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에 대한 오해는,
영화를 통한 오해부터 시작한다.
<대표적인 오해들>
1. 베트남전은 무기한 적인 전쟁이다
2. 미군은 항상 고전하고 이기지 못했다
3. 베트콩/월맹군은 항상 균등한 상태를 유지했다
4. 미군이 베트남전을 이길 가망은 제로였다....
5. 미군은 확실한 승리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
<오해에 대한 반박>
1. 베트남전은 무기한-유기한-무기한으로 개념이 변경된다.
2. 미군은 결정적인 승리를 생각보다 많이 거뒀다
그러나, 2차대전 같은 확실한 전과는 증명하기 힘들었다.
대체로 밀고 당기는 게임의 전쟁이었다.
3. 베트콩/월맹군은 남베트남 영토에서 3회 정도 거의 토벌되었었다.
(테트공세로 입은 월맹의 피해는 상상 이상이다)
4. 미군은 베트남전의 승리로 향하고 있었다.
다만, 10개 전투사단의 증강과 3-5년이 필요했다
5. 미 군부는 확실한 승리를 목표로 했으나, 병사들은 그런게 없었다.
그 개인적인 본인의 반박 조건들을,
아래 구분된 17단위 전투 구분에서 찾아보시기를....
아래 내용은 어떤 베트남전 전기를 읽을 때,
그때의 전반적인 상황을 이해하고 읽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파편화를 잇는 본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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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17 Campaigns of the Vietnam War
1962년 3월부터 1965년 3월까지는 미군이 베트남에 개입하는
농도가 점차 짙어진 기간이다. 대표적으로 미군은 지원한 헬기를
운영시키기 위하여, 베트남군 헬기 조종사 양성에 고문단을 다수
파견했다.
1962년 불과 746명에 달했던 미군 군사고문단의 수가 6월을 넘어서면서
3,400명까지 불어나게 된다. 그리고 62년이 가기 전에는 총 1,100명의
고문단이 베트남에 들어오게 된다. 그린베레도 28개 팀이 들어온다.
이 맥브이가 남베트남 정부에 조력해주려고 하는 것은 3만 명으로 추산되는
정규 베트콩에 대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서 전술은 베트남 민간인들과 연합
하여 마을 등의 단위 방어에 돈을 쏟게 된다. 미군은 군사장비를 기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패한 남베트남 관리들은 이러한 장비나 돈을 얻으려고 획책했고,
이는 군사고문단원들과의 마찰로 이어진다. 이에 효과가 없자, 대규모 미군
전투 병력의 투입을 부추기게 된다.
<1>
방어, 1965년 3월 8일 - 1965년 12월 24일.
이 기간 동안 미군의 목표는 베트콩의 베이스캠프와 보급직접소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럴 시간을 주기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미군은 좀 더 효과적인
지상전을 만드려고 노력했다.
이런 목적으로 베트남 미 육군(USARV)은 1군단 지역의 최북단의 5개
지방을 지원했다. 우선 지원은 미 해병의 책임지역이었다. 나머지 2-3
군단의 주 작전지역은 중부고원지대였다. 그 나머지는 해안지대와 수도
사이공이었다. 그리하여 델타 삼각주에 책임이 있는 4군단은 오히려
사이공 쪽을 우선하게 된다.
1965년 10월 19일, 베트콩 3개 연대 총 6천명이 플레이 메에 있는 특전단
캠프의 CIDG 병력을 공격했다. 이아 드랑 계곡의 입구에 해당되는 곳이다.
베트콩들은 ‘우리는 남베트남 덩어리를 반으로 가르려고 한다’는 소문을 냈다.
대규모의 공중폭격 지원과 함께, 새로 베트남에 도착한 1기병사단의 제대가
한 달 정도 전투를 벌이게 된다. 서너 번의 큰 전투가 있었다. 이아 드랑 계곡
에서 미군은 매우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성공적인 방어임무로 인해서
중부고원지대는 안전해졌고 병사들의 사기는 높아졌다.
(미 해병 군사고문단원)
(1965년, 작전중인 미 173공수여단 병사. 군장이 구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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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공세. 1965년 12월 25일-1966년 6월 30일
이아 드랑 계곡에서 미군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베트콩의 베이스 캠프와
보급집적소가 또 발견되었다. 그러나 수색섬멸작전을 위한 전진을 위해서
미군의 베이스캠프와 보급소가 늘어났고 이로 인해서 사이공 근처의 병력이
동원되었다.
