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 전자 감지기는 1966년 9월 15일 로버트 맥나마라 미 국방장관의 지시에 따라 개발된 장비이다.
맥나마라는 막대한 비용과 승무원 및 고가 항공기의 희생이 따르는 북폭대신
호치민 루트를따라 유입되는 병력과 군수물자를 차단하는 편이 비용대 효과면에서 훨씬 경제적이라고 생각 하였다..
1966년 1월, 하바드대 로 스쿨의 로저 피셔 교수가 약257km에 달하는
거대한 장애물을 라오스, 베트남 국경에 설치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피셔 교수는 도랑을 파서 가시 철조망을 설치하고 막대한 양의 지뢰와 감지기를 매설하여
물자와 병력의 침투를 차단한다면 굳이 북폭을 할 필요가 없으며, 장애물은 5개 사단이 방어하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방어 계획이 합동참모본부와 태평양 사령부, 그리고 웨스트모얼랜드의 반대에 부딪치자
맥나마라는 일명 "제이슨 위원회"에 연구와 분석을 맡겼다.
47명의 과학자들로 구성된 제이슨 위원회는 1966년 8월,
맥나마라에게 약 1년 후에 항공기를 이용한 전자 감지기 살포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했다.
그러자 맥나마라는 9월 15일에 알프레드 D 스타버드 육군 중장을
국방통신개발위원회(DCPG / Defense Communications Planning Group)책임자로 임명하여
각종 전자전 장비 개발과 연구를 맡겼다.
제이슨 위원회의 확장판인 DCPG는 과학자 및 저명 대학교수, 컴퓨터, 정보처리 전문가 및 군전략가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이 집중적으로 연구 개발해야할 과제는 전자 감지기와 디스플레이, 데이터 정보 처리였다.
이후 장애물 프로그램에는 Dyemarker라는 명칭이 붙여지고, 태국 나콘파놈에
침투감시센터(ISC / Infiltration Surveillance Center)가 설립되었다.
ISC는 알파 기동대(Task Force Alpha)라 불리우며 지휘관으로 제7공군 윌리엄 맥브라이드 소장이 임명되었다.
맥브라이드 소장은 남베트남 주둔 미장성들이 이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하들을 베트남에 파견하여 장점을 설명토록 명령하였다.
알파 기동대는 다음과 같은 장점을 강조했다.
100명이상의 병력이 이동할 때의 압력을 감지한 전자 감지기에의해 사전 경고를 받을 수 있고,
그 지역을 집중 포격하여 적을 괴롭힐 수 있다.
그리고 케산 주변의 코끼리풀이 거의 20피트 정도로 자라 북베트남군이
방어 전진기지 전방 50m 지점을 이동해도 잘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감지기의 사전 경고는 매우 중요하다.
알파 기동대는 이미 6주동안 라오스 국경 부근에서 감지기를 사용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음을 강조 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감지기라도 위치 선정이 최우선 과제였다.
가장 최상의 방법은 지도를 분석하여 최종 결정된 장소까지 헬리콥터로 공수된 병사들이 직접 손으로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포위당한 케산에서는 이 방법이 불가능하여 공중에서 투하되어야했다.
지진감지식 센서를 땅 속에 박기 위해서는 충분히 높은 고도로 비행하여야하고
경량 고감도 마이크로 폰 내장센서는 발견이 쉽지 않도록 나무가 울창한 지역에 투하하여야 했다.
항공기는 해군의 OP-2E 넵튠과 공군의 시콜스키 CH-3 헬리콥터가 사용되었다.
지진 감지기는 헬리콥터에서 전용 디스펜서에의해 투하되었는데,
충격에 의한 오작동 때문에 승무원이 손으로 투하하기로 결정 하였다.
투하 항공기들이 투하 장소로 비행할 때 전방항공통제기들이 대공포대를 감시하였다.
그러나 적 대공화기의 위협이 너무 컸기 때문에 이후 부터 감지기 투하 임무는 속도가 빠른 F-4 팬텀이 맡게된다.
