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베트남전쟁..케산(Khe Sanh)공방전 (3부)

구름위 2013. 11. 23. 10:42
728x90

 

랑베이 특수부대 캠프를 점령하여 측면의 위협을 제거하는데 성공한  북베트남군은 케산 기지 공격에 들어갔다.

북베트남군은 공격에 앞서 우선 케산 전방 작전기지를 정탐하기 시작했다.
공격 대상은 케산 기지 전투력 증강 계획에따라 1월 22일 도착하여 기지 서쪽 돌산에 전개한

존 미첼 중령의 제3해병사단 9연대 1대대였다.
북베트남군은 최우선 표적으로 1대대 A중대를 택했다.
66명의 병력으로 보강된 A중대는 대대 본부로부터 500m 서쪽에 위치한 요충지 64고지에 배치되어 있었다.


 

1968년 2월 8일 새벽 4시 15분, 북베트남군 제101C연대의

1개 대대병력이 1대대와 A중대에 박격포 공격을 개시했다.
짙은 안개가 드리운 가운데 전초기지 철조망을 돌파한 북베트남군은

기지내로 돌입하여 소대장을 사살하는 등 참호의 절반 가량을 점령했다.

 

해병대는 지근 거리에서 날아온 수류탄 세례를 받았다.
참호로 날아온 중국제 수류탄이 마이클 베리 일병의 철모를 쳤다.
마이클 일병은 재빨리 수류탄을 잡아 되던지려했지만

수류탄이 손에서 폭발해버렸다.
운이 좋았던 그는 등과 다리, 팔에 파편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손은 멀쩡했다.
전초기지의 해병들이 거듭되는 공격을 필사적으로 막아내는 가운데
대대에서 긴급히  증파된 해병들이 역습을 가했다.
동이 트면서 대대에서는 지원 포사격을, 하늘에서는 전폭기들이

근접 지원 폭격을하였다.
화력의 열세로 북베트남군은 전초기지를 포기하고 퇴각했다.
이 전투에서 1대대는 24명이 전사, 27명이 부상 당했고

150구 이상의 북베트남군 시신이 전초기지 왼쪽에서 발견되었다. 

 

2월 10일부터 북베트남군의 공격 전술이 바뀌었다.
케산 기지 외곽 방어선과 매우 근접한 지점까지 진출하여 박격포 공격 및 저격을 한다는 속셈이었다.
북베트남군은 기지 동쪽과 남쪽에서  도랑형의 침투로를 파기 시작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디엔 비엔 푸에서 프랑스군을 전멸시킨 지압 장군의 전술과 흡사했다.
공세 예정시간이되면 방어선 바로 근처까지 굴착한 땅굴 속에서 뛰쳐나와 공략한다는 전술이었다.
동쪽에서는 라오 쾅 골짜기를 따라 땅굴이 파여지기 시작했고

해병들은 땅굴 방향을 알기위하여 땅 속에서 들려오는 수상한 소리들을 탐지하였다.
라오 쾅 강은 케산 기지의 유일한 식수원이어서 북베트남군이 독약을 사용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적이 땅굴을 파며 기지 방어선을 위협하자 해병대는 위험을 무릅쓰고 순찰대를 내보내기로 하였지만
북베트남 포병 관측자들은 포격으로 이를 방해했다.
그러자 해병대는 장거리 포격으로 참호를 격파하기로 결정 하였다.
낮에는 해병대원들이 근거리의 참호에  M79 유탄 발사기를, 밤에는 장거리 포격을 한다는 것이다

 

북베트남군은 포병 전술도 변경 하였다.
1개 포대에 편성된 4문의 포를 각각 약 500m정도의  간격을 두고 적당한 장소에 분산 배치하였다.
포격을 개시할 때 각각의 포는 독자적으로 포각과 탄착점 조정을 해야했는데,

