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골든 트라이앵글의 그늘 -1- 패퇴의 시작|베트남전쟁

구름위 2013. 11. 22.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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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현재의 미얀마군 막사입니다.
오른쪽은 타이땅이고 길건너 막사쪽이 미얀마땅입니다.
미얀마군은...국경경비가 주목적이 아닙니다. 자국에서 타이로 넘어가는 사람들을 감시한다는게 더 맞겠지요....그리고...
....마치 우리네 전방 추진소초같습니다...-_-..........


戰史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도 국공내전에 관심가진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국내에서도 이 분야를 연구한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합니다.
-고구려사 전공자도 열손가락안에 들판인데.....남의나라,
더구나 얼마전까지 금기시되었던 공산주의 국가의 전사를 연구하는
사람이 많을리 없죠.이래서 탕슉놈들이 동북공정운운해도 제대로된
반론을 펼치는 이는 드물게 됩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나라...타이와 미얀마,라오스 그리고 중국에 관한 내용이라
조금 써볼까합니다.

개괄로는 국공내전 운남성 주둔 국민당군 제 8군,26군의 철수로부터 시작하여
이들의 버마퇴각, 운남성 재진공,타이군편입,그리고 이용가치의 소멸로 인한
와해로 이어집니다.

이 국민당잔여부대의 활동은 우리나라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국민당 잔당의 운남성 재 진격은 1951,2년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했을 무렵입니다.
말하자면 중공 후방의 한국전 제2전선의 형성을 노렸던겁니다.

이후 국민당 잔여부대의 말로는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길을 걷게 됩니다.
또한 여러분이 아시는 마약왕 쿤 쿤사와도 연관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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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1940년대에 발원한 국민당 제 8군 26군의 피맺힌 행군의 역사가
타이,미얀마,라오스,중국의 격변의 골든 트라이앵글의 현대사를 꿰뚫고.
1990년대 쿤사의 사망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온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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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내용은 사료부족으로 인해 혼동됨이 많습니다.

가령 지명문제만 하더라도
왜냐면 중국측 기록의 지명은 미얀마와 태국 라오스의 지명조차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자기네식 표기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얀마령 따찌렉은 소설이역에서는 따치리로 표현합니다.
이정도는 애교입니다. 바로 옆의 타이령 메싸이는 이에쓰라고 표현합니다.
정확한 군사지도가 있더라도 현재의 지명과 대조 불가입니다.
또한 현재의 도이 메싸롱을 pha tang이라는 전혀 듣도보도 못한 지명으로
표기하는 문헌도 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국민당 8군,26군 및 뒤이은 개편부대의
작전루트와 철군루트를 정확히 파악하는것은 매우 힘든일입니다.

가령 극히드문 사료가운데 참전자가 쓴 수기형식의 소설 이異역域은
그저 처절한 철수의 흔적만 되새길뿐 사료로서의 가치는 30%도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나마 신빙성있는 국방군사연구소간의 중국인민해방군사
中國人民解放軍史에서도 이부분은 달랑 도표 한장과 몇줄의 언급으로 맺어버립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이 잊혀진 전戰투鬪사史에 CIA가 개입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타이를 비롯한 각국의 드러내고 싶지않은 치부이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비교적 현대의 사건임에도 다른 전쟁,정세에 비해
사료가 극히 부족합니다.


논문쓰는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고증에 문제가 있을수가 있습니다.
또한 지명과 일자등은 거의 생략합니다.
그저 생각나는대로 쓰는것이니 만큼 혜량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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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민국 38년(1949년) 중국대륙은 공산당에 석권되고 운남성과 티벳등 짜투리 땅만 남겨놓았다.
운남성 주둔 국민당 第8軍 26軍 (군단정도의 병력)의 병력은 인원과 장비등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으나 다른 성省의 국민당이 인원없고 장비없어 일패도지한것은 아니었다.
많은 국민당군은 전투다운 전투없이 공산당에 투항해버렸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구식 일본군 장비로 무장했던,
인원과 장비가 불충분했던 공산당군은 자진해서 투항하고 접수한 국민당군덕분에
최신 미군장비와 병력을 보충할수 있었다.
말하자면....국민당군은 공산군의 보급창고이자 훈련소인셈이었다.