미군은 주로 양민의 숫자가 많은 지역을 우선으로 윤곽에 넣었다. 해병3상륙군은
1군단 지역인 남베트남 북부지방에 들어갔고, 미군 1야전군은 남베트남 2군단을
지원해 중부지대로 들어갔다. 미 2야전군은 사이공 근처에 있는 남베트남 3군단
지역으로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이 해의 주 전투는 수도 사이공 근처에서 발생했다.
101공정사단 1여단, 한국군 해병2여단, 남베트남 47연대는 VAN BUREN 작전을
시작했다. 시작일은 1월 19일이고 대상은 북베트남군 95연대였다. 그들은 투이
호아 계곡에 있는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들은 주로 남베트남 해안지대의 쌀
수확을 방해하려고 했다.
이 작전으로 인해서 월맹군은 많은 출혈을 감수해야 했다. 1월 20-23일,
이때에 처음으로 구정(테트)에 잠시 휴전을 했고, 소규모 전투를 제외하면
대부분 지켜진 셈이다. (이 단기휴전의 준수가 1968년 테트 공세의 대량
피해 빌미를 제공한다)
(1966년 7월, 공격받아 불 탄 채로 날고 있는, 미 육군 헬기)
(1965년, 기관총 참호에서 전사한 남베트남 육군 병사)
(이아 드랑 계곡, 무어 중령의 실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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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66년 1-3월
미군 정보부는 많은 월맹군이 라오스를 통해 침투하여 DMZ 지대를 지나
쾅 트리 지방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간파했다. 쾅 트리에는 남베트남 1사단과
미 해병 1개 대대만이 있었다. 미군은 미해병 3사단과, 베트남에 들어온
최초의 전투병력인 173공수여단을 이 지역 북부로 급파했다.
1966년 4워 12일, 미군은 최초로 괌에서 이륙한 B-52 폭격기를 이용해,
라오스 국경 근처의 월맹군을 폭격했다. 이 전투 동안 여전히 월맹군은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피난처로 사용했다.
(1966년, 비무장지대 근처의 미 해병 작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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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차 역공세. 1966년 7월 1일 - 1967년 5월 31일
1966년 7월 1일 이후의 미군 전투는 일종의 ‘역공세’였다. 이는 월맹이
남베트남과 라오스에 대한 지원과 활동 컨트롤을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또한 남베트남의 베트콩과 침투하는 월맹군에 대한 직접적인 격퇴도 목표
였다. 또한 남베트남 정부의 실통치범위를 넓혀주는 것이었다.
북베트남은 지속적으로 남베트남 안에 힘을 조성했다. 그들은 호치민 루트와
해상을 통한 침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1966년 초에는 비무장지대를 통한 침투도
많았다. 미 공군은 무력정찰과 비무장지대 북쪽에 대한 폭격권한을 승인 받았다.
지상군은 비무장지대와 북베트남 영토에 대한 정찰을 승인받지 못하고 있었다.
미군은 제한된 남베트남 영토에서 적과의 소모전을 하고 있었다. 그저 남베트남
내의 베트콩과 월맹군에 대한 바디 카운트가 다였고 그것이 전쟁을 이기는 방편
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966년 동안 총 18개의 주요 작전이 있었고
가장 성공적인 작전은 ‘WHITE WING ’이었다.
이 작전 동안 미 1기갑사단과 한국군, 그리고 남베트남군은 중부 해안지대인
빈 딘 지역의 북부 반을 성공적으로 청소했다. 상대는 월맹군 3사단이었고
그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미해병3사단은 지역의 북부 두개 지역에 진입했고,
이 작전은 남베트남 군대가 모르는 채 실시되었다. 다른 미 해병부대도 모르게
실시했다. 이 작전은 ‘헤이스팅스’였고 비무장지대로 침투한 병력을 섬멸
하고자 함이었다.
또한 ‘아트레보로’작전으로 사이공 북서쪽으로 청소하였는데,
미군과 남베트남군 22,000명이 참가하여 베트콩 9사단과
월맹군 1개 연대를 소탕했다. 잔유병력은 캄보디아와 라오스로
도주했다.
