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베트남전의 야생 족제비

구름위 2013. 11. 23.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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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의 야생 족제비(Wild Weasels)


By John T. Correll

 

 

 

야생 족제비를 통한 샘 미슬 파괴작전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면서

소련제 SA-2 지대공 미슬은 미국 정보부에서 이미 잘 알고 있었다.

 

1960년 미 CIA의 U-2 정찰기가 격추되어 프랜시스 게리 파워스가 억류되었고, 62년엔

같은 U-2기가 쿠바 미슬 위기에서 정찰활동을 했다. 이 샘-II 미슬은 사정거리가 25마일

(40km)  목표 근처에서 가속하면 마하 3.5까지 속도를 낼 수 있다. 이는 중고도와 고고도

항공기에 치명적 무기였다. 이 미슬은 나토 암호명으로  ‘Guideline(윤곽선)’이었고, 동남

아시아에서는 "the SAM,"혹은 그냥 "Sam."이라 불렀다.


이 샘 미슬 사이트가 북베트남에서 처음 간파된 것은 1965년 4월이다. 미군 지휘관들은

그것을 바로 파괴해버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 국방부장관 맥나마라는 이 폭격

요청을 거부했다. 만약 거기 관련된 소련 기술자가 죽게 되면 전쟁이 확대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오히려 국방부 부장관인 맥나톤은 그것을 비웃었다.

 

“그걸, 북베트남 사람들이 사용한다니 웃기는 소리다!

 소련이 그냥 정치적인 액션으로 하노이에 보여준 것뿐이야.”


그러나 맥나톤의 추측은 곧 의혹을 낳게 된다.

 

1965년 7월 24일, 이 미슬이 미 공군의 F-4C를 한 대 격추시킨 것이다. 동남아시아에서 미

공군이 샘 미슬로 잃게 될 110대의 항공기 중 첫 번째였다. 샘 미슬 사이트 폭격을 보류하고

있던 백악관은 기회를 놓쳤다. 샘 미슬 사이트는 좀 더 복잡해 진 것이다. 북베트남은 모조

샘 사이트를 만들어 ‘대공포의 덫’으로 사용했다. 대공포를 집중 배치한 그 ‘덫’으로 이미 네

대의 미군 항공기가 샘 미슬 사이트를 공격하다 격추되었다.

 

 


키스 페리스가 그린 야생 족제비호

 

 

1965년 8월, 미 태평양사령부는 이른바 '강철손

(Iron Hand)‘을 시작했는데, 이는 미 해군과 공군이

북베트남 샘 미슬 사이트를 파괴하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이는 크게 효과를 보지 못했고, 그러자 미

공군에선 새롭게 ‘야생 족제비(Wild Weasel)’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두 대의 F-100F  전폭기에 이른바 ‘radar homing

and warning: RHAW’란 장비를 장착했는데, 이는 샘

미슬의 사격통제레이더를 간파하는 전파탐지 장치였다. F-100F은 20밀리 캐논포와 마킹과 공격

을 위한 로켓으로 무장했는데, 항법/전자 능력이 있는 장교를 미 공군전략사령부에서 모집해, 그

후미 좌석 뒤에 앉히고 이 특수 장비를 장착한 것이다.


고전적인 조합  


11월, 첫 번째 ‘야생 족제비’ 전폭기가 태국 코랏의 388전술전투기전대에 도착했다. 그곳은

F-105D 전폭기를 이용해서 강철손 작전을 수행하던 부대였고 12월에 작전을 시작한다. 이

‘족제비’는 전폭기들과 같이 날면서 샘미슬 사이트를 찾고 지적해 주고, 그러면 다른 전폭기

들이 그 사이트를 공대지 미슬과 폭탄으로 공격했다. 이 방법은 꽤 잘 먹혔다.