분산 배치되었기 때문에 미군의 집중 포격이 있어도 포대 전체가 피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산 속 지하 터널에 숨겨진 박격포는 탐지가 어려울 뿐 만아니라 포위된 케산의 해병들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로켓 보다 더 정밀한 포격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2월 21일, 제37 레인저 대대에 북베트남군 중대가 접근하여 정탐을 시작했다.
가장 취약한 곳이 파악되면 언젠가는 공격할 작정이었다.
케산 기지에 쏟아지는 포탄의 량이 갈수록 증가하였고 그 횟수도 많아졌다.
22일에는 26해병연대 2대대 교회 군목 로버트 브레트 중위의 벙커가 직격탄에 맞아 전원이 즉사하였다.
23일에는 하루 동안에만 무려 1,307발의 포탄이 날아들었다.
케산 포위 공격 중  1일 포격 량이 가장 높은 날로 기록되었다.
이전까지 가장 높은 1일 포격으로 기록되었던 것은 1967년 7월 2일 DMZ  남쪽 콘 치엔 해병기지에 쏟아진 1,065발이었다.
우박 처럼 쏟아진 포탄이 3번 탄약고를 직격하여 90mm, 106mm 탄약 1,620발이 폭발했고, 12명이 죽고 51명이 부상했다.
25일에는 26해병연대 1대대 B중대 지원병력들이 순찰 도중 북베트남군의 매복 공격을 받아 26명이 전사하기도했다.
전형적인 전투부대인 해병대로서는 독안에 든 쥐처럼 포위당해 있는 것이 못마땅했다.
공격은 커녕 높은 산 속에 은신한 북베트남군 포수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 참호에 박혀있어야했다.
산 위에서는 하루 평균 150발의 각종 포탄이 날아왔고, 특히 수송기가 들어오면 활주로가 집중적으로 공격 받았다.

북베트남군 포병의 주요 표적은 탄약고와 포 진지였지만

케산 기지의 포 3문과 881S 고지의 1문 만이 파괴되었을 뿐이고 그것들은 즉각 대체되었다.

 

해병대원들은 각종 무기로 적을 저격하는 등 포위된 상황 속에서도 적극적 능동적으로 대처했다.

포위 생활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이러한 행동들은 매우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또한 관측병들은 쌍안경으로 기지 주변을 정밀 탐색,

의심스러운 먼지나 연기가 포착되면 폭격과 포격을 지시하여 적의 침투를 저지 시켰다.
881S고지의 해병들은 사격 실력이 뛰어난 북베트남군 저격병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 10여명이 저격당해 구급 헬리콥터로 후송 되었다.
해병들은 저격수를 찾기 위해 관측에 열을 올렸다.
어느날, 햇빛에 반짝이는 저격수의 망원 렌즈가 포착되자 해병들은 106mm 무반동총을 발사하여 저격수를 제거해버렸다.
끝없는 포격 스트레스와 불규칙한 취침으로 체력이 저하되었지만

벙커와 참호의 모래 주머니 보강,  철조망 수리, 지뢰 매설, 보초, 순찰과 청음초 임무를 수행해야했다.
각종 화기에 직격당하면 참사를 피할 수 가 없었기 때문에

특히 참호와 벙커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붕괴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주거 상태는 정말 형편없어 병사들은 거의 거지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근무를 제외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의 해병들은 제위치에서

위생 및 총기를 수입하거나 전투 식량을 챙기는 등 개인적인 시간을 가졌다.
낮에는 가능하였지만 C-레이션 통조림을 데우기위해 야간에 지상에서 불을 피우는 일은 절대 금지되어
그나마 참호 깊숙한 곳이 아니면 전투 식량을 데워 먹기란 힘들었다.
날씨가 좋지 못할 때에는 하루에 반컵 정도의 물을 공급받았다.
마시고 씻고 면도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포격 때문에 빗물과 이슬로 축축한 참호에서 며칠씩 지내는 경우도 있었다.
군복은 붉은 흙, 땀과  음식 찌꺼기와 총기 기름, 흙에 찌들었지만 며칠 씩 그대로 입고 있어야했다.
가끔 드럼통에 받은 빗물로 빨래는 가능했으나 그 어떠한 목욕 시설도 없었다.