1966년 12월 31일, 베트남의 미군은 총 38만 5천명이 되었고, 적의 병력도
표면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적의 병력은 대략 28만 명이었고
공산당 정치세포는 8만명으로 추산되고 있었다. 1967년 6월 30일, 베트남의
미군은 44만 8천명이 되었고 상대의 크기도 어느 정도 늘어났다.
1967년 1월 8일, 남베트남군은 이른바 ‘철의 삼각주’라고 일컬어지는 사이공
북서쪽 25마일 지점의 베트콩 근거지를 여러 방면에서 압박했다. 당시 이
지역의 베트콩 전술베이스와 본부가 들어서 사이공 주변의 전투행동이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은 엄청난 규모의 쌀 저장고와 식료품을
발견했고 매머드 급의 터널망을 파괴했다. 그리고 많은 정보에 유용한
문서를 노획했다.
1967년 2월이 되자, 이번에는 미군이 철의 삼각주에 대한 작전을 시작했고,
당시로써는 매우 큰 장거리 공수작전인 ‘정션 시티(연합 도시)’ 작전을 실시했다.
173공수여단을 포함한 미군 총 22개 대대가 동원되었고 4개의 남베트남군
대대가 포함되어 작전을 펼쳤다. 이에 적군 2,728 명이 사살되어 일대가 평정
되었다. 미군은 일대에 비행장을 건설했다. 그리고 교량도 설치하고 두 개의
보강된 진지로 CIDG 캠프를 만들고 철수했다.
(1967년 추 치의 미 보병25사단 기관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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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3차 역공세. 1967년 6월 1일 - 1968년 1월 29일
베트남전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바뀌지 않고 있었다. ‘정션 시티’작전이
끝나자 미군 1사단과 25사단, 11기갑연대, 그리고 남베트남 육군은 사이공
쪽의 적에 대한 작전을 다시 시작했다. ‘맨하탄’작전이다.
이는 철의 삼각주 북쪽의 Long Nguyen 미군기지 주변을 사전에 청소한 것이다.
유능한 미군 군사고문단의 협력으로 남베트남 군은 좀 더 작전역량이 상승한 상태
였다.
이 해에 남베트남 특전단은 서너 개의 CIDG 병력을 포함하는 특전단 캠프
건설을 위임받았고, 완수되자 고문단은 빠져 베트남을 떠났다. 1967년에는
대규모 작전을 남베트남 군이 단독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베트콩들도
교전을 꺼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작전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1967년 가을이 되자 또 다른 적의 활동이
증가되었고, 특별히 캄보이아와 라오스 국경근처가 더욱 그러했다. 10월 말에,
베트콩은 녹 닌의 특전단 캠프를 공격했다. 다행히도 남베트남군이 증강하여
캠프는 존속되었다.
같은 시간, 12,000 정도의 베트콩이 닥 토의 미 그린베레 특전단 캠프에
몰려들었다. 캠프는 라오스 국경과 가까운 콘텀 지역의 북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3개 나라의 국경이 모이는 곳이다. 이에 미군과
남베트남군 총 16개 대대가 컨톰과 록 닌에 급파되었다.
(1967년, 타이 닌 지방의 미보병1사단 사진)
( 정션 시티 작전 중, 173공수여단의 보급품을 투하하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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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테트 공세와 반격. 1968년 1월 30일 - 4월 1일.
1968년 1월 29일 음력으로 새해를 맞는 베트남에서는 36시간의 평화로운
‘정전’으로 구정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전협상과는 달리 월맹군은
케 산 지역에서 대규모의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군과 베트남군 모두
비무장지대가 있는 전술 1군단 지역을 제외하고는 발포를 자제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1968년 1월 30일 여명이 밝기 전에 남베트남 북부와 중부에서 적은 공격을
시작했다. 사이공과 메콘 델타 지역은 이미 그 전날 밤부터 공격을 먼저 시작
했다.
8만 4천명의 베트콩과 월맹군들이
44개 중 36개의 지역 행정도시를 공격했다.
자치도시 6개중 5개가 공격당했고, 자치구의 242마을 중에서 64개 마을이
공격당했다. 부가적으로 모든 미군 비행장의 군수보급소를 공격했다. 3일
간의 공격 중 가장 강렬한 공격을 받은 도시는 사이공과 고도 ‘후에’였다.