 

그러므로 전폭기들이 샘 미슬 기지가 있는 근처에 가면 ‘족제비’는 항상 같이 따라갔다. ‘족제비’

는 편대 앞에 먼저 날았다. 문제는 족제비가 구형 F-100이었는데, 이것은 400노트의 매우 느린

속도로 날았다. 이에 반해 F-105는 500노트의 속도였다. 그래서 날다보면 F-105가 자꾸 추월

하게 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명백한 결론은 이제 F-105를 족제비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였다.   2인승 F-105F에 족제비

장비가 장착되어 실험되었다. 105-기종도 100과 같이 무장은 같았으나, 그에 더해서 Shrike

(때까치) missile을 장착할 수 있었고, 이는 샘 미슬 전파 근원지를 따라가서 폭발할 수 있는

무기였다.


재래식 F-100F을 이용한 족제비는 1966년 7월에 마지막 작전을 끝냈고 이제 105로 교체되기

시작한다. 1966년 5월에 F-105로 만들어진 족제비 11대가 태국 코랏 기지에 도착했고, 다른

7대가 태국 타크리 기지 335전술전투기전대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미 공군의 이 야생 족제비 보급은, 북베트남의 샘 미슬 팽창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1966년 8월에는 약 100개의 샘 미슬 사이트가 북베트남에 전개되었고, 특히나 하노이 부근에

많았다. 나중에는 보다 남쪽에 군사/공업지대까지 배치가 팽창하게 된다.


족제비는 분명 제 역할을 했지만, 미 공군의 피해는 적지 않았다. 타크리 기지의 F-105F 총 7

대가 6주 만에 격추되었다. 이 샘 미슬들도 미군 족제비에 대해 알게 되었고, 전술까지 변화를

주고 있었다. 조종사들은 북베트남에서 총 100회의 임무를 수행하면 귀국티켓을 받을 수 있었

으나, 매우 도달하기 힘든 것이었다. F-105 조종사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기록상으로 보면,

 당신이 66회의 임무를 뛰면, 두 번 격추되어야 한다.

 그리고 구조는 두 번 중에 한번 밖에 안 된다."

 

 

 

족제비 전자전기를 몰면서 최고훈장을 탄,

조종사 토스테스 소령과 전자전 장교 존슨 대위.

출격을 준비하고 있다. 

 


원래 컨셉인, 족제비와 전폭기가 연합해서 킬러-헌터

팀이 샘미슬을 수색/파괴를 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족제비들 숫자는 매우 적었고, 호위

를 요청하는 폭격부대는 너무 많았다. 원래 룰 상에는

전폭기들이 북베트남을 폭격할때 전폭기 4대에 족제비

한대였다.

 

그러나 그럴 숫자가 없었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4대의

편대 폭격기가 모두 족제비로 하면 좋겠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폭격의 회수가 뚝 떨어져

했다. 전형적인 편대는 1번이 편대장이고 3번이 족제비였다.

 

가끔 족제비가 편대장을 한 일도 있기는 했다. 


이 족제비가 투입되는 작전은 모두 샘 미슬이 존재하는 위험지구였다. 이 족제비는 ‘미끼’ 그 자체

로 사용되기도 했다. 족제비가 편대에 앞서 몇 분 먼저 날아가는 것이다. 특히나 샘 미슬 지역으로.

 "사실, 그게 방법의 정수였다. 우리가 높이 날고, 족제비가 낮은 고도로 먼저 날아가는 것이다."

족제비의 편대장을 했던 레오 토르스네스 소령의 말이다. 그래서 월맹군 샘 미슬 레이더 조작수가

전파를 쏘면, 족제비는 날아가다 전파를 잡고 그 전파 발원지로 날아가 샘 미슬을 공격하는 것이다.

 

각 샘 미슬 사이트는 5-6개의 미슬 발사대가 별(star) 모양으로 해서 12미터 간격의 고리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 중앙에는 Fan Song radar가 장착된 벤 차량이 있고, 그 레이더의 전파를 유도

받아 목표물로 발사된다. 북베트남은 6시간 마다 이 샘 사이트를 접어서 다른 장소로 이동시켰다.