감지기로부터 신호가 전달된 지역을 정확히 찾아내기란 무척 어려웠으나
다행히도 케산 화력 지원센터에는 감지기 해독에 능통한 해병대 장교가 파병되어 있었다.
미 본토에서 개최된 심포지움 등에서 지식을 습득한바 있었던 머자 헤이그 대위는 면밀히 판독된
항공정찰사진과 감지기 신호, 나콘 파놈으로부터 공중 중계된 데이터들을 철저히 분석하여 적의 이동을 탐지했다.
적의 위치가 파악되면 B-52 폭격기의 집중 폭격이 실시되었다.
B-52의 타격 지대가 500에서 1,000 제곱미터이면 미니 아크 라이트,
500 제곱미터이면 마이크로 아크 라이트로 불리우며,
통상 미니 아크 라이트의 경우 45분간, 마이크로 아크 라이트는 10분간의 집중 폭격이 가해졌다
감지기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곳은 881S 고지였다.
케산 화력 지원센터에서는1968년 2월 3일 밤부터 전달되어지는 예사롭지 않은 신호를 주시하고 있었다.
머자 헤이그 대위는 분석 결과 북베트남군 6개 대대병력이 881S 전초 기지를 향해 이동하는 것으로 확신했다.
881S 고지 가까운 지점에 살포된 감지기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머자 헤이그 대위는 이동을 마친 북베트남군이 공격 준비에 들어간 것으로 보았다.
공격 명령을 기다리며 짙은 안개 속에 몸을 숨긴 채 은신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에 포화를 집중시키기로 결정 하였다.
2월 5일 새벽 02시 30분, 일제히 포문이 열렸다.
약 500발의 포탄이 881S 고지를 뒤 흔들었고, 적의 공격은 실현되지 않았다.
이때 2개 대대는 감지기가 설치되지 않은 지역을 통과하여 861A고지를 향해 전진했다.
안개 속에서 달려나온 북베트남군이 전초기지를 급습했다.
그러나 북베트남군의 머리 위에는 전투 폭격기가 나타났고, 뒤에서는 포화가 작렬하여 궁지로 몰아 넣어버렸다.
들판에 뿌려진 감지기는 북베트남군 대공포병 타격에 공헌했다.
한밤중에 9번 도로 근처에서 들어온 감지기 신호가 갑자기 침묵했다.
케산의 포병은 적의 침투를 단념시키기 위하여 발신 지역을 포격했다.
다음날 저녁에도 9번 도로 근처에서 다시 신호가 들어오자 또 다시 집중 포화가 실시되었다.
날이 밝은 후 실시된 수색 비행에서 위장한 37mm 대공포 6문이 발견되었다.
이들 위장 대공 포대는 B-52로부터 미니 아크 라이트 타격을 받았다.
해병대는 화력지원에 이용된 모든 정보 중 40% 가량을 감지기가 제공한 것으로 평가했다.
1968년 3월 1일 밤 9시 30분,
북베트남군 66연대는 케산 기지 동쪽 끝단에 배치된 남베트남군 제37 레인저 대대 경계선 공격을 시도하였다.
레인저 대대 방어선 전방에는 북베트남군의 습격 참호 들중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큰 참호들이 구축된 상태였다.
활발한 정탐을 실시하면서 참호 속에서 호시탐탐 공격의 기회만 노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은 곧바로 전자 감지기에 포착되었다.
긴급 발진한 B-52폭격기가 케산 상공에 나타났고, 전투 폭격기와 포병이 신호 발신 지점을 강타했다.
몇 시간에 걸쳐 거듭 시도된 3번의 공격이 참담하게 실패했다.
나중에 습격용 참호와 철조망 곳곳에서 78구의 시신이 발견되었을 뿐이지만 66연대의 피해는 막대했다.
몽타냐드족들이 적게는 200, 많게는 500구의 북베트남군 시신을 봤다고 보고하였던 것이다.
