남베트남 팀이
하나 있었고, 나머지는 그린베레 A-101팀 13명이 있었다. 랑베이의 총 방어병력은 480명이었다.
캠프는 자동화기로 무장하고, 106밀리 무반동총 2정, 네 개 중대에 57밀리 무반동총 각 한 정이 있었다.
106밀리 하나는 캠프 남쪽 제2전투정찰소대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9번 국도를 감시하기 위해서 측면에
있었다. 각 106밀리에는 20발의 고폭탄이 있었다. 175밀리와 105밀리 등은 다양한 포격지원을 윌로우비
대위는 끌어내서 보강했다. 아래 그림에 중화기 구성이 보인다.
케산 기지는 호치민 루트를 차단하겠다는 웨스트모어랜드 장군 계획의 일부였다. 당시 지압 장군은
한 곳에 군사력을 집중해서 인상적인 승리를 원하고 있었다. 디엔 비엔 푸처럼. 그런데 서쪽(라오스)
에서 케산으로 다가서는 월맹군은 랑베이 캠프가 걸렸다. 웨스트모어랜드는 기술과 엄청난 화력으로
월맹군 우위에 있다고 확신했고, 랑베이 캠프는 케산의 전초기지처럼 일대 월맹군 공격에 대한 정보
를 모으고 있었다.
월맹군은 랑베이에서 나오는 CIDG 병력과 자주 조우하면서 강력한 교전까지 하고 있었다.
월맹군은 324B사단으로 이미 1967년 12월에 들어와 있었다.
1960년대 말 Mike Force의 모습...
101팀장 윌로우비는 도움이 필요했고, C팀장 슈겔은 반 메 투옷의 마이크포스(Mobile Strike Force)를
보낸다. 마이크포스는 그린베레가 훈련시켜 잘 무장시킨 현지민부대로, 당시 반 메 투옷 마이크포스
병력은 196명으로 된 산악족이었다. 마이크포스는 적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도록 훈련되고 다수가 공수
자격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이전의 임무에서 매우 성공적이었다. 또한 피해도 컸는데, 그로 인해
전투에 단련된 베테랑도 많았다. 이 마이크포스는 12월 22일 랑베이에 헬기로 도착했다. 곧이어
바로 라오스로 정찰작전을 시작했고 결과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1월에 마이크포스는 정찰 중, 강 건너 몇 킬로미터 지점에서 탱크들이 주기했던 장소를 발견했다.
선명한 궤도자국이 땅에 찍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정보는 사이공에서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네들의 노력은 참 좋아 보인다. 그러나 월맹군은 탱크가 없다!"
1월 24일, 미 공군 정찰기가 9번국도 상의 탱크 5대를 발견해 공중폭격을 가했다. 같은 날, 라오스
왕립33대대와 가족들이 랑베이에 나타났다. 그들은 랑베이에서 12km 떨어진 곳에 주둔하고 있었는
데, 월맹군 304사단과 325사단에 공격받아 2일 전 함락 당해 베트남 쪽으로 후퇴한 것이다. 이들은
월맹군 탱크로 공격 받았다. 윌로우비 대위는 이들을 말을 듣고 공격이 임박했다고 느꼈고 이들이
탱크로 공격받은 사실에 주목했다. 랑베이 특전단 병력은 상부에 요청해서 탱크를 잡기 위한 66밀리
LAW 대전차 로켓을 요청해 들여왔다.
이때 한 월맹군 포로가 잡혔는데, 그는 랑베이를 곧 공격당할 것이며 근처에 월맹군 기갑이 있다고
증언했다. 다시 1968년 1월 30일, 루옹 디 두라는 월맹군이 랑베이 캠프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자연스럽게 산악족이 위병을 서던 정문을 통과해 그린베레 팀하우스까지 걸어왔다. 그로인해 갑자기
엄폐하는 소동이 있었다. 루옹 일병은 월맹군 304사단 66연대 8대대의 소총수로 그의 부대는 케산
해병대 캠프를 공격했다가 큰 전상자를 낸 상태였다. 루옹은 귀순을 밝히며 그린베레 심문관의 질문
에 모두 답변했다.
