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3국의 깃발 아래 싸운 전사|베트남전쟁

구름위 2013. 11. 23.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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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리썬, 라우리 알란 퇴르니..

 

1965년 10월 18일.

앞의 전사에서는 특이사항이라고 생각되지 않아서

생략되었던 인물이 있다. MACV-SOG 전사에는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다.

 

1965년 10월 18일, 특전단 래리 알란 토르니 대위, 샤이닝브라스작전(CCN)으로

다낭에서 C-34를 타고 이륙해서 캄 덕 근처에 추락. 실종. 베트남 조종사와

부조종사, 기총수는 전사. 트론 대위는 라오스에서 팀을 침투시키고 복귀하는

도중이었음. 승무원과 함께 토르니 대위 모두 실종처리.

(토르니thorne -핀란드어로 퇴르니- 대위는 CCN의 1차 샤이닝 브라스

작전 도중, 동료인 특전단 찰스 페트리, 짐 스미스, 윌리엄 카드가 속한

정찰팀을 침투시키는 지원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는 헬기 추락과 함께

전사했다)

 

 

(같은날 이들을 찾으려고 이륙했던 버드독 정찰기가  추락해 두 명의 장교가 실종된다.

 이 작전은 샤이닝 브라스의 라오스 정찰 첫 작전이었다 - 잇빨중사>

 

 

그런데,

이 트론 대위는 매우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3국의 군인으로 전투를 경험한 사람이다. 아래가

그의 군사경력이다.

 

(아래 내용은 인터넷 기사와 혼용해서 구성합니다.)

 


1938-1945 (핀란드 육군) : 제12보병연대 : 핀랜드군 대위
1945 (Waffen SS) : 친위대 자유 북구인 대대 : 무장친위대  소위
1954-1965 (미 육군) : 77특전단. 10특전단. 7특전단. 5특전단, MACV-SOG.  : 미육군 소령(추서)

수상경력: 만네르하임 크로스, 동성훈장, 명예전상장, 수훈십자장, 대통령부대표창

 

군사경력: 1919년 5월 28일 - 1965년 10월 18일. (전사 당시 46세)

 

 

(그를 추모해서 기록된 사후 자서전)

 


바로  미국 명"래리 썬"으로 알려진  

핀랜드인 "라우리 알란 퇴르니" 미육군 소령이다.

겨울전쟁과 독소전쟁에서 핀랜드군으로 활약했고, 종전직전 잠시 독일군에 몸담았으며,

종전후 미국으로 건너가 미육군 특전단에서 대위로 복무하므로서  삼국의 깃발아래서

장교로 복무한 경력이 있는 래리 썬은  "전설적인 핀랜드 전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냉전이 가져온 또 하나의 비극 그 자체다.


라우리 퇴르니는 1919년 5월 28일 핀랜드와 소련의 접경근처 핀랜드 령  "비푸리"에서

선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8년이 되자 퇴르니는 육군에 입대했으며 겨울전쟁이 한창인,

1940년에 "하미나"의 예비역 부사관 학교에 입교했다. 이 비푸리란 도시는 나중에 독소전쟁의

결과 러시아의 영토가 되어 버린다. 

1939년 가을, 퇴르니는 핀랜드 군 의무복무기간을 마쳤지만, 그의 조국 핀랜드는 여전히 소련과

겨울전쟁 중 이었다. 이에 따라 그의 군 복무기한은 전시동원령의 일환으로  연장되었다.  원래

그의 보직은 군수지원 업무였지만,  라도가 호수 전투 중에 최전선으로 배치되었다.  "레미티"에서의

포위된 러시아 사단에 대한 섬멸전에 참가했었던  그는 혁혁한 공적으로 지휘관의 주목을 받았고,

그의 배려로 장교후보생 교육을 받게 되었다.  소련과의 전쟁이 끝났을때 그는 소위로 임관되었다.

전쟁에서 패한 핀랜드는 독일과의 연대를 강화했고, 그 일환으로 다수의 핀랜드 군인(대략 650명)

들이 독일에 교육생으로 파견되었다.  퇴르니도 독일 무장친위대에 교육생으로 단기 파견되었다.


곧이어 독일과 소련의 전쟁이 개시되자, 퇴르니는 전선으로 복귀했다.  이른바 "퇴르니 부대"로

알려진 그의 휘하 수색정찰부대는 적후방 깊숙이 잠입해 소련군 후방을 공격하는 임무를 수행

했는데, 놀라운 전과로 인해 양측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한번은 소련군 후방으로 침투한 퇴르니

부대는 러시아군 호송차량을 습격해 러시아군 300여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한편 그의 부대원 중에는 훗날 핀랜드 대통령에 오른 "마우노 코이비스토"도 있었는데  그는  

독소전 당시 핀랜드와 소련간의 최후의 전투인 1944년 7월에서 8월까지 이어진 "일로맨치" 전투

당시 퇴르니 대위 휘하의 정찰 중대에서 근무했다.)