동쪽 방면에대한 수색을 실시하여 엄청난 규모의 습격 참호를 발견한
제37 레인저 대대는 소탕 작전에 들어가 사상자 없이 좋은 전과를 올렸다.
3월 1일, 이륙을 시도하고 있던 C-12K 수송기 주변에 포탄이 떨어져
파편에 1기의 엔진이 손상되었지만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3월 6일 오후에는 케산 활주로를 향해 하강하던 C-123K가 대공포에 보조 제트 엔진을 피격 당해
다낭으로 회항하다 추락, 해병대원 43명과 1명의 해군, 4명의 공군 등 총 48명이 사망하였다.
3월에만 3대의 헬리콥터가 격추 당했다.
비록 반복되는 공격들은 물리쳤지만 포위 2개월째가 되면서 해병들의 전투 스트레스는 가중되었고,
특히 고립된 고지 전초기지 병사들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거기에다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북베트남군이 다시 강력한 대규모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몽타냐드족의 정보에 의하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냈던
디엔 비엔 푸 공격 개시일(1954년 3월 13일) 14주년을 기리는 대규모 공격이 13일이나 14일에 실시된다는 것이었다.
입수된 정보 그대로 14일 북베트남군의 공격이 실시되었지만 미군 전폭기와 포병의 불세례를 받았다.
이날 62명이 전술기의 먹이가 되었고, 아크 라이트 미션을 수행한 B-52 폭격기 승무원들은 59회의 2차 폭발을 보고하였다.
케산 기지 남서쪽 2km지점에서 25명이 포격에 사망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북베트남군의 공격은 멈추지 않고 있었지만 정보에 의하면
3월 15일부터 케산 주변에서 서서히 물러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북베트남군이 다시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가 몽타냐드족으로부터 입수되었다.
몽타냐드족의 정보대로 공격은 3월 22일에 있었다.
감지기 신호가 포착되었고, 이날 케산 기지에 1,000발 이상의 포탄이 쏟아졌다.
1번 탄약고가 직격당해 약 4,000발의 포탄과 106mm 탄약이 날아가 버려 105mm 포 사격이 중지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날밤 AC-47 스푸키 건쉽이 출격하여 총탄 우박을 뿌리면서부터 북베트남군의 공격 강도가 점차 약해졌다.
그 다음날에도 1,109발의 포탄이 날아와 2월 23일의 1,307발 보다는 적었지만 3월 중 최대의 1일 포격량으로 기록되었다.
23일과 24일에도 B-52 폭격기와 전폭기들이 적을 강타하였다.
9연대 1대대는 순찰 과정에서 8명을 사살하고 21명에게 부상을 입혔고 UH-1E 건쉽 헬리콥터가 57명을 사살하였다.
그동안 방어에 급급했던 케산의 해병대가 첫 번째의 공격 계획을 마련하였다.
케산 기지 남쪽 측면에 포진한 제26해병연대 1대대 B중대는 3월 30일을 기해 북베트남군 거점 공격에 나섰다.
목표는 북베트남군 제66연대 8대대 벙커 구축지였으며, 전사자 시신 회수가 목적 이었다.
B중대는 2월 25일 매복 공격에 걸려 전사한 순찰대 26명의 시신을 회수하지 못한 상태였다.
기지를 출발하여 안개에 몸을 숨기고 은밀히 전진한 1대대 B중대는
아침 7시 55분경에 방어선 외곽 300m 지점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짙은 안개 때문에 공중 엄호는 없었지만 해병대원들은 화염방사기로 방어된 벙커를 공격하여 파괴시켰다.
그러나 북베트남군은 박격포 집중 사격으로 역습에 들어가 B중대원들을 공략했다.
이 때문에 B중대원들은 실종된 26명의 해병 시신을 찾지 못한 채 후퇴해야만 했다.