미국대사관이 침투조의 공격을 받았고, 다른 침투조들은 남베트남
대통령궁과 남베트남 연합참모장 저택을 향하고 있었고, 또한 탄손
누트 공항도 공격을 받았다.
후에(Hue)에서는 월맹군 8개 대대가 침투했고 미 해병대, 미육군 3개 대대와
남베트남군 11개 대대와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근 한 달을 갔다. 미군과
남베트남군 500여명이 전사했고, 베트콩과 월맹군 4-5천 명이 전사했다.
그리고 또한 따로 떨어진 두 개의 지역에서 대량이 전투가 벌어졌다.
중부 고원지대의 그린베레 닥 토 캠프와, 미해병이 있는 케 산이었다.
결국 공격은 격퇴되었다.
마침내, 더 많은 미군(새로 만들어진 XXIV군단 본부)이 해병을 지원하여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미군은 케 산을 포기하게 된다. 테트 공세는 결국
공산주의자들의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베트남에 대한 지원이 결국 무익한
것으로 판단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른 의미로 말하면, 미군의 지원은 심각하게 좀먹고 있었던 것이다.
1968년 초에 미군은 50만 명에 달했다. 외국군 6만 1천명을 합하면
거의 60만 명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이 테트 공세는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냈다. 그리고 남베트남에는 파괴된 도시와 마을로
인해서 17만 명의 이재민이 생겨났다.
(1968년 메콩 델타 지역의 미 보병9사단)
(1968년, 173공수여단의 작전 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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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4차 역공세. 1968년 4월 2일 - 6월 30일
이 기간에 미군은 대대급의 소모전에 들어갔다. ‘페가수스-람 손 207’ 작전은
케산 전투기지를 4월 5일 안정적으로 만들었다. 이 작전에 의해서 1967년 8월에
남베트남 9번 국도가 다시 뚫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쾅 트리 지역의 월맹군 2개
사단이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그러나 이어 벌어진 어 샤우(A Shau) 계곡에서의 ‘델라웨어-람 손’ 작전이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어찌 되었건 월맹군은 전술1군단 지역에서의 활동이
둔화되었으나 이들 잔존병력이 사이공을 위시한 전술3군단지역으로 이동
하면서 상황은 복잡하게 되었다.
1968년 5월 5-12일 동안, 월맹군은 1순위 목표인 사이공에 대하여
공격을 다시 감행했다. 우방군은 대단한 결심으로 방어했다. 결과적으로
사이공에서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고 결국 베트콩들은 사이공 근처에서
와해되어 분산되어 버렸다. 베트콩의 손실도 엄청났다.
잔존병력은 '거룩한 장소' 인접국의 정글로 사라졌다. 1968년 6월 말,
미군은 그들의 공격에 대한 대처에 매우 무딘 자신들을 보게 되었다.
이 미 육군은 36만 명이었다.
(어 샤우 계곡의 미 1기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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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5차 역공세. 1968년 7월 1일 - 11월 1일
이 시기는 테트 공세로 남베트남 통치권이 약해진 곳에 대한 통치력
수복을 위한 작전을 했다. 그러나 북베트남은 8월 17-18일 또 다시
공세로 나왔다. 그러나 공세는 비교적 약했고 금방 진화되었다.
1968년 가을에 남베트남 정부는 미군의 협조 하에 게릴라 근거지를
파괴하는데 주력하기 시작했다. 강도 높은 작전으로 미군은 목표지역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남베트남 정부군, 지역민병대, 경찰, 당직자 등이
시민들 몰래 색출작업에 동참했다.
주요 목표는 베트콩 세포의 뼈대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는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고 미군도 이러한 형태를 참고하게 되었다. 이전에 베트콩의 지배
하에 있던 지역들이 남베트남 정부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이 계획은 2년간
지속적으로 진행된다.
(테트 공세 당시 동료 헌병대원의 사체를 수습하는 미군들. 총을 쥐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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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6차 역공세. 1968년 11월 2일 - 1969년 2월 22일
1968년 11월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정부통치지역을
넓히고 있었다. 이 프로그램의 이름은 "Accelerated Pacification
Campaign.(남베트남 영토내의 게릴라에 대한 비성역화 파괴전술의
가속화)"였다.