그는 랑베이가 곧 공격당할 것이며 자신이 귀순하기 2일 전 밤에 새퍼팀이 이미 정찰을 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부대에서 탱크는 못 봤다고 했다. 그는 케산의 해병대에 인계되었고 거기서 심문
을 받을 때 탱크로 생각되는 기갑차량의 소음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101팀원과 CIDG 병력 중 10명이 도착한 66밀리 LAW의 교육을 새롭게 받았다. 실사격을 끝내자 남은
로켓은 총 75발이었다. 만약 월맹군의 탱크가 오면 엄폐해 66밀리를 쏠 생각이었다. 캠프 방어는 탱크
공격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다. 캠프는 작은 언덕에 개뼈 모양을 하고 있었고, 외곽 철조망에는 사슬
을 달아 적 RPG가 통과하다 터지도록 전투형으로 만든 캠프. 철조망은 3중으로 50미터에 달했고 중간
에 크레모어가 설치되어 있었다. 벙커는 유개호로 베트남에서는 보기 드문 8*8인치 재목으로 축성했다.
모든 거점은 사계협조가 되도록 만들어졌고, 각 소대와 중대가 섹터를 맡아 철조망과 크레모어를 관리
했다. 1966년의 어샤우 캠프처럼 점령당하지 않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랑베이 캠프 실제 사진
이전에 CIDG 병력 속에 침투한 베트콩들은 캠프 공격을 이끌었고, 미군은 인종적으로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왜냐하면 캠프 안에 비군사원은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고, 라오스에서 탈출한 왕립대대
는 근본적으로 마이크포스를 불신하고 있었다.
마이크포스 정찰대는 매일 적과 만났다. 당시 마이크포스와 랑베이의 산악족 중대원들은 서로 종족
이 달랐다. 그로 인해 마찰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 마이크포스 161명은 캠프에서 800미터 떨어진
곳에 감시거점 명목으로 따로 숙영을 시켰다. 1월 22일 케산 마을이 월맹군에게 공격당하자 이 마이
크포스는 유사시 마을을 보강하는 기동군 임무를 받는다. 그러나 윌로우비 대위는 이 마이크포스가
랑베이와 케산을 연결하는 물리적인 요체가 되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케산기지 해병대 지휘관인 대령은 이를 거절했고 케산 외곽에 있던 부대도 기지로 모두 불러
들였다. 랑베이에 긴급투입할 계획이었던 2개 중대도 케산마을 쪽으로 이동시켰는데, 그 마을은 이미
월맹군 수중에 떨어지고 있었다. 케산 해병대 지휘관은 특전단 어샤우 캠프를 기억했다. 어샤우 캠프
는 미 해병대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1965년 점령당했다. 해병대 증강군은 도착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생존자들은 몇 주 간 정글에서 도피 및 탈출을 시해야 했다. 랑베이는 그렇게까지 되지 않을 거라고
해병대는 약속했다.
1월 31일, 정찰대는 케산마을 근처에서 월맹군 대대급과 조우했다. 그러자 윌로우비 대위는 방어보강
을 위해 마이크포스 2/3를 캠프 안으로 이동시키고 나머지로 감시거점에 남겨 두었다. 이때 다낭에서
6명의 그린베레 대원이 과거 랑베이 캠프 위치에 있던 500명의 라오스 병력을 돕기 위해 추가로 날아
왔다. 이 6명의 그린베레 대원들은 탄약, 의료품, 식량과 울타리용 물품을 가지고 왔다.
랑베이에서 밖으로 향하는 출구. CIDG 병력은 전투캠프 바로 밖에 모여 거주했다.
2월 첫 주에 랑베이 주변 적의 활동은 점차 증가했고, 마이크포스는 매일 교전을 벌였다.
그리고 5일 저녁 적 152밀리 포탄 50발이 캠프에 떨어졌고, 이내 공격당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1968년 2월 6일 밤, 월맹군은 랑베이 캠프를 공격했다. 마이크포스 소대장 존 얼리 병장은 저녁 10시
30분, 철조망 외곽에 월맹군 새퍼들이 침투하는 소리를 듣고 두 명의 산악족 대원을 대검을 들고 내보
냈다. 포로로 잡을 생각이었다. 얼리 병장의 증언이다. "... 내 참호 모서리에서 수류탄이 터졌고, 이어
조명지뢰가 마구 터졌다. 그 불빛 아래 거대한 병력이 땅에서 일어섰고, 이어,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돌격을 시작했다."