퇴르니의 부대가 계속해서 소련군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자, 소련군은 퇴르니의 목에 300만

핀랜드 "마르크" 화를 현상금으로 걸었다. 퇴르니는  그동안의 혁혁한 공적을 인정받아 1944년

7월 9일 "만네르하임 크로스"를 수상하였다. 만네르하임 크로스는 미국의 의회명예훈장에 해당

하는 최고훈장으로 독소전 동안 핀랜드장교 로서는 그가 유일하게 수상하였다고 한다.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핀랜드와 소련이 강화조약을 맺자, 퇴르니는 승복하지 않고,

독일로 갔다. 그는 무장친위대의 자유 북구인 대대에 친위대소위로 착임하였고, 독일군의

"베오울프"작전(저항군조직 및 사보타주 작전)을 위한 교육을 받고 핀랜드에서 저항운동을

할 작정이었지만,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결국 영국군에 항복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영국군 포로수용소를 탈출해 핀랜드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는 것은  국가경찰이었다. 핀랜드는 이미 소련의 영향력 하에 있었고,

핀랜드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한 상태였다. 퇴르니는 체포되어 6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를 비롯해서 전쟁 중 혁혁한 공적을 세운 수많은 핀랜드 장교들이 헌신과 용기의 댓가를

감방에서 치루고 있었던 것이다.   1948년 12월 퇴르니는 핀랜드 대통령 "파시키비"의 사면

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이미 사회주의 핀랜드에서 그를 흔쾌히 받아줄 곳은 없었다.  결국 퇴르니는  전쟁중

함께 했던 부하장교와 함께 스웨덴으로 넘어가 한 남작부인의 도움으로 탈출을 준비한다. 

그러나 같이 넘어온 동료 장교는 핀란드 첩보기관에 붙잡히고 퇴르니는 스웨덴계 핀란드

여성과 결혼하여 위장상태로 스웨덴에서 살게 된다. 

결혼후 직업이 필요했던, 퇴르니는 스웨덴 선원으로 가장하고 베네주엘라로 가는

"볼리비아"라는 화물선에 승선했다.  카라카스 항구에서 퇴르니는 겨울전쟁 당시

핀랜드군 지휘관 중 한 명인  "마티 아르니오" 대령을 만났다. 그는 전쟁후 볼리비아에

망명해 정착한 상태였다.

1950년 퇴르니는 다시 스웨덴 국적 화물선"스카렌"에 승선했다. 목적지는 미국이었다.  

스카렌이 알라배마 주, 모빌 근처를 항해하자 퇴르니는 멕시코 만에 뛰어들었다.  그는

수영으로 해변에 도착한 후, 핀랜드 인들이 다수 정착한 뉴욕시의 브룩클린으로 갔다.  

거기서 퇴르니는 목수와 청소부로 일했으나, 이런 직업은 "타고난 전사"인 그에게는

맞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허드렛 일이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그는 전시 비밀정보부의 수장으로

유명한 "와일드 빌" 도노반이 운영하는 법률회사에 의해 추진된 미의회 법안이 통과되면서  

영주권과 함께 미육군에 들어갈 기회가 주어졌다.

퇴르니는 1954년  "롯지(잠정 법률로 유능한 해외인력의 미군입대를 허용하는 것이 골자)"으로

미육군에 입대하였고, 거기서 "래리 썬"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육군에 들어간 래리 썬은

곧 그와 같은 처지에 있었던 핀랜드계 미군장교 그룸의 후원을 받았다. 미육군에서는 종전

후 직업을 잃은  핀랜드 장교들을 미국에 이주시키고 미육군에서 장교로 일할수 있도록

길을 터주고 있었던 것이다.  미육군에서 이들은 "마르티넨의 아이들"이라고 불렸다.

그들중 상당수가 특수전부대로 배속되었고, 그들은 사병이었던 래리 썬도 특수전부대로

가도록 후원했다.  뛰어난 실력을 가졌던 래리 썬은 곧 특수전부대에서 가장 뛰어난 교관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거기서 그는 교관으로서 스키와 써바이벌,산악등반, 게릴라 전술을

가르쳤고, 새로이 낙하산교육을 이수했다.

