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베트남전쟁..케산(Khe Sanh)공방전(1)

구름위 2013. 11. 23. 10:32
728x90

남 베트남 북쪽지역(제1군단 전술책임구역-1 Corps Tactical Zone)은

제3해병 수륙양용군(3 Marine Amphibious Force )과

남베트남군(ARVN-Army Republic of Vietnam)병력 약 81,000명이 책임지고 있었다.

 

 

미 해병대와 남베트남군의 전투기지들은 DMZ 남쪽 인구밀집지역의 보호와 후방 경계선 보호를 위해 설치되었다.

대부분의 남베트남군 기지들은 몇몇 언덕을 제외하고는 인구가 조밀한 연안의 평지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가장 서쪽에 위치한 케산의 전투기지/KSCB(Khe Sanh Combat Base)는 9번 국도를 따라

동쪽 30km에 위치한 로크파일(Rockpile)의 해병 기지와 더불어 그 중간지역인 카루(Ca Lu)를 방어하고 있었다.

 

 

주변에 드문드문 사람이 살뿐 거의 인적이 없는 고원지대 케산(Khe Sanh)은

남 베트남영토의 북서쪽 끝에 위치한 작은 삼각형의 쟁반같은 모양의 마을이다.  

케산은 남북으로 베트남을 분단한 분사분계선(DMZ)바로 아래에, 

서쪽으로는 라오스 국경으로부터 약10km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케산고원은 해수면상 약 450m에 위치하며 일반적으로 평평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북동쪽의 측면은 약 300m 의 라오 쾅 골짜기로 형성되어 있으며  폭이 좁은 강이 북서에서 남동으로 흐르고 있었다.

고원은 대나무, 높은 코끼리 풀과 커피나무에 둘러 싸여있고 그 위로는 더 큰 나무들이 덮고 있다.

 

 

케산은 오직 1개의 병참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서쪽으로는 라오스 국경, 동쪽으로는 쾅트리로 연결되는 9번 국도이다.  

쾅트리 주둔 미해병대의 주요 기지(캠프 캐롤)가 설치된 동하지역으로부터 케산까지의 거리는 63km이다.

이 도로는 굽이치는 언덕과 수 십개의 강줄기가 교차하고  36개의 다리가 놓여져 있었으며

국도를 따라 펼쳐진 깊은 골짜기와 우거진 숲,  짙은 안개와 낮은 구름과 비는

대규모의 북베트남군을 숨겨주기에 더없이 이상적인 자연과 기후조건이었다.

 

 

북베트남군(NVA-North Vietnamese Army)은 자연이 제공한 천연의 루트들을 통하여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방어선을 뚫고 대규모의 병력과 물자를 남하시켰다.

호치민 루트는 남북베트남에서 라오스, 캄보디아로 이어지는

작고 수 많은 루트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베트남 전역으로까지 연결되었다.

북베트남군의 활동이 왕성해지자 미군은 단순한 방어기지였던 케산기지를 증강시키게 된다.

육군 제1기병사단(1st Cavalry Division -공중강습/Airmobile)은 해병대와 마찬가지로

케산 기지의 방어와 지원임무를 할당받았으며 미군 특수부대와 남베트남군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미공군, 해군, 남베트남 공군에게는 공중엄호, 폭격, 수색, 보급, 사상자 철수용 헬리콥터 지원 등이 지시되었다.


 

케산 기지 주변의 고지들은 양측 모두에게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881S고지는 케산으로부터 서북서 방향으로 7km떨어진 곳에 있으며,

북으로 2km떨어진 곳에 위치한 881N 등의 여러 고지는 북베트남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북서쪽 4km지점에는 861, 861A고지, 그곳으로부터 대략 1.5km 동북동 쪽에는

558고지(케산으로부터 4km 북북서방향)가 있고, 케산으로부터 정북쪽으로 4.5km 지점에는 950고지가 있다.