 

고지 전초기지의 해병들은 케산 기지의 해병보다 훨씬 더 열악한 생활을 했다.
산 정상에 구축된 참호와 방어선의 이슬비를 먹은 모래 주머니들이 습기 때문에 붕괴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방치된 북베트남군 전사자 시신 때문에 큰 진디와 구더기가 급속히 퍼졌다.
축축한 벙커와 참호는 악취와 함께 구더기와 큰 쥐로 넘쳐났다.
해병들은 잠잘때 쥐가 몸을 갉아먹지 못하도록 조심해야했고,
권총으로 쥐를 사냥하는 등 매일매일 쥐와의 전쟁을 치루어야 했다.
케산에는 큰쥐가 너무나 많아서 사단에 쥐약 보급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55갤런 드럼통을 절단하여 만든 공중 변소는 매일매일 경유를 뿌려 태워야했기 때문에 연료를 아껴야했다.
야전 재킷이 보급되지 않아 추위에 떨어야했던 해병들은 우의를 껴 입어야했다.
나중에 야전 재킷이 보급되긴 하지만 충분한 양은 아니었다.
M1955 방탄 조끼는 파편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는 능력만 있어 총탄에는 무용지물이었다.
해병들은 공군으로부터 빌린 방탄조끼를 착용해야했다.
고향에서 보내준 잡지나 식품은 전우들과 공유했다.
해병들은 13개월의 해외근무 기간을 채우지 못하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중상자가 후송되면 곧 다른 해병이 그 자리에 대체되었고 경상자는 치료 후 곧바로 복귀 되었다.

해병들은 자신들을 포위하고있는 북베트남군의 형편에 비하면 오히려 사치에 가까웠다.
북베트남군 304사단 9연대 병사의 일기에는
"케산은 그 어떤 격전지보다도 치열했고 디엔 비엔 푸 보다도 더 지독하다.  

전투원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는  몇 주 동안 꼼짝없이 지하에만 있어야했다.

지상은 B-52 폭격기의 융단폭격으로 모든 식물이 사라지고 온통 붉은 흙만 보였다" 라고 기록 되어 있었다.


 

케산 공중 보급

 

외부와 이어지는 유일한 통로인 9번 도로를 빼앗긴 케산 항공 지원은 생명선과 같았다.
케산의 병력들은 하루 평균 126톤의 각종 군수물자를 소비했기 때문에

지속적인 공중 보급없이는 전투 능력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할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탄약고 폭발로 1,100톤 이상의 탄약을 한꺼번에 날려 버려 더 많은 공중 보급이 요구되었다.
그것도 단 하나뿐인 활주로를 이용해서 말이다.
기상 악화로  보급에 차질이 생겨 때로는 군수품 부족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케산 포위 당시 공중 보급 임무를 맡은 제834비행사단(사단장 벌 W. 맥로린 소장)은

병력 약 7,500명에 240대의 각종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제834비행사단은 휘하에 6개 C-7A  캐리보우 비행대(81대)와 4개 C-123 비행대(58대),

3개의 C-130 분견비행대(72)를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모든 C-130 수송기는 일본 다치가와 315비행사단에서 분견대로 베트남에 파견되어 있었다.
그러다 구정 공세가 시작되자 2월에는 88대로,  3월에는 96대로 증가되었다.
디엔 디엔 푸에서 포위당한 프랑스군은 1953년 11월 65대의 C-47 수송기로 병력을 공수했고,
그 이듬해 실제 포위 공격당했을 때에는 오직 124대의 수송기가 있었을 뿐 이었다.
포위당한 프랑스군은 하루 평균 100톤의 물자를 낙하산 투하로 보급 받았다.
그에 비해  최신식 수송기를 보유한 제834비행사단의 공중 보급 능력은 이론적으로는 프랑스군 보다 6배가 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상의 수치일뿐 실제 모든 여건을 감안하면 그 절반이 감소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공군 C-130과 해병대 KC-130 수송기가 다낭 기지에서 발진하면 케산 까지는 겨우 30분만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맥로린 소장은 다낭의 복잡한 활주로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공군 미션 전문가와 유지보수 병력을 파견했다.
그러나 더 많은 수송기들은 유지 시설이 잘 갖추어진 탄손 누트, 캄란, 투이 호아, 그리고 나 트랑 기지에서 운용되었다.
케산까지의 비행시간은 탄손 누트 95분, 캄란만에서는 75분, 투이 호아에서는 1시간이 소요되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C-47수송기는

