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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케산(Khe Sanh)공방전 (4부)

구름위 2013. 11. 23.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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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산 기지 바깥의 전초 기지에 군수품을 공급하는 일은 대단히 힘든 임무였다.
북베트남군이 도처에 매복해있기 때문에 육상 보급은 불가능했다.
또한 고지에 위치한 전초 기지는 너무나 좁아서 수송기의 물자 투하도 불가능했다.
때문에 고지의 물자 보급 및 사상자 후송은 오직 헬리콥터로만 가능했다.

 

케산 기지가 포위당하기전 헬리콥터들은 950, 558, 861, 그리고 881S 고지에 병력과 물자를 공수하였다.
쾅트리의 동하 기지가 케산 고지 전초부대에 물자를 보급하는 병참 기지가 되었다.
북베트남군의 수가 불어나면서 대공화기의 위협도 증가되자 UH-1E 건쉽 헬리콥터가 수송헬리콥터를 엄호하였다.
그러나 2월 들어 안개 낀 날이 많아졌고 그 틈을 이용하여 북베트남군은 다량의 대공화기를 산마루와 고지에 배치하였다.

 

대공화기가 대폭 증강되어 건쉽 헬리콥터의 엄호 한계를 넘어버렸다
그러자 노먼 J 앤더슨 소장이 지휘하는 제1해병항공단은

소위 "수퍼 게글 / Super Gaggle"이라는 새로운 전술을 마련한다.
수퍼 게글은 UH-1E 건쉽 헬리콥터의 수송헬리콥터 엄호라는 기존의 전술에

A-4 스카이호크 공격기가 추가되는 신전술이었다. 그리고 해병대 전방항공통제관이 탑승한

복좌 TA-4F 스카이호크 훈련기가 케산 상공에서 기상 상태를 체크하여 적 대공포대 공격 가능 여부를 판단하였다.

 

케산 상공의 전방항공통제관으로부터 기상이 좋다는 연락이 오면

추 라이 기지에서는 A-4 공격기가 출격하고, 동하에서도 12~14대로 편성된 CH-46 수송헬리콥터가 이륙하였다.
이때 동하 기지에는 네이팜, 폭탄, 최루가스를 장착한 A-4가 언제든지 출격 가능한 상태로 대기하였다.
수송헬리콥터 편대가 케산에 도달하기전 미리 도착한 A-4 스카이호크가

헬리콥터 비행 항로 주변에 연막탄을 투하하고, 4대의 A-4는 TA-4F의 지시에 따라 표적을 타격했다.
통상 A-4 스카이호크 공격기는 500파운드 폭탄 8발을 적재하였다.

 

CH-46은 물자를 담은 그물 네트를 동체 하부에 메달고 출격했는데,

이 그물 네트는 때로는 격추된 승무원 구조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2월 10일, 881S 고지에 물자를 공급하는 헬리콥터를 향해 기관총탄이 날아왔다.
A-4 조종사는 기관총진지가 협곡에위치하여 찾아내기가 힘들었지만 결국 제거해 내었다.

 

기상 악화로 전초 기지 보급 비행이 중단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2월초 881S고지는 짙은 안개 때문에 3일 동안 식량을 공급받지 못했고,
950고지는 낮은 구름 때문에 헬리콥터 착륙이 불가능하여 9일동안 보급을 받지 못해 식수가 고갈된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다시 기상이 양호해지면서 보급 작전은 재개되었다.
해병대 수송 헬리콥터들은 낙하산으로는 불가능한 물자 보급을 비롯, 증원병력과 부상자들을 실어날랐다.

케산 공중 보급 지원은 그동안 베트남에서 이루어진 보급 기록 총계를 갈아치웠을 정도였다.
1월 21일부터 4월 8일까지 C-123와 C-130 수송기들은 601회 출격하여 8,120톤의 물자를 낙하산으로 공중 투하 하였다.
그리고 C-130은 273시간, C-123는 179시간, 그리고 C-7은 8시간을 활주로에 착륙하여

4,310톤의 화물과 2,676명의 병력을 내려놓았다.
1,574명이 케산 기지에서 외부로 공수되었으며 그 중 360명이 부상자였다.
공군 C-130 수송기는 근접 지면 추출 방식(ground proximity extraction system)으로 15회,
52회의 저고도 낙하산 추출 시스템(LAPES / low altitude parachute extraction system)보급을 실시하였다.
해병대 헬리콥터들은 케산 기지와 고지 전초부대에 총 14,562명의 병력과 4,661톤의 물자를 공수 하였다.
해병대는 "수퍼 게글" 보급 전술 기간 동안 단 2대의 헬리콥터만을 대공화기 공격으로 상실했다.