랑베이 전투의 시작이었다.
랑베이 방어자들은 조명지뢰를 통해 두 대의 탱크를 똑똑히 목격했다.
9시가 되자, 러시아제 PT-76 경(정찰)전차 13대 정도가 나타나 랑베이 경계선 철조망으로 직진해 밀고
들어왔다. 탱크 조종수는 헤치를 열고 담배를 피우면서 탱크를 외곽선으로 몰고 들어왔다. 포탑에 앉은
탱크장은 새퍼들에게 철조망에 구멍을 내라고 명령했다. 양편이 모두 사격을 시작했다. 101팀의 의무주
특기 조수인 니콜라스 프라고스 병장은 아마도 처음 탱크를 본 사람일 것이다. 캠프 관망탑에 있던 그는
선도 탱크 앞에 두 명의 월맹군병사가 무릎을 꿇고 104중대구역 앞 철조망을 침착하게 절단하고 있었다.
그는 무전기에 대고 윌로우비 대위에게 소리쳤다. "철조망에 탱크!" 그러자 대위가 진짜인가 물었다.
"하느님 맙소사, 4대의 탱크와 2백 명이 나에게로 오고 있다.
사방 어디에나 놈들이 있다. 조명탄 올려라!"
윌로우비 대위는 지휘벙커에 1군단지역 특전단장인 다니엘 슌겔 중령과 같이 있었다. 슌겔 중령은 외교
문제로 인해서 와 있었다. 라오스군 대대장인 중령은 윌로우비 대위의 고문을 거절했고, 그와 맞는 계급
을 원해 들어온 것이다. 결국 랑베이캠프는 슌겔 중령의 지휘한다. 캠프 무전병은 해병대 포병에게 포격
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케산 기지의 해병대에게 랑베이가 탱크로 공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납득시
키기 힘들었다. 그동안 슌겔 중령은 66밀리 로켓을 무장한 대전차반을 가동시켰다. 윌로우비 대위도 포병
포격요청과 AC-47을 통한 조명탄 투하를 요청하고 있었다. (나중에 이 슌겔 중령은 덕랩 특전단 캠프가
비슷하게 거대한 지상군 공격을 받을 때 전투를 지휘하게 된다. 잇빨 주)
마이크포스의 흐레(Hre) 산악족은 탱크를 전에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방어선을 지키려고 했으나 월경
당하면서 뒤로 후퇴했다. 공격 당하고 나서 윌로우비 대위가 방어를 위한 재편성에는 30분밖에 시간이
없었다. 1시, 떠났던 마이크포스가 캠프 동쪽에 합병되어 81밀리 박격포좌 부근에 자리를 잡았고, 케산
에서 날아오는 포탄이 캠프 방어선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FAC 정찰기도 팬텀기와 A-1 스카이레이더기
들을 불러 폭격을 유도했다.
이미 캠프 안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제임스 홀트 중사는 106mm 무반동총으로 두 대의 남쪽으로 진입
하던 월맹군 탱크를 잡았다. 그는 사격을 계속해서 탄약이 떨어지기 전에 세 번째 탱크를 잡았다. 포격
과 공중지원, 그리고 홀트의 무반동총 사격에도 월맹군은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한 특전단 부사관은
4.2인치 박격포를 거의 수직을 놓고, 월맹군 수중으로 넘어간 지역에 포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월맹군
은 이미 뚫린 경계선을 통해 랑베이로 계속 범람했다.
외곽선은 월맹군에게 넘어갔고, 1시 30분이 되자 캠프 동쪽이 모두 넘어갔다. 탱크 두 대가 북쪽으로
굴러들어와 2-3중대가 후퇴하자 결국 측면이 뚫렸고 탱크 두 대가 더 북쪽에서 들어왔다. 월맹군 탱크
를 막지 못하고 CIDG 병력은 와해되어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 뚫린 북쪽으로 월맹군은 압도적으로 밀려
들었고 탱크 3대가 더 들어와 103중대의 두개 소대를 때렸다. 탱크 세대는 이제 102중대와 103중대 쪽
으로 기동했다. 생존한 CIDG 병력들은 9번 도로를 타고 케산으로 탈출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막
히고 말았다.