이 시신들은 나중에 회수되지만, 시신 회수에 나섰던 B중대는 10명 전사, 실종 2명, 부상 100명이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북베트남군도 100명 이상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비록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 실패하긴 했지만 미군 최초의 계획적 공격이된 시신 회수 작전은 포위 공격의 끝을 의미하였다.
나이아가라 작전은 3월 31일에 종료되었다.
북베트남군은 305C 사단 주력을 라오스로 철수시키고 304사단도 남서쪽으로 철수를 시작 하였지만
101C연대를 비롯한 두 사단의 포병은 그대로 잔류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이들 잔류 부대들은 심각한 보급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한 제1군단지역에서는 구정 공세 패잔병 소탕전이 진행중에 있었다.
B-52 폭격기의 아크 라이트 폭격
B-52 폭격기의 타격 피해 평가에는 주로 항공사진이 이용되었지만
다양한 요인들이 항공 촬영을 방해하여 정확히 분석할 수 있는 사진은 겨우 7% 뿐이었다.
가장 큰 장애요인은 가시도였다.
B-52의 타격 중에서 약 절반가량은 야간에 실시되었으며, 낮에도 케산 상공에는 항상 구름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타격 박스 내에 마치 달의 분화구 처럼 많은 구멍들은
과연 어떠한 무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 분석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리 첨단 과학이 발달하였다지만 가장 믿을만한 저격은 첨단 전폭기가 아닌 노련한 저격수가 맡는 것처럼
케산의 가장 정확한 타격 평가는 해병대 순찰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예를 들자면, 3월 19일 실시된 B-52 폭격 항공 사진에는 너무나 많은 폭탄 구멍이 찍혀있어서
숙련된 사진 분석가들 조차도 정확한 판독이 어려웠다.
뒤이어 타격 지역에 투입된 해병 순찰대원들은 폭탄 구멍과 함께 대대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벙커들을 발견하여 이를 상부에 보고하였고
그 지역은 즉각 폭격 당했다.
그렇지만 웨스트모얼랜드 사령관의 정보담당자들은 모든 통계들을 조합하여 폭격 피해를 평가해야했다.
1월 15일부터 3월 31일까지 촬영된 항공 사진과 영상에는 274개소(벙커와 참호)에 피해를 입힌 것으로 나타났고,
그중 17 곳의 무기 관련 시설을 파괴하고 8곳에 손상을 입힌 것으로 나타났다.
제3비행사단의 전투 문서에는 2,548소티 출격에 59,542톤의 폭탄을 투하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B-52 폭격기 승무원들은 1,382회의 2차 폭발과 108회의 2차 화재가 발생했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B-52 폭격에 의한 사상자 평가는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해병대 순찰대가 획득한 북베트남군 전사자의 일기와 기록들이 인명 피해 평가에 반영되었다.
어느 일기에는 "B-52폭격을 피해 동굴이나 참호 속에 들어간 병사들 조차도 살아남기 힘들었다.
케산이 디엔 비엔 푸 보다도 더 지독하다"라고 적혔던 반면에
1968년 4월 포로로 붙잡힌 팜 반 홍은 흥미로운 진술을 하였다.
자신의 부대가 쾅 트리 지역에 배치되었을 때, B-52 폭격 주의 경보를 자주 받았다고 말했다.
대체로 폭격 2시간 전에 무전 또는 전화로 경보가 전달되어 폭격 예상 지역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사전 경보들은 매우 정확하고 시기 적절하게 통보되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그런 정보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인가는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미군은 태평양 괌 부근 해상에서 은밀히 첩보 수집 활동을하는 소련 트롤 어선에 의해서,
또는 무선 도청에 의한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랑 베이 특수부대 캠프를 지키던 북베트남군 중대도 3월 말에 B-52의 폭격을 받았지만
벙커에 몸을 숨겨 1명만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케산 근접 항공 지원 / CAS(Close Air Support)에 나섰던 해군 A-4 스카이호크 공격기 조종사들의 증언이다.
항모 CVA-31 본 험 리차드 VA-94 해군공격비행대 소속 존 쿠친스키 중위는
대공포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최대한 낮은 고도에서 타격해야했다고 말했다.