이는 리처드 닉슨이 선거에서, 베트남 자신의 방호력을 확보시켜주는데
주력하겠다고 했던 공약과도 맞물리는 것이었다. 1969년 프랑스 파리에서는
정전협상이 이뤄졌다. 이 기간 중에 총 47개의 지상 전투작전이 실시되었다.
그 작전들은 아래와 같다. 중요한 작전들만 모았다.
(1). 나폴레옹 작전: 1967년-1968년 12월 9일 종료. 동 하 지역. 미 해병대.
(2). WHEELER WALLOWA 작전: 11월 11일 종료. 중북부 콴 틴. 1기갑사단/196보병여단.
(3). 맥아더 작전: 1969년 1월 31일 종료. 전술2군단 지역 미 4사단.
(4). COCHISE GREEN 작전: 빈 딘 지역. 173공수여단.
(5). 토안 탕 II 작전: 전술3군단 지역의 다수 사단 우방군 협동작전.
(6). SEA LORDS 작전: 해안과 강변에 대한 작전. 12월 6일에는 캄보디아를
통한 침투부대를 격멸하기 위한 GIANT SLINGSHOT작전이 실시되었고
엄청난 공중폭격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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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테트69/역공세. 1969년 2월 23일 - 1969년 6월 8일
1969년 구정부터 6월 달까지 월맹은 다시 공세를 취했다. 이는 지상군
병력들이 그 잔당들을 진압하는 작전으로 전환시키게 된다. 2월 23일
부터 1969년 6월 8일까지 총 함축성 있는 이름으로 된 70개의 지상
작전이 수행되었다. 그로 인해 적은 많은 인적 물적 손실을 보게 되었다.
주요 작전은 아래와 같다.
(1). 미 해병 3사단의 ‘켄터기’작전: 작전장소는 비무장지대의 침투 저지와
중부지역의 쾅트리 지역이었다. 1969년 1월 초부터 베트콩과 월맹군은
우방국과의 대규모적인 접전을 회피했다. 이들은 주로 음식과 군수품의
집적에 주력했고, 그 결과 쾅 트리 지역에서 다시 전투를 시작한다.
(2). ‘네바다 이글’작전: 1968년 5월 17일 투안 티엔 지역에서 시작했다.
이는 1969년까지 이어졌고 미 101공수사단이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많은 적 병력을 손실시켰고, 쌀 저장고, 보급품, 넓은 작전지역 안의 군수품
집적소를 발견하고 파괴했다. 주로 송 베 지역의 547도로를 중심으로 실시됐다.
3). 스코틀랜드 II 작전: 미해병4연대의 2개 대대가 작전.
1968년 4워 15일에 시작하여 계속 이어졌다. 주로 케 산
지역에 대한 수색파괴작전이었다.
(4). Dry Weather 전투: 전술4군단 지역에서 1968년 12월 1일 작전이
시작되었다. 지역 내의 베트콩이 있는 지역을 찾아다니면서 근저지를
부수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Speedy Express,"라고도 불렀고,
베이스캠프를 못 만들도록 방해하고 적 통신을 끊어버리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1969년에 미제9보병사단 1여단이 틴 투옹 지역에서
작전을 했다. 이때 많은 효과적인 야간매복작전을 펼쳤다. 2여단은
강변의 기동예비대로 작전을 했다. 작전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9사단은
몫을 충분히 해냈다.
1969년 2월 23일이 되자, 미 해군부대와 군수품시설이 있는
다낭, 탄 안, 벡 룩, 고 단 하, 트라 쿠에 매우 넓고 큰 규모의
새로운 공격이 있었다. 그러나 피해는 별로 크지 않았다.
다시 잠잠해졌다가 4월이 되면서 무언가 큰 일을 벌일
징조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1969년 해안지대를 청소 중인 미 해병대 병력)
(1968년, 12월, 미 173공수여단의 작전 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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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969년의 여름에서 가을까지, 6월 9일 - 10월 31일
작전은 남베트남군에게 일임하는 형태가 계속 늘어났다. 미군은 대규모로
철수하기 시작했고 미국 정부는 변함없는 지원을 약속했다. 닉슨 대통령은
1969년 8월 31일까지 25,000명을 남베트남에서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했다.