슌겔 중령이 지휘하는 2인조 탱크헌터팀들은 진출 중인 PT-76에 LAW를 발사했다. 66밀리의 효과는
다양했다. 일부 LAW는 불발이었고, 일부는 탱크의 경사장갑에 튕겨져 나가 폭발하지 않았다. 슌겔과
대원들은 이 LAW의 성능에 분노가 치밀었다. 결국 그들은 로켓을 버리고 백린수류탄으로 공격을 계속
했다. 얼리 병장의 말. "이런 혼란 속에서 탱크로 인해 최소한의 방어도 힘들어졌고 병사들은 그대로
위험에 노출됐다. 베트남군, 산악족, 미군들은 소총을 쏘고, 총류탄도 쏘고 기관총들도 쐈으며 남은
LAW도 쐈다. 마지막에는 탱크 포탑에 기어올라 헤치를 열려고까지 했다..."
새벽 3시, 월맹군 탱크는 지휘소 벙커 위로 굴러들어왔다. 월맹군은 지휘소(TOC)만 빼고 캠프 모든
곳을 점령했다. 지휘벙커에는 총 8명의 그린베레와 산악족대원 40명이 있었다. 월맹군은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일부 남베트남 특전대원과 CIDG 병력은 월맹군에 포로로 잡혔으나 즉결처형되었다. 다른
그린베레 대원과 CIDG 병력 일부가 캠프 곳곳에 숨어 있다가 탈출을 시도했다. 벙커의 생존자들은
케산에 증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해병대 기지 지휘관은 계획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후 전투는 좀 더 지속됐지만 랑베이는 결국 끝장났고 이들은 케산진지로 향했다...
이 사진은 기아 빅이라는 특전단 캠프의 81밀리 박격포좌 사진이다. 이들은 특전단 한 팀인데, 화기주특기 사수
부사수가 60과 81박격포를 맡았고, 현지민 대원 중에서 똑똑한 사람들 골라 사수/부사수를 따로 육성했다. 미육군
특전단이란 모든 면에서 다재다능한 베테랑이란 이미지였다. 베트남 전쟁 동안 징병자가 거의 없는 곳이기도 했고,
1개 팀이 모든 걸 해내야 했다. 몇 개의 캠프는 105밀리 자주포를 들여와 화기주특기들이 베트콩에게 포격하기도
했다. 캠프가 크고 화기가 많을 경우 의무나 다른 주특기들이 무반동총과 박격포를 배워 포격하기도 했다.
최고훈장
유진 애슐리 중사는 원래 구 랑베이 캠프에 라오스 군대와 같이 있었다. 중사는 라오스 병력과 CIDG
낙오병력을 데리고 네 번이나 랑베이 캠프 지휘벙커 구출작전을 시도했다. 그 와중에 부상을 입었고
이후 두 번째 부상으로 인해 전사했다. 그는 사후에 최고훈장이 추서되었다. (애슐리 중사는 흑인이며,
38세로, 한국전 참전 경험이 있는 부사관이었다. 잇빨 주)
헬기가 올 수 없었기 때문에 특전대원들은 구출시도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오후 4시, 강력
한 공중폭격 속에 일부가 탈출한다. 오후 6시, 전투는 끝났고 몇 명의 생존자가 케산 캠프에 도착했는
데, 이들은 대부분 흐레 블루 산악족이었다. 베트남군과 미군은 모두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당시 케산
캠프에 있던 전쟁통신원 마이클 허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케산기지 해병들은 랑베이 캠프 생존자
들이 들어오는 걸 봤다. 해병들은 특전단캠프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있었다. 총구를 내려놓고 그들의
얼굴을 봤는데, 그들 얼굴은 무표정하고 초점이 없었다. 그들은 조용히 말했다. 탱크가 있다. 탱크!..."
지압 장군은 왜 13대의 탱크와 1개 연대를 동원해서 랑베이를 공격했을까?
랑베이는 일대의 키포인트였다. 랑베이의 위치는 9번 국도에 인접해 있었고 또한 호치민루트
귀착점에 있었다. 그 호치민 루트는 케산으로 가는 보급품을 운반해야 하는 코스였고, 그래서
랑베이를 파괴하려고 했다. 랑베이는 라오스에서 오는 루트를 차단하고 있었고, 케산을 향한
월맹군의 기동로를 막고 있었다.