북베트남군의 수중에 들어간 9번 도로가 다시 미군 손에 들어올때까지는

전적으로 공중 보급에 의해서만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케산 기지는 수송기 보급에,
고지 전초기지들은 해병대 헬리콥터의 보급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케산 공중 보급 엄호 지원은 각군의 훌륭한 협동정신으로 이루어졌다.
예를 들자면 공군 F-100 수퍼 세이버 조종사들은 해병대로부터 타격 지시를 받았고,
해군 A-1 스카이레이더 조종사들은 공군 조종사에게 폭격 기술을 전수받았다.
이따금 각군간 팀워크 부조화도 있었지만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원래 케산 공방전 당시 해병항공단과 해군, 공군은 각각 독자적으로 항공작전을 운용하다가
1968년 1월에 서로 협조하기로 결정했지만 여전히 독자적으로 운용되고 있었다.
해병대는 화력지원통제센터가 포 지원과 공중 엄호를 통제 관리하였고
해군과 공군 항공기들은 공군 EC-130E 공중전장통제센터의 지시를 받았다.
공군은 해병대 F-4를 비롯한 여러 조종사들이 공중전장통제센터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케산에서 개별적 행동을 한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케산의 해병들은 해병항공단의 신속하고 정확한 공중 지원을 선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웨스트모얼랜드 사령관은

케산에서 운용되는 모든 전술기의 통제권한을 제7공군사령관  모마이어 중장이 일임토록 노력하였다.
이러한 통합작업이 각군간 불화 때문에 즉각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항공력은 점점 좋아지게된다.

 

미군은 지속되던 악천후 상태가 일시적으로 호전되는 잠시의 틈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3월 16일, 막 베트남에 전개되었던 제355 전술전투비행대대는 갑자기 기상이 호전되자

15대의 F-100을 신속히 출격시켜 북베트남군 주요 표적들을 타격하였다.
케산 공중 지원에는 태국 나콘 파놈 기지에서 출격한 소 수의 노스 아메리칸 T-28도 대게릴라전기도 참가하였다.
악천후시에는 해병대와 해군 A-6 인트루더 전천후 공격기가 사용되었는데,
밤에도 케산 상공을 무장 수색하며 적 집결지로 의심되는 지역을 폭격하였다.
A-6 인트루더는 MER을 이용하여 500파운 폭탄을 최대 30발까지 적재할 수 있다.

 

다낭 기지 활주로에는 항공모함용 M-21 착함 제동 장치가 설치되어

비에 젖어 미끄러운 활주로에 공군 F-4 팬텀의 착륙이 가능 하였다.
공군도 자신들의 비행 기지에 착함 제동 장치를 갖추고 있었으나 해병대가 장비한 M-21형은 장점이 많았다.
공군은 1대의 전투기 착륙 후 다음 전투기의 착륙은 약 10분후에나 가능했지만 해병대는 1분이 채 안걸렸다.
그래서 빠르게 연속 착륙이 필요한 공군 F-4 팬텀 편대에게  M-21 착함 제동 장치는 매우 유리했다.

 

미군 지휘부는 수송기나 헬리콥터는 적 전투기 공격에 매우 취약하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었다.
만약 적의 미그기가 케산에 나타나는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자면 기관포를 장비한 F-4팬텀이 가장 적합할 것이었다.
그래서 F-4팬텀은 미그기 출몰에 대비하여 공중 순찰 임무를 맡았다.
F-4 팬텀은 폭장을 하게되면 연료 소비량이 너무 과도하여 체공 시간이 몹시 제한되었기 때문에
폭격 임무를 제외한 순수한 공중 순찰 임무가 가장 적합했다.
또한 항모의 함재기들은 북베트남 공군 기지를 타격하여 케산 상공에서 적기 출격의 위험을 줄여 주었다.
F-4는 효율적인 타격을 위해 Mk82 500파운드 폭탄을 보통 12발 적재했다.