1969년 4월에 미군은 543,400명이었다. 그러나 10월 중순이 되자
505,500명으로 떨어졌다. 전보다 좀 흩어진 감은 있었지만 월맹군은
남베트남 주요 거점에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미군의 철수로 미군
사상률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을 초입에 주둔중인 미군도 소규모
부대 작전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정한 내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미군 전사자는 일주일에 100명 이하로 떨어졌다. 그 전에는 100명을
넘었었다.
(1969년, 베트콩 보급소를 파괴하는 미 보병1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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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969년 11월 1일 - 1970년 4월 30일
월맹은 공격을 점차 증가시키기 시작했다. 9월 4-5일이 되자 더욱 높아졌고,
이는 월맹의 ‘겨울전투’의 첫 번째 단추였다. 11-12월에는 비무장지대가
아닌 베트남 남부 전술3군단 지역과 4군단지역(사이공 주변)에서 전투가
가장 많아졌다.
월맹과 베트콩들은 주로 남베트남군 주둔지와 병참시설을 공격했고
거꾸로 남베트남군의 민간침투 거부작전을 박살내려고 했다. 월맹은
베트남 중부 고원지대인 전술2군단 지역의 바이 프랑과 덕 랩 지역에
가장 큰 공격을 11월 달에 퍼부었다.
1970년 2월이 되자 적의 활동은 다시 전술1군단지역과 2군단 지역에서
활발해졌다. 공격은 더욱 강해졌고 1970년 4월에 그 최고봉을 보였다.
그들은 중부고원지대와 전술1군단의 CIDG 캠프를 공격했다. 닥 세옹,
닥 펙, 벤 헷이 공격받았다. 또한 미군의 화력지원진지에 공격을 집중했다.
서너 명의 새퍼를 이용한 공격도 있었다. 1군단지역은 그렇게 4-5월까지
계속 공격당했다.
1969년 11월 1일부터 1970년 4월 30일까지 미군과 베트남군도 공격적인
공세에 나섰다. 주로 적의 베이스 캠프와 보급품 집적소를 공격했다. 이는
적의 사기를 꺾고 보급을 끊으려는 의도였다. 또한 나아가서 베트남인들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는 ‘베트나미제이션’을 위한 것이었다. 이후로 미군
보병1사단의 3개 여단과 미 해병 주 병력이 베트남을 떠났다.
적은 닥 세앙(Dak Seang)을 차지하려고 여러 번의 공격을 감행했다.
1970년 4월 1일 공격은 방어자가 막아냈으나 한 달간 계속 월맹은
공격을 지속했다. 마지막 잔당 진압은 12월까지 이어졌다. 이 두
전투 모두 남베트남군이 감당하고 있었다.
쾅 덕의 전투에는 베트남군 12,000명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어 4월 14일부터 3일간 남베트남군은 캄보디아 국경을
따라 있는 곳에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미군 전투병력의
조력 없이 이때 남베트남군은 잘 버텨주었다.
이는 베트나미제이션을 수행할 가능성을
미군 측에서 높게 평가하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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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성역에 대한 반격(Sanctuary Counteroffensive), 1970년 5월 1일 - 6월 30일
(Sanctuary: 성스러운 장소라는 뜻. 미군이 쫓아갈 수 없는 라오스, 캄보디아 영내)
이 때에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캄보디아 궁격 안쪽으로 공격적인 공세를
취했다. 작전명은 ROCK CRUSHER(돌깨기)였다. 그러나 월맹군의 거룩한
장소였던 캄보디아의 월맹군이 점차 증가함에 따라서 미군은 후퇴했다.
이에 베트남을 떠나는 미군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과 비례로 월맹군은
강화되었다. 닉슨은 당시 캄보디아의 반공 정부였던 논놀에게 월맹군의
캄보디아 내 활동을 제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동안 월맹군과 베트콩들은
오히려 캄보디아 수도인 프놈펜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논놀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미군과 베트남군은 매우 큰
스케일의 캄보디아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5월 1일이었다. 8개의
미군부대와 남베트남군이 연합으로 캄보디아에 5월에서 6월까지
들어왔다. 월맹군의 지휘통신을 절단하고 그들의 ‘거룩한 장소’를
공격했다. 미군의 존재를 확인시키고 전술3군단지역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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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7차 역공세. 1970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2월초에 시작된 캄보디아 내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고, 남베트남군은
다시 미군과 협력하여 라오스로 들어갔다. 람 손 719작전이다. 이는
이 기간중 매우 중요하고 특별한 전투였다.