그러나 랑베이 방어자들은 월맹군 탱크 반을 격파했고, 월맹군 공격의 피해는 예상보다 컸다.
이로 인해 케산 기지 공격에 집중할 수 없었다. 랑베이의 저항으로 인해 월맹군은 전술을 일부
변경해야 했고, 목적했던 후에에 대한 효과는 미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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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산의 사라진 월맹군 2연대를 찾아서...
By: Toby Rashforth
아메리칼 사단은 오직 하나의 항공전대 밖에 없었고, 그래서 건쉽 지원의 한계가 있었다. 월맹군
제2연대는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전술을 선보였고, 우리 헬기들은 새로운 아침을 맞았다. 작전 2일
차, 101사단항공대 헬기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날아와 월맹군을 향해 로켓을 쐈다. 3일차에는 여단
항공대 정찰헬기들이 그들을 찾았다. 정찰기 조종사는 솟아있는 작은 고지들 몇 개에 일련의 어두운
점들을 목격했고, 자세히 보려고 내려가니 엄청난 대공사격이 날아왔다. 결국 건쉽 헬기들이 그곳을
연달아 공격했다. (아메리칼 사단: 미 보병 23사단. 밀라이 사건으로 유명하다. 잇빨 주)
그곳 적은 규율이 강했고 2일 동안 본 적들과는 달랐다. 헬기들에 탄약과 연료가 떨어지자 FAC 정찰기
는 팬텀을 불렀다. 팬텀기와 코브라의 활동으로 적은 기동을 중지했다. 그때 정찰기는 아주 가까이 날
수 있었는데, 랑베이 미 육군 특전단 캠프 지상에는 쓰러진 미군 병사들이 흙과 피가 범벅이 되어 쓰러
져 죽어 있었고, 건조가 되어 있는 상태란 것도 알 수 있었다. 각 시체마다 네 개의 대나무 장대를 묶여
있었다. 생존자는 없어 보였다.
월맹군은 조심스러웠다. 높은 곳의 잘 축성된 51밀리 대공포좌에서 월맹군이 점심을 먹는 것도 보였다.
모든 공중폭격, 재보급, 부상자 후송이 이 51구경 대공기관총으로 인해서 막혔다. 보통 7개의 대공기관
총이 한 목표를 쐈고, 그 근처엔 12정 정도의 7.72밀리 기관총들이 지원하고 있었다. 서로 간의 힘은 균
등했고 누가 더 이득인지 알 수 없었다. 중대급 이상의 기동은 곧바로 반격을 받았고 며칠간 죽음의 무도
회는 줄지 않고 계속 됐었다. 헬기를 통한 보병의 작전은 힘들어졌고 일주일 전투 끝에는 오직 OH-6 한
대와 두 대의 코브라만이 날 수 있었다. 모든 항공단의 정찰과 공격항공기들이 날았으나 세 대가 격추되
고 나머지도 크게 피해를 입었다. 24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다. 75명이나 전사했다는 루머가 돌았다. 믿을
수 있을 정도의 정황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월맹군의 51밀리 대공기관총. 그로 인해 아군의 보병과 항공기들은 참화적으로
당했다. 스타카토로 망치질을 하는 듯한 그 기관총의 소리는 죽음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2-3-4 혹은
그 이상이 그룹으로 묶인 51밀리는 다가오는 아군 보병에도 사격을 퍼부었다. 우리 헬기들의 피해는
빈약한 전술의 결과. 그 죽음의 계곡에서 핑크팀과 화이트팀 모두 쉽게 적 대공화기에 당했다. 정찰
비행은 보통 두 대의 헬기였으나 이제 5-6대로 늘어났다. 2주차에 이런 전술변화가 있자 헬기 추락률
이 떨어졌다.
