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베트남 전쟁사

두코전투 증언

구름위 2013. 11. 23.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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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코 전투의 개요

 

 

1966년 7월9일 미군의 '파울리비아'작전을 측면지원 하기위하여 '캄보디아' 국경으로
이동하여 중대전술기지를 구축한후 방어에 임하고 있던 맹호 기갑연대 3대대 9중대는
채명신 사령관의 [중대전술기지 방어개념]에 따라 가능한 모든 장애물과 조기경보
조직의 활용및 철저한 야간조명 계획을 수립하여 세밀한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던중,
1966년 8월9일 밤 10시40분경 적 월맹군 2개대대의 공격을 받아, 다음날 새벽 4시30분
까지 6시간 동안에 걸쳐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총검과 수류탄, 태권도로 단련된 육박전등
근접전투로 적을 섬멸 격퇴하였다.

동 작전 결과 적사살 189명, 포로 6명, 61mm 박격포 5문, 중경기관총 11정, 개인화기 62정,
대전차 유탄포 12문, 기타 10여만발의 실탄을 노획하는 다대한 전과를 획득했다.
이 전투의 개가로 인하여 주월한국군의 [중대 전술기지 개념]은 주월 모든 우방군들의
경탄의 대상이 되었을뿐만 아니라, 미군 보병학교에서 교리 연구과제로 채택되기도 했다.
아군의 피해는 전사 6명, 부상 42명(전원완치퇴원)이었다.


 

1.맹호 기갑연대 제3대대 9중대장 이춘근

□ 증언 내용
- 일시 : 1978년 11월 29일
­ 장소 : 서울시 강남구 잠실4동 자택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편집정리

­ 두코 전투의 배경 및 경과
­ 전투 교훈 및 성공요인


전쟁은 비극이다. 살기 위하여 죽여야 하고, 평화를 위하여 싸워야 한다.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 한 전쟁은 인류의 자해행위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토록 치열한 전투는 불타는 생애의 의지가 아니면 설명될 수 없다.
죽자면 더 간편한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 아닌가?
피아간에 자기가 좋아하는 생활방식을 주장하며 싸우고 있다.
전쟁의 역설을 자질구레한 분별로써 해결하려들면 결국 전쟁을 기피하고 싶은
생각밖에 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이겨야 하겠다는 패기를 잃게 마련이다.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투입된 병사나 장교는 다같이 조국이 원하는 평화를 위한
전쟁에서 피해를 적게 하고 한사람이라도 더 살아서 돌아가 민족의 눈물을 덜어야 한다는
공통된 신조 위에서 전우애를 가져야 하고 철석같이 단결하여 대적하여야 할 것이다.
전쟁을 직접 치르는 군인이야말로 누구보다도 평화의 소중한 가치를 통감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싸움에 이기고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고상한 이데올로기나 세계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이미 승리 아니면 죽음이라는
양자택일의 길에 직면하고 있다. “왜 싸워야 하느냐”를 물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싸워서 이기고 사느냐”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맹호 기갑연대 제9중대장으로 임명된 것은 1966년 3월 3일, 그러니까
내가 월남에 상륙해서 대대 정보장교로서 근무한지 4개월이 꼬박 채워지는 날이었다.
예기치 않았던 명령을 받고 중대장으로 부임하는 심경이 무겁고 개운치 못한 것은
고온 다습한 열대성기후의 영향만도 아니었다. 당시 제9중대에는 많은 안전사고가
발생하였고,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휘관 교체를 통하여 기강을 가다듬고
분위기를 쇄신하려는 의도에서 취하여진 조치로 부임하였기 때문이었다.

임지에 당도하면서 내가 먼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병사들의 심리파악이었다.
제9중대는 모국에서부터의 기성조직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병사가 월남에까지 와서 실전을 치르게 될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누구나 전장에 들어서면 불가피한 일이라고는 하나
전쟁공포의 징후가 뚜렷한 것이 눈에 띠었다. 전쟁공포심이 정서의 불안정을 초래하고
따라서 안전규칙을 어기는 사고가 빈발하는 것이었다.

군인을 직업으로 택한 나에게도 전쟁공포심을 없을 수 없는 일이다. 빈약한 장비와
손아귀에 들어올 정도의 병력을 가지고, 산발적으로 대항하여 오는 베트콩을 잡는 것을
멀리서 보면 산에서 토끼 잡는 사냥놀이 정도로 볼지 모르나, 막상 이들과 접촉하여
생사를 판가름하는 상황에 봉착하여 생각해보면 그와 같이 사치스러운 생각을
할 수 없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더구나 군인으로서 어떤 제대에 속하든 또는 어떤 직위에 있던지 간에 시위 기분에
들떠서 전과나열에 급급하고, 또는 보물찾기식의 사행심에 사로잡히는 것은 엄중 경계
하여야 할 일이다. 베트콩은 지금도 우리들의 기억에서 매몰될 수 없는 디엔 비엔 푸의
처절한 전투에서 현대적 프랑스 군대에 대하여 운명적인 일대 결정타를 가하여
프랑스의 세력을 구축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민족에 대한 불길 같은
증오심과 만성적으로 끌어온 전쟁속에서 자란 특수체질, 그리고 그들에게는
‘홈그라운드’라는 결정적인 이점을 지니고 있다.

다음에 관심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문제는 전의를 고취시키는 문제이다. 우리 중대는
월남에 오기 위하여 특별히 편성을 하지 않고, 기성조직을 그대로 안고 왔기 때문에
저간의 사정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중대장이 전투를 다반사로 아는 따위의
태도를 취하는 것은 병사들의 마음과는 천지차이일 것이며, 사실 그런 사람은 있지
않을 것 같다. 만일 간헐적인 발작에서 혹은 공명심에서 지휘관이 경거망동을 한다면
적전에서 장교와 사병 간에는 필연적으로 정신분열을 초래하게 마련이며 여기에는
공멸의 길밖에 없을 것이다.



군인은 맹목적으로 싸워서 죽어야 한다는 말처럼 비정한 살인행위는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생애의 집념과 깊은 의지로써 전쟁 공포심을 일소하고 전의를 북돋우어야 한다.
살기를 목표로 한다면 천방지축 못할 짓이 없을 듯 하나 우리는 살겠다는 원시감정이
얼마나 확고한 전의가 되는지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원시씨족의 싸움에서 목격할 수 있다.
문명을 외면한 그들은 문명의 이기 앞에 무참하게 쓰러지면서도 자기의 고토를 지키고
자기의 생활을 수호하기 위하여 과감 무쌍하게 싸운 기록을 흔히 보고 있다.

군인은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나 전쟁을 취미로 할 수는 없으며,
전쟁을 취미로 한다고 해도 마음대로 도전할 수는 더욱 없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장교나 병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장교의 책임은 의로운 평화를 쟁취하기 위하여
지불하여야 할 우리의 대가를 최소로 하는데, 지략와 용기를 다해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곳은 외국이요, 이곳에서 싸움에서 지고 살아남은 길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보다 더 굴욕적이고 고통스러운 포로의 길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중대장으로 부임해서 2개월은 부대의 내외정비에도 바빴으나, 오히려 중대를 책임진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는데 더 유익하게 보낸 귀중한 시간이었다.

중대장이 할 일은 병사들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살 수 있는 길을 찾아 주는데
있고 살기 위하여 가장 슬기로운 전술, 전기를 연마하는데 있다는 것을 납득시켜야 했다.
유혈을 더는 길은 중대장의 지시를 기만 없이 이행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특히 전술적 사항이면 빠짐없이 시달하고 엄밀하게 확인하고 독려했다.
경계를 철저히 하여 기습에 대비하고 야간잠복근무에 대한 점검을 엄격하게 하여
불의의 희생을 막고 시간만 있으면 각종장비의 손질과 장비를 정비시키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보충훈련을 가하는데 힘썼다.

20년간 손을 대지 못했다는 푸캇산 공략(맹호5호 작전), 야간침투로 시작된 연대작전
(번개2호)의 10일간에 있어서도 나는 병사들의 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음으로써,
병사들이 품어온 모든 의구와 염려를 덜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우리 중대가 베트콩 마을을 습격하여 사살 9명, 무기 노획 2정이라는 작은 전과를
올린 싸움에서도 희생은 없었다. 이 전투에서는 우리 첨병이 베트콩과 2m 거리를 두고
조우하였으나, 우리 병사의 기민한 동작으로 적의 저격을 피할 수 있었다.



전투가 되풀이 될수록 막다른 상황이 그만큼 가까워 오고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한 상황에 처해서 당황하지 않고 지휘관다운 태도를 잃지 않으면서
병사들이 믿을 수 있는 의연한 지휘관의 몫을 다할 수 있을 것인지 초심자로서
자기 자신을 시험해 보지 못한 나에게는 불안과 초조가 없을 수 없었다.

제9중대에 중대장으로 부임하여 처음으로 중대장다운 생각과 중대장으로
당연히 겪어야 할 본격적인 과제에 대하여 경험을 쌓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중대장으로서의 경력을 새로이 쌓고 있는 것으로도 생각되었다. 이미 중대장으로서의
경험이 있었던 나에게는 본연의 지휘권 행사는 여기에서 처음으로 겪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무를 강요당하면서도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였던 모국에서의 파행적 지휘관
생활이야말로 우리가 가져온 통폐임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중대원의 운명을 좌우할 지휘권 행사는 사실상 무제약적인 것이었고,
그에 따르는 군법상 도덕상의 책임도 또한 그런 것이었다. 중대가 전투에 돌입하면
모든 것은 중대장에게 달려있고 상급지휘계통의 전투지휘는 비정규전인 월남전의 성격상
2차적인 의미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중대단위는 다시 쪼개어져서 소대, 분대단위의 전투가 빈번하였고,
우발적인 조우전 등도 착잡한 상황 하에서 흔히 일어나는 전례이고 보면
결국 월남에서의 우리의 승리는 각개병사의 전투력에 달려있고, 모든 영광은
알려지지 않은 무명용사에로 돌려져야 할 것이다.