이 SA-2 미슬은 3천 피트(900m) 아래에선 효과적이지 못했다. 900미터의 갭은 대공포들이 커버

하고 있었다. 그 대공포는 사정거리 안에서 상당히 치명적이었다. 만약 족제비가 발사징후를 포착

하고 저고도로 피할 경우, 지상 대공포들의 복도를 걷는 것과 같았다.

 

이 사진과 아래 비슷한 류의 사진은 모두 베트남 작전중, 미 공군이 북베트남 상공에서 촬영한 사진.

 


(잇빨 주: 이 족제비를 제외하고 다른 방법도 동원되었다. 조기경보기가 베트남 해안 상공에 떠서

재밍(jamming)을 하는 것이다. 강력한 전파를 쏴서 월맹군의 주파수대를 중요한 시간 다운시키는

것이다. 다른 강한 출력에 동 주파수대 전파가 먹히는 것. 가장 고전적인 재밍. 어느 프로그램에 의

하면 당시는 월맹군 전체 주파수를 완전 다운 시키는 게 2-3분이 당시 고작이었다고 한다. 당시는

‘출력’의 싸움이었고, 현재는 많이 다를 것이다.

 

연평도 포격에서도 북한이 우리 대포병레이더를 교란하기 위해 이런 재밍 장비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놀랄 일이 아니다. 이런 전자전 장비가 없는 군대가 바로 재래식 군대다. 탱크가 많아도 그건

재래식 군대다. 당연히 우리나라도 있다. 주한미군 것이 훨씬 강할 것으로 또한 본다. 총포를 무력화

시키는 번외전력이 화학전과 정보/전자전이다.)


샘 미슬 사이트는 보통 매우 위장이 잘 되어 있어 발사하기 직전까지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Fan Song 레이더로 위장전파를 쏘기도 했다. 족제비에 탑승한 전자전장교는 월맹이

그 레이더를 쓸 경우 헤드셋에 ‘딱 딱’거리는 독특한 소릴 들을 수 있었고, 그 소리를 ‘방울뱀’

이란 슬랭으로 불렀다. 월맹의 Fan Song 레이더는 목표를 식별하고 발사하는데 총 75초의 시간

이 걸렸다. 그러므로 족제비는 그 시간 안에 월맹 레이더를 간파하고 먼저 공격을 해야 했다.


샘 미슬과의 전투


베트남에서 미군 전투기를 상대하는 월맹군의 SA-2 미슬은 유효사거리가 17마일이었다. 이는

당시 미군의  Shrike 공대지 미슬의 사정거리 두 배였다. 그러나 토르스네스와 그의 전자전장교

인 해롤드 존슨 대위는 방법을 찾았다. "해리와 나는 Shrike 미슬을 발사하기 전까지 항상 사이트

에서 16km 정도를 이격해서 비행했다. 그리고 35,000 피트로 상승해, 버너를 넣고 기수를 45도

각도로 놓인 상태로 비행한다. 그것은 거의  실속(失速)에 가깝다."


다음 문제는 이미 발사되어 다가오는 샘 미슬이었다. "처음 발사되면 로켓 부스터에 의해서

굉장히 큰 먼지 폭풍이 지상에서 일어난다. 그 돌풍을 목격하면 이미 샘 미슬이 공중으로 날아

올랐다는 것을 알게 되고, 눈으로 찾으려 한다,"

 

타크리에서 근무한 부전대장 잭 브라우톤 대령의 말이다.

"로켓 부스터가 다 타서 소모되면 그것은 지상으로 떨어진다. 그러면서 샘 미슬 내부 로켓이

점화되어 그 힘으로 날기 시작한다. 만약 눈으로 미슬을 보게 되면 보통 회피는 일반적으로

가능하다. 그 조그만 나무 그루터기 같은 것을 보게 되면 지옥을 경험한다. 방향전환을 쉽게

하지 못한다. 여러 대가 있으면 그게 누구에게 날아올지는 처음에 잘 모른다.  그러므로 발견

하면 모두 위치를 이탈한다. 그리고 실속으로 벗어나거나 혹은 나사 같이 돌아 회피한다."