 

(기록에 따르면 퇴르니 대위는 초기 그린베레 HALO 이수자다-잇빨중사)



이런 그를 그냥 사병으로 둘 이유는 없었고 그의 계급은 초고속으로 올라갔다. 1957년 그는

예비역 중위로 임관했고, 곧 현역으로 전환되었으며 1960년에는 대위로 승진했다.  천성이

"필드 체질"인 그는  중위로 임관된 직후인 1958년에 이미 제10특전단 소속으로 서독에서

근무 중이었다.   서독 근무 중, 그는 미육군 특수전부대의 스키교육과정을 새로 쓸 정도로

상관의 신임을 받았으며  이란의 "자고라" 산맥에 추락한 미공군 수송기의 시신회수 작업때는  

험하기로 유명해서  유럽의 전문산악구조반도 포기한 그 곳을 부하들을 이끌고 가볍게 돌파해

수색회수작전을 마무리 하므로서 큰 명성을 얻었다. 

 

   (찾기 좀 힘든, 독일 10특전단 사진)



1963년에는  서독근무 당시 상관인 "롤트" 중령의 천거로 중령과 베트남에 배속되었다.  

그는 작전팀 A-734 소속으로 메콩델타에서 작전을 수행하며 두 차례 훈장을 수상했다.


상관인 "롤트" 중령은 그의 능력을 인정해  그가 승진을 위한 경력을 쌓기를 바랬지만,

그는 야성을 버리지 못하고 SOG로 전출을 희망했다. 결국 1965년  래리 썬은 SOG 불

사이먼 대령의 "프로젝트 샤이닝 브라스"에 군사고문 신분으로 배속되는데 성공했다.

 

(샤이닝 브라스: '초원의 불' 작전으로 시작된 CCN의 후기 작전명칭.)

(Bull 사이면 대령: 나중에 손타이 수용소 습격대장)

샤이닝 브라스는 남베트남으로 남파되는 북베트남 군과 게릴라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그들의 은신처인 라오스로 월경침투하는 위험한 작전이었다. 래리 썬은 샤이닝 브라스의

첫 라오스 침투작전에 자원했다.  

 

1965년 10월 18일 그와 정찰팀을 실은 "킹비"헬기가 라오스로 넘어갔다.  그의 헬기는 무사히

이동중이라는 무전을 본부로 보내왔지만, 이내 통신이 끊겼다.  사고가 발생했음을 직감한

샤이닝 브라스 프로젝트팀은  곧 이어  그 지역에 대규모 수색구조 작전을 실시했으며, 얼마

뒤 다낭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라오스 산악지대에서  그가 탑승한 헬기의 잔해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고,  실종으로 처리되었다.  하지만 정황상 그의 사망은 명백

했고, 그는 사후 "육군소령"이 추서되었다.

1999년, 미군유해발굴단이 현지조사를 통해 래리 썬의 유해로 보이는

유골을 발굴했고, 2003년 그의 신원을 확인했다.

 

 

2003년 6월 26일 그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정되었다. 



미군은 래리 썬의 업적을 기려서 콜로라도주 포트 "카슨"의

제10특전단 본부건물 "래리 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최근에 국내에 번역 소개된 "로빈 무어"의 "그린베레"라는 작품에서는 래리 썬을 모델로 한

"스벤 코르니"라는 핀랜드계 미군특전단원이 소개되었다. 참고로,  로빈 무어의 소설은 존웨인

주연의 "그린베레"라는 영화로 재탄생되었고,  래리 썬은 2004년 그의 모국인 핀랜드의 "위대한

핀랜드인"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전 시대를 통털어 52번째로 위대한 인물로 선정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래리 썬은 냉전의 와중에 갈 곳을 잃은 전사의 대표적인 표본이다. 당시

추축국편에 섰거나 전후 처리과정에서 동서진영의 분열로 인해서 다수의 인물들이 조국을

등져야 했고, 거기엔 상당수의 군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핀랜드인 래리 썬, 즉 라우리

퇴르니도 결국 사회주의 조국 핀랜드의 핍박을 벗어나기 위해서 미국으로 망명한 것이다.

망명한 이후에도 퇴르니는  전사의 영혼을 버리지 못했고, 결국 위험한 전장을 찾아 떠돌다

결국 라오스의 이름 모를 어느 골짜기에서 사라진 셈이다.


다만,

그는 동정적인 여론과  운이 따라준 덕에

지금은 조국에서 핀랜드의 영웅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p.s 

국내에서 환영받지 못하던 많은 제3제국과 북구유럽의 전쟁참전자들이 미국이나

프랑스 등으로 흘러들었다. 그 중 독일군 무장친위대를 가장 많이 받아준 곳은

캐피블랑. 그리고 이들은 인도차이나에서 많은 수가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했다.