제9중대가 소속하고 있는 기갑연대 제3대대는 1966년 7월 9일
미군이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는 캄보디아 국경선으로 출동하게 되었다.
맹호부대 사령부가 있는 퀴논(Quy Nhon)으로부터 19번 도로를 따라 25km 서쪽으로 가면
빈케(Binh Khe)라는 소도시가 있는데 여기에 기갑연대가 위치하고 있었으며,
계속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면 미 제1기갑사단, 안캐패스(An Khe Pass) 그리고
더 나가면 월남군 제2군단사령부 푸레이쿠(Plei Ku)가 있고 국경선에 접근하여
두코(Duc Co)라고 불리는 해발 200~300m의 고원지대가 있다.
그곳에는 산악 소수민족인 ‘몬타나(Montagnard)'족과 월남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호치민 루트를 봉쇄하기 위하여 나와 있는 미군 전술기지와 임시가설 비행장이 있는
이곳에서 우리가 맡은 임무는 광범위한 지역에 전술기지를 펴고 주간정찰,
야간매복으로써 적의 내륙침투를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군의 전술기지 서남방
8km 떨어진 지점에 대대전술기지와 예비중대가 위치하였고 2개 중대는 국경선에 연하여
배치되어 각각 전면방어형태의 진지를 편성하였다.

제9중대는 최초 예비대대로서 대대와 같이 있다가 15일 후인 1966년 7월 27일에
두코 전술기지에 배치되어있던 제11중대와 진지를 교대하여 투입되고, 제11중대가
대대의 예비로 전환되었으며, 제10중대는 인접지역의 전술기지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우리 중대는 제11중대와 교체되어 국경선지역으로 나가게 되었다.
우리 중대는 최초에 중화기 중대로부터 경기환총 1개 소대와 81mm 박격포 1개반 이외에
미군으로부터 배속 받은 전차 1개 소대로, 편성되었다.

대대에서 준비명령을 받자, 곧 제2소대장(이춘식 중위)을 불러 제11중대 기지에 가서
진지를 인수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때 강조한 것은
①유개호를 보강하라. 취침호, 공용화기진지, 탄약고, 관측조는 필히 유개호로 구축하고,
   개인호도 적의 중요한 접근로에 있는 것은 유개호로 하라.
②조기 경보를 위하여 조명 지뢰를 추가로 설치하되, 외선부터 200~500m어간의
   예상되는 적의 접근로 및 집결지에 집중적으로 부설하라.
③그리고 조명지뢰 100여 발을 추가로 획득하여 휴대하도록 조치해 주었다.



1966년 7월 27일에 전방진지에 이동한 후부터 계속 2개 소대병력이 교대로 수색과
매복을 나갔으나, 좀처럼 적과 조우하는 일이 없었다. 잔류 병력은 벙커를 견고하게
구축하고 열대지방의 무성한 생목으로 유개호를 만들어 위장하는 일에 종사하였고,
각개 병사의 사격구역을 배당하여 중대진지의 여하한 방향으로 접근하는 적에 대해서도
안전한 호 속에서 즉각 격퇴할 수 있도록 계속 방어태세를 굳히는데 여념이 없었다.

8월 6일에는 미군의 워커장군(제25사단 제3여단장)이 당 중대를 방문하여
수색정찰은 소홀히 하고 할 일이 없으니까 진지구축이나 하고 있다고 핀잔을 주고 갔다. 
7~11월간은 우기였으므로 이 지대에 구축된 진지와 교통호는 매일 보수하여야 했으며
교통호의 물을 퍼내는 일, 습기찬 탄약을 벙커 속에서 말리는 일, 젖은 작업복과
군화를 착용하고 수색, 매복근무에 나가는 등 짜증과 고통을 감당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이곳에 와서 한 달이 가까워 오는데도 적과 접촉이 없어서 병사들은
출동할 때 가졌던 긴장이 풀리기 시작하는 듯 하였고, 또는 폭풍전야의 정적과 같은
야릇한 정황 속에서 불안과 초조를 가누지 못하기도 하였다.
악천후로 인한 울적한 기분으로 고립무원의 변경(邊境)에서 하루하루를 겪는 동안
병사들의 가라앉은 분위기에 장교까지 말려들 우려조차 느껴졌다.
장교의 지구력 있는 통솔이 이럴 때에 요청되는 것이다. 이런 침체된 분위기를 불식하기
위하여 각자 하여야 할 임무를 되풀이 점검하고 여러 가지의 상황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여하한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는 예비훈련을 끈기 있게 강요하였다.

앞서 미군 여단장이 다녀간 뒤 8월 8일에는 “적 사단사령부가 있다”는 미확인된 정보에
따라서 우리 중대가 전투정찰의 임무를 띠고 출동하게 되었다. 도대체 적의 사단사령부가
있다는 지점의 접근로도 모른 채 후방에서 쏘아 올리는 포탄에 의하여 방향유도를
받으면서 20km나 되는 정글 속의 행군을 1박 2일에 걸쳐서 감행하게 된 것이다.
사단사령부를 향해서 1개 중대의 근소한 병력이 전투정찰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좀 무리인 것 같았다. 또한 중대는 접근로 조차 없는 전인미답의 처녀지를 헤치고 전진하여
무인지경을 누비고 다녔으나,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원 주둔지로 돌아오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8월 8일의 캄보디아 국경선 정찰은 임무를 고려해 볼 때 대대 예비인
제11중대가 담당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대대장이 딱 잘라 지명을 했어야 하는데,
중대장의 의견을 물으니까, 아무도 가려하지 않기에 내가 나선 것이다.
이때의 정찰은 미 제3여단에서 2박 3일간의 정찰을 지시하였으나,
정찰간에 접적이 없었기 때문에 1박 2일로 마쳤다.



기지에 복귀하였을 때에는 대원들이 몹시 피곤하여, 몸을 움직이기도 불편할 정도였다.
허탕치고 진지로 돌아온 것이 8월 9일 오후 4시 30분! 군장을 풀자 긴장이 풀리면서
밀물 같은 피로에 사지를 가눌 수 없었다. 언제나 육체적, 정신적 해이를 겪을 적마다
머리 속에 번개같이 스치는 것은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휘관은 취침시간을 제외하고는 전장에서는 숨막히는 긴장상태를 지속하여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대대에서는 여전히 2개 소대병력을 잠복근무에 나가게 하는 것이었으나,
중대원과 강행군을 같이 한 나로서는 이것이 무리라고 판단하고 중대장 권한을 발동하여
전 중대원을 진지에 머무르게 하고 야간경계근무도 2교대제로 하여 병사들로 하여금
가급적 수면을 많이 취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사실 이때 대대장이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야간 매복조를 배치하라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 직권으로 못하겠다고 불복의 듯을 표하고, 2교대 경계로 대체 했다.
만약 잠복조나 청음호를 내 보냈다면, 현지에서 코를 골며 잘 테니 어찌 중대장이
그 실정을 알면서 내 보낼 수 있겠는가? 사실 나도 온몸이 쑤시고
솜같이 늘어짐을 감당하기 어려웠는데 하물며 사병들이야 어찌 하겠는가?

그날 따라 오랜만에 우리들은 맑은 밤을 맞이하였다. 오랜만에 별을 보며, 문득 같은 별을
쳐다보고 있을지도 모를 부모형제, 친지들을 생각하게 된 것은 나만의 감상은 아니었는지,
8월 7일에 나와 중대장 임무를 교대하기 위하여 부임한 '강세호' 대위는
벙커에 얼굴을 맞대고 앉자마자 고향이야기(나와는 우연히 동향이었다.),
6.25때 겪은 전투경험, 최근에 결혼한 일을 중심으로 하여 이야기에 열중하였다.

몸이 몹시 피곤하였으나 밤 1시에 자는 버릇이 있어서 강대위의 이야기에 맞장구치면서
간간이 인계하여야 할 제9중대에 대한 이야기를 삽입하였다.
강세호 대위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가 내 자신이 들어도 무뚝뚝한 함경도 사투리로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돌연 조명지뢰가 터졌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제2소대 전방에 나가있는 화기소대원 청음조 앞에서 22시 40분에 조명지뢰가 터진 것이다.
그러나 경계병은 아무것도 의심스러운 것을 발견치 못하였다.
미군 전차경계병도 역시 같은 보고였다.



짐승의 소치가 아닐까 하고 약간의 의심스러운 생각을 보류하여 두고
곤히 자고 있는 병력들의 비상동원을 자제하였다. 5분도 못되어 청음조에서
전방 독립수가 있는 방향에서 땅을 파는 소리가 들린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러나 나는 또 한번 이를 묵살하고 징후를 예의 관찰하라고 지시하였다.
세 번째의 호를 파는 소리보고도 역시 같은 지기를 반복하는데 그쳤다.

화기소대장 '임복만' 중위에게서 같은 보고를 두 번 받고 나는 화기소대장이
강세호 대위와 같이 고국에서 최근에 부임한 장교라서 처녀 출전한 탓으로 지나치게
촉각을 돋우고 있는 탓이나 아닐까 하는 의심이 엎치고 덮쳤다.
제2소대 전방은 아군의 시계와 사계가 양호하여서 이 방향에서는 접근치 못할 것이며,
나로써는 제1소대지역을 가장 중요한 접근로로 판단하고, 그 방향에 주력을 지향하고
전차 3대를 그곳에 배치하여 두었던 것이다.

세 번째의 보고를 받고 나는 미군 전차에 장치된 탐조등으로써 소리나는 방향으로 
비추라고 전차소대에게 지시하였다. 전차의 시동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트리고
울려 퍼지면서 탐조등이 목표했던 지점에 비추어지자마자, 우리 기관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지고 잇달아 전차에 장치된 구경 50기관포가 불을 뿜기 시작하였다.