하노이 인근 박 마이 비행기지에서 이륙하여 디엔 비엔 푸까지 약 75분이 걸렸다.

 

 

수송기 승무원들에게 있어서 케산 공중 보급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위험한 임무였다.
미군 타격기가 대공포대의 화력을 조금 약하게 해줄 수는 있겠지만 완전히 침묵 시킬 수는 없었다.
북베트남군으로 둘러싸인 케산 활주로에 착륙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깊은 협곡 때문에 날씨가 좋을 때도 케산 활주로 동쪽 끝으로 접근할 때

거리를 판단하기가 힘들었는데 날씨가 나쁘면 더욱 힘들었다.
다행히도 조종사들은 케산에 설치된 지상 관제 접근 레이더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비상시에는 선박용 TPQ-10 레이더를 사용할 수도 있었다.
북베트남군의 포격 뿐 아니라 활주로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포탄에 맞아 울퉁불퉁하게 훼손된 활주로의 금속 패킹이 타이어를 꿰뚫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2월 10일, 제7공군소속 C-130E 수송기가 활주로에 공격을 받았으나 기체가 손상되었을 뿐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2월 11일, 헬리콥터에 사용될 항공유를 적재한 해병 항공단 소속 KC-130F 허큘리스 급유기가

케산 기지 활주로로 진입하던 도중 대공화기의 공격을 받았다.
아무런 이상없이 정상적으로 활주로에 착지한 급유기에서 갑자기 화재가 발생하고 기수의 방향이 틀어졌다.
기체에서 연료가 흘렀을 때 조종사는 통상적 방출인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총탄에 의한 누출 이었다.
조종사와 부조종사는약간의 화상을 입은 채 헤치를 열고 비상탈출했다.
케산 활주로 소방대원들이 6명을 구해냈지만 나머지 6명은 빠져나오지 못해 사망했다.

 

이날 또 다른 수송기도 공격을 받았다.
다낭에서 이륙한 C-130 조종사 에드윈 쟁크스 대위는 케산 활주로에 착륙하여 물자를 하역하던 도중
날아온 포탄 파편에 뒷날개 유압라인이 절단되어 화재가 발생하는 사고를 만났다.
다행히도 조종사와 승무원 전원이 탈출에 성공했다.
케산 활주로에 파견된 공군 분견대(지휘관 - 윌리엄 스미스 중령)의 로버트 마피 병장 등이 소화기로 불을 끄다

절단된 호스에서 새어나온 화학물질이 눈에 들어가는 사고가 발생하였지만 화재 진압에는 성공했다.
사고를 당한 병사들은 해병대 전방 응급소에서 치료를 받았고 다행히 눈은 이상이 없었다.
분견대장 스미스 중령은 손상된 유압 장치 대체품과 경험 많은 정비사를 보내달라고 다낭 기지에 무선으로 요청하였다.
곧 정비사가 투입되었지만 왠지 주요 부품은 함께오지 않았다.

조종사 쟁크스 대위는 주요 유압 장치 부품이 올때 까지 마냥 기다리고있을 수만은 없었다.

250만 달러짜리 수송기를 포격의 위험 속에 그대로 방치해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승무원들은 정비사가 긴급 비상 수리를 마치면 이륙하기로 결정했다.
만약 비상 수리된 유압 계통에 이상이 생겨 유압을 잃는다면 바로 추락할 수 도 있는 위험한 비행이었다.