그러나 국민당 8군과 26군은 그나마 절개있는 지휘관을 두고 있었다.
어수선한 윈난성도 주석(우리로치면 도지사)이 공산당에 회유당해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이는 군 지휘관들도 마찬가지였지만

8군 이미장군과 26군 여국전장군은 항전을 결심했고 이는 기나긴 고난의 시작을
의미했다.

공산당 2野 소속의 진갱의 부대가 윈난성으로 쳐들어오자 싸얼론지앙에서 패해
버마 국경으로 패퇴한다.

당시 버마와 중국측 국경은 정확히 협의 된것이 없었다.
이는 초기에 흐리멍텅했던 국경선 정립이 나중에 문제가 생겨
중인국경분쟁이 59년에,중소국경분쟁이 62년에 발생한것에 비춰보면 당시엔 당연한 일이었다.

말하자면 이지역은 미얀마의 영향권도, 중국권도 아닌 거의 무정부 지역이었고
사는 민족은 국경지대 변두리 소규모무역에 종사하는 중국인과 나중에 피난온 중국인과
샨족등 미얀마 변구의 소수민족뿐인 허름한 지역이었다고 보면되었다.

남사당 놀잇줄마냥 불안한 정세를 가진 지역에서 약간의 해방구를 설정하고
투철한 반공정신을 가진 동남아 화교청년들을 모집하여 기력을 회복한 국민당 잔여분자들은
국토수복을 꿈꾸며 세력을 키운다.
이들이 차지했던 해방구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중국 운남성 곤명남부의 징홍부터 따치렉남부지역을 아우르는 타이완의 3배에
이르는 땅이었다.

작전에 참가한 이들은 국토회복,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인줄로만 알고 있지만 국제정세는 냉혹했다.

[OPERATION PAPER]
운남성을 공격하라....


인천에선 허를 찔러 성공적으로 상륙했지만 압록강에선 허를찔려 중공군의 개입을 전혀 눈치못챈
맥아더가 해임되고 트루먼의 친정체제가 강화되자 백악관여관에서는 뭔가를 꾸미기 시작했다.
바로 한국전의 제2전선 구축이었다.

타이완으로 도망간 장개석은 한국전이 일어나자마자 대만군(중화민국군)의 파병을 천명했다가
미국으로부터 핀잔만듣고 앙갚음할 기회를 노리던중 51년 휴전협상이 개시되자
[휴전절대불가]를 고수하며 타이완에서 고성방가를 하고있었다.
물론...본토를 잃었으니 한국전을 기화로 미군을 끼워서 중공을 괴롭히면 자기에게는
다시금 기회가 올것이라는 꼼수가 엿보이는 플레이 였지만 사건은 엉뚱한데서 일어났다.

미국이 미얀마변경에 남은 국민당잔여부대에 주목하기 시작한것이다.
물론 내놓고는 못하는 일이어서 늘 그렇지만 극소수의 작전입안자만이 아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처절한 전투의 경험을 수기로 남긴 참전자들은...그저 순수하게 본토수복을 꿈꾸다 전사한꼴이었다.

51년 4월,
편제 개편이 이루어 졌지만...역시 원대오는 운남성주둔 국민당 8군,26군이던
이미 장군의 8군이 와~ 하고 운남성으로 쳐들어갔다. 찡홍을 수복하고 멍싸까지 진출했으나
기냥 패하여 다시 버마로 돌아왔다.