람 손 719작전은 미군의 화력지원을 받는 전술1군단지역 베트남군이 실시했다.
이는 호치민 루트를 끊고 또한 라오스 Techepone에 있는 월맹군의 베이스캠프를
파괴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 작전은 4단계로 이루어졌는데, 1단계는 ‘듀이 캐년 II’작전으로 미5기계화사단이
참가하여 케 산을 점거하고 라오스로 향하는 9번국도를 평정한 것이었다. 미 101
공정사단은 양동작전의 일환으로 어 샤우 계곡에서 작전을 했다.
미 45공병그룹은 라오스로 향하는 9번 도로를 개보수했다. 이 작전은 1971년
1월 30일부터 2월 7일까지 진행됐다. 2단계 작전은, 미군의 화력, 헬기, 전술과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군이 한 작전이다. 이는 2월 8일부터 3월까지 계속되었다.
3단계는 3월초부터 3월 16일까지 실시되었고, 4단계는 작전 후 철수하는
단계였다. 그러나 침공군의 사령관이었던 호앙 옥산 람 중장은 작전을
조기에 종결시키고 부하들을 후퇴시켰다.
람 손 719작전은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서 1971년 봄에 있을
월맹의 공세에 여파를 미치게 되었다. 이 공세를 준비하던 월맹군은 이 람 손
작전 때문에 많은 병력과 물자를 써버렸던 것이다.
(남베트남군 보병대원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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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Consolidation(다지기) I, 1971년 7월 1일 - 11월 30일
이 기간은 베트나미제이션의 진행과정으로써 지상작전을 전부 남베트남군에
넘기는 것이었다. 미군의 지상군은 철수를 시작하고 미군은 공군의 폭격만은
계속 지원해 주었다. 7월 11일 남베트남군은 전력을 비무장지대 아래로 집결
하는 것 같은 기만전술을 썼다.
미 국방부 차관 멜빈 레어드는 공식성명에서 베트나미제이션의 1단계가 완성
되었으며, 다음 단계로 지상작전을 모두 베트남에 인계한다고 밝혔다. 그
일짜는 8월 11일로 잡았다. 이리하여 미 육군은 지상 전투작전을 중단하였고,
일부 야전에 있던 대대들만이 하던 임무를 계속했다.
101공정사단만은 당시 베트남 1군의 1사단과 연합하여 제퍼슨 그렌(골짜기)
작전을 투아 티엔 지역에서 10월에 할 예정이었다. 이 101공정사단이 예정된
제퍼슨 그렌 작전을 10월 8일 종료하자 101사단도 전열에서 물러났고 결국
베트남을 떠나게 된다.
다지기(Consolidation) I 기간 동안 미군의 크기는 계속 감소했다.
1971년 7월의 미군 전사자는 66명이었다. 1967년 이래 가장 적은
한 달간의 전사자 수였다.
11월 초가 되자 베트남의 미군은 191,000명으로 줄었다.
1965년 12월 이래 가장 적은 인원이었다. 11월 초, 닉슨
대통령은 미군은 본래의 임무와 자리로 복귀한다고 발표했다.
(코브라 공격헬기의 로켓 발사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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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다지기 II, 1971년 12월 1일 - 1972년 3월 29일
미군은 계속 줄고 있었으나 남베트남의 요청에 따라서
미 공군의 공중폭격은 오히려 증가했다.
1972년 1월 초, 닉슨 대통령은 미군의 철수는 기정사실이지만, 미군 포로가
석방될 때까지 2만5천에서 3만명의 미군은 계속 주둔시키겠다고 말했다.
미 국방부 차관은 베트나미제이션이 잘 진행되고 있으며 어떤 사건이
있더라도 미군이 다시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1972년 1월 31일에 미군은 136,500명으로 줄었고,
2월 29일에는 119,600 명으로 줄었다.
3월말이 되면서 미군은 95,500 명으로 다시 줄었다.