반사적으로 강대위와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벙커밖에 나갔다.
탐조등이 비치고 있는 지점에 월맹군이 4열 내지 5열로써 폭 50~60m의 대형을 짓고
밀물처럼 육박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찰나적으로 나는 벙커로 들어가서 포병사격요청을 하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어떤 압력으로 몸이 교통호에 내 동댕이쳐졌다. 머리를 흔들며 의식을 회복하고 보니
옆에 섰던 강세호 대위가 5~7m 떨어진 곳에서 나를 부르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총격에 놀라 뛰어 나왔던 전령도 ‘왼쪽 어깨, 왼쪽 어깨!’ 하면서 비명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몸을 어루만져 보았으나 다친 곳이 없는 것 같았고 기동하는데 부자유를
느끼지 않기에 벙커로 뛰어 들어가서 무전병으로 하여금 대대를 호출케 하였다.
동시에 지휘소 요원들은 밖에 부상당한 강대위와 전령을 중대장 벙커로 운반하고 있었다.
한광덕 중위가 잠에서 깨어나서 무전기를 움켜쥐는 것을 보았다.
포병사격요청을 하려고 하는 순간, 적탄이 중대 지휘소 벙커에 구멍을 뚫어 놓았다.



적은 우리 지휘소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지휘소를 무력화하기 위하여
공격준비사격의 첫탄을 지휘소에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오늘 있었던 우리의 행군이 약점이 될 것을 간파한 적은 이날 이 시각에 계획된 공격을
가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번개 같이 지나면서 전우들의 즉각적인 응사를 보고 경계는
소홀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어 지금쯤은 취침 중에 있던 전 병력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을 것으로 믿으면서 우선 지휘소의 기능을 정상화하여 지원화력을 유도하여야 했다.

관측장교 한광덕 중위에게 화집점 313방향에서 적 1개 중대 이상의 병력이 공격하니
그 지점으로부터 계속 우리 중대 진지로 포탄을 유도하여 2소대의 사격효과 보고에 따라
집중화력을 퍼부어 줄 것과 화집점 305, 309, 311에 대해서도 인접 포대에 사격요청을
하도록 지시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머리 위에서 꽝!~ 터지더니 지휘소 요원은
전격(電擊)을 당한 듯 일제히 쓰러졌다. 대들보가 휘어져 흙이 떨어지고 주먹만한 구멍
사이로 총총한 별이 보였다. 견고하게 구축한 벙커의 보호로 지휘소의 기능을 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지휘소 요원은 다시 무전기에 붙고 환자를 간호하는 일에 혈안이 되었다.
중대 지휘소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제1소대의 분대장 2명이 위생병을 부르면서
중대장 벙커로 기어 왔다. 소대에도 상당한 피해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밖에는 적의 박격포탄이 우리의 점령지역을 완전히 뒤덮고 있다.
참으로 순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우리가 머리를 쳐들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적이 접근해 올 것임에 틀림없다.
각 소대를 무전기로 호출하여 각 소대의 상황을 들었다. 나는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아군의 중대한 피해에 우리 모두가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음을 의식하였다.
제1소대와 2소대는 소대장이 중상을 입고 제3소대만이 소대장 '정희율' 소위의
전투지휘하에 전원 전투배치를 완료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무기가 있고 탄약이 있는 한, 승이 아니면 죽음의 결판을 낼 것이다.
그 동안 병력의 손실은 부상자를 합하여 100명으로 추산되었다. 최후의 1인까지 싸운다.
싸울 수 있는 병력은 모두 나서라! 중대장 이하 전원이 최후의 백병전을 감행한다.
자기의 위치를 최후까지 사수하라! 비탄과 결사의 결의에 뒤섞인 나의 목소리는
박격포탄의 폭음으로 끊기고 또 끊겼다.

우리의 박격포에서 발사되는 조명탄사격으로 대낮과 같이 밝혀진 중대전면에 대하여
맹화를 퍼붓는 우리의 영롱한 전우들의 사격은 적탄이 우리의 진지 위에서
불꽃 튀기는데도 조금도 수그러지지 않는다.



한광덕 중위의 재빠른 조치로 최초 사격 요구가 포대에 하달되고 머지않아 아군의
지원포병사격이 가하여지게 될것이다. 일각이 여삼추다.
기다리는 마음에 회오가 치밀어 온다. 최초에 청음초에서 경보가 전하여졌을 때
나는 왜 이것을 묵살했을까? 피곤한 병사들의 피를 더 흘리게 한 것이 아닌가?
아니, 오히려 자신의 피로가 더 고식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작용했을 것이다.

화기소대장을 초심자라고 너무 얕보아서 결국 이런 중대한 파국을 가져온 것이다.
이 책임을 결코 모면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제1소대장의 건의대로 병사들 목욕을
개울에 내 보내었다면, 그리고 2개 소대 병력을 대대의 지시대로 잠복근무에 보냈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때 왜 화기소대장의 보고를 묵살했을까? 왜? 왜? ......
나는 지휘관으로서 몸둘 곳을 몰랐다. 나의 과오를 나 혼자만이 책임을 질 수는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105mm포병의 첫 탄이 떳다는 보고를 받고 모든 과오를 용서받은 심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에서 싸우다 죽는다. 나의 과오를 씻고 전우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도 전우들과 같이 이곳에 시체가 되어 나란히 누워 있을 것이다. 이미 3분의 2의
병력을 초반전에 잃었다는 것은 나에게 극한조치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대대에서는 현재의 확실한 상황을 보고하고 적의 박격포 위치를 알아내라는 지시가
있었으나 야음에 뒤덮인 야간전투에서 박격포위치를 알아내라는 지시로 보아
대대에서도 무척 당황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되었다. 중대전술기지의 주변일대에 대하여
가용한 지원화기를 총동원하여 제압하여 줄 것을 요청하고 대대참모의 몇 가지 질문에
답하여 무전기를 떠나려고 할 때 제3소대에서도 지원사격요청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적은 맹렬한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중대를 전면포위하여 결정적인 총공격에 나설 것으로
판단되었다. 사태추이는 일각일각 우리에게 백병전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중대 전면에 맹렬한 아군의 포병화력이 중대전술 기지를 빼돌려 놓고
정확하게 작렬하는 가운데 병사들의 사기는 충천했다. 포병지원은 육사의 1년 선배
'김진규' 대위의 지휘하에 실시되었다. 우리의 포병사격이 약 40분간 계속되는 사이에
적의 박격포 사격은 현저하게 수그러졌다. 중대의 1차 위기는 모면한 듯 했다.

적의 박격포 탄이 뜸해진 틈을 타서 교통호를 통하여 제3소대지역서부터 중대를
돌기 시작하였다. 피아간에 교환되는 총화(銃火)의 교환은 아직도 치열하였고,
아군의 포화가 적의 두상에 장쾌하게 불꽃을 퉁기고 있었다.
병사들의 안부를 궁금해 하는 나에게 처음으로 부딪친 것은 교통호에 놓여있는
전우의 시체였다. 벙커 속에는 부상병들이 위생병의 간호를 받고 있었다.



타오르는 적개심에 사지가 부르르 떨렸다.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소리를 질렀다.
“적의 박격포는 거의 파괴되었다. 그들에게 남은 길은 우리의 진지에 돌격하거나
도주하는 길밖에 없다. 중대장 이하 전원은 백병전으로 적을 무찔러 우리 진지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할 것이다!”
많은 병사들이 자다가 소총만 들고 나와서 싸우는 것을 보고 나는 병사들을 교대로
벙커 속에 보내어 백병전에 대비할 수 있도록 전투복장을 입게 하고 소총에는 착검을
하도록 지시하였다.

가장 염려스러운 제2소대 지역으로 가는데 이곳에서는 처절한 사투가 전개되고 있었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탄약을 나르는 전우, 한쪽 발을 부상당하여 다른 한쪽 발로 서서
사격을 가하는 전우, 그야말로 그들의 장렬한 모습에 압도되고 말았다.
내가 제2소대 지역에 갔을 때 인해전술의 제2파가 밀어닥치고 있었다.
내가 부상자의 출혈을 걱정하여 만류하는 것도 전혀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그들에게는 이미 출혈, 죽음 같은 것은 안중에 없었다. 죽을 때까지 싸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는 초인적인 힘에 완전히 사로잡힌 행동이었다.

전차 2대의 기관총과 요소에 배치된 경기관총 4정, 자동소총 2, 그리고 각개 병사가 발사
하는 소총의 집중적인 사격은 적이 밀어닥치는 지역에 통쾌한 화망을 구성하고 있었다.
조명탄 사격으로 대낮과 같이 밝혀진 전면의 광경은 우리 한국군의 전투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일대 파노라마가 아닐 수 없었다.

적은 공격이 저지되면 엎드리고, 다시 일어나서 전진하려고 하면 아군의 탄우가 빗발친다.
전열이 쓰러지면 뒤에서 시체를 밟고 넘어오고, 넘어오다가 쓰러지면 또 넘어온다.
그러나 우리 병사들의 철통같은 방어태세 앞에 무수히 쓰러진다.
소대장 이춘식 중위는 두부, 복부 그리고 팔에 부상을 입고 누워 있었다.
누워 있으면서도 상황을 보고 받고 수시로 전투에 대한 적절한 지시를 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위독하게 보여서 깨끗한 전투복으로 갈아입히고,
나의 손으로 육사 졸업 반지를 끼워 주면서 말없이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
“중대장님! 저는 죽지 않습니다. 이 전투에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나지막하면서 힘있는 목소리에 나는 놀랐다.
그렇다! 우리는 최후의 1인까지 여기에서 싸워 죽더라도 우리는 이길 것이다.
최후까지 승리를 확신하고 비굴하지 않는 우리들에게는 승리만이 있다.

우리의 한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해 적은 100명이 쓰러지고 있다. 우리는 모두 이 땅에서
가공할 한국의 전투력, 아니 우리 민족의 강인성을 유감없이 과시하고 죽을 것이다.
후배인 제2소대장의 손으로 꼭 쥐고 놓지를 못하였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영원한 가치로 완성되어 가지 않은가?
민족의 영원한 생명 속에 우리는 부활하는 것이다. 결코 우리는 죽지 않는다.
우리는 소아(小我)를 버리고 유구한 대의(大儀) 속에 영생할 것이다.