2월 13일 정오쯤에 비상수리가 완료되자 승무원 전원은 수송기에 탑승했다.
기상이 나빠 가시도가 50피트밖에 안되었지만 이륙에 성공하자 1천 피트 이상의 고도로 급상승하여 

대공화기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무사히 다낭 기지에 착륙한 수송기 동체에서 총242개의 구멍이 발견되었다.

 


 

귀중한 자원인 C-130 수송기의 피해가 늘자 제7공군사령관 윌리엄 W. 모마이어 중장은

2월 12일자로 C-130의 케산  비행을 일시 중단 시켰다.
제834비행사단장 벌 W. 맥로린 소장은 하는 수 없이 보조제트기관을 사용하여 C-130보다 활주거리가 짧고

더작고 가벼운 적재 능력 5톤의 페어차일드 C-123K 수송기를 낙하산 물자 투하에 동원했고
그 보다 더 작은 3톤의 적재 능력을 지닌 C-7A  캐리보우 수송기에게는  

케산 활주로에 착륙하여 물자를 보급하도록 명령 하였다.

2월 25일까지 C-123K 수송기는 300톤, C-7A 수송기는 13톤을 공수 하였고, 이날부터 C-130의 비행이 재개되었다.
C-130들은 4일간 14회 착륙하여 160톤의 물자를 하역하였다.
케산 활주로에서 머무는 시간을 줄이기 위하여 수송기 승무원들은 수송기 후부 램프 바닥에 설치된

7피트 짜리 금속 러너로 신속히 화물을 하역하는 스피드 오프로딩(speed offloading) 기술을 개발해내기도 하였다.

C-123K는 주익 하부에 추력 2,850파운드 J85 제트 엔진 포드를 보조 장착한 형이다.
조종사는 대공포화의 위험을 줄이기위하여 가파른 각도로 착륙을 해야했다.
케산 활주로로부터 약 5km지점 상공에서부터 분당 3천 피트 비율로 활강하며 진로를 잡고 착륙 준비를 했다.
화물 하역은 케산 활주로 서쪽 끝부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조종사들은 동쪽으로 진입하는 것을 선호했다.
만약 서쪽으로부터 진입을 했다면 조종사는 동쪽 끝에서 회전하여 서쪽까지 활주를 해야하기 때문에

포격에 당할 위험이 더 많았다.

 

1968년 3월 1일, 이륙을 시도하고 있던 C-123K 수송기 주변에 포탄이 떨어져
포탄 파편이 1개의 엔진을 손상 시켰다.
수송기는 파괴되었지만 다행히 단 한명이 부상하는데 그쳤다.
기상이 좋다면 수송기들이 케산 인근에 도달하였을때 전방항공통제기들이

북베트남군 고사포대를 찾아내어 타격을 지시하겠지만 기상이 좋지 않으면 전투기 출격이 금지되어 매우 위험하게된다.
전투기의 엄호가 없다고해서 공중 보급을 멈출 수는 없었다.

3월 6일 오후, 케산 활주로를 향해 하강하던 C-123K가 대공포에 보조 제트 엔진을 피격 당했다.
조종사는 다낭으로 회항한다고  통고하였지만 결국 추락하고 말았다.
케산 기지 동쪽 고지 부근에서 검은 연기가 관측 되자
전방항공통제기와 헬리콥터가 출동하여 수색했지만 생존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C-123K 수송기에 탑승했던 해병대원 43명과 1명의 해군, 4명의 공군 등 총 48명이 사망하였다.

케산 공방전이 시작되었을 때,  공중 보급 임무를 맡은 제834비행사단장 벌 W. 맥로린 소장은
기상 여건과 적의 대공포화 때문에 한꺼번에 많은 양의 물자를 낙하산으로 투하해야했다.
탄약, 식량, 연료 등의 물자를 나무 팔레트에 실어 투하하는

컨테이너 전달 방식(container deliv­ery system)을 사용키로 했다.
C-130 허큘리스 수송기는 나무 팔레트를 최대 16개까지 적재할 수 있었다.
1월 25일과 28일 이틀동안 C-130은 컨테이너 전달 방식으로 67톤의 물자를 공급하였다.