그리고 케산 기지 남쪽으로 3.5km 지점에는 케산 마을이, 랑베이 미군 특수부대 캠프는

9번 국도를따라 케산으로부터 9km남서쪽에 위치했다. 랑베이 특수부대 캠프는

1967년 9월에 서쪽으로 약 1km더 전진배치되어 라오스 국경으로부터 약 2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케산 기지의 해병대에게 있어서 기상예보는 최대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북베트남군의 케산 포위공격은 대부분의 동남아시아가 건기이며

베트남북부지역의 우기인 1월과 4월사이에 실행되었다.

이 지역은 다른지역이 가뭄일지라도 연중 비가 내리는 곳이다.

특히 케산 고원지대는 연중 낮은 구름과 안개가 하늘을 가리는 날씨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케산 공방전 당시에는 더욱 심했다. 케산과 외부를 잇는 유일한 통로인 9번 국도는 북

베트남군이 매복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중으로부터의 지원은 필수적이었다.

또한 포병은 관측을 통해 적의 위치를 파악해야했기 때문에 날씨는 매우 중요한 변수였던 것이다.

이러한 기상조건 때문에 케산은 "안개 공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따금 맑은 날씨가 6시간동안 지속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시계는 7km이상을 넘지 못했다

 

1962년 9월, 남베트남군 공병들이 케산 마을 북쪽에 처음으로 간이 활주로를 건설하였다.

1964년 말경에는 인근 950고지에 무선 중계소(레몬 트리)를 설치하여 1개 소총소대 병력이 경비하도록 조치했다.

1966년 9월에 들어서는 미 해군 공병 건설대대가 수송기의 이착륙이 가능하도록

활주로의 길이가 1km이상이 되도록 확장한 다음, 강철판을 깔아놓았다.

그 몇 달 후인  1966년 10월 1개 해병대대가 케산 비행장과 인근지역을 점령했는데, 북

베트남군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후부터 케산 비행장은 해병 1개 중대(9연대 2대대 E중대)에 의해 방어되었다.

 

미군 특수부대(그린베레)는 1962년 12월 한때 사용하였던 캠프를  남서쪽으로 9km떨어진 랑베이로 옮겼다.

특수부대는 A-101팀이 1966년 12월부터 영구히 주둔하기로 결정되기까지는

6개의 A팀들이 6개월간격으로 순환 주둔하고 있었다.

특수부대는 캠프 내 훈련장에서 몽타냐족 등 고산 원주민 훈련 임무를 수행해 왔다.
라오스 국경과 호치민 루트를 통한 북베트남군의 활동이 증가하자 해군 건설대대가 비행장 개수 및 확장작업에 나서게된다.
건설대대는 1967년 8월 17일, 비행장 사용을 부분적으로 중단시킨 다음,

남서쪽 약 1.6km정도의 암석지대를 채석하여 3000개의 새로운 패널(AM-2 매트)을깔아

확장한 비행장을 10월 27일에 개방했다.

활주로 길이가 짧았기 때문에 이 기간동안의 보급은 무착륙 공중투하, 헬리콥터, C-7A 캐리보우에 의해 수행 되었다.

 제3해병연대 1대대는 "대초원 작전"에 의해 1966년 9월 말 케산에 전개 되었다.
대대는 북베트남군 120mm 박격포의 최대 사거리보다 좀 더 긴 6,500m 지점까지 수색을 실시 하였고
그 다음에는 비행장으로부터 1만m가 넘는 지점까지 수색 범위를 확대 하였다.
작전이 실시되는 동안 북베트남군과의 접촉은 일어나지 않았고 작전은 1967년 1월 말에 종료 되었다.
작전을 마친 1대대는  제9해병연대 1대대 B중대와 교대하였고

비행장은 제12해병연대 3대대 I중대의 대공 화기 병력이 배치되었다.