 

케산을 포위한 북베트남군이 37mm 대공포보다 더 강력한 대공화기는 배치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렇지만 이들 대공화기들은 해병 기지에 물자를 공수하는 항공기에게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악천후 때문에 엄호기가 출격하지 못해도 수송기는 출격해야만 했다.
그러나 기상이 좋을 때에는 수송기는 전방항공통제기와 전투기와 약속된 장소에서 만나게된다.
케산으로부터 18마일 지점에서부터 전형적인 호위 비행이 이루어졌다.
때로는 기상이 좋지 않은 경우에 수송기 조종사가 스스로 판단하여 호위기를 기다릴지 말지를 결정하기도 하였다.

 

호위가 이루어져 전방항공통제관이 수송기에게 위협이되는 지점을 찾아 통고하면 전투폭격기들은
그지역 상공 약1,500피트 상공을 비행하면서 20mm기관포와 파쇄폭탄을 투하하였다.
만약 구름이나 안개가 수송기를 숨겨주지 못한다면 2대의 전투폭격기는

케산 활주로 3마일 지점에서부터 양쪽 방향에 연막을 투하하여 수송기 은폐에 착수한다.
통상 전투폭격기는 고도 300피트에서 480노트의 속도로 비행하며 연막탄을 발사하였다.
이렇게 적 대공포대 타격은 수송기 접근때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케산 주변에서 존재가 확인된 모든 대공포대는 즉각 타격을 당했고,
총 300개소의 대공포대가 지속적인 공격을 받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또하나의 위협적인 대공 무기에 관한 우려도 있었다.
그것은 레이더 유도식 지대공 미사일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러한 무기는 케산 부근에서 전혀 탐지되지 않았고,

1968년 1월 DMZ 부근에서 B-52 폭격기를 목표로 발사되었지만 격추에는 실패하였다.

 

북베트남군이 케산 기지 방어선 가까운 곳에서 땅굴을 파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전방항공통제기의 관측이 한층 강화되어야했다.
제7공군사령관 모마이어 중장은 제1해병항공단에서 개최되는 작전 회의에 참가하여
해군 제77기동함대에게 비상시 즉각적인 함재기 출격을 요청하였다.
이리하여 3월 3일부터 해군 함재기들은 케산의 전방항공통제관 또는 레이더 조작사가 지시한 표적을 타격하게 된다.
케산 항공 지원에 나선 어느 해군 조종사는 전방항공통제관이 발견한 습격용 참호를 공격하여

50m를 붕괴시켰고, 탈출하려던 북베트남군 2명을 사살했다.
북베트남군은 공격 당한 이 참호를 다시는 사용하지 않았다.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함재기들이 케산 상공에서 표적 정보를 얻지 못하여 연료만 소비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우 함재기들은 항모로 귀함하면서 안전상 폭탄을 바다에 유기하여야만 했다.
공군은 4대의 관측기를 케산에 투입하여 전방항공통제기로 사용하였다.
해병대와 공군이 사용한 기종은 세스너 O-1A와 O-2였고 전방항공통제관들은 매우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랑베이 특수부대 캠프가 공격당했을 때 통제관들은 구름 아래로 하강하여 전투기의 타격을 지원하였다.
구름 아래로 내려간 통제관들은 어느 지점을 어느 방향에서 공격할지를 무선으로 통고해주었다.

 

그런다음 표적에 백색 연막로켓을 발사하거나 연막 수류탄을 투하하였다.
위험은 대공화기나 날씨 뿐만이 아니었다.
켐프 케롤이나 로크 파일, 또는 케산 기지에서 날아오는 아군의 지원 포탄에 맞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했다.
어느 통제관은 케산 서쪽방향에서 북베트남군의 탄약 공급소로 의심되는 장소를 발견했다.
그는 전투폭격기를 호출하여 그 지역을 타격하도록 지시하였다.
출격한 전투폭격기가 네이팜탄과 로켓을 발사하자 탄약 상자들이 폭발을 일으켰고  뒤 이어 거대한 2차 폭발로 이어졌다.

 

 

정밀한 타격 및 방어는 레이더 때문에 가능했다.
해병대는 케산 기지에서 선박용 TPQ-10 레이더를 하루에 20시간 가동하였고,

공군은 공중 전투 지원 레이더인 MSQ-77 스카이스포트(Combat Skyspot)를 사용했다.
케산에 파견된 공군 연락관은 해병대 레이더 운용술을 칭찬했다.
레이더 조작자의 지시에따라 방어선으로부터 겨우 50m 떨어진 지점에도 폭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만약 레이더가 없었다면 악천후시에는 근접 공중 타격이 결코 불가능했을 것이다.