이 방식은 많은 양을 한꺼번에 빠르게 투하할 수 있지만 악천후에서는 투하지점을 벗어날 수도 있었다.
만약 투하지점을 벗어난다면 케산의 해병들이 회수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레이더를 사용하기로 결정 하였다.

 

그래서 미본토 노스캐롤라이나 포프 공군기지에서 테스트가 실행된 대지 레이더 공중 보급 시스템이 채택되었다.
시스템은 수송기의 항법장치와 연계하여 높은 고도에서 매우 정확하게 물자를 투하할 수 있게 되었다.
케산 기지의 착륙 유도 레이더 조작자는 동쪽에서 접근하는 수송기에게 특정 고도에서 하강지시를 내릴 수 있었다.
수송기의 항법사는 도플러 항법장치와 스톱 워치를 조작하며 기체를 투하지점으로 유도했다.
이때 항법사는 풍속, 방향 그리고 대지 속도를 계산하여 투하 시기를 결정하게된다.
항법사로부터 항로를 전달받은 조종사는 투하지점과 일직선이 되게 비행하였다.
투하지대의 길이가 겨우 300m밖에 안되어 조금만 실수를해도 보급품 전체를 잃을 수도 있어 

투하 타이밍 결정은 매우 중요했다.
따라서 조종사와 항법사는 실제 투하에 앞서 케산으로 날아가 연습을하였다.
2월 13일, 이 방식을 사용한 투하가 처음으로 실시되었고, 17일과 18일에는 18개를 투하하여 총 279톤을 보급하였다.
2월 16일에는 악천후였지만 공중 보급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2월 19일에 북베트남군 포병이 레이더를 파괴시켜버렸다.
대지 레이더 공중 보급 시스템에 차질이 생기자 해병대는 선박용 TPQ-10 레이더로 비상 대체하고
활주로에 레이더 반사기를 설치하여 수송기의 진입을 지원했다.

 

 

 

케산 물자 투하지점인 활주로 서쪽에는 9해병연대 1대대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투하지대에는 지뢰가 매설되어 있어서 위험했으나 그렇다고 화물을 방치해 둘 수는 없어 재빨리 회수되었다.
투하 지대를 벗어나 북베트남군 지역에 떨어진  화물은 폭격이나 포격을 가하여 적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3월 2일, 투하된 화물이 9연대 1대대 벙커에 떨어져 벙커가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제834비행사단은 케산에서 요청한 건축자재 보급 문제를 해결해야했다.
무거운 건축자재를 적재하고 착륙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며 케산에는 이 자재들을 하역할 적합한 장비조차 없었다.
대형 낙하산 투하도 고려되었으나 취소되었다.
투하 지대는 너무 작았고 자칫 잘못 투하하면 자재 파손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공군과 해병대는 화물 추출 방식을 사용하는데 동의했다.
저고도 낙하산 추출 시스템(LAPES / low altitude parachute extraction system)은

1967년 여름에 케산에서 이미 실시된 적이 있었으며 1968년 2월에 다시 시도하는 것이다.
해병대는 처음엔 활주로 파손을 염려하여 이 방식에 반대하였었다.
그러자 공군은 활주로를 구하고 케산을 잃을 작정이냐고 반문했다.

 

저고도 낙하산 추출 시스템(LAPES)은 C-130 수송기가 지면으로부터 정확히 1.5m 고도를 130노트의 속도로 비행하면서  

직경 48인치의 낙하산을 산개시켜 파레트가 추출되는 방식이며

낙하산 저항에의해 화물의 가속도와 충격을 최소화 하는 것이다.
저고도 화물 추출은 정밀한 보급 방식이지만 상당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승무원들의 운용 미숙으로 낙하산은 전개되었지만 화물 팔레트가 수송기 후부램프에서 꼼짝도하지 않는 위험한 경우도 있었다.
낙하산없이 투하된 10톤 무게의 팔레트가 1,500m 거리까지 쏜살 같이 달려가 벙커를 타격,

해병대원이 사망하는 사고도 발생하였다.
3월 1일에는 화물을 투하하던 중 조종사의 실수로 C-123K가 활주로 바깥으로 이탈하는 사고도 발생했다.