"근접항공지원은 밀림 지대라는 베트남 특성 상 폭격 효과가 그리 크지 않았으며
대공포대가 은폐하기에 매우 유리하여 공격기에게는 위험했다.
우리는 한달 동안 하루 평균 2소티의 출격을 했다.
우리는 착륙 우선 순위에따라 선회하는 수송기 엄호를 위해
11,000~13,000피트 상공에서 전방항공통제관의 타격 지시를 기다렸다.
수송기들은 주로 활주로 동쪽에서 접근을하였고, 물자를 하역할 때 집중적으로 공격 당했다.
적의 대공화기 탄 대부분이 케산 북쪽 또는 북서쪽에서 날아왔다.
가끔 우리는 보유한 무기들을 C-130 수송기의 접근로 부근에 모조리 발사해버리기도했다.
나는 호신용 357매그넘 권총을 가슴에 착용하고 있었다.
표적 타격후 적 고사포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급격 회피 기동으로 기체가 네거티브G 상태에 놓였을 때,
늘어난 가죽 권총집이 내 헬멧과 방풍유리를 여러번 강타하는
아찔한 경험을 하고나서는 가벼운 25구경 자동권총으로 바꾸었다".
존 쿠친스키 중위가 소속된 항모비행단 CVW-5 VA-94 공격비행대는 그당시 A-4E 스카이호크를 장비하였으나
자매 비행대 VA-212 램판트 레이더스와 VA-93 블루 블레이저스는 신형 A-4F로 대체하고 있었다.
1968년 3월 7일, 항모에서 발진한 각각의 비행대는 남서쪽을 향해 비행했다.
A-4 스카이호크는 20mm 기관포 탄약 200발에 통상 500파운드 폭탄 8발과 250파운드 폭탄 2발,
그리고 동체 중앙 하부에 400갤런 연료탱크를 장착하고 있었다.
이날 VA-121 비행대 A-4F 스카이호크 조종사 스테판 그레이 중위는 케산을 향해 비행하고 있었다.
"타격 비행대들은 케산 인근 상공에서 합류하였다.
케산 상공의 기상은 무척 나쁜 상태였다.
우리는 항공 통제관의 지시에따라 궤도 선회중인 C-130 수송기를 엄호하고 있었다.
우리는 활주로 서쪽 끝단에서 부상자를 태우고 이륙을 준비하던 C-123 수송기 동체에서 불꽃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다.
박격포탄에 맞아 이내 불길에 휩싸인 기체에서 생존자는 결코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상공을 비행하던 전방항공통제기가 박격포대를 발견, 백색 인광 로켓을 발사하여 표적을 알려주었다.
놀랍게도 표적은 기지로부터 100m 떨어진 방어선 내에 있었다.
A-4 스카이호크들은 미공군 전방항공통제관의 지시에 따라
상공 2,700m 아래로 쏜살같이 내려가 Mk81 250파운드 폭탄을 투하했다.
박격포를 제거한 타격대는 항모로 귀환했지만 날이 밝으면 다시 케산으로 비행하여야한다."
북베트남군이 케산을 훤히 들여다보는 불리한 입장에서 C-130의 화물 공수는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포격 위협으로 3월 10일부터 케산 활주로 착륙이 일시 중단된 가운데 A-4공격기들은 케산 상공을 비행하고 있었다.
"우리 CVW-5 소속 A-4 스카이호크 조종사들은 고공에서 스카이스포트 레이더의 공격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더 조작사가 지시한 표적에 고공 폭격을하기 위해서 였다.
그때 갑자기 해병대 전방항공통제관으로부터 기지 서쪽 고지의 해병 중대를 긴급히 근접항공지원하라는 지시가 전달되었다.
그 지역의 근접항공지원은 해병 항공단 소속기들이 하는 것이 정상적이었지만 해병 공격기가 부근에 없었다.