 

1967년 2월부터 북베트남군의 활동이 증가하기 시작하여 3월에는 대폭 증가 되었다.
이 때 잘못된 보고로 인한 오폭 사고가 발생하여 1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200여명이 부상하는 비극이 빚어졌다.
케산 주변엔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는 보고가 있으나 그것은 잘못된 것으로,

소수 민족을 비롯 제법 많은 민간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북베트남군은 케산 주변의 방어시설을 정탐하며 박격포로 비행장을 공격하여 헬리콥터를 파괴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1군단지역 전술 책임자인 제3해병사단은 제9해병연대 2대대 E중대를 케산에 증원 배치 하였다.
이 때 케산 기지에는 전차 2대, 온토스 3대, 쿼드50구경 기관총 탑재차량 2대,  

M2A1 40mm 기관포를 탑재한 M42 더스터 대공자주포 2대가 증강 배치되었다.

 

3월 16일, 해병대는 19명의 전사자와 59명의 부상자라는 큰 손실이 발생한 제9해병연대 2대대 E중대를

케산에서 철수 시키고 제12해병연대 3대대 I중대도 제12해병연대 2대대 F중대로 대체 하였다.
사실상 케산에서의 최초의 전투로 기록되게 되는 전투는 4월 24일 861고지에서 있었으며,

제9해병연대 1대대 B중대는 북베트남군의 강력한 협공에 의해 14명이 전사하고 17명이 부상하는 피해를 입었다.
4월 25일, 미해병대는 제9해병연대 1대대 B중대 지원을 위해 제3해병연대 3대대 K중대를 헬리콥터로 증원 투입하였다.
3대대장 그레이 와일더 중령이 강력한 저항을 만나 고지 공격에 어려움을 겪자

케산 기지에서는 9연대 3대대 K중대를 헬리콥터로 증파 하였다.
그러나 이 3개 중대는 북베트남군의 매복과 안개, 폭우 때문에 26일 저녁 무렵 고지에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전이 실패하자 해병사단은 후에 시의 북쪽에서 작전 중이던 칼 데롱 중령의

제3해병연대 2대대를 케산 기지로 공수한 다음 861고지로 증파 하였다.

 

4월 28일, 로크 파일 기지의 지원 포 사격과 해병 항공단의 대대적인 공격이 실시되었다.
해병 전폭기들은 250, 500파운드 폭탄, 그리고 벙커 파괴를 위해 750, 1,000, 2,000파운드 폭탄을 861고지에 투하했다.
28일 오후, 해병대는 861고지 에 대하여 기습 공격을 가했으며 적이 후퇴한 후 25개의 벙커와 400개의 개인 참호를 발견했다.
861 고지를 점령한 해병대는 다음날 3연대 3대대에게 881S 고지를 점령토록 명령 하였다.
3대대는 고지로 향하던 중 북베트남군 정찰대와 만나 전투를 치르고 해질 무렵에는

고지 북동쪽 750m지점에 위치한 작은 언덕까지 진출했다.
날이 어두어지자 미군은 881S 고지에 포격과 함께 공습을 실시 하였다.

 

4월 30일 아침, 3연대 3대대는 881S 고지의 정면에서, 2연대 3대대는 서쪽에서 공격을 실시했다가
강력한 저항을 만나 치열한 접전 끝에 52명이 전사하고 152명이 부상 당하는 대 피해를 입었다.
북베트남군은 매우 강력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5월 1일, 북베트남군은 고지를 버리고 사라져 버렸다.
해병대는 5월 2일 고지에서 250개의 벙커를 발견했다.
이즈음 북베트남군은 325C사단으로 병력을 대체 하였다.
881S 고지는 2개의 봉우리로 형성된 둥근 천장 모양으로 생겼고 동쪽이 서쪽 보다 조금 약간 더 높다.
양쪽 봉우리 주변으로는 달걀 모양의 참호가 구축되었으며 고지 주변에는 5대의 헬기가 착륙할 수 있는 랜딩 존이 있다.


5월 2일, 해병대는 881N 고지의 남동쪽에서 공격을 개시하였지만 갑작스런 폭풍우를 만나 포병 지원 작전에 차질이 생겼다.