해병대가 우려했던 것처럼 저고도 낙하산 추출 방식의 공중 보급이 시작된지 4주도 지나지 않아

활주로가 심하게 파괴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방식은 4월 2일 실시된 2소티의 공중 보급 후 중단되었다.

제834비행사단은 4월 초까지 좀더 개량된 근접 지면 추출 방식(ground proximity extraction system)을 개발하여

활주로 또는 물자 파손없이 보급할 수 있었다.
규격화된 화물 팔레트는 갈고리와 케이블로 고정되었고, 

승무원이 조작하지 않는한 램프에서 이탈하지 않아 낙하산 추출방식보다  훨씬 안정적이었다.

3월로 접어들면서 미국내 언론은 케산을 제2의 디엔 비엔 푸에 비유하며 여론을 부추겼다.
라이프 지는 구정 공세, 케산 포위, 그리고 한반도 동해상에서의 미 정보함 푸에블로 납치 사건을 예로 들면서

아시아에서의 미군사력 역량이 의심된다고 보도하였다.
언론들은 보도의 10% 이상을 디엔 비엔 푸와 케산 이야기로 채웠고 시간이 갈 수록 그 비중은 더 높아졌다.
디엔 비엔 푸에 비해 케산은 항공력에의해 유지되고 있지만

포격으로 활주로 사용불능이 되기 전에 해병들을 철수 시켜야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디엔 비엔 푸와 케산은 포위 당했다는 것만 같을뿐 정치적인 것은 제외하고

군사적으로만 놓고보면 결코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다른점이 많았다.

지압 장군은 3번 실시한 대공세에서 프랑스군의 화력에 밀려 번번이 참패하였다.
경무장으로는 체계적이고 잘 무장된 적을 결코 이길 수 없음을 깨달은 지압 장군은

산 속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치르기로 하였다.
반면에  3번의 대승리로 자만심에 빠져 버린  프랑스군은 다시 베트민을 유인해 강력한 화력으로 괴멸시키고자 했다.
프랑스군 최고 사령부는 군수 지원이 수월한 곳대신 큰 계곡이 있는 북서 베트남의 디엔 비엔 푸를 선택하였다.
프랑스군은 항공기로 베트민의 보급선을 차단할 수 있도록 작은 활주로를 건설했다.
디엔 비엔 푸는 프랑스군 보급기지로부터 200km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케산은 겨우 45km였다.
디엔 비엔 푸는 3~5km 떨어진 지점의 병풍같은 산에 포진한 포병에게 포위되어 있었지만
케산은 주요 고지들이 7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북베트남군 포병은 케산 기지로부터 약 9~13km쯤에 포병을 전개 시켜야했다.
물론 박격포는 더 가까이 전진 배치되어 있었긴 하지만.
디엔 비엔 푸의 프랑스군은 비록 사거리는 짧으나 케산보다 더 많은, 약200문의 각종 포에 포위 당했다.
케산은 자체 포병 뿐 아니라  로크 파일과 캠프 케롤에 배치된 사거리 32,000m의 175mm 장거리 포 지원을 받을 수 있었으나
프랑스군은 외부로부터 포 지원을 받을 수 없었고 기지에 보유한 포 48문 중 절반이 사거리가 짧은 대구경 박격포였다.