제1소대는 초반전에 소대장 고건영, 중위가 부상당하고 지위불능이 되었으며,
선임하사 조차 몇 일 전에 1차로 귀국하여 거의 지휘기능을 상실한 가운데,
전투상태에 동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1소대는 제3소대와 같이 적의 공격이
치열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병사 중 최선임자인 향도의 지위하에 산발적으로 총격을
가하여 오는 적에 대하여 모든 병사가 자율적으로 자기의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제1소대장은 허벅다리와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고 기동을 할 수 없었으나
투지를 잃지 않고 계속 전황을 보고 받으며 부하들을 격려하고, 사실상의 전투지휘를
하고 있었다. 중상을 입은 장교들이 자신의 상처를 돌보지 않고 보여주는 불굴의 투지는
모든 병사에게 실병 지휘보다 더 견고한 필승의 신념을 주고 있는 것이다.
소대장을 대신하여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병사들에게 전황을 알리고,
중대장으로서 최후까지 중대진지를 사수할 것을 선언하고 다녔다.

병사들이 갖추어야 할 전투복장을 완전히 갖추게 하고 난 뒤 자신을 살펴보니까
나는 아직도 반라이다. 나의 상의와 내의는 전우의 지혈을 위하여 찢긴지 이미 오래다.
중대지휘소에 돌아와 보니까 화기소대장은 각 소대의 정면에 화력을 배분하노라 바빴다.

포병 관측장교로서, 방어전투에 그 동안 특훈의 공을 세운 '한광덕' 중위는
각 소대에서 들어오는 사격요청에 대하여 정확한 제원을 산출하여 포대에 사격요구를
하는데 바빴다. 전투는 이와 같이 각자 자기의 소임을 충실하게 그리고 용감하게 수행
하는 장병들의 노고에 의해서 질서를 되찾아 가며 수행되고 있었다.
박격포탄이 우리의 진지 위에서 작렬할 때와는 달리 퍽 질서 있게 유기적인 협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화력의 우세를 장악하게 되자 장병의 사기와 전의는 충천하였다.
적의 총공세가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각 산병호에 충분한 수류탄을 준비하고
근접전투에 대비 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도록 지시하고 기다린지는 그럭저럭 1시간이
되는 듯한데, 적의 전면적인 공세는 의외로 시작되지 않고 있었다.

보병, 포병, 기갑병의 숙련된 협동 방어에 그들은 완전히 제압된 것인가?
사계와 시계가 어느 지역보다도 양호한 제2소대 지역으로만 계속 공격하여 온다면
적은 지금까지의 실패를 되풀이할 것임에 틀림없으나, 제1소대 지역으로 공격 방향이
옮겨지면 지표물이 무성하고 시계가 제한되어, 근접전투는 불가피할 것이다.

더구나 지금까지 적이 퍼부은 화력과 총탄의 밀도로 부아 적은 압도적인 병력임에 틀림
없는데, 이러한 대병력이 근접전투를 감행하여 올 경우 제1소대 지역에서는 돌파 당할
가능성이 짙어 보인다. 평소에도 이와 같은 것을 고려하여 전차와 중화기 등을 이 지역에
중점 배치하기는 하였으나 적은 다행히도 초반전에 주공을 이곳으로 돌리지 않았다.



계속 제1소대 지역의 전방 상황에 대하여 촉각을 돋우고 적의 동정을 살폈다.
그런 가운데 포병 관측장교에게서 포대의 탄약의 예비량이 넉넉지 않아서 포탄을 절약
해달라는 전갈이 있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우리가 화력의 우세를 가지지 못하면,
뒤에 오는 사태는 뻔한 것이 아닌가? 상황은 낙관할 수 없는 요소들을 안은 채
자정에 육박하였다.

이윽고 중대진지 상공에 항공기 2대가 날아와서 공중조명을 대낮과 같이 해주었다.
중대의 박격포도 항공의 조명지원을 받고 일제히 조명탄 발사를 중지하고
인명살상용 고폭탄으로 전환하였다.

대대에서는 제10중대와 제11중대의 출동을 알려 주었다. 모든 병사들에게 인접중대의
출동과 아군의 광범위한 지원을 알리면서 상급부대 및 지원부대의 고마운 협조에 감격을
금치 못하였다. 그런데 별안간 우리 81mm 박격포 탄약고 위에 포탄이 떨어졌다.
전 중대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알고 보니 미군의 지원부대에서 실수한 것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반석 같은 신념을 굳게 하고 제2소대 전방에서 감행해 오는
인해전술의 파상공격은 이제 자신만만하게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공격이 시도 될 적마다 포병화력의 지원을 받으면서 무전병들은 중대의 60mm, 81mm
박격포에 사격 요청을 하여 포병화력의 구멍을 빈틈없이 메워 나갔다.
소총의 사격은 견적필살의 정확성을 가지고 파도같이 밀려 닥치는 적병을 그물로 뒤덮어
한 걸음도 전지하지 못하게 저지하였다.

반라의 살갗에 새벽바람이 한결 시원하게 느껴질 무렵 처음으로 담배를 찾은 나는
밤이 새고 승리가 확인될 때까지 4갑을 피워버렸다. 연발하는 소총소리, 부상자들까지
총동원되어 결사적인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병사들의 가쁜 숨결소리, 이따금
모든 소음을 진압할 듯이 천지를 진동하는 포병의 포효에 나의 비장했던 생각들은 감격과
흥분으로 변하고 있었다.

내가 걱정했던 제1소대와 제3소대 정면에는 아직도 뚜렷한 공격의 징후가 보이지 않고
결국 적은 제2소대 전방에서 파상공격을 가하다가 말 것인지도 모른다는 낙관적인 생각도
들었다. 낙관적인 생각을 하게 된 근거는 대체로 2~3시에서부터 적의 소화기 사격이
머리를 숙인 듯 했고, 전반적인 정세가 우리의 성공적인 방어로 기울어지는 듯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상처로 오랫동안 신음하던 '강세호' 대위가 위생병의 헌신적 가료의 효력도 외면하고
숨졌다. 중대장 근무도 해보지 못한 채 부임 4일만에 그는 오랜 군대생활을 죽음으로서
청산한 것이다. 이윽고 제2소대 전방에서 그 동안 잠잠하였던 파상공격이 다시 감행
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병력이 많고 4번이나 끈덕지게 되풀이된 이 공격은
최초의 파상공격에 다음가는 규모였다.



여명을 약 2시간 앞두고 다시 적극적인 공세로 나오는 듯 하였으나 제2소대 전방에서 공
격이 시도되는 한에 있어서 여전히 적은 침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제2소대에서는 그 동안 4회의 파상공격을 받고 이제 다섯번째를 맞이하여 능숙한 솜씨로
적을 진지전방에서 완강하게 저지하였다. 4시 좀 지나서 돌연 제2소대 전방에서
우리의 원형 철조망을 작대기로 누르고 철조망을 넘어 적이 일제 돌격을 개시하고 있다는
무전보고 가 숨가쁘게 들려왔다.

313화집점에서 사거리를 줄이고 줄여서 중대전술기지의 근접지점까지 포탄을 유도해 온
'한광덕' 중위에게 나는 줄이기 50을 더하여 빨리 우리의 진지에 접근하는 적 병력에
대하여 사격을 하도록 요청했다. 아군에 피해가 있을 것이 두려워 주춤하면서도
아군의 피해가 있더라도 돌격을 분산하여야만 한다는 요구에 그는 엄밀한 사격제원을
산출하여 포대에 하달하였다.

새로운 제원으로 날아온 포탄은 우리의 경기관총 진지와 전차의 바로 5m 앞에 떨어졌다.
이어 포대 10발(6문의 포가 10발씩 발사하는 것임), 즉 60발의 포탄이 순식간에 날아와
최후의 돌격을 분산시키는데 성공하는 것을 보고, 우리 포술의 정확함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포병사격이 멈춰지자 우리의 용감한 병사들은 일제히 호에서 전방으로 돌진하여
분산된 적의 병력을 백병전으로써 무찔러서 우리의 자랑스러운 방어 전투의 대단원을
찬란하게 장식하였다.

그 뒤에는 더 이상의 병력투입은 없었고 경미한 소화기사격이 가해졌을 뿐이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철수하는 것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뒤에 밝혀졌다.
드디어 적이 공격방향을 바꾸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기우에 그치고, 그들은 부상자와
시체를 인양하면서 서서히 병력을 철수하기 시작하여 아침 6시에 총성이 완전히 멎었다.
이렇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억을 더듬으며 적어보니 기억에 남아 있으면서도
시간적 좌표를 잃은 사실들이 더러 있다.

한때 중대가 보유하고 있는 조명탄이 동이 나게 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야간 방어 전투에 있어서 조명탄이 동이 난다면 이것은 중대 운명이 그대로 캄캄한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다. 조명지원을 요청하는 나는 조급한 생각에 몰려서
전차 1개 소대의 증원도 함께 요청하였다. 항공기에 의한 조명이 있기 전에 있었던 일
임에는 틀림없으나 참으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순간이 지나간 것이다.

전차 1개 소대의 증원은 병사들의 사기를 고무시키고 전차가 가지는 강력한 화력에
도움을 받자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한 때 전차로 하여금
충격행동을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야음에 전차를 정글 속으로 들여보낸다는 것은 자살행위로 판단되었다.
미군측에서 나의 허가를 요청해 왔으나 이것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이런 일은 적의 공격이 수그러질 때 퇴각하는 적에 대하여 전과확대를 위하여
취할 수 있는 일이지만 주위의 지형이 전차가 기동하는데 매우 불리하고
적의 상황이 도대체 관측되지 않은 야간 전투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적을 격퇴하는데 방어전투의 주목적이 있고, 더구나 야간방어에 있어서는
역습이 용이하지 않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모든 일들은 나에게는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마음속에 떠오른 표상들과 밖에서 일어난 일들이 완전히 혼동되어 분간하기 어렵다.
나와 나의 부하들의 행동을 모두 하나로 수렴하여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날이 새니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목이 쉬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전장을 정리하고 전과를 확대하기 위하여 최초로 도착한 예비대 제11중대가
제2소대의 우측에 와서 무전연락을 해주었다. 우리 중대가 승리한 것이다.
역습 준비를 위하여 야간에 우리의 근처에 와 있던 제11중대는 이제 우리의 승리를
확인하기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제 부상자와 전사자를 안전한 곳에 옮기도록 지시하고 제11중대가 수색하는 전방을
홀가분한 마음으로 관측하였다.