 

MSQ-77 스카이스포트는 2년 전부터 공군이 동남아시아의 몇 곳에 설치하여 운용되어오고 있었다.
1966년 이전부터 베트콩은 아 샤우의 특수부대 캠프를 공격하기위하여 계곡을 따라 침투하고 있었다.
아 샤우 특수부대 캠프가 공격당했을 때, 전투폭격기 조종사들은

오직 O-1 버드독 전방항공통제기의 타격 지원만을 받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300에서 500피트 상공에 드리운 구름 아래로 하강해야 하는 등

악천후와 계곡 양쪽에 포진한 대공포 때문에 근접 타격이 매우 어려웠다.
아 샤우 특수부대 캠프 항공 지원이 실패하자 공군은 악천후에 관계없이

표적에 정밀 폭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라오스를 비롯한 동남아 곳곳에 MSQ-77 스카이스포트를 설치하게 된다.
스카이스포트의 컨테이너에 설치된 컴퓨터는 고도, 풍속과 방향, 항공기 속도, 온도 등 

수집된 정보를 연산 처리하여 항공기에게 적정한 고도, 속도, 표적 정보 등을 전달한다.
항로 변경 등 스카이스포트의 원격 통제에 따라 표적 상공에 도달한 항공기는 신호가 들어오면 폭탄을 투하하면 되었다. 
MSQ-77 스카이스포트는 전투 폭격기와 B-52 폭격기를 케산 부근에서

많은 수의 항공기들을 통제해야하는 복잡함 때문에 때로는 혼란을 겪기도했다.
2월 24일 F-4 팬텀 편대장은 명령에따라 지시된 지역으로 비행하다 깜짝 놀랐다.
그 시각 그지역에서는  스카이스포트의 지시에따라 먼저 출격한 B-52가 융단 폭격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전폭기는 폭장을 한채 애프터 버너를 가동하여 신속히 목표 지역에 도달하였지만
폭격 우선 순위에 밀려 공중 대기하다 연료만 소비하고는 폭탄을 버리고 귀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스카이스포트는 정밀타격에 큰 기여를 하였다.


B-52 전략 폭격기는 동남아시아에서 전술 폭격 비행으로 하늘의 포병 역할을 수행하여 

아크 라이트(Arc Light)타격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냈다.
셀몬 W 웰즈 중장이 지휘하는 괌 앤더슨 공군기지의 제3비행사단은

1967년 9월부터 10월까지 제압(neutralize) 작전에 참가하였다.

 

이 작전에서 B-52는 남베트남 북부 쾅트리 지역을 타격했는데,

그 목적은 캠프 케롤, 동하, 그리고 콘 치엔을 압박하고 있는 북베트남군을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매일 매일 실시된 공중 정찰 사진을 분석한 후 아침과 저녁에 타격할 폭격 메뉴가 정해졌다.
제3비행사단은 케산 포위 공격 일주일 전부터 케산 방어 작전에 참가하고 있었다.
1968년 1월 14일부터 공격이 시작되는 21일까지 92대의 B-52 폭격기들이

저장소, 집결지와 침투 루트 등 12개소의 표적을 타격하였다.

 

그리고 1월 30일에는 케산 인근과 라오스의 표적에 강력한 대 타격을 가했다.
그날 폭격기들은 지휘 통제 시설이 포함된 36개의 표적을 맹타했고 야간에도 9번 출격하여 폭탄을 쏟아 부었다.
거대한 벼락을 맞은 듯 동굴이 붕괴되고 폭격기 승무원들은 지상에서 85번의 2차 폭발을 목격했을 정도였다.
B-52 폭격기는 1월말까지 총 463소티를 출격하여 케산을 위협하는 65곳의 표적을 강타했다.

 

제3비행사단장 셀몬 W 웰즈 중장은 해병대를 효과적으로 지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폭격량 증대라고 생각하였다.
웨스트모얼랜드 사령관이 마련한 나이아가라 작전에서

셀몬 W 웰즈 중장은 이른바 버글 메모(Bugle Note)를 채택하였다.

버글 메모에는 해병대 방어선 3km내에는 폭격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근접 안전 제한 수칙도 포함되어 있었다.
버글 메모에 의하면 3대의 B-52폭격기가 1조가 되어 지도상에 표시된 1X2km의 지역에

500파운드 폭탄 252발 또는 72발의 750파운드 폭탄을 투하하여 초토화하게된다.

