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초, 베트남 전쟁의 케산(Khe Sanh) 전투는 미 해병대와 베트남군 유격대 등 6000여 명이 월맹군 2개 사단의 포위공격을 격퇴시킨 놀라운 전투였다. 이 전투는 전사상 단일 전투에서 가장 많은 화력이 지원된 대규모 화력전이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들의 피해도 여러 대의 항공기가 격추되는 등 만만치 않았다.
미군의 폭격으로 월맹군의 공세는 많은 사상자만 냈을 뿐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쌍방의 포격과 사격전이 계속됐고 미 해병대를 향한 월맹군 스나이퍼의 날카로운 저격이 끊임없이 이어졌다.케산 전투의 치열했던 저격전은 제26해병연대 3대대 중대장 대브니(W. Dabney) 대위의 전투일기에 나타나고 있다.
“연일 계속되는 아군의 맹렬한 폭격에도 불구하고 북쪽으로 약 400m 정도 떨어진 고지에 스나이퍼가 숨어 있었다. 이 고지는 아군진지가 있는 881m고지 방향으로 효과적인 사격이 가능한 위치였다. 저격수는 가끔씩 치명적인 사격을 가해 왔다. 총 20발 정도의 사격으로 우리 해병대원 2명을 죽였고, 다른 6명을 부상시켰다.
공군의 네이팜탄 공격도 효과가 없었다. 그 놈은 구조 헬리콥터가 고장 나서 이륙을 못할 때 구조대원들을 한 명씩 쏘아 모두 쓰러뜨렸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이 왔다! 어느 날 오후 아군 기관총 사수가 멀리 떨어진 우거진 덤불 속에서 무언가 살짝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즉각 대전차 무기인 무반동총을 조준해 106mm 고폭탄을 발사했다. ‘꽝’ 포탄소리와 함께 적의 저격진지가 박살 났고 그 놈들은 형체도 없는 고깃덩어리가 됐다. 어디선가 또 다른 저격수가 튀어나와 자리를 잡았지만 그 역시 106mm 고폭탄에 맞았다. 이런 저격전이 10일간 계속됐다.”
스나이퍼의 저격전은 때때로 게임처럼 진행되기도 했다. 장거리 표적을 맞히는 쾌감과 인간사냥의 스릴, 그리고 사선에선 병사들의 두려움이 전선에 깔려 있었지만 극한상황 속에서도 쌍방의 저격수들은 암묵적인 교전규칙을 지켰다. 그것은 죽음과 무모한 살상전에 대한 거부감이며 생존본능이었다.
미군의 보복공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어떤 월맹군 저격수들은 의도적으로 오발사격을 했다. 가장 주목을 끌었던 저격수 한 명은 ‘끈끈이’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그는 해병대 전선으로부터 200m 이상 떨어진 웅덩이 부근에서 위협적인 사격을 계속 실시했다. 그렇지만 대부분 오발탄이고 사격효과는 없었다.
이러한 월맹군 저격수에 대한 미군의 대응도 전투가 진행됨에 따라 점점 교묘해졌다. 양측의 스나이퍼들은 명중보다 그저 총소리를 내는 것, 어느덧 공존공생의 저격술을 선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일찍이 제1차 세계대전 시 서부전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현상이었다. 저격수들은 적의 대략적인 방향으로 약간의 사격을 가함으로써 자신의 체면을 지키고자 했다.
하지만 정확한 저격으로 상대방을 자극해 대규모 보복공격을 받는 일을 원치 않았다. 케산 전투에서 격전을 치른 미 해병 대브니 대위는 이러한 이상한 저격전을 회고했다.
“우리 대원들이 적의 저격진지를 향해 106mm탄을 쏘아댔다. 마침내 표적을 찾아냈을 때, 어느 병사가 나한테 기어와서 건의를 했다. 그 일병은 지난주 내내 적의 저격수를 면밀하게 관찰했던 것이다. 그가 관찰한 월맹군 저격수는 아군 쪽으로 많은 사격을 했지만, 어느 것 하나 명중시키지 않았다. 일병은 그를 당분간 우리가 보호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우리가 그를 사살한다면 월맹군이 제대로 총을 쏘는 누군가와 대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아이디어는 이치에 맞았고 우리는 106mm 무반동총을 철수시켰다. 우리 병사들은 심지어 사격훈련장에서 오발신호로 쓰는 빨간 깃발을 사용해 총성이 날 때마다 ‘오발탄’이라는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언제 정확한 사격을 할지 모르는 일, 부하들은 그런 게임을 중단했다. 월맹군 저격수는 전투 내내 약 2개월 동안 그곳에 있었고 여느 때와 같이 사격을 계속했으나 아군을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
대브니와 그의 동료 해병대원들이 겪은 이러한 현상은 이미 베트남 전쟁 초기부터 나타났다.1965년 미군이 참전한 초기, 해병 장교인 전사작가 카푸토(P.Caputo)도 이러한 공존공생의 저격전을 목격했다. 당시 268m 고지에 주둔한 카푸토와 동료 해병대원들은 적어도 적의 사격공세만으로는 전혀 곤란을 겪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아군과 대치하고 있는 1600여 명의 베트콩 게릴라는 시간을 잘 지켜서 거의 매일 오후 4시 정각에 총탄 몇 발을 발사했다. 우리는 점점 그들을 좋아하게 됐는데 절대로 아무것도 맞히지 않았기 때문이다.”스나이퍼들의 보복공격에 대한 두려움, 즉 적을 저격한 스나이퍼는 반드시 저격당한다는 전장의 법칙을 스나이퍼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