이제 정찰헬기는 2-3대의 코브라가 엄호했고 휴이 헬기들도 높은 곳을 날았다. 당시 조합은 소형 LOH
정찰헬기 두 대와 코브라 두 대, 아니면 FAC 정찰기와 팬텀 두 대였다. 헬기는 정지상태를 절대로 취하
지 않았고 지상에 내려가도 3천 피트 상공에서 최대한 빠르게 하강해 저고도 체공시간을 줄이려 노력했
다. 50-1,500피트(15-450m)고도에서 자동화기는 헬기에 치명적이었다. 소형 LOH의 경우 51대공기관총
으로 쏘면 3천 피트까지 위험했다. LOH는 최고속도로 목표를 정찰하고 달아나야 했다. 그럴 때면 12정
정도의 AK-47과 6-7정의 51밀리 사격을 피할 수 없었다. LOH의 사수(gunner)와 관측수는 최대한 많은
목표에 백린탄을 지시탄으로 쐈다. 이 경헬기도 M-60과 미니건을 쐈고 M-16까지 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정찰헬기가 마킹을 하고 도피할 때는 코브라가 로켓과 40밀리 유탄을 퍼부었다. 그 지시탄을 보고
포병이 적 거점을 포격했다.
미군과 월맹군의 형세는 다소 유사했다. 그러나 보급과 뒷받침에서는 101사단 1여단과 월맹2연대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전투 3주차가 되자 월맹 2연대는 교전을 회피하고 정글로 숨으려 중대나
소대로 부대를 쪼개 흩어졌다. 미국 항공화력의 목표가 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보고에 의하면 완벽
한 시설을 갖춘 월맹군 연대병원이 작전지역 남쪽에 있었고, 2연대는 서쪽 라오스를 향해 도피하고 있
었다. 이때 항공 정찰팀은 이 죽음의 계곡 사방을 정찰하기 시작했다. 가끔 교전은 있었으나 상대 월맹
군 부대는 매우 작고 무질서한 상태였다. 월맹 2연대는 1여단을 회피했다. 그리고 항상 그랬듯 라오스
로 도주했다.
그러나 1여단 정보과는 그런 대규모 부대가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101사단 주변에서
작전하던 아메리칼 사단은 월맹2연대를 볼 수 없었다.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2연대는 아직 작전지역
에 있다. 북쪽과 남쪽에서 압박을 받자 동쪽으로 이동한 것뿐이다. 그들은 쉽게 해안지대에 도달해 1번
국도에 갈 수도 있다. 그들의 큰 이동이 사라진 것은 발견될 경우 쉽게 파괴되기 때문이다.” 작전지역
서쪽에는 탐 키라는 작은 산들이 모인 일대가 있었고, 이는 101사단 작전지역 경계선 밖이었다.
지휘부는 이렇다 할 방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을 수색할 지상군도 가용한 병력이 없었고,
그러자 커다란 고지들이 집단으로 모여 있는 이른바 Recon Zone Alpha라 하는 지역에 대한 공중
정찰을 시작하게 되었다. Alpha 지역은 유독 방치되었었다. 101사단의 누구도 그곳을 가까이 가본
적이 없었고 헬기들조차도 작전지역 상공만 들어갔다 나왔을 뿐이다. 그곳은 그 일대에서 매우 두드
러진 고지군으로, 돌아보면, 그곳에 미군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더 놀라웠다.
1969년 5월 초, 알파에 대한 공중정찰이 매일 있었다. 그 고지에는 정글이 개간되어 경작된 모습도
목격되었고 초가집도 보였다. 명백하게 그곳에서 누군가 매일 농사를 짓고 있었고, 5월초 작전이 시작
되면서 남베트남인이나 우호국 사람들을 모두 소개된 상태였다. 월맹군 2연대는 분명히 부근에 있었고,
미군은 그들의 거처와 식량을 근절시키는 전술을 쓰게 된다. 알파존의 모든 구조물은 파괴되었고 수확
물들은 불태워졌으며 모든 가축은 도살되었다. 코브라헬기들은 물소는 물론 닭까지 쏘았다. (당시 물소
들을 모두 쏴버리기 위해 코브라 헬기들은 재급유와 재무장까지 하면서 계속 해야 했다.)
정찰헬기들은 12채 정도 초가집을 불태웠는데, 그로 인해서 그 주변에 많은 벙커들이 있었음이 드러
났다. 알파존의 가장 최정상은 숨겨진 거점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렇게 소형헬기들이 작전을 하는 동안
대공사격은 한 건도 없었다. 보기에 월맹군이 거기 없어 보였다. 적을 보았다는 보고가 있기 전까지. 그
고지군에 그들이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일주일 동안 보병들이 이 죽음의 계곡을 수색했고, 여단 항공기들이 알파존 서쪽과 북쪽을 엄호하면서
정찰을 계속 했다. 그러나 발견된 것은 벙커들과 병기은익소, 매장된 시체 정도였다. 이 작전의 이름은
‘나싼 홀(Nathan Hale)’의 일부로 적을 찾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있었다. 적을 발견하지 못하자 정보부
측은 난감해 했다.