 

디엔 비엔 푸의 3개 전초기지들은 3km의 넓은 지역에 2km정도를 가로질러 흩어졌던 반면
케산은 2.3km지역에  400~600m마다 전초기지들이 설치되며, 디엔 비엔 푸에 비해 크기가 작아 방어에 부담이 덜했다.
총 6,680명의 병력이 케산을 방어했고 디엔 비엔 푸는 나중에 공수 투입된 병력을 포함하여

19개 보병대대 16,500명의 병력이 방어했다.
케산은 6개 대대가 기지 전방작전기지(FOB-3)와 3개의 고지에 전개되었고 남베트남 레인저 대대 1개도 증원되었다.
프랑스군은 80대의 수송기로 평균 150톤의 물자 공수를 요구받았지만 평균 100톤을 조금 넘었을 뿐 이었다.
프랑스군의 C-47은 4톤의 화물을 적재할 수 있으나 

미군의 C-130E는 13톤, C-123K는 5톤, 그리고 C-7A는 3톤을 적재할 수 있었다.

 

프랑스군은 75대의 전투기와 약100대의 수송기와 정찰기, 그리고 54대의 헬리콥터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미군은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항공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군은 1968년도에 총 2,000대의 각종 항공기와 3,300대 이상의 헬리콥터를 아시아에서 보유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MS500 관측기, 그루만 F8F 전투기와 구식 폭격기들이 공중 지원을 하였으나 야간에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미 해군과 해병대의 A-6 인트루더 전천후 공격기의 경우 레이더 목표 지시 시스템을 사용하여

야간에도 은폐된 표적을 타격할 수 있었다.

프랑스군 항공기들이 167일간의 포위 기간 중 약 10,400소티의 지원 출격을 기록한 반면,
미군은 하루에만 2,500소티의 출격을 기록하는 경우도 가끔씩 있었다.
공군 수송기들이 총 14,000톤 이상의 화물을 케산에 공수하였고, 

해병대 헬리콥터들은 9,109소티의 비행으로  14,562명의 병력과  4,661톤의 화물을 공수 하였다.


프랑스군은 3일 분량의 군수물자 비축도 힘들었으나 

케산의 미군은 가끔씩 부족할 때도 있었지만통상 30일분을 비축했다.
레이더 유도 지원 덕택에 미군 수송기들은 악천후에서도 화물 낙하가 가능했지만 프랑스군은 그러지 못했다.
또한 미공군이 개발한  화물 추출 장비는 부피가 매우 큰 화물도 공수가 가능했다. 

미군이 나이아가라 작전으로 3개월 동안 폭격한 114,810톤은 1954년에 B-29가 일본 본토에 폭격한 양과 맞먹었다.
그야말로 나이아가라 폭포수처럼 내리 쏟아진 폭탄은 케산 인근을 평지로 만들어 놓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미군은 사상자 후송이 지속적으로 가능하였지만 디엔 비엔 푸는 치열한 포화 때문에 불가능했다.

디엔 비엔 푸 증후군에 걸려 버린 듯 미국 언론은

6,600여명의 해병대를 포위하기위해 북베트남군 4개 사단이상의 병력이 동원되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많은 병력과 무기들이 구정 공세에 합류했더라면 남베트남 전역은 더 큰 재난을 맞았을 것이다.
케산 포위는 엄청난 보급이 필요했기 때문에 병참/수송자원 및 예비 인력들이 케산으로 집중 동원되었다.

디엔 비엔 푸가 완전 포위 당하기 전, 프랑스군 항공기들은 적의 포대와 병참선을 격멸시키지 못했다.
지압 장군은 라오스와 베트남 고원지대 플레이 쿠 등지에서 공격을 가장한 행동을 지시했다.
그러자 프랑스군사령부는 방어에 착수하는 등 지압 장군의 양동작전에 말려들었다.
그러는 사이 지압 장군은 병력과 포를 디엔 비엔 푸 주변으로 집결시키는데 성공 하였다.
1954년 3월 13일, 산속에 숨겨진 포문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2일 후 베트민은 활주로를 방어하고 있던 2개의 전초기지를 붕괴시켜 버렸고
끝내는 프랑스군을 격멸하여 항복을 받아내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