날이 어두워지고 일단 전진을 멈춘 해병대가 다시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5월 3일 새벽에 북베트남군이 역습을 가했다.
이 역습으로 881N 고지 남쪽 500m 지점의 작은 언덕이 돌파당하여

이 곳에 있던 3연대 2대대 E중대와 북베트남군과의 치열한 근접 전투가 벌어졌다.

새벽 내내 벌어진 이 전투에서 해병대는 전사 27명과 부상자 84명이 발생했고,

북베트남군은 137구의 시신을 남겨 놓고 고지 정상으로 빠져 나갔다.
이 전투에서 붙잡은 3명의 포로로부터  5월 3일 밤에 북베트남군이 881N 아래를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얻음에따라

 

 

해병대는 고지 남쪽 경사면 방어선에 도달하여 크레이모어와 조명탄과 철조망을 설치하고

북베트남군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5월 4일, 북베트남군은 881N  고지 대신 랑베이 특수부대 캠프를 공격했다.
고지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당했음에 불구하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광범위한 지역에

북베트남군이 전개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미군은 당황했다,
기습 공격을 받은 랑베이 특수부대 캠프에서는 2명의 미군 특수부대원과

20명의 민병대/CIDG(Civilian Irregular Defense Group)대원이 전사하고 37명이 포로가 되거나 또는 달아나 버렸다.

 

881N 고지 습격은 5월 5일 아침에 실시되었는데,

북베트남군의 공격이 너무 강력해서 3연대 2대대는 고개길을 폭파시켜 버렸다.
고개길이 파괴되자 북베트남군은 공격을 멈추고 퇴각해버렸다.
이후 3일 동안 2개 대대가 실시한 수색 정찰에서 북베트남군의 모습을 볼 수 없었으나
공중 관측기가 북쪽과 서쪽으로 퇴각하는 북베트남군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5월 9일, 2개의 소대가 적진을 정찰하기로 하였는데,

가용 통신 범위를 벗어나는 장거리 정찰이어서 다른 병사가 무전기로 케산기지까지 중계해주기로 하였다.
정찰 소대의 보고가 들어오자 헬리콥터들이 병력과 박격포, 무반동총을 싣고 이륙하였으며

건쉽 헬리콥터도 출격하여 퇴각하는 적을 강타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해병대는 24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을 당했다.
5월 10일, 제3 수색대대가 정찰을 마치고 귀환한 것을 끝으로 케산 주변 고지들에서의 전투는 막을 내렸다.
고지 전투에서 해병대는 155명이 전사하고 425명이 부상 당했으며 많은 수 의 헬리콥터들을 잃었다.
해병대 항공기들은 1900톤의 폭탄을 투하했으며 포병은 포탄 25,000발 이상을 발사했고 B-52 폭격기도 23회 출격 하였다.
북베트남군은 확인 된 전사자만 940명이며 최대 1500명으로 추산되었다.

 

5월 중순부터 제3해병연대는 크로켓 작전을 발동하여  861고지를 강화하였고

950고지에 설치된 무선 중계소에 소대 병력을 배치 시켰다.
수색과 정찰은 기지로부터 약4200m 까지 실시되었으며 제3수색대대는 더 먼 지역까지 수색 정찰을 수행했다.
북베트남군 제325C 사단 병력들은 여전히 케산 주변에 은신하고 있었으며

6월 부터는 박격포와 로켓탄 공격이 빈번해졌다.
6월 6일에는 881S고지 서쪽 방면에서 전투가 벌어져 해병대원 18명이 전사하고

28명이 부상 했으며 66명의 북베트남군 전사자가 확인 되었다.
북베트남군의 활동이 증가하자 제26해병연대 3대대가 6월 13일에 케산 기지로 증원되었다.
6월 29일 아침에는 케산 전투 기지/KSCB가 로켓 공격을 받아 10명이 전사하고 139명이 부상당하기도 하였다.