"밑으로 피해!"이란 울부짖음이 들리면, 족제비는 그 특유의 유명한 기동에 들어간다. 올라오는

미슬의 방향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지상을 향해 다이빙을 한다. 그런 상태로 지나치면 샘 미슬은

방향전환이 쉽지 않다. 그리고 이어 족제비는 날카롭게 방향을 꺾는다. "그렇게 하강을 하면 가끔

샘 미슬이 어디 있는지 안보이기도 하는데, 미슬은 지나쳐서 해를 입히지 못하고 그냥 사라지기

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샘미슬이 다가오는 마지막 순간에 출력을 높여서 달린다. 그렇게

해서 미슬이 항공기를 놓치는 경우도 있다."


다른 전술은 타크리에 근무했던 제리 호브릿 대위가 고안한 것이다. 그는 4대의 편대를 두 개

그룹으로 나뉘어 비행하며, 족제비를 왼쪽이나 오른쪽에 둔다. 이런 경우 족제비의 관측영역

이 더 넓어진다. 하지만 그런 만큼 위험부담도 커졌다.  

 

 

 

 

 

 

족제비 조종사로 최고훈장을 탔던,

머린 데스레스펜 대위.

태국 타크리 비행장. 


 

가끔 샘 미슬 조작수들은 미슬을 한번에 세 개를 무리로 쏘기도 했다. "그런 방식의 새로운 공격을

우린 Dr. Pepper라고 불렀다. 그럴 경우 한번에 홱 피해야 한다. 10시, 2시, 4시 방향에서 동시에

날아오기 때문이다.” (당시 청량음료인 Dr. Pepper의 병에는 10, 2, 4시라는 다이얼이 그려져 있었다.)


족제비는 편대에서 맨 처음 들어갈 뿐 아니라 나올 때도 맨 마지막이다. 이 족제비로 인해서

월맹군 미슬조작자들은 레이다를 꺼놓기도 했다. 이러한 샘미슬에 대한 압박을 위해 족제비

들은 타격편대가 이미 떠나고도 조금 뒤에 빠져나오기도 했다. 


1967년 말에 F-105F는 F-105G로 업그레이드 됐다. 이 기종은 항공 전자기기가 개량된 것

이었고, 무기도 훨씬 향상되었다. AGM-78이란 열추적미슬인데, 기존 Shrike 미슬에 비해

속도도 빠르지만 사거리가 네 배나 길어졌고, 탄두도 매우 컸다. 1968년 3월에는 ARM이

결국 Shrike 미슬을 밀어냈다.


족제비에도 또 다른 기술혁신이 도입되었다. 대-전자전 재밍 포트(jamming pods)가 장착된

것이다. 이  ECM 장비는 월맹의 미슬 유도와 경고장비를 무력화 시킨다.토르스네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 샘과 족제비의 싸움 연대기의 마지막에, 나는 하나의 Shrike 미슬과 ECM 포드를

옵션으로 달고 다녔다. 회피 전술에 자신이 생겼고 그 ECM 장비에 큰 신뢰를 느꼈다. 그로

인해 Shrikes 미슬 두 대만 달고 나가도, 파괴력은 훨씬 강한 것이 되었다."


족제비 기종은 보급된 것이 매우 적었지만, 그중 몇 대의 F-105F는 야간폭격과 전천후기상용

폭격기로 개조되었다. 이른바 ‘손톱 특공대(Commando Nail)’ 프로그램이었다. 관계자들은 이걸

‘라이언의 습격자’라고도 불렀다. 미 공군 태평양 사령관 이름이 존 라이언이었고, 그의 아이디어

였기 때문이다. 일부 조종사들은 족제비 임무와 코만도 네일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기도 했다.

사이공에 있던 미 제7공군사령관인 윌리엄 모미어 장군도 이 컨셉에 큰 인상을 받고 받아들였다.