수풀과 정글에 묻혀 있던 적 부상병들이 전진하는 우리 제11중대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최후 발악을 하고 있었다. 제11중대의 전진을 잠시 멈추게 하고, 우리의 전차 2대를
앞세우고 보전협동으로 패잔병을 소탕하기 시작하였다.
그 지휘를 제11중대장에게 위임하고 다시 중대기지로 돌아와서 부상병들과
전우의 시체를 한자리에서 대하게 되었다.

제1소대장 '고건영' 중위와 제2소대장 '이춘식' 중위가 흐느끼면서
“중대장님! 전투는 이겼습니다! 전과는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지휘관으로서
병사들 앞에서 청동과 같은 냉엄과 엄숙을 가장하여 온 나는 그만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6구의 시체 앞에 손 모아 선 나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못하였다.
오늘의 이 빛나는 승리를 무언중에 보고하고 유명을 달리한 전우들 영전에 명복을 빌었다.
부상자는 42명이나 되었다. 중상자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은 모두 최후까지 전투에 참가
하여 오늘의 전투에서 가장 영웅적인 투지를 보여 준 전우들이었다.

최초 보고된 손실보다는 훨씬 적은 인원이었다. 소대에서는 포탄 하나라도 더 지원 받기
위하여 처음 손실보고를 과장하겠다는 말이었다. 끝까지 건투하여 준 나머지 전우들은
전날의 고된 행군과 철야 전투에도 불구하고 피로의 빛을 전혀 띠지 않고 있었다.
의욕에 찬 눈빛으로 어느 때보다도 민첩하게 그리고 자발적으로 전장정리를 하고 있었다.
누가 지휘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지시한 것도 아닌 일을 자발적으로 말없이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중대장도 소대장도 필요 없는 것이다. 모두 중대장이며, 소대장이었다.
그들은 민족의 영웅이요 조국의 간성이다. 나는 전투간에도 중대장으로서 전투지휘를
한 것이 아니다. 일단 전장이 열리자 각개 병사는 여하한 자도 관여할 수 없는 초인간적인
용기와 지략으로써 자기의 소임을 다하여 나왔다. 나는 그저 분투하는 그들의 뒤를
따르면서 최후까지 그들의 대열을 등지지 않을 것을 밝히는 것으로써 족하였다.
반라로 그들 사이에 섞인 나는 하나의 필부에 불과하였다.

 병사들의 용전감투를 치하하는 나에게 어떤 병사가
“이 전투는 중대장님이 건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적들이 걸어 온 싸움이기 때문에 그들은 용감하게 싸운 것이다.”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평화를 애호하는 민족이다.
그러나 외적이 일단 우리의 국토를 침범하면 우리의 조상들은 과감무쌍하게 싸웠었다.
우리 민족은 방어에 강한 민족인지도 모른다. 남에게 싸움을 거는 싸움에는 강하지
못하나 남이 걸어 온 싸움에는 용감하게 저항하는 것이다.



전황분석을 해 봤을때 나중에 포로신문에 의해서 밝혀진 그들의 공격계획과
우리가 직접 답사한 결과를 종합해서 적의 의도를 살펴보면,
적은 우리가 7월 9일에 이곳에 옮긴 후 계속 정찰하여, 근 1개월 동안 우리의 동태를
파악하여 왔다. 이 정찰대는 캄보디아 국경선에 있는 월맹 정규군의 내륙침투를 안내
하는 일을 맡고 있는 정차대로서 월맹으로부터 남하 침투한 월맹군 제88연대를 유도하여
은밀히 화집점 313에 이날 밤 7시 30분에 집결하였다.

우리의 중대기지를 공격한 적은 제88연대 제1대대와 제2대대의 2개 대대 병력에다가
공병 1개대대가 증강된 것이었다. 적은 최초 집결지에 박격포 진지를 선정하고
주공격 목표를 제2소대 정면에 돌리고 제1소대와 제3소대의 세방향에서 일제히 공격할
계획이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이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그들이 가설한 통신선이
박격포 진지에서 주공방향으로 가설이 완료되었고 제1소대와 제3소대 정면으로 끌고
나가는 도중에서 아군의 공격을 받고 중단한 것을 목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초에 우리가 적을 발견하고 일제사격을 할 때에는 제1소대와 제3소대 지역에는
적의 병력이 배치 완료되지 못하였음이 분명하였다. 따라서 적이 최초 계획했던
공격 개시시간은 자정이 훨씬 지난 밤 3시경이나 여명이었을 것이고 이렇게 되면
우리 중대의 운명은 아마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밤 11시라는 시각은 우리가 즉각 전투태세를 갖출 수 있고 지원부대의 신속한
화력지원을 바랄 수 있는 최후의 시각이라 할 것이다. 일단 잠이 든 후에는
동원도 느리거니와 자정을 넘어서면 경계도 전날의 피로 때문에 소홀하여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지 때문이다.

적의 책동이 우리의 청음초에 의해서 발각되고 탐조등에 의해서 포착되자
적은 당초의 계획을 추진하지 못하고 제2소대 지역에서만 공격을 감행해 온 것이다.
중대의 측면으로 이동하던 적은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다가 지휘통신망도 두절된 상태
였으며, 소총병에 의한 총격을 가하다가 이윽고 날아오기 시작한 아군 포병의 화력에
교란되어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것 같다. 제10중대가 제11중대와 같이 우리 중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출동했다가 박격포를 들고 도주하는 것을 생포하였는데 이것은
아군 포병화력의 효과를 증명하는 사례라 하겠다.

여러 가지 뉘우치는 점이 많은 가운데 내가 특히 전투의 전 기간을 통하여,  
참회를 금치 못하는 일은 적의 공격할 징후를 여러 차례 무시한 것이다.
변명 같지만 처음에 보고 되었을 때 내가 어떤 조치를 취한다 해도 무턱대로 병사들을
비상동원하지 않고 탐조등을 비추어서 전방의 상황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그러면 결과는 결국 유사한 것이 될 것이다.
조명지뢰가 터지고 또는 땅파는 소리가 났을 때 병사들을 비상 동원하여 전투태세를 갖춘
뒤에 탐조등을 비추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언제나 비판받을 용의가 있다.



적은 예기치 않은데서 오는 것이었다. 물론 야간 공격이니까 전면이 개활지로 되어 있는
제2소대 지역으로 공격할 수 있을지 모르나 내가 보기에는 제1소대 지역이 언제나
적의 가능 접근로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주요 화력을 이곳에 지향시켜 두었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적의 공격 방향이 제2소대 지역이었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된다.

적의 돌진을 소화기로써 저지할 수 있을 만큼 전망이 좋고 관측할 수 있는 거리가
멀어서 중대에서 보유하고 있는 화력을 적게 배치했던 결함을 능히 포병사격으로써
보충할 수 있었다. 이러한 포병사격이 유효 적저하게 이용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대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병사가 포병사격을 요청할 수 있었다는데 힘입은 바 크다.
결국 상급부대와 지원부대의 협조적인 지원과 각개 병사의 영웅적인 투쟁이 승리를
가져오게 한 것임은 누차 강조된 바 있다.

초반전에 있어서 적의 박격포 공격이 치열했을 때 중대의 희생이 그 정도에 그친 것은
참으로 야전축성을 위하여 평소에 흘린 땀이 유혈을 덜게 한 것으로서 우리 한국군이
가지는 장점이라 하겠다. 미군 여단장이 중대를 방문하고 핀잔을 던지고 간 것은 이미
언급되었거니와 교통호와 벙커에서 우기에 두더지처럼 생활하는 것은 어쩌면
미군들로서는 생각만 하여도 지긋지긋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 지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이 되었지만 견디기 어려운 생활을 인내하여
우리는 결국 승리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승리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을 역시 장거리 행군으로 피로함에도 불구하고
청음초 경계병의 철저한 근무에서 찾아야할 것이다. 그때 그 순간을 우리 경계병이
포착하지 못하였다면, 우리 제9중대는 한 사람도 살지 못하였을 것이다.
지금도 생각하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일은 저녁때면 가까이에 있는 개울에서
소대별로 목욕시키는 것이 관례가 되어있었다.

그래서 '고건영' 중위가 이날 저녁에도 소대를 인솔하여 목욕하러 가게 해달라고 했으나,
피로가 나의 경계심을 자극하여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일체 진지를 이탈하는 일이
없도록 각 소대에 강력히 지시하였다. 피곤할 때 목욕을 시키고 잠을 잘 재워야 한다는
생각보다도 이로 인한 분위기 해이가 더 두려워서이다.
또한 뚜렷한 이유도 없이, 다만 육감이 이상했고, 대원들의 뒤를 생각해서 그랬을 것이다.
만약 목욕을 허락했다면, 상황은 180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 결과는 상상에 맡긴다.

우기철인데도 희한하게 이날만은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구름 사이의 별이 보였으니
그야말로 천우신조였다. 따라서 조명과 포격의 효과가 증대되고, 사격이 신속 정확했다.
또한 우중에 실수하기 쉬운 근탄(近彈), 낙오탄(落伍彈)이 전혀 없었고, 관측과 사계가
양호하여 과력의 우세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지에 이동하자 대원 전원이 화력 계획을 숙지하도록 교육하고,
지원 포병의 화력 요청 요령과 탄착점의 수정 방법을 교육하게 하였다.
관측 장교 '한광덕' 중위가 교육을 건의하였기 때문에 그의 주도하에 교육하였다.

당시 적의 주공이 서측으로부터 남서쪽으로 전이할 것으로 보았는데 그것은 착오였다.
그 이유는 제2소대의 '이종세' 중사는 P-10으로 계속 보고하는데, 경기관총 소대의
'이대일' 중사에게는 무전기가 없었기 때문에 적정 파악에 차질이 있었으며,
또 남서쪽은 지형상 공격자가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이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두코 기지는 중대 전술기지로서 약간 좁은 편이었다.

더욱이 전차 등 추가 병력이 증강되었기 때문에 적이 박격포를 집중할 초기에는
그만큼 손실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진지를 보강한 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적의 직격탄에도 견딜 수 있었다. 부하들을 너무 혹사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잠복근무를 거부하고 피로할 때일수록 더욱 경계를 철저히 하여야 한다는 나의 소신이
언제 생각해 보아도 그릇되지 않는 것 같다.