 

이후부터 북베트남군의 활동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고, 크로켓 작전은 7월 16일자로 종료되었다.
크로켓 작전 중 해병대는 52명이 전사하고 255명이 부상 했으며 북베트남군 전사자는 200명으로 확인 되었다.
작전이 종료된 그다음날인 7월 17일부터는 아드모어 작전이 시작되었지만 쌍방간 접촉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아드모어 작전은 우기가 시작된 10월 31일자로  종료 되었다.
이때 해군 건설대가 2개월간 케산 비행장 확장 공사를 실시하였으며

8월 12일에는 제26해병연대장 데이비드 E. 론스 대령이 케산 기지 지휘권을 인수 받았고

9월 에는 랑베이 특수부대가  옛 캠프를 떠나  라오스 국경으로부터 더 가까운 지점에 캠프를 마련 하였다.

 

론스(David E. Lownds)대령은 2차 대전때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군과 싸웠고 한국 전쟁에도 참가한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이 당시 제1군단지역 책임자인 제3수륙양용군 사령관 로버트 E 쿠스먼 중장은 휘하에

제1, 3 해병사단과 제1해병 항공단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쿠스먼 중장과 레스본 맥콜 톰킨즈 제3해병사단장도 태평양 전쟁 참전 경력이 있었다,

그러면 여기에서 케산 공방전 당시의 해병대 지휘관들의 이력들을 간단히 살펴보면...

 

 

 

로버트 쿠스먼(Robert E. Cushman, Jr) 제3수륙 양용군 사령관

 

 

쿠스먼 중장은 1914년 생으로 해군사관학교를

상위 성적으로 졸업하고 해병대 소위로 임관 하였다.
제4해병연대 소속으로 중국에서 근무했고

제9해병연대 소속으로 펜실베이니아 호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태평양 전쟁 중 부겐빌, 괌, 이오지마 전투에서

대대장으로 전투를 지휘 하여 해군 수훈장을 수상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다양한 군사 교재를 연구 공부 하였으며

CIA에도 깊숙히 관여 하였다.
1956년 제2해병연대장으로 근무한 뒤 리차드 닉슨 부통령

국가 안보 자문으로 4년간 근무했다.
1961년 제3해병부사단장에 이어 사단장직을 수행하고

2년간 해병대 사령부에서 근무하였다.
1967년 5월에는 제5해병사단장직을 맡다가

곧바로 제3수륙양용군 사령관에 임명되면서
1967년 6월에 해병 중장으로 승진 하였다.
1969년 3월까지 사령관직을 수행하고 CIA를 거쳐

1972년에 제25대 해병대 사령관에 취임 하였다.
1975년에 대장으로 전역하고 1985년에 사망 하였다.

 

레스본 맥콜 톰킨즈(Rathvon McC. Tompkins) 제3해병사단장은 1912년 생으로 1935년 해병대에 임관하였다.

그는 36년간의 군생활을 하면서 메달 오브 아너/의회 명예 훈장을 제외한 모든 메달을 수상한 기록을 보유하게된다.
태평양 전쟁 중 과달카날, 타라와, 사이판 등의 격전지에서 전투를 수행했으며
한국에서 제1해병사단 5연대장으로 근무한 뒤
1967년에 베트남에 파병되어 1968년 5월 까지 제3사단장직을 수행하고, 1971년 전역하여 1999년에 사망 하였다.

 


 

데이비드 론스(David E. Lownds) 제26해병연대장은

1920년 매사추세츠에서 출생하였다.
1942년에 해병 소위로 임관하여 로이 나무르, 사이판,

이오지마 전투에서 제4해병사단 소속 소대장직을 수행 하였다.
태평양 전쟁을 치르면서 수 많은 부상을 당해

1945년 말에 예비역으로 돌려졌다가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재 소집되어 제2해병사단에서 근무 하였다.