그는 그가 가진 모든 F-105F를 샘 미슬과 싸우는데 동원했다.


다른 베트남의 조종사들과 마찬가지로 족제비 조종사들도 지속적으로 제한사항에 시달렸다.

모미어 장군의 말: "교전 룰에 따라서 우린 목표에 확실한 타격을 하기 힘들었다. 북베트남은

샘사이트들을 일종의 보호지대를 두고 배치했다. 하노이 부근 15km는 인구밀집지역으로 특별

히 미군을 공격하는 일만 없으면 족제비 공격으로부터 안전했다. 그런 애매한 곳에 수많은 샘

사이트가 자리 잡고 있었다."


트로스네스의 말: "우리는 하이퐁 항에서 하적되는 샘 미슬은 공격할 수 없었다. 가끔 소련 배가

짐을 부리는 것을 목격했는데, 그 배나 하적 중인 샘 미슬들은 공격할 수 없었다. 정말 어리석은

짓이었다!"

 

(하이퐁 항에는 미슬 외에 많은 소련제 총기류와 제트기까지 하적되고 있었다. 잇빨 주)


이로 인해 능란한 월맹의 샘 미슬 조작병들도 발사한 미슬에 비해 격추된 미군 항공기 수가 줄어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965년에는 5.7%의 격추율을 보였는데 그 밑으로 더 하강한 것이다.

1968년에는 1% 이하로 떨어졌다. 샘 미슬의 협박과 통행세는 현저히 하강했다. 샘 미슬 조작병

들은 족제비의 공격이 무서워 전원을 꺼두는 일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미군의

손실은 여전히 높았다. 왜냐하면 해마다 월맹이 들여오는 샘 미슬의 댓수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최악의 해는 1967년으로 월맹은 이 해에 총 3,202개의 미슬을 발사했고, 총 56대의 미군 항공기

가 떨어졌다. 


이러한 족제비와 샘 미슬의 서사적인 전투는 1968년에 들어서면서 줄어들게 된다.

미군이 북베트남 폭격을 중지했기 때문이다. 타크리에 있던 미군 전투기 전대는 1970년

해체되었고, 생존한 대부분 족제비들은 동남아시아를 떠났다. 태국 코랏에 1개 전대만이

남았다.


1970년 1월, 족제비들은 북베트남으로 나가는 RF-4C 정찰기를 호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슬

사이트에 대한 공격은 제한적으로 묶어둔 상태였다. ‘방어 행동’인 경우에만 국한된 것이다. 그러

므로 RF-4 정찰기에 판 송 레이더가 방사되지 않으면 공격할 수 없었다. 거기다 월맹은 대공방어

에 향상이 있었는데, 미군 정찰기를 감시할 수 있는 사거리가 매우 긴 레이더를 들여왔고, 이는

족제비가 간파할 수 없는 레이더였다. 그리고 판 송 레이더도 꺼뒀다가 공격 직전에 전원을 넣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1970년 네 달 동안 발사된 샘 미슬은 약 200개 정도였다.


이때 미 제7공군 사령관 존 라벨레 장군은 거대한 논쟁에 불을 붙였다. 미국 전투기들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즉각 행동이 힘들다는 의견 때문이었다.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교전 룰을

개정해야 한다는 것의 그의 주장이었다. 1972년, RF-4 전투기들이 미슬을 발포하고는 보고서

에는 ‘사전에 준비된 방어행동’이라고 왜곡해서 기재하기 시작했다. 그 ‘사전 방어행동’은 정보

보고서에 의해 입증된 것들로 계획할 수 있었다. 라벨레 장군은 자신의 요구를 요약해서 백악관

으로 보냈고, 이는 항명으로 여겨져 2계급 강등되어 강제 은퇴되었다.