지시와 명령이라고는 하나 처벌을 받더라도 자기의 소신대로 버티어 볼만한 경우에는
버티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대원과 같이 행군한 중대장이 가장 병사의 상태를
잘 알 수 있고 병사들이 잠복하러 나가서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겠는가에 대한
가장 정확한 판단은 하급 지휘관을 신뢰하여 위임하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상급부대 지휘관의 결심을 기다려서 하여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크게 수정
되어야할 것이다.

각급 지휘관은 자기의 주체적 결단의 한계를 명백하게 긋고, 그 범위 안에서 책임을 져야
될 것임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잠복근무를 나가지 않은 것은 병사들의 신체
조건을 신중히 감안하고 내린 지휘관으로서의 권한 발동이라고 지금도 확신하고 있다.
우리는 승리를 위하여 일보후퇴도 할 수 있어야 하고 일보후퇴가 중대의 전투지경선
내에서라면 중대장의 권한에 속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전투는 결국 병사들이 하는 것이다. 병사의 역량은 민족의 역량이오,
병사의 승리는 민족의 승리이다. 크게 보면 정글전투에 있어서도 우연은 없다.
평소에 뿌려지는 좋은 씨는 선과를 맺고 나쁜 씨는 악과를 맺는다.
평소의 노력 없이 우연히 승리가 주어지지는 않는다.
그동안의 겨레의 성원과 파월 군인 가족 여러분의 절대적인 격려로 우리 병사들은
상승의 가두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 총력이 병사들에게 직결되어 있는 한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

또 한가지는 교전간에 미군 155mm포병대에서 발사한 포탄 1발이 81mm 박격포 탄약고
바로 옆에서 작렬했는데, 그것이 10cm만 우측에 떨어졌다면, 탄약고가 폭발하여
적지 않은 손실이 발생하였을 것이다. 또한 이로 말미암은 혼선은 컷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Duc Co 전투의 승리는 평소 연마한 전기와 불굴의 투지와 중대장을 중심
으로 굳게 단결하여 생사를 걸고 싸운 결정체이다.

2.제61포병대대 C포대 관측장교 한 광 덕

□ 증언 내용
 - 두코 전투의 상황 및 경과
 - 전투 교훈 및 성공 요인
 - 1967년 11월 30일. 화랑의 십자군 수록내용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편집정리



맹호기갑연대 제9중대는 1966년 7월 9일 빈케(BinhKhe)로부터
두코(Duc Co)지역으로 이동 후 최초에는 대대의 예비로 제3대대 본부와 같이
위치하다가 7월 27일 제11중대와 진지를 교대하였으며, 이후 한 달이 지나는 동안
적과의 실제접촉은 없었다. 진지교대 후 제9중대(중대장 대위 이춘근)는
중대기지 내의 교통호와 벙커 보강작업을 실시하였으며, 1개소대는 야간의
매목을 위해 주간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관측장교는 제11중대 관측장교로부터 인계 받은 방어 화집점의 위치를 확인 및
조정하였으며, 그 후 2~3일에 한번 씩 전 병력을 전투진지에 투입한 후
방어 화집점에 대한 점검사격을 실시하여 중대원들이 방어 화집점에 대한 위치를
숙지케하고 분대장급 이상이 화집점을 기준으로 하여 사탄을 유도하거나
상황을 보고하게 하는 포병의 관측교육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1966년 8월 8일 제9중대는 대대로부터 월남과 캄보디아의 국경선을 연하는
지역 일대에 월맹군의 사단지휘소와 탄약고 및 쌀 저장고가 있다는 첩보를 부여받고,
중대 전투정찰을 위해 아침 8시 30분에 중대기지를 출발했다. 전 중대원은 모두들
단단한 각오를 해야했으며, 어제(8월 7일) 새로 부임한 신임 중대장 '강세호' 대위도
행동을 같이 했다.

전투정찰간 고무나무 정글 속에는 적의 활동흔적이 있는 소로가 있었으나
적의 부비트랩이나 매복을 피하라는 중대장의 지시로 중대는 이동흔적을 피해
새로운 길을 뚫으며 나갔다. 하늘을 가리는 정글과 비에 젖은 진흙은 병사들의
기동을 느리게 만들었으며, 정글지역에서의 독도와 방향 유지는 그 동안 연마했던
독도법 실력을 무색케 만들었다.



정글속에서는 연막탄의 육안관측이 불가함으로 지도상의 자기 위치확인은
2개의 기지지점에 대한 HE탄의 음향관측에 의한 역 표정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적의 매복과 부비트랩을 거부하고 동시에 목표를 향한 방향유지의 방법으로
이동하는 전방과 좌우 측방의 의심지역에 대한 요란 및 저지사격을 실시하면서
제9중대의 기동을 지원했다.

이동 도중 의심지역에 대한 포사격으로 2개 지점(YA797, 136 YA808, 139)에서
적들이 피를 흘리고 급히 도망간 흔적도 발견할 수 있었다.
전 중대원은 극도의 긴장과 피로 속에서 오후 5시경에 잠복지점(YA797, 129)에
무사히 전개할 수 있었으며, 나는 주둔지 편성개념에 따라서
네 개의 방어 화집점을 선정하여 점검사격을 준비중이었는데,
이때 서북방 약 500m 떨어진 방향에서 월남 말이 확성기를 타고 들려왔다.

나는 의심지역에 대한 최초 사격요구를 내렸고, 중대장은 동시에 대대 S-2에게
미군 항공기의 대적 방송이 있었는가를 문의했다.
잠시 후 대대로부터 그런 일이 없었으니 경계를 철저히 하라는 통보를 받자,
나는 월남 말이 들려온 의심지역 일대에 120여 발의 포탄을 퍼부었고
그 동안 중대장은 매복위치가 노출된 것으로 판단하고 새로운 지역으로의
이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 때 다시 대대로부터 미군 심리전반의 항공기 대적방송이 지역에서 실시되었다는
정보가 무전으로 통보되자 우리는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으며,
날도 차츰 어두워지기 시작함으로 중대는 매복지점을 변경하지 않기로 하고
나는 계획된 방어 화집점에 대한 점검사격(CHECK-ROUND)을 완료했다.
월남의 캄보디아 국경선지역에 진을 치고 이름도 모르는 동물들의 울음소리를
듣는 야릇한 감회 속에서 지루한 시간이 흘러갔다.

이어서 8월 9일 05:00경 어둠이 걷히자, 간단한 식사를 끝내고 중대는
매복지점을 은밀히 이탈, 목표를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
중대장이 특히 강조한 것은 적의 매복에 대한 사전제압이었으므로
국경선과 병행하여 이동간에는 주로 전방에 대한 요란 및 저지 사격을 실시했다.
 좌측방향인 캄보디아 국경선을 넘는 포사격은 국제법에 위반되기 때문에
중대는 의심지역의 수색보다는 부대의 안전을 위주로 빠른 전진속도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었다.

적과의 접촉 없이 목표지역을 벗어나자 어제와 동일한 개념으로 가급적 기존의
소로가 아닌 험준한 지형을 따라 중대 기지로의 행군을 계속했다.
15:00경 중대는 무사히 기지로 복귀하고 병사들은 장비 수입과 목욕을 실시하였다.
저녁 식사를 마친 장교들은 한자리에 모여 국경선까지의 수색정찰로부터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환담을 즐기고 있었다.



제2소대장 이춘식 중위가 “신,구 중대장의 환영 및 송별파티는 국경선의 정글지대에서
역사적으로 끝났다”고 하자 나는 새로 부임한 임복만(林福萬) 중위의 이름을 풀이하며
“숲 속에 복이 많으니, 파티에 참석했던 전원이 복을 맏을 것”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21:00경에 우리는 모두 헤어져 각자의 취침호로 돌아갔다.

월남 도착이후 중대장과 관측장교는 침식을 같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 왔으나
두분 중대장의 업무인수인계를 위해 자리를 신임중대장에게 양보하고,
나는 관측반 병사들의 호로 갔다. 자리에 누워 ‘김찬삼의 끝없는 여로’를 읽다가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시간은 대략 10:00시경이었을 것으로 생각 된다.

중대 관측호에서는 신임 중대장 강세호 대위와 내일 모레면 중대장직을 마치고
고국으로 귀국하게 될 이춘근 대위와의 옛이야기가 한참이었다.
강대위는 21세의 아가씨와 결혼한 지 4개월만에 월남에 도착했고, 이제 곧 귀국할
이 대위는 아직 노총각의 탈을 벗지 않은지라 이야기는 꼬리를 물 수밖에 없었으리라.

중대기지의 경계책임은 매복을 나가지 않는 화기소대장의 몫으로, 22:00시경
기지 순찰을 돌고 있던 임 중위는 57mm 무반동총반 병사로부터
멀리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린다는 보고를 접하고 즉시 중대장에게 보고했다.
1박 2일의 수색정찰로부터 별 상황 없이 복귀한 직후에다가 월남 신참장교의 보고
인지라 중대장은 큰 비중을 두지 않고 계속 관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계속 순찰을 돌던 임 중위는 동일지역에서 땅을 파는 쇠붙이의 마찰음을 확인하고
그 사실을 다시 중대장에게 보고하였다. 평상시 진지 외곽의 의심스런 상황을 확인
할 때는 중대에 작전통제 되어 있던 미군의 전차 소대장에게 전화로 전차의 탐조등을
비추게 하는 협조업무는 관측장교의 몫이었는데, 임 중위로 하여금 직접 5번 탱크에 가서
소리가 나는 지역에 대해 탐조등을 비추도록 지시했다.

탱크가 탐조등을 켜기 위해서는 먼저 시동을 걸어야 하는데, 전차의 시동소리와 함께
중대외곽에 매설되었던 조명 지뢰 1발이 터지면서 누군가가 사격을 개시하고
그 순간부터 총성이 삽시간에 10배 100배로 확대되었다.
갑작스러운 총성에 잠을 깬 나는 무전병에게 따라 오라는 지시를 하고
취침호를 박차고 나갔다. 중대 기지의 서쪽 방향에서 시작된 총성은 삽시간에
10배로 커지고 다시 100배로 커졌다.