한국 전쟁 후 그는 대대 작전, 정보, 보급 및 교관 직을

두루 거친 후 1958년에 8연대 3대대장에 임명 되었다.
1964년부터 1965년까지 제2해병사단 작전 장교였던 그는

1965년 도미니카 공화국에 파견되었다.
1967년 7월에 베트남에 전개되어

8월 12일자로 케산 기지 지휘권을 인수 하였다.
그는 베트남전쟁에서의 공훈으로 해군 수훈장을 수여 받은 직후

전역하여 플로리다에 정착 하였다.

 

 

케산에는 지휘권을 넘겨받은 론스 대령의 26연대와 1개 남베트남군 대대 외 2개 대대 병력을 포함하여

약 6천명의 병력이 기지내, 외곽 방어선 또는 점령한 고지의 전초기지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론스 대령은 휘하에 105mm 포 등의 강력한 포병 화력을 보유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1968년 1월에 몇문이 배치된 후 제12해병연대 1대대장 존 헤넬리 중령의 포병 1개 대대를 보강 받았다.
사거리 12,000m의 105mm 포 18문과 사거리 14,600m의 155mm  곡사포 6문,

그리고  사거리 4,020m의 4.2인치 박격포도 6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로크 파일과 캠프 케롤에 배치된 사거리 32,000m  육군 175mm 자주포들이 케산 기지를 지원하게 되었다. 

또한 케산에는 6대의 전차와 온토스 10대, 더스터 대공자주포 4대와 4대의 쿼드50 기관총탑재 트럭이 배치되어 있었다.
M41 차체에 40mm 보포스 기관포를 2연장으로 탑재한 M42 더스터 대공자주포와  4연장 50구경 기관총(쿼드50)을

탑재한 중무장 트럭의 원래 용도는 대공화기이나 게릴라전에서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해병대는 파괴된 차량과 항공기 잔해, 드럼통, 탄약 상자와 포탄 카트릿지 등을 사용하여 전투기지를 구축했다.
기지 주변의 무성한 코끼리풀은 키가 커서 관측에 매우 불리했다.
해병대는 제1차 방어선에 철조망을 설치하고 수류탄 투척거리 바깥에 6피트 높이의 장애물을 구축하였다.
또한 M18A1  크레이모어와 대인 지뢰를 일정 간격마다 매설했다.
그리고 더 안쪽에는 와이어 팬스와 가시 철조망을 가설하였고,  M16A1 바운싱 베티와

M14 대인지뢰와 M15, M19 대전차지뢰를 매설했다.

M16A1지뢰는 공중으로 튀어올라 병사의 허리 부근에서 폭파되기 때문에 살상율이 높았다.

류탄을 사용한 부비트랩과 약1분간 300평방미터를 밝혀주는 조명탄도 매설했다.
4~6피트 깊이로 파여진 참호는 모래주머니 등으로 덮고 대피용 벙커는 활주로용 매트와 모래주머니를 3중으로 쌓아 보강했다.

전투용 벙커의 깊이는 8피트이며 시멘트와 3중 모래주머니를 지붕으로 사용하였고 벽도 3중으로 보강되었다.

82mm  박격포 벙커는 6X6 목재를 모서리에 세우고 그 위에 2~3중으로 모래주머니를 쌓았다.
아무튼 각각의 벙커들은 노련한 공병은 4일 안에 완성할 수 있었지만 건설 장비가 부족한 일반 병사들은 1주일 정도가 걸렸다.
해병대는 가시도를 높이고 벙커 구축에 사용할 목재를 얻을 목적으로 기지 주변의 나무들을 톱으로 베거나
C4 가소성 폭약을 사용했는데, 나무는 흰개미가 우글거리고 빠르게 썩어 버렸기 때문에 쓸모가 없었다.
참호 외에 그 어떠한 엄폐물도 존재하지 않아 해병대원들은 무조건 땅을 깊숙히 파는 수밖에 없었다.
전투통제센터, 화력통제센터 등 주요 벙커는 철재나 활주로용 매트로 만든 지붕에

3중 모래주머니를 쌓았지만 대구경탄에는 무용지물에 다름 아니었다.
추가적인 건축 재료들은 C-130 수송기가 다낭으로부터 공수 해왔다.