5월 마지막 주 휴일에 정전(停戰)이 있었다. 석가탄신일이었기 때문이다. 미군도 자기방어를 위한
것이 아니면 교전을 하지 말라고 지시가 내려왔다. 공중정찰은 또 알파존에 들어갔으나 결과는 허무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른 헬기를 통한 공중정찰....
경악의 순간
화이트팀이 이 일대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선도 LOH가 개활지 하나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조종사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방에 월맹군으로 꽉 차 있었다! 이 보고를 받은 후미
헬기에 타고 있던 팀장이, 보이는 사람들이 월맹군으로 확신할 수 있냐고 물으면서 그들이 뭘 하고
있냐고도 물었다. 선도 조종사의 보고에 의하면 월맹군들은 그늘에 앉아 있거나 빈둥거리고 있었다.
조종사는 그들이 월맹군임을 알았다. 그들의 혁대 금속버클이 별처럼 반짝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밑에 얼마나 많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사방 어디에나 있었다. 일부는 헬기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기는 시늉
까지 했다! 정말 혼란스러웠다. 그때 한 조종사가 사격을 받고 있나 물었고, 다른 조종사는 그 말을 듣
고 ‘사격을 받았다고?’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곧장 기총수가 발포를 시작했고 지상의 몇 명이 쓰러졌다.
후미 헬기가 분명히 M-60 기관총 소리를 들었고 그러자 미니건의 방아쇠를 당겼다. 순간, 하늘은 온갖
예광탄으로 채워졌다. 적색과 녹색 예광탄이 난무했고, 화이트팀은 코브라가 없었기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추 라이로 기수를 돌렸다.
정찰팀은 두 대의 코브라를 대동하고 다시 돌아와 그 꿀벌통을 차버리기로 했다. 그러나 팀은 이미 몇
킬로미터 전의 높은 고도에서부터 사격을 받기 시작했다. 근 한 달 전이라면 사격을 받자마자 되돌아섰
을 것이지만 이제 그렇지 않았다. 정찰헬기들은 그 속도로 계속 날면서 될 수 있는 한 빠르게 수류탄을
까서 밑으로 던졌다. 코브라에 병기가 모두 소모되자 다른 팀이 또다시 출발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사라
졌던 월맹군 2연대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고지대의 병력이 월맹군 2연대의 본진이라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공중정찰에 약간 방황하는 무리를 발견했는데 지역 베트콩 소대 같았다. 정보장교는 보병을
투입시켜 좀 더 확실하게 하고 싶어 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101사단 17공중기갑연대 2대대 정찰소대, 찰스 버키 중위가 지휘하는 ‘블루스’팀이
알파존의 봉우리 주변으로 정찰을 나갔다. 총 5대의 헬기로 정상에 병력이 랜딩했다. 헬기는 매일 같이
이륙해서 차이나해를 뒤로 하고 서쪽으로 향해 1번 국도를 넘었다. 라포인트라는 이름의 의무병도 의무
낭을 가슴에 달고 항상 이때 같이 탑승했다. 고도를 높여 구름을 흐트러트리기 시작했다. 대형을 형성해
알파존을 향해 서쪽으로 날았다. 대형 양쪽에는 미니건과 로켓, 자동유탄발사기가 장착된 건쉽헬기가 서
고 있었다.
병력이 랜딩하고 마지막 UH-1 헬기가 떠났을 때, 몇 명은 이미 죽거나 다쳤다. 버키 중위가 무전기로
전대장에게 3명의 전사자가 있다고 보고했고 무전기는 조용해졌다. 부대는 그런 종류의 빠른 교전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조종사와 승무원들은 누가 전사했는지가 관심사였다. 모두 같은 항공소대원이었
기 때문이다. 부대원들은 슬픔과 비탄에 젖었다. ‘블루스’ 팀은 완전히 박살이 났다. 조종사들이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블루스 팀은 최대한 응사를 했다. 샌더스 병장은 무전기로 교신을 하던 도중 맞아 전사했다.
라포인트 의무병은 부상자 여러 명을 살폈다.