나는 중대장 관측호에 연결된 교통호에 이르자 직전방에서의 요란한 폭음과 함께 
뒤로 굴렀다. 전신이 화끈하는 순간 눈도 뜰 수가 없었고 무엇인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적의 각동 화기의 사격과 함께 박격포의 공격준비 사격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때 관측호 안에서 나를 찾는 이춘근 중대장의 음성이 들렸다.
“한 중위! 한 중위!” 정신을 차린 나는 엉금엉금 길 수 있었다.

관측호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눈에 보이는 무전기를 본능적으로 움켜쥐었다.
“호남선(3대대장 호출부호) 여기는 만리포(제9중대장 호출 부호) 관측장교,
호남선은 포병 무전병을 바꾸라!. 
넷둘 사격임무 송신한다. 화집점 AB 311, 방위각 4260,
사격중인 적 박격포, 포대 10발!”
나는 중대장의 3대대 보병 지휘망으로 최초사격요구를 했던 것이다.

보병 제3대대(대대장 중령 최병수)와 제61포병대대 C포대(포대장 김진규 대위)는
상황실을 함께 쓰고 있었음으로 나는 상대방을 확인하는 절차도 없이
무전기를 움켜 쥔 채 계속해서
“화집점 AB 311에 포대 10발”을 복창할 수밖에 없었다.
조정임무 없이 최초부터 10발을 요구했던 것은 다량의 포탄을 까 놓으라는 절규였으며
그 음성은 아마도 지옥에서 보내는 울부짖음이었을 것이다.

피아간에 교차되는 각종화기의 총성과 고막을 찢는 적 박격포탄의 낙탄 속에서
중대장과의 대화는 불가능했으며 필요하지도 않았다. 각자는 각자의 판단에 따라
본능적인 반응만이 있을 뿐이었다. 중대의 전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기습을 받게되면 누가 누구의 지시를 받고 행동하는 평상시의 여유는
있을 수 없었다.

이때 1발의 박격포탄이 중대 관측호의 지붕에 명중되면서 벙커 내의 전화교환대
아답타가 깨지고 중대장 전령이 비명을 지른다. 적은 박격포의 공격준비 사격을
하는 것이 분명했으며 나는 몸둘 곳을 몰랐다. 중대장이 쓰고 있는 철모가 그렇게도
부러워 보일 수가 없었으며 방탄복조차 입지 못한 나는 벙켜 내에서 목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가 나오는 웃지 못할 행동을 수차 반복했음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다.

육사를 나온 장교가 이러면 안 되지 하면거 속으로 꾸짖는데 무전기를 통해
중대장을 바꾸라는 제3대대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대꾸할 겨를도 없이 
무전기 키를 움켜진 채 최초에 하달한 사격요구를 반복할 수 밖에 없었다.
“넷둘 사격임무, 화집점 AB 311, 방위각 4360, 사격중인 적의 박격포, 포대 10발!”
...일각이 여삼추인데 무전기를 타고 ‘넷둘 떳다!’가 들린다.



숨막히는 초조 끝에 ‘휙’하고 미리 위를 나르는 포탄소리와 함께 목표상에 터지는
105mm 포탄의 파열음은 그 자체가 기쁨의 전부였다.
기쁨은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주었고 나는 화집점 AB311에 포대 4~5발의
낙탄이 있은 후부터 전후 좌우로 수정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우리 105mm 포탄이
계속 터지면서 적 박격포탄의 낙탄은 현저히 줄어드는 것으로 느꺼졌다.

마음의 여유를 찾으며 나는 적의 주공이 화집점 AB 311 방향이라는 직감에서
이 사실을 포대 FDC에 통보하고 155mm로 하여금 그 후방에 대한 차단 사격을 요청했다.
“만리포 여기는 호남선. 관측장교는 즉시 중대장을 바꾸라”는 대대장의 육성에도
중대장은 무전기를 요구할 수 없었으며 나는 직접 응답을 피하고

“호남선 대기하라. 여기는 만리포 관측 장교다” “수정한다.
지금 떨어지는 지점으로부터 좌로 150, 동 거리 포대 3발 효력사!
지금 사격한 지점으로부터 우로 50 줄이기 50 포대 3발 효력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넷둘, 여기는 넷칠, 넷둘은 포병방으로 나오라, 그리고 중대장을 바꾸라. 이상”
나의 직속상관이 김진규 포대장의 육성지시에도 나는 “넷둘 무전병은 부상이다.
고로 포병망으로 나갈 수 없다!”로 응신하면서 잠시도 포병사격을 중단할 수 없었다.

이때 죽은 줄만 알았던 무전병이 무전기를 안고 관측호로 뛰어 들어왔으며
죽었던 무전병이 살아온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은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중대장에게 보병 지휘망을 인계하고 비로소 포병무전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무전기를 들고 뒤를 따라나오던 김진선 병장은 앞을 섰던 4.2˝ 박격포 관측병 2명이
적 박격포탄에 부상을 당하는 통에 취침호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105mm 관측 하사 박제영이 김 병장의 무전기로 최초사격요구를 했었는데,
그 요구지점이 관측장교와 일치함으로써 포병 제61대대 C포대의 제1탄이
3분이내에 목표에 도달하는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것이다.
급작스러운 총성과 함께 상황파악을 위해 먼저 관측호 밖으로 나오던 신임중대장
'강세호' 대위는 떨어지는 첫번째 포탄에 중상을 입고 교통호에 쓰러졌었는데
나는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적 박격포가 고개를 숙이면서 중대장호로 접근하던 화기 소대장 임 중위가
신임중대장을 발견하여 관측호 안으로 안고 들어올 때까지
벙커 내의 인원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를 정도로 숨가쁜 시간이 흘렀던 것이다.
교통호에 떨어졌던 낙탄이 나와는 불과 3~4m의 거리였음으로 그는 아마도
나의 희생을 대리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적의 박격포 공격준비사격은 아군의 지휘기능을 마비시켰고 소대를 통한
상황의 파악은 어려웠다. 강세호 대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1소대장 '고건영' 중위와
제2소대장 '이춘식' 중위도 취침호로부터 밖으로 나오다가 부상을 당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진내에 떨어진 적의 포탄은 차후 170여 발로 확인됐으며
우리의 전사자 7명과 40여명의 중경상자도 90%가 박격포에 의한 희생이었던 것이다.

진지교대 후 계속했던 벙커의 보강작업이 없었다면, 우리의 피해는 실로 컸을 것이다.
복부에 중상을 입은 강세호 대위는 위생병의 응급치료를 받으며 목침대 위에 눕혀져
있었고, 나는 중대장의 부상 부위를 확인할 겨를조차 없었다.
이때 제3소대 무전병으로부터 제3소대 좌전방 독립수 근처에서 자동화기의 사격이
날아온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적은 일방(서쪽)에서의 공격이 아니라
남쪽과 북쪽에서 양익 포위를 하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한 중위, 이 자식들 포위를 시도하는 모양이야!” 중대장은 그의 판단을 관측장교에 알리며
“만리포 하나, 둘, 셋, 넷 여기는 만리포장이다.
적의 공격이 어디서 나올지 모르니까 자기 정면을 철저히 관측하라 이상”
소대장과 통하는 중대장의 목소리가 내 귀에도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북쪽에서 접근하는 포위부대를 때리기 위해 주공의 후방을 사격하던
155mm 포대(제628 포병대대 C포대장 김근식 대위)에 좌표 YA823 162, 방위각
6400에 조정임무 요청 후 첫탄이 뜨자, 우로 100 줄이기 200 효력사 포대 1발을
요청했고 105mm에 대해서는 좌로 150 동 거리 포대 3발을 요청했다.

155mm는 포목선 관계로 많은 파편이 진내로 튀어 들어옴으로 충분한 지근거리
사격을 못하고 더하기 50을 해서 좌우탄을 내고 있었다. 이때 다시 AB 311 근처의
바나나 숲에서 사격이 날아온다는 제2소대의 보고가 있어 105mm를 다시 AB 311로
지향하여 포대 3발을 때린 후 좌우 원근의 수정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이때 C포대장
(대위 김진규)으로부터 장차 임무를 위해 포탄을 절약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포대 5발은 2발로 그리고 다시 1발로 줄이고 있는데, 지금부터 미군 105mm가 가용하니
직접 조정하라는 C포대장의 지시와 함께 적의 철수와 증원차단을 위해
미군의 8인치와 175mm 포가 원거리 차단사격을 실시하고 있음을 알려왔다.
멀리서 터지는 8인치 및 175mm의 포성 속에서 미군을 포함한 3개 포대의 포탄이
거의 동시에 진지외곽에서 터질 때에는 도대체 어느 포대가 어디를 때리는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때에는 3개 포대에 대해 사격중지를 요청하고,
1개 포대씩 조정을 다시 하곤 했는데 제628대대 C포대(155mm)는 중대 남쪽전면의
기지 외곽으로부터 약 200m까지 유도하고 미군 포대(105mm)는 기지북방 외곽으로부터
100m까지, 그리고 가장 자신을 각고 유도할 수 있는 제61대대 C포대(105mm)는
AB 311을 중심으로 한 개활지와 그 전후방 일대에 포대 1~2발씩 지근사격을 시도했다.

제2소대 전면에 낙탄 중인 155mm는 차츰 우로 이동을 시켜 제2소대 우전방 독립수
좌단 일대를 제압함으로써 남쪽으로 포위하려는 적의 기동로를 차단하고 미군 105mm는
북쪽으로 포위하려는 기동로를 차단하기 위해 산발적으로 포사격을 유지했다.
적 박격포의 진내 낙탄이 줄어들면서 침묵하던 중대의 60mm 박격포가 포문을
열기 시작하고 중대장은 자주 소대지역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그 때까지 대대장과의 직접교신 내용은 주로 중대의 피해보고로서 중대장 1명 부상
소대장 2명 부상과 함께 사망 대 부상을 대략 1:3으로 하여 끝에 가서는
중대의 반 이상이 부상을 당했으니, 증원병을 보내달라는 요구로 이어지고 있었다.
밤 1시가 지났을까? 시계를 본적은 없었음으로 당시 상황에 따른 시간개념은 없었는데
FDC에서 미군 레이더망 및 포탁된 적 박격포 진지의 위치를 알리면서
8인치로 제압사격을 실시했다고 알려왔다.