1971년 12월 마지막 주 미 해군기와 공군기들은 약 1천회의 북베트남
폭격을 했다. 1968년 11월 이래 가장 큰 규모였다. 미군 지휘관은
남베트남과 캄보디아에 대한 공격을 막기 위해서라고 그 대규모
공습을 언급했다.
그러자 미군기에 대한 월맹의 대공포와 지대공미슬의 공격이 상승했다.
미군기는 주로 라오스 내의 호치민 루트를 폭격했다. 그러자 1972년
1월 동안 미군 군용기는 월맹과 라오스 국경에 있는 월맹의 미슬
사이트를 폭격했다. 또한 월맹군은 남베트남 중부 고원지대로
병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1972년 1월 닉슨 대통령은 6개월 안에 평화협정의 합의가 나오면
8단계에 걸쳐서 전쟁을 끝내는 프로그램을 가동하겠다고 발표했다.
월맹은 이 제안을 거절했고, 외국군이 인도차이나에서 나가고 미국이
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중단해야 협의에 이를 수 있다고 대답했다.
(남베트남군 레인저 부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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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전투중단. 1972년 3월 30일 - 1973년 1월 28일
1972년 3월 30일 북베트남군은 전체 전쟁기간 중에 가장 큰 공세를
실시했다. 월맹군은 대다수 병력을 새 무기로 무장하여 정렬시키고
공격을 준비했다. 그들은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서 마지막 총력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남베트남의 중요 포인트에 대한
지방에 공격을 시작했다.
이 기간에 베트나미제이션 프로그램은 계속 되었고 월맹의 공격에 반격을
성공적으로 거두기도 했다. 이 기간중 남베트남 공군은 인상적인 작전을
했다. 정찰, 근접항공지원, 병력수송 등을 아주 잘 해냈다. 미군의 철수에
따라서 가장 시급하게 필요해진 것이 헬리콥터 부대였다.
남베남군은 이 헬기부대를 증편했다. 전투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었다.
미군 군사고문단은 엄청난 월맹군의 공세에 많은 장비와 노우하우를
엄청나게 넘겨주었다. 베트나미제이션의 일부이기도 했다. 육군과
해병대의 미 군사고문관들은 월맹군을 쳐부수는 것과 남베트남
정부의 비효과적인 태도 두개와 모두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은 남베트남군의 역공세가 효과를 보자 이 야전고문단들
숫자도 줄이기 시작했다. 군사고문단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훈련
에만 참가하도록 지시가 내려졌으며 이는 곧 고문단의 철수로 이어졌다.
1972년 9월에, 월맹군이 점거하고 있던 쾅 트리 시에 대한 남베트남군의
탈환작전은 완벽한 실패로 돌아갔다. 미국이 제공한 막대한 지원물자는
이 봄 역공세 기간에 잃어버렸다. 그러나 남베트남 공군은 재교육과 개조로
많은 역량이 상승한 상태였다.
월맹군과의 전술적인 타협이 이루어졌고 이는 미군의 관여가 줄어드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제 하늘은 남베트남 공군들의 책임이 늘어났다.
1972년 12월과 1972년 1월에 전체 출격의 45%를 남베트남 공군이 했다.
1972년 11월, 남베트남 공군은 C-130에 대한 운영 훈련을 시작해서
1973년 1월에 종료되었다.
전방관측기는 남베트남 공군이 운영하면서 미 공군과 남베트남 공군을
직통으로 연결했다. 그리고 미 공군과 남베트남 공군의 전폭기들이 연결
되어 작전을 했다. 베트나미제이션은 계속되었다.
미군의 지상군은 마지막에 7개 대대로 줄었고
이들 역시 미군의 군사기지에 대한 경계임무에 국한되었다.
결국 나머지 대대도 모두 떠나게 된다.
이와 함께 미국의 군사적 지원도 종점을 향하게 된다.
(1972년 '안 록' 지역에서 파괴된 월맹군 전차 사진)
베트남전은 미국의 관점으로 볼 때, 지루한 전쟁은 아니었다.
최고조의 전쟁은 1968-1969-1970 이렇게 3년간이다.
나머지는 그렇게 치열하지도 않았고, 확전/철수의 기간이다.
앞 뒤로 붙은 그 기간들로 인해서 지루한 전쟁으로 비춰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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