 

북베트남 상공에서 교전하다, 미군기에 찍힌 북베트남 미그-17기

 

 


마지막 족제비 임무


라벨레 장군이 제시한 분규는 1973년 3월에도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때 북베트남은 비무장지대를

건너 남베트남을 침공했다. 이른바 "부활절 공세(Easter Invasion)." 그러자 갑자기 미군도 북베트남

폭격을 재개했다. 이 북베트남 상공에 대한 작전은 ‘라인베커’였고, 이는 ‘라인베커-II'로 발전한다.

닉슨의 베트나미제이션(Vietnamization) 정책으로 미 지상군은 이미 베트남을 모두 떠난 상태였다.

그러므로 미군이 할 수 있는 것은 공군과 해군의 공군의 항공기뿐이었다.


태국 코랏의 기지에는 있는 족제비 전투기들은 본토에서 날아온 전대들과 함께 보강되었다.

그때 F-105G는 28대로 늘어났고, 새로운 기종 족제비인 F-4C도 들어왔다. 사실 F-105 당시

족제비 최적 기종이 아니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발된 것이었다. F-105는 이미 생산

이 중단된 상태였고 부품도 많이 부족한 상태였다.

 

F-4C으로 만들어진 족제비는 F-105와는 다르게 같은 시간 발전된 것이다. 독일과 오키나와

카데나 미군 기지에서 개발하고 실험되었다. 이 카데나 기지의 전대는 1972년 10월 태국 코랏

으로 배치되었다. 그들은 Shrike 미슬로 무장하고 북베트남으로 작전을 나갔는데, 그 당시

기체에 Standard ARM 미슬을 장착할 공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SA-2 미슬은 F-105 전투기의 후미 연기를 따라서 추적하는

것으로, 만약 미슬이 항공기를 지나치게 되면 자동으로 폭발

하게 되어 있었다. 대신 그 파편이 매우 넓은 지역으로 퍼져

날아가도록 만들어진 미슬이었다. 100미터 이내에 있는 항공기

는 매우 위험했다. 베트남전 실제 샘 미슬 근접폭파 사진이다.

 

 

라인베커 작전 동안 북베트남은 약 30개 정도 미슬 사이트만 가동했다. F-4E 전폭기와

연합한 족제비들이 사이트들을 휩쓸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때 월맹이 발사한 미슬의 숫자는

4,244개나 되었다. 미군은 이런 발사대와 레이더 차량에 크러스터 폭탄cluster bomb으로

완전히 쑥대밭을 만들었다. 족제비의 마지막 작전은 1972년 12월 미군이 B-52로 하노이를

폭격할 때 호위한 라인베커-II 작전이다.


이 족제비 항공기들은 떠나기도 했고 남아있기도 했으나, 이제 그들의 날은 지나갔다.

그리고 F-105 기종들은 이미 끔찍한 손실률로 격추되거나 해서 소모된 상태였다. 46대의

족제비 F-105가 전투 중 격추되었고, 족제비 원형인 F-100F 족제비도 두 대 격추되었다.

파괴된 샘 사이트의 숫자는 명확하지 않다.

 

“당시 북베트남의 방공망을 돕기 위해 하노이에 있었던 한 소련군 장군은, 98개의 미슬

시스템과 7,500개의 미슬이 북베트남에 들어왔으며, 전쟁이 끝났을 때 남은 것이 45개의

시스템과 미슬 2,300개가 전부라고 말했다.”

 

호블릿 소령인 추산한 족제비와 샘 미슬의 전쟁 그 결론이다.


숫자야 어떻든 이 족제비들은 샘 미슬의 위협을 어느 정도 경감시켜 준 것이 사실이다.

전쟁 기간 동안 족제비를 타고 근무한 승무원의 숫자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다음

세대의 족제비는 F-4G가 대상이 되었고 1978년에 처음 선보였다. F-4G는 F-4E의

개량 버전으로, F-4C보다 컸고, Standard ARM과 신형 AGM-88 HARM를 모두 장착

해서 무장했다. 이 F-4G는 여전히 살아남아 걸프전에서도 작전을 수행했었다.


