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의 한국인

구름위 2013. 11. 23.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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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의 한국인

시민 혁명의 나라 프랑스지만 식민 지배의 끈질김과 잔혹함, 그리고 집착은 오히려 제국주의 열강 가운데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웠다. 독일에게 맥없이 무너진 뒤 일본에게 자신의 식민지를 무력하게 내 줬지만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는 또 다시 그 추잡한 발길을 베트남에 들이밀었다. 여기에 단호하게 대응해 싸운 게 호지명의 월맹이었고, 초기에는 월등한 화력을 앞세워 기세를 올리던 프랑스군은 끈질기게 게릴라전으로 맞서는 월맹군에게 점차 수세에 몰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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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은 이 판세를 역전시킬 원대한 작전 하나를 세운다. 중국이 월맹을 지원하는 보급 루트가 인근의 라오스를 관통하는 것에 착안, 라오스 인근의 디엔비엔푸 지역에 대규모 공수부대를 낙하시켜 그를 장악하고 월맹의 보급루트를 차단하여 월맹의 목을 죄겠다는 것이었다.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프랑스 외인부대를 비롯한 정예병력이 하늘을 덮는 낙하산으로 디엔비엔푸에 내렸고 월맹군은 일단 후퇴했다. 프랑스 군 사령관 나바르의 기세가 얼마나 등등했는가는 다음과 같은 마초적 발언으로 추산해 볼 수 있다. “전쟁이란 건 여자와 같아서 덮칠 줄 아는 자에게 몸을 맡긴다고!”

그러나 나바르가 덮친 건 여자가 아니라 호랑이였다. 월맹군은 기가 질린 것도, 마냥 후퇴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차근차근 병력을 집중시켰고, 맨등으로 포탄을 지고, 자전거로 박격포를 나르고, 사람의 몸을 이어 늪의 다리를 만들면서 프랑스군에 대한 포위망을 소리없이 완성시켜 갔다. 현재 백 살이 넘어 생존하고 있는 월맹군의 명장 보구엔지압 장군은 압도적인 병력의 우세를 확정지은 다음에야 포위 공격을 시작했고, 프랑스 제국주의는 베트남 민족해방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는다. 고지대에서 내려퍼붓는 월맹군의 포격은 나폴레옹 이래 빛나는 공훈을 세웠던 프랑스 포병대를 침묵시켰고 급기야 프랑스 포병 사령관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수없이 죽어 나가면서도 월맹군들은 쇠심줄처럼 디엔비엔푸를 죄어 들어갔고 마침내 1954년 5월 7일 프랑스군은 전면 항복한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전투 중의 하나로 평가되는 디엔비엔푸 전투의 끝이었다.

이 전투에는 프랑스의 정규군은 물론 프랑스가 운용해 온 외인부대들도 대거 투입됐다. 여기에는 ‘프랑스 대대’라고 해서 한국 전쟁 때 참전한 부대원들도 있었다. 프랑스 대대는 한국에서 전설적인 용맹성을 과시한 바 있는데 1951년 1월 25명의 프랑스군이 총검 돌격을 감행하여 인민군 1개 대대를 혼비백산 쫓아낸 일은 그 대표적이다. 이에 감동한 미군은 은성 훈장으로 그 공훈을 기렸는데 프랑스 지휘관 몽클라르 중령 (원래는 장성인데 대대를 지휘하느라 스스로 강등했다는)은 “총검 돌격은 보병의 기본인데 뭘 훈장까지 주고 그러나” 하며 잘난체(?)를 했다는 후문이다.

이 용맹한 부대도 한국 전선을 떠나서 디엔비엔푸에 배치됐다가 쓴맛을 보게 되는데, 한국을 떠날 때 프랑스 대대에는 한국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함경도 함주가 고향이었던 전병일도 그 중의 하나였다. 무작정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피난온 이후 국민방위군으로 편성된 그는 프랑스대대의 행정병으로 배속됐고 그들과 함께 2년간 전투를 치른다. 휴전은 됐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타향살이 신세였던 그는 프랑스 장교의 제의로 프랑스군의 일원으로 베트남 땅을 밟고 디엔비엔푸의 참극의 현장에 있게 된다. 디엔비엔푸의 혈전에서 그와 함께 베트남으로 왔던 한국인들은 거의 전사했지만 그는 살아남는다. 디엔비엔푸 이후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손을 뗀 뒤 그는 이번에는 알제리로 배치된다. 프랑스 식민지 경영 역사의 가장 큰 오점, 알제리 전투에서 제국주의 군대의 일원으로 싸우게 된다. 뭐 이런 기구한 인생이 다 있을까.

하지만 그 와중에 그는 알제리 인들과 내통한다는 누명을 썼고 그를 벗을 길이 없자 탈영을 선택했다. 1960년 그는 체포됐고 외인부대원으로 쌓아온 모든 것을 잃었다. 훈장은 물론이고 프랑스 국적까지도. 그 이후 프랑스에서 살면서, 트럭 운전도 하고 제빵 기술도 배워 생계를 유지했지만 그는 여지껏 무국적자로 남아 있다. 어떤 서류에는 북한인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다른 서류는 그를 남한인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그 어느 쪽에도 그의 존재는 남아 있지 않다. 그는 한국말을 거의 잊었지만 가끔 한국 물건 파는 슈퍼에 가서 라면을 사서 끓여 먹으면서 고향을 떠올린다고 했다. 그가 한국에 있을 때에는 라면 같은 것이 없었지만, 한국 라면 특유의 매운 맛이 까마득히 숨어 있던 그의 옛 미각을 자극했는지도 모르겠다.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에 백기가 휘날리기 전의 전황은 그야말로 지옥같은 백병전이었다. 수없이 죽어간 동료들의 원수를 갚겠다는 각오로 월맹군은 악귀같이 달려들었고, 프랑스군의 마지막 거점 이자벨 고지가 떨어졌다. 그 와중에 시체로 변한 사람 가운데에는 어쩌다 프랑스군의 일원이 되어 영문도 모르는 나라 베트남까지 와서 누구인지도 모를 적과 싸운 한국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살아남았고, 프랑스의 요구에 따라 알제리까지 싸우다가 지금은 무국적자로 프랑스에 살고 있다. 한반도는 참으로 풍운의 땅이었고, 거기 살았던 이들의 운명도 여러 바람에 휘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