핀란드 경우도 사정이 비슷했고, 남미로 도주하거나 미국으로 흘러들어간 사람이

꽤 많았던 것을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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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리 토르니 대위/그린베레 사이트의 근무내용

 

그는 35세에 미 육군에 이병으로 1954년 1월에 입대했다.

당시 그가 병적표에 기입한 그의 이름은 Larry A. Thorne이다.

(그의 핀란드식 이름은 Törni 다)

 

그는 통신/산악훈련/낙하산 훈련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했다.

병장으로 고속 진급을 한 뒤에, 그는 콜로라도 포트 카슨에서

암벽과 겨울전투 교관임무를 수행한다.

 

이어 1954년 말, 그는 미 육군 특전단으로 들어가 77특전단으로

배속되었고, 이어 1956년 가을, 미 육군 소위로 임관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고고도낙하산훈련 HALO를 수료했다.

 

(이 포브 브레그의 77특전단은 나중에 7특전단의 토대가 된다)

(이 미 육군 77특전단에는 북구/동구권 출신과 동양인 등이 많았다)

 

그리고 그는 미 육군 특전단, 나토군의 일환으로 서독의 바바리아

지방에 톨즈 10특전단으로 간다. 독일의 10특전단에서 그는 1958-

1962년까지 근무한다. 그리고 그 동안 대위로 진급한다. 

 

당시 자그로스 산악에 미군의 항공기가 추락했는데, 그는 12명의

특전대원을 이끌고 험란한 산악을 돌파해 임무를 완수, 훈장을 받는다.

이 항공기에는 당시 미군의 1급기밀로 분류된 서류가 실려 있었다. 

자그로스 산악은 당시 이란-러시아 국경 근처의 산악이었다. 추락

장소는 고도 14,000피트였다. 그는 1급기밀 서류를 확보하고 죽은

승무원들의 사체를 모두 끌고 내려왔다.

 

1963년 토르니 대위는 포트 조지아의 보병학교로 입교를 발령 받는다.

고등군사반을 수료하고, 그는 1963년 11월부터 1964년 4월까지 베트남

파병을 수행한다. 첫번째 파병에서는 소속부대인 7특전단의 A-734팀을

이끌고 메콩 델타 부근의 세븐 마운틴 지역의 틴 비엔에서 그린베레 A

캠프를 운영한다. 이 A캠프 동안 토르니 대위의 팀은 캄보디아 국경으로

정찰을 나가 베트콩의 통신선을 파괴하고 다수의 베트콩을 사살했다.

이 기간 동안 토르니 대위는 동성훈장을 받고 부상도 당했다.

 

이어진 1964년 11월 토르니는 5특전단에 배속되어 다시 베트남으로 가라는

두 번째 파병명령을 받는다. 그는 판 차우(Phan Chau)의 그린베레 A캠프의

팀장으로 임무를 수행한다. 그리고 1965년 6월 12일 두번째 부상을 입는다.

이로 인해서 5특전단 본부는 그에게 행정업무에 머물 것을 지시한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1965년 중하순 MACV-SOG에 지원하여 들어가게 된다.

 

당시 MACV-SOG CCN은 초원의 빛(PRAIRIE FIRE)작전을 끝내고 2단계작전인

샤이닝 브라스(Shining Brass)작전을 시작하고 있었고, 샤이닝 브라스 첫번째

라오스 영내 정찰작전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특전기지는 캄 덕이었고, 작전

도중 그가 타고 있던 헬기가 추락하여 실종되었다. 1998년 당시 헬기의 추락

장소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1999년 7-8월에 미군 유해조사반의 조사가 있었다.

그리고 DNA조사를 거쳐서 그의 전사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린베레 사이트에서 보면, 토르니 대위는 굉장히 많은 훈련을 받은

장교였다. 스쿠버다이빙. HALO를 수료했고, 암벽등반에 일가견이

있었으며, 뛰어난 스키 실력에 복싱도 매우 잘한 장교로 나와있다.

 

미 육군은 베트콩/월맹군 투항자가 있을 때 보여주는 미군 실종자

사진에 토르니 대위 사진을 포함하여 항상 제시했었다.

 

그가 실종되었을 때, 다른 대원들은

"그가 살아 있을 것으로 나는 확신한다. 그는 가능하다."

"전투생존에 토르니 대위처럼 뛰어난 사람은 없다."

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