 

스카이스포트는 평균 90분마다 1개조를 특정 블록의 표적지까지 유도하며 그 다음 조는 다른 표적으로 유도되었다. 

만약 1개조가 표적 타격에 실패했거나 또는 타격이 취소된다면 각각의 조는 1개 표적에 번갈아 타격 지시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꼭 90분 간격으로만 유도할 수는 없었다.
적이 폭격 패턴을 혼동하도록 각 조의 순번을 바꾸었기 때문에 간격은 90분 또는 2시간이될 수도 있었다.
한국 동해상에서 납치된 푸에블로호가 원산항으로 나포되는 등 위기가 발생했기 때문에
26대의 B-52 폭격기가 아시아로 전진배치되었다.
15대의 B-52가 일본 오키나와 가데나 기지에 배치되어 B-52는

괌 앤더슨, 가데나, 그리고 태국에서 하루 48소티 출격이 가능하였다.
2월 12일,  합동 참모 본부 그랜트 샤프 해군제독은

가데나 기지의 B-52가 동남아시아의 표적들을 타격할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웨스트모얼랜드 사령관은 제3비행사단장에게 버글 메모 수정을 건의하였다.
90분 간격으로 1개조 3대를 출격시키지 말고  6대를  3시간 간격으로 출격시키자는 것이었다.
웨스트모얼랜드의 이러한 제안은 더 많은 폭격기가 한꺼번에 표적을 타격하여 완전히 초토화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웨스트모얼랜드의 제안은 2월 25일부터 공식 발효되었다.

  

1967년 11월 12일, 태국 우 타파오 기지에서 발진한 B-52 폭격기가

콘 치엔 기지에서 3km 안전 제한 수칙을 지키지 못했던 일이 있었다.
그날 9대가 출격하여 병력 집결지와 로켓 포대를 타격하였는데,

그 중 1대가 실수로 해병대 방어선으로부터 약 1.4km 근접한 지점에 폭탄을 투하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실수로 인해 북베트남군이 손해를 입었다.

 

오폭을 당한 방어선 근처에서 제2차 폭발이 일어나는 놀라운 광경이 목격되었다.
북베트남군은 미군의 안전 조치를 역으로 이용, 폭탄이 떨어지지 않는 안전 지대 내에 숨어있었던 것이다.
우연한 실수가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미 전략공군은 비상시가 아니면 안전 지대 내 타격을 무척 싫어했다.
아무튼 제3해병수륙양용군은 1968년 1월 8일에 개최된 회의에서 안전 지대를 좁히자는 건의를 하였다.
쿠스먼 해병중장은 안전을위해 최신형 레이더 경고 시설을 콘 치엔 또는 케산에 설치하여 

해병대 방어선으로부터 1km지점에 B-52 폭격 테스트를 실시하자고 제안하였다.
제3비행사단장 웰스 중장은 처음엔 B-52의 폭격 정밀도를 높이는 추가적인 보조장치로 이용하려고

레이더 경고장치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그는 경고 장치가 적의 포격에 취약할 것을 염려했고,

스카이스포트 임무에서 승무원들이 불필요하게 추가적인 일을 하게되는 것을 걱정하였다.

 

이에 대한 찬반 논란은 2월 내내 계속되다가 결국 2월 26일에 근접 폭격 테스트를 해보기로 결정되었다.
1대의 B-52가 테스트를 위하여 우 타파오 기지에서 이륙하였고, 또 한 대는 예비로 이륙하였다.
2대의 스카이스포트가 폭격기를 유도하였지만 아무런 기술적 이상도 발생하지 않자
다음날 실전 근접 지원이 실시되었다.
B-52가 방어선 안전 지대 내에 폭격을 실시하자 케산 해병 기지에 무시무시한 충격이 전달되어 벙커가 붕괴되기도 하였다.

 

방어선 부근에서 2차 폭발이 일어나자 해병대원들은 박수 갈채를 보냈다.
뒤이어 실시된 폭격에서도 어김없이 2차 폭발과 화재가 발생하였다.
근접 폭격이 성공하자 3월부터 제3비행사단 B-52 승무원들은 근접 폭격 임무를 자주 수행하게된다.
제3비행사단은 3월동안 남베트남 전역에 총 444소티의 출격을 기록했으며
4월 까지 근접 폭격 지원은 48회를 실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