현대의 족제비 임무는 특별훈련을 받은 F-16CJ가 하고 있고,

북베트남 상공에서 활약한 족제비 F-100와 F-105의 경험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개량된 것이다.

 

북베트남 상공에서 미군기에 발사되어 빗나가는 샘 미슬 궤적이 촬영된 사진. 하나는 공중폭발하고 있다.

북베트남은 베트남 전쟁 동안, 주로 북베트남 상공에서 샘미슬을 약 5천기나 발사했다.

 


최고훈장을 받은 두 명의 족제비 조종사:


머린 H. 디틀프센 대위 : 1967년 3월 10일, 그는 태국 타크리 공항에서 거대한 항공타격부대를

호위하는 족제비 비행의 제2제대 편대장이었다. 목표는 하노이 북쪽 타이 느구옌. 북베트남에서

강철을 생산하는 공장들이 목표였다. 그는 목표를 공격하면서 기체에 굉장한 숫자의 피격을 당했

으나 이를 버티면서 최소 1개의 샘 미슬 사이트를 파괴했다. 그는 목표지대에 10분간 머물면서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대공포화를 받았다.


레오 K. 토스네스 소령: 1967년 4월 19일. 그는 타크리 기지에서 족제비 편대장으로 출격했다.

북베트남의 군사기지를 폭격하는 호위임무였다. 소령의 뒷좌석 전자전 장교는 해롤드 존슨 대위

였고, 그는 미그기, 샘 미슬과 대공방어 등등 북베트남의 모든 것을 대처할 수 있는 장교였다. 이

들은 한 대의 미그-17을 격추시키고, 하나를 더 격추시켰으나 이것은 확인이 되지 않았다. 당시

gun camera에 필름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미슬과 클러스터 폭탄을 모두 소비한 다음,

재급유을 하고 다시 돌아와 구출작전의 엄호를 했다. 당시 병기는 20밀리 캐논포 뿐이었다. 토스

네스 소령은 최고훈장을 받았고, 존슨 대위는 공군십자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11일 후, 그들의

93회 임무에서 격추되어, 둘은 남은 전쟁기간 동안 포로로 지냈다.


베트남전 족제비호 조종사였던 두 명이 4성장군까지 올랐다.

 

척 호너는 걸프전에서 공군의 최고지휘관이었고

그는 1967년 코랏에서 족제비를 몰았다.

 

부-연합참모총장과 유럽 나토 최고사령관을 지냈던

조 랄스톤은 1970년 타크리 기지에서 족제비를 몰았다. 

 

 

 

 

 

 

 

 

 

 

북베트남 상공에서 목표에 폭탄을

투하하고 상승하다 찍힌 목표타격

사진.

 

미군 조종사들은 이 북베트남 상공을

지옥의 5분이라 불렀다.

 

그리고 또한 이후 미 공군의 높은

계급에 오르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베트남에서 전폭기 등을 조종사

조종사출신들이었다.

 

만약 소련이 이런 전자장비와

샘 미슬/전투기를 제공하지 않

았다면 그 결과는 전혀 예측할

수 없다.

 

 

 

 

 

 

 

잇빨중사의 가벼운 이야기:

 

본인이 87년 특전사령부에 하사관보수 교육을 들어갔고, 그 교육은 사실 첫주 유격을 빼면

거의 교수법(주특기 교관이 되어 강의하는 법)이 대부분이다. 전자전 대-전자전 개념을 배우

기도했고, 마지막 주 교수법 경연대회가 열리게 되는데, 나는 그때 '대-전자전'이란 것으로

출전했다. 그래서 이런 것에 관심이 많다. 물론 현재와 같은 다양한 지식은 없었고 아쉽지만

나는 3등이라는 것에 만족한다. 인터넷이 지금 같이 발전했었더라면 어땠을까...