탄약이 떨어져가자 버키 중위는 좀 더 많은 건쉽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드 피어레스 중위는 이 작전
에 나설 승무원 자원자를 물었다. 그때 젊은 준사관 스티브 킬러 부조종사가 자원했고 기총수와 탄약을
부릴 3명의 승무원도 자원했다. 그들의 이름은 잊었으나 행동은 잊혀지지 않는다. 임무는 자살행위였다.
UH-1H 건쉽의 강한 지원을 받으며 이들은 정찰존 알파 산꼭대기 랜딩존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탄약을
내리는) 그 동안 월맹군은 쏘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들의 위치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 같았으나, 진짜는
알 수 없었다.
결국 1개 보병중대를 랜딩시키기로 결정이 났고, 먼저 1개 소대가 나섰다. 랜딩존은 작았고 작은
나무들과 관목들이 주변에 있었다. 이 중대는 점차 조각이 났고 피해가 컸다. 여단 항공대가 화력
지원을 했지만 이 병력은 포위되었고, 51밀리 대공포가 위협했다.
보병중대가 랜딩존을 벗어나려고 했으나 불가능했다. 이 중대는 월맹군 2연대의 왼쪽 측면부대 중앙에
랜딩한 걸로 밝혀졌다. 교전이 벌어졌고, 월맹군연대는 매우 조직적이고 규율도 우수한 부대였다. 미군
중대와 마주한 것은 월맹군 대대급. 랜딩존에서 못 벗어난 미군중대는 잊지 못할 밤을 보내야 했다.
블루스 팀에 대한 작전권은 여단으로 넘어갔고, 그들을 태우러 갔던 헬기는 복귀했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해안선을 따라 헬기가 날고 있는데 이런 무전이 들어왔다.
“의무병 사망.”
“염병할!” 테리 필즈 중위가 중얼거렸다.
밤새도록 알파존에 대한 랜딩이 기지에서 준비되었다. 그리고 이제 병력은 늘어 보병대대를 투입하
기로 결정이 또 났다. 텐트 시티(Tent City) 추라이에서 다음날 아침 보병대대는 랜딩존 오른쪽에 선도
부대를 투입할 준비를 했다. 랜딩존은 3-4대의 헬기가 앉을 정도의 작은 크기였다. 각 소대는 랜딩하
자마자 곧바로 교전에 들어갔다. 랜딩존 경계선의 압력은 하루 종일 팽팽했고 코브라와 건쉽은 하루
종일 사격지원을 해야 했다.
마침내 3일 후, 3개 중대는 랜딩존 경계를 고정시키고 그 밖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이 전투는 전술
항공이 도움을 줄 수 없는 지형이었고, 소형 LOH 헬기들이 몇 번 보병의 진출을 확인하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적 매복에 미니건과 유탄을 발사했다. 한 LOH 헬기 승무원은 부상자 두 명의 구출에 성공
해 은성훈장을 받았다. 당시 월맹군은 15미터 거리에 있었고 결국 구해냈다.
고지 정상을 향해 진출하는 동안, 미군 101공수사단과 남베트남 육군 병력이 추가로 투입되어
적에 대한 차단병력 역할을 하고 정찰도 수행했다.
미군 강습부대는 점차 활동적이 되었고 랜딩존 모든 방향으로 진출을 시작했다. 월맹군 2연대는 이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거점들은 차례로 미군에게 점령당했고, 장비도 노획되었는데, 특히
적 연대본부를 손에 넣게 된다. 거기엔 신형군복이 무더기로 있었고, 기관총과, 대부분 미국제인 의료품들
도 발견되었다. 마침내 월맹군 연대는 평정상태로 들어갔고, 월맹군 연대장과 참모 몇이 한 거점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월맹군 2연대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월맹군 포로에 따르면, 오히려 소형헬기들로 인해 전투가 어려웠다고 증언했다. 소형 헬기들이 공격적
으로 사격을 해서 화력을 압도당했다고 했다. 이 전투는 햄버거힐도 아니고, 테트 공세도 아니고, 케산
도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한 승리였으나 잘 알려지지 않았다. 월맹군 연대를 소멸시킨 것은 역사적인 일
이다. 그러나 이 죽음의 계곡과 알파존에서 나온 병사들은 상당한 전투가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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