 

1967년 4월, 하노이 정치국과 중앙 군사 위원회는 남베트남에서 결정적 승리를 얻기위한 작전 수행 능력 평가를 지시했다.
뒤 이어 6월에는 구정공세를 취하기로 결정하고 남베트남 전역에서 광범위한 타격을 가하도록 결정되었다.
하노이 당국은 10월까지 북베트남 정규군과 베트콩의 보급을 통합하고

호치민 루트를 통해 트럭 5천대 분량의 군수물자를 비축 시켰다.

또한 공병을 포함한 공격 부대원과 무기들을 남쪽으로 은밀히 내려 보냈다.
그해 10월 미국이 베트남 파병 병력을 증가하자 하노이는 새해 구정을 기해 대타격을 가하기로 최종 결정 하였다.
12월 말 미군은  케산 부근에 더 많은 병력이 모여드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하노이가 미군의 시선을 케산에 집중시키기 위한 양동작전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노이의 작전 계획은 먼저 1968년 1월 20일 밤에 제304, 325C사단이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이동을 개시하고
320사단은 9번 도로를 따라 케산으로부터 25km 지점까지 이동한다.
29C연대와 95C 연대가 동쪽으로 전개하면 325C사단은 케산 북쪽과 북서쪽에서 공격한다.
디엔 비엔 푸에서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였던 역전의 304 사단은

320 사단의 지원을 받으며 남쪽과 남서쪽에서 공격하고 324B 사단은 DMZ 북쪽에 예비대로 대기한다.
고지 전투 기지에 대한 공격은 정해진 시각에 일제히 실시되며 다음 날은 케산에 집중 포격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하노이 정치국 구옌 반 마이는 "우리는 미군을 유인할 것이고 가혹하게 피를 흘리게 만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웨스트모얼랜드 미군 사령관은 케산이 분명히 공격당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웨스트모얼랜드는 북베트남군의 주요 침투로 상에 위치한 케산을 1968년까지 활주로를 갖춘

강력한 전진기지로 구축하여 베트남 전쟁을 계속 수행한다는 미군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지구전을 펼친 끝에 마침내 미끼를 문 북베트남군이 포위 공격을 가해온다면

B-52와 같은 미국의 가공할 최신 무기로 일거에 괴멸시켜 버린다는 계산 이었다.
때문에 웨스트모얼랜드는 민간인 피해가 우려되지 않는 곳에 북베트남군을 끌어들여  

마음 껏 화력을 퍼 부을 수 있는  케산을 사용키로 했다는 것이다.

백악관에 케산의 축소 모형을 만들어 놓은  존슨 대통령은 매일 매일 케산의 정보들을 보고 받고 있었으며

참모들에게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의 견해처럼 케산이 잘 방어될 수 있겠는가고 거듭 물었다.
가장 의구심을 품고 있었던 사람은 사이공 주재 미대사였으며 합동참모본부의 제임스 테일러 장군이었다.

그는 케산의 해병대를 격멸시키기 위해 북베트남군들은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 시킬 것이라고 경고 하였다.
케산이 포위 된 후 케산의 상황 보고서가 존슨의 손에 전달되기 까지 약50분 시간이 소요되었다.

 

미군 정보 당국은 주력 제304, 325C사단이 2만명의 병력에 최대 사거리 12,000m의 105mm와

122mm 곡사포와 사거리 8,600m의 75mm포를 보유한 것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사거리 6,000m의 120mm, 사거리 3,000m의 82mm,

사거리 1,500m의 60mm 박격포도 다량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보병들은 78문의 대구경 박격포와 중구경 36문, 108문의 소구경 박격포 지원을 받을 것으로 예상 되었다.
그리고 각각의 포대는 12.7mm 대공 화기 소대가 엄호하며, 107, 122mm 로켓 발사기도 보유한 것으로 예상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