 

이번에 연평도 포격을 두고 대포병레이더를 무력화시키려는 일종의 재밍(전파간섭)을 북이

사용했다는 말이 언론에 나왔다. 당연한 것이다. 그런 장비도 없이 미군에게 포격했다가는

진지 이동준비하다가 보복포격으로 폭사할 거다. 현대적인 군대에서는 필수인 장비다. 물론

아군도 있다. 그리고 서로의 성능은 많이 사용해보기 전에는 사실, 모른다.

 

그리고 하나 특별한 점은, '레이더'에 관한 것이다. 공고 시절 이 '레이더 기능사 자격2급'이

있었다. (하여간 나도 별거별거 다 해봤다) 그런데 이 시험은 거의 고지가 없었다. 그래서 학교

선생님의 정보로 현 강동구에 있던 레이더에 관한 관청에 가서 문의를 해본 적이 있다. 가보니

'그런 거 왜 따려고 하냐?'라고 반문한다. 안내창구도 없고 사무실이었다. '군대 가서 레이더병

할 거 아니면 필요 없어. 전파통신기능사를 따'라고 한다. 특이업종에 대한 선망은 그곳 방문

으로 끝났다. 당시 강동구는 거의 길만 크게 나 있었다. 앞서 본 레이더에 관한 책은 생각보다

수학적으로 훨씬 어려웠다. 전기통론 전자공학의 공식보다 더 어려웠다.

 

내가 하고픈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큰 밀리터리 사이트를 보면 적어도 내가 접하고 어느 정도

전자에 관한 기능, 그리고 실제로 고가 장비를 수리해 본 경험이 있는 나로써는 스펙만 가지고

게시판에서 누가 옳고 그르다는 논쟁이 참 불필요해 보인다. 인터넷유저들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인터넷 상에 나타난 장비 스펙을 보고 무언가 가능하다, 가능하지 않다라고 공방을 벌이는

것은 결론이 불가능한 토론으로 보인다. 실제 전자공학과라도 나온 분인가 의문해 본다. (물론,

그런 분도 있을 것이다) 무전기는 뭐 그렇다 쳐도... 

 

전자장비란 '절대로' 매뉴얼에 나온 스펙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실제 사용의 신뢰성이 작업을

통해서 입증되어야 한다. '이 장비만 장착하면 최강이 된다,' 이런 문구는 납득이 되지 않는 말이다.

IC의 기초가 되는 트랜지스터 원리라도 한번 배워보면 이 전자장비란 것이 얼마나 오묘하고 복잡한

것인 줄 알게 된다. 뭐 요즘은 고장나면 모듈을 그냥 갈아버리고 빼낸 것은 본사로 보내는 것이 보통

이라 90년대 초반 내가 했던 전자수리는 아마도 옛말이 될 것이다. 여기에 내가 가장 공고 다니면서

싫어했던 '전기통론' 이론까지 들어가면 정말 머리 터진다. 전문직종의 분야가 될 것이다.

 

같은 회사에서 나온 전자제품도 사실은 각자가 모두 다른 스펙이다. 쉽게 말해서 같은 공정에서

나온 '맛이 간 놈'을 만나면 일반적인 좋은 평가와 별개로 본인은 AS센터를 폭파하고 싶을 것

이다. 전자제품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미세한 납땜의 오류, 측정으로 안 잡히는 콘덴서 하나의

불안정한 치매로 인해 유저는 죽을 맛이 된다. 모든 부속은 개별적으로 일정한 오류가 있다. 그

오류가 일정하고 안정적인 범위에서 묶일 때 제품이 출시되는 것이다.

 

운영도 안해 본 장비/ 최신 출시품/ 운영의 결과물이 나오지 않은 장비/ 이런 것에 관한 일반적인

평가는 개뻥에 가깝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스펙만 보고 물건을 사는가? 다 사용후기를 들어보고

평가하고 산다. 심지어 핸드폰조차도. 그어떤 대포병레이더 같은 장비도 절대로 사용해보기 전엔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레이더 마찬가지다. 미국 걸 많이 사는 이유는 품질이 우수해서가 아니다.

여러 전쟁을 통해서 운영을 해 본 결과물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