나도 중대장을 따라 관측호 밖으로 나가는 기회가 많아지고 하늘에서는
언제부터인지 비행기가 날고 대낮 같은 항공조명이 우리의 진지를 비치고 있었다.
제9중대의 지원을 위해 진지를 출발한 제10중대와 제11중대의 기동을 위한 조치였다.
항공조명이 잠시 꺼지는 순간이면 우리의 소화기는 사격을 시작하고 환히 켜지면
다시 조용해지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적이 어둠을 틈타 돌격해 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호남선 여기는 만리포장”
“항공조명 북쪽으로 500 서쪽으로 500 조명의 중단이 없도록 하라”
보병 지휘망으로 항공조명을 요구하는 중대장의 목소리는 벌써 쉬어 있었으며
내가 중대장을 따라 벙커로 돌아오자 관측호로 뛰어드는 병사가 있었는데,
나의 무전병 김 병장이였다. 그는 관측요원들의 취침호에 있었던 나의 철모와
방탄복을 갖고 왔던 것이다. “한 중위님 이것 입으십시오.” 번번히 관측호 밖으로
나가는 게 불안했던 모양이다. 김 병장은 나의 무전병이기 전에 나의 은인이었다.



진내에서는 교통호와 교통호를 바삐 뛰어 다니는 미군 병사가 있었는데,
그는 'Wiscom'이라는 탱크소대의 위생병으로 카톨릭 신자였다.
“IS THERE ANY MAN WOUNDES(다친 분 없습니까)”를 연발하면서
구석구석의 취침호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어깨에는 구급낭을 메고 있었는데
그는 다섯명의 전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때에 105mm로 보이는 포탄 1발이 지근 거리에서 터졌다.

나는 관측호 밖에서 사탄을 조정하고 있었고 화기 소대장 임 중위도 멀리 않은 위치에서
기관총반의 진지변환을 지시하고 있었는데 나의 PRC-25 무전기 안테나가 잘려나간 것
외에는 모두가 무사했다. 철모와 방탄복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김진성 병장은 내 생명의 은인으로 남게 되었으며 안테나가 잘려져도 임무수행에 제한을
주지 않았던 PRC-25의 위력으로 예비안테나를 쓰지 않고도 계속해서 임무수행이
가능할 수 있었다.

나는 즉각 3개 포대에 사격중지를 요청하고 각 포대에 1발의 낙오탄 발생에 대한
제원 확인을 요구했다. 아군 호의 낙오탄이 아니라면 적의 장거리 포병일 수 도 있다는
불안감이 생겨나고 있었는데, 미군 포대에서 착오가 있었다고 알려주었다.
전장에서의 솔직한 사실보고가 얼마나 중요한 사기의 요소인가를 체험할 수 있었으며
차후 군 생활을 통해 사실보고를 강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새벽 2시가 지났을까? 언제부터인가 적의 소화기 총성도 들리지 않게 되자
적들은 철수를 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조용해지자 나는 또 한번 이상한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적이 공격 방향을 바꾸어 기습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중대장은 각 소대장을 무전기로 호출하여 적의 동태를 잘 파악 보고토록
지시했다. 적이 철수를 하는지 공격 방향을 바꾸고 있는지를 특히 주의하라는 요지였다.

나는 포사격의 빈도를 늦추어 155mm포는 남쪽의 정글 일대에,
미군 105mm는 북쪽지대 일대에, 제C포대의 105mm는 서쪽의 개활지 일대에
각각 좌우 원근의 수정을 계속하다가 새벽 2시 30분경 적의 남쪽지역의 정글 일대를
사격하던 155mm에 임무 끝을 통보했다. 



그리고는 중대 관측호로 돌아와 나머지 2개 포대는 지근거리 사격으로부터 원거리 사격
으로 옮겨가면서 사격의 빈도를 더욱 늦추었다. 관측호로 돌아와서는 중대병사들의
소화기 사격이 항공조명의 따라 조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후인지라
이제는 살았다는 마음의 여유를 찾고 비로소 담배에 불을 붙일 수가 있었다.
이 때 중상을 당한 채 말없이 누워있던 강 대위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야, 나 숨넘어간다. 부탁한다. 부탁한다.'
힘없는 그러나 또렷한 음성이었다. 후송 헬리콥터가 올 때까지 강 대위의 생명이
붙어있길 바라는 우리의 소망은 깨졌다. 신임 중대장 강 대위는 32세를 일기로
부임 4일만인 8월 10일 새벽 4시경에 마지막 숨을 거두고 말았다.

중대장은 화기 소대장에게 적의 시체가 전방에 보이는가를 물었으나
'서서 죽은 놈이 없어 보이지 않습니다'라는 익살 섞인 대답을 한다.
순간 나에겐 불안감이 엄습했다. 전과가 없으면 나는 밤새 허위보고를 하고 만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중대장과 나는 무전병을 대동하고 교통호를 따라 외곽진지까지
나가 보았으나 시야에는 멀리 5~6구의 시체만이 보일 뿐이었다.

사격중인 적 박격포를 표적으로, 사격하는 적 기관총을 표적으로,
또, 사격중인 적의 위치등등 온갖 표적의 성질을 동원하여 사격을 요구했는데,
그것이 허위보고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적을 내 눈으로 확인하며 사탄을 조정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11중대가 제9중대 기지에 근접해 오면서 진지내의 전차도 외곽으로 나가
합동수색이 시작되었다.

'넷둘, 여기는 넷삼(제11중대 관측장교), 지금 귀소 전방에 많은 시체가 보인다.
만세! 축하한다. 이상!' 제 9중대의 지원을 위해 중대지역에 도착했던
제11중대 관측장교 '강보길' 중위의 첫 상황보고였다.
'넷삼, 여기는 넷둘 장인데 총들을 다 갖고 있는가? 이상'
'넷둘, 여기는 넷삼 전부 하나씩 갖고 있다. 이상'
우리는 차츰 전과의 규모를 확인하게 되고 승리의 기쁨을 실감했다.
교통호 밖을 나와서 보니 2~30m 떨어진 야자수 숲에서 아직 살아 남은 부상자는
'살려달라'고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그건 비참한 항복의 절규였다.

다른 곳에서는 발악을 하는 놈도 있었고 탱크의 뒷 난간을 잡고 수류탄을 던져 올리는
놈도 있었다고 한다. 6명의 포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제 갈 길로 보내야 했다.
나는 붙잡혀 오는 첫 번째 포로를 발로 차고 싶었다. 그러나 앞에 오자마자 주저앉는
포로의 눈망울이 글썽인 채 순박한 것을 보고는 마구 때리려 덤벼드는 병사들의 울분을
저지시켜야만 했다.

제9중대는 도합 189구의 적군 시체를 헤아렸고 놀라운 숫자의 적 무기를 노획하였으나,
신임중대장과 6명이 전사 하고 2명의 소대장과 40여명의 병사가 중경상을 당해야 했다.



교훈:

적들은 다량의 박격포 공격준비사격과 함께 기습공격을 시도했으나 기습에 실패했다.
당시 1박 2일의 전투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제9중대 병사들의 피로와 긴장의 해이를
감안했다면 박격포의 공격준비사격보다는 방망이 수류탄으로 무장한 1개 분대의
은밀 침투가 더욱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곤히 잠들어 있는 벙커마다 수류탄 1발씩만 까 넣었다면, 우리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공격준비사격은 최초 중대지휘의 마비를 초래한 면도 있었으나,
아군의 포병에 의해 조기에 제압됨으로써 소기의 목적 달성에 실패했다. 

적은 다음 몇 가지 점에서 커다란 실수를 한 것이다.

첫째, 그들의 주공 방향은 비교적 평탄한 개활지였으므로 미군전차의 기관총 사격 하에서
돌격의 기회를 상실했다.

둘째, 그들은 남쪽과 북쪽의 정글에서 먼저 사격을 개시함으로써 주공의 기만을
기도했는지도 모르나 조명지뢰가 노출되었고 남쪽과 북쪽에서의 사격은 상황이
개시되고 나서 한참 후에야 있었던 것이다.

셋째, 그들은 탱크를 조기에 제압을 하지 못했다. 75mm 대전차포를 장비하고 있었지만
전차하나 파괴하지 못함으로써 전차 화기는 계속 사격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 전차화기는 그들의 박격포 공격준비사격 중에도 무제한 사격이 가능하여
적 기동병력에게 약진이 아닌 포복자세를 강요함으로써 우리의 포가 여유있게 날아가
그들의 머리를 덮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허용했던 것이다.

넷째, 제61포병대대 C포대의 첫발 '떴다!'가 3~5분만 더 지연됐더라도 결정적인 화력의
우세는 적이 장악하고 우리는 화력의 우세를 영원히 상실했을지도 모른다.
완벽하게 신속 정확했던 제61포병대대 C포대(포대장 김진규 대위)의 전투준비태세가
적의 기습을 제압할 수 있는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섯째, 제9중대에 근접화력지원을 제공했던 3개 포병부대가 행동의 자유를 확보하도록
허용한 것은 적 작전의 결정적 패인이었다.



아군의 효과적인 화력운용을 위해 준비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관측장교는 어떤 경우에도 항시 중대장과 같이 위치해야 하고 동시 상황파악이
    이루어져야 한다.
2. 중대 관측소는 중대전면을 관측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유개화 되어야 한다.
3. 중대기지 주위엔 외곽으로 3~400m의 거리에 4~6개의 방어 화집점 설정되어야 한다.
    (5~600m 간격이 적당함).
4. 중대기지 주변에 예상 적 박격포 진지를 검토해 두어야 한다.
5. 중대원들은 방어 화집점의 위치를 숙지해야 하며 상황보고는 물론 최초사격 요구와
    차후의 수정을 방어화집점을 기준으로 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예: 제1분대장 상황보고: 화집점 311로부터 우로 400m 줄이기, 300지점에
    적 1개 분대 출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