마찬가지로 26군의 여국전장군도 만만치 않아보이는 시상반나 찡홍을 살짝돌아서 디립다 공격했으나
PLA(인민해방군)의 강력한 출근저지로 1주일만에 퇴근해버린다.
이후 소규모 게릴라전이 난무하는가운데 잔여분자들의
본토수복의 꿈은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때쯤 나온것이 오퍼레이션 페이퍼였다
그린베레가 라오스의 소수민족인 몽족을 포섭하여 훈련과 지원을 한뒤 운남성 여기저기서 출몰,
일대 깜짝쑈를 벌이다가 기회를 보아 쿤밍을 점령한다는 깜찍한(?)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60년대까지 계속되나 실적치에 미달하자
불량품만 쏟아내고 CIA가 하는짓이 언제나 그렇듯 슬그머니 발을 뺀다.


미국과 타이완 국민당정부가 희망했던 한국전 제2전선구축의 실패는 물론이거니와
베이징까지 쳐들어 가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윈난성 점령을 통해 내륙진출의
안정적인 교두보를 마련하려는 꿈도 날아가버린것이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사실로는 미군이 CIA를 동원하여 이 국민당 잔여분자들에게
지원을 해주었다는 점이다.
이 역시 소련과 중공당국이 알면 큰일날 일이므로 위장회사와 더미항공사를 통해
직접적인 도움을 준것이다.
이들이 취급한 물자는 총기,탄약뿐만아니라 공산당의 경제혼란을 야기하기위해
중공 위조지폐까지 있었다.

그때당시 얼마나 보안이 철저했던지
소련은 커녕 중공당국도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아마 알았으면
마오아저씨가 당시 심혈을 기우려 몰두했던 군부숙청대상자들을 이리로 총알받이로 내보냈을지도
모를일이다. 중국공산당은 한번 전쟁하면 사상자수 단위가 보통 백만이다.
가볍게 숙청 한번하면 보통 500만이다. 근현대사에서 수많은 외침과 침략,내란,숙청이 있었던 나라,
이러고도 중국인이 멸종안되는거 보면 참 신기할 따름이다.
아무튼....


더우기 이 시점에서 국민당 잔여분자들은 자금조달을 위하여
마약을 재배하고 있었다.
물론 CIA의 사주로 인한점이 크기는 하지만 명분이 그럴듯하다고 잔여부대지만 명색이 정규군인데
마약을 재배한다는것은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가 이미 퇴색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 역시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지만
장개석정부의 무능과 부패, 미국의 비정상적인 개입등에 기인한바 크다.
한가지 예를 들면 당시 미얀마변구주둔 국민당 정규군 병사의 봉급이 미화 25센트였다.

이역의 저자 등극보가 한탄하듯이 방콕 호텔 도어맨에게 팁으로 주면 따귀맞을 돈을
월급으로 받는다는 것이다.
당시 타이완과 미국에게서 동시에 지원을 받는처지였지만 장개석국민당의 고질적인
부정부패로 타이완에서 방콕으로 방콕에서 미얀마로 오는동안 죄다 사라지고
실수령하는 물자는 한줌이었으니, 쌀한가마 보냈다는데 받는사람에겐 한됫박 오는셈이었다.

이러한 물자들은 암시장에 거래되어 고급장교들이 방콕의 부동산거부가 된다거나
타이완본토에서 호의호식하는일은 얼마든지 예상할수 있다.
한마디로...부하들의 피로서 배불리는 반민족적인 인사들이 지금도 타이완에
생존하는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도 남의 일만은 아닐것이다.

또한,
국민당잔여분자들이 재배한 마약은 CIA에 의해 안전하게 방콕을 비롯한 후방으로 운송되어 갔으니
이역시 타이 군부의 암묵적인 승인이 있었다는것을 반증해준다.

-여담으로 타이북부,미얀마와 라오스에서 재배된 마약은 월남전의 미군을 오염시키고
나아가서 세계 최대 마약왕 쿤사를 있게 했으니 이 역시 한시대의 격랑이 지금껏 남아있는
슬픈 역사라 할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