전방항공통제관은 스네이크아이 폭탄을 투하하길 원했다.
우리는 240m의 매우 낮은 고도에서 10도의 각도로 폭탄을 투하하기로 하였다.
해병대의 붉은색 항공식별표지판와 연막 표식간의 거리는 오직 75m였을 뿐이어서 매우 정확한 투하가 요구되었다.
나는 선도기와 윙맨이 폭탄 투하하는 모습을 보았고, 곧 내순서가 되었을 때 나는 기체가 하늘로 튀어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비록 뒤를 돌아볼 수 없어 직접 폭격 결과를 확인해볼 수는 없었지만 전방항공통제관이 성공적이라고 통보해주었다.
우리의 근접항공지원으로 최소한 50명의 북베트남군 전사자가 발생했다
해병제1항공단은 UH-1E 건쉽 헬리콥터 대신 A-4 스카이호크 공격기가
수송 헬리콥터를 엄호하는 수퍼 게글 / Super Gaggle 전술을 마련하였다.
TA-4F 복좌 훈련기는 전방항공통제기로 운용되며 KC-130 급유기가 엄호기들의 공중급유를 지원했다.
경량 관측기의 전방항공통제기 사용은 2차대전을 거쳐 한국전쟁 동안 T-6를 사용하면서 대폭 발전되었다.
해안 교두보를 확보해야하는 상륙부대의 특성상 해병대는 진보된 함공함포통제 전술이 필수적이었다.
TF-9J 등 노후된 관측기를 운용하고 있던 해병대는 1966년 5월부터 도입이 시작된 TA-4F 복좌 훈련기로 대체하였다.
TA-4F는 20mm 기관포와 즈니 로켓 포드 2기를 장착할 수 있어 공격력도 우수했다.
첫 번째 TA-4F가 1967년 8월 다낭 기지에 전달되었다.
TA-4F는 베트남에 전개되자마자 작전에 투입되어 전함 뉴저지의 16인치 함포를 통제하였다.
1968년 1월 21일, 케산 근접항공지원에 투입된 VMA-311 해병공격비행대 A-4E 조종사
바비 다우닝 대위가 기총소사 도중 피격당해 긴급 비상탈출했다.
다우닝 대위는 윙맨의 엄호 속에 구조 헬리콥터로 구출되었다.
1월 23일에는 450m 상공에서 적을 공격하던 윌리엄 로트퍼스 소령이 대공화기에 피탄당해 비상탈출했다.
기체와 조종사는 케산 방어선 철조망 부근에 떨어졌고, 헬기에 구조된 로트퍼스 소령은 추라이 기지로 귀환했다.
페가수스 작전(OPERATION PEGASUS)
1968년 1월부터 미 해병이 담당하고 있는 제1군단지역에 미 육군부대들이 점진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제3수륙양용군 사령관 로버트 쿠스먼 해병중장은 1월 말경, 육군 제1기병사단과 함께
9번 도로를 평정한다는 계획을 구상하고있으나 북베트남군의 구정공세로 인해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사이공을 비롯한 주요 대도시에서 감행된 구정공세가 실패로 돌아가고 패잔병 소탕작전이 진행되던 2월 중순,
쿠스먼 중장은 다시 작전 계획 마련에 착수하였다.
2월 28일, 쿠스먼 중장과 제1기병사단장 존 톨슨 소장이 작전 회의를 가졌다.
육군과 남베트남군이 공중 강습으로, 해병대는 9번 도로를 따라 진격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작전계획이었다.
페가수스 작전(OPERATION PEGASUS)의 궁극 목적은 케산 포위망을 푸는 것 이었다.
나이아가라 작전이 종료되면 1968년 4월 1일부터 페가수스 작전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이리하여 제1군단지역에 임시 편성된 군단(제1기병사단, 101공수사단, 3해병사단,
3개 대대의 남베트남군 기동대)은 공동 작전 준비에 들어갔다.
페가수스 작전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9번도로를 열기위한 전진기지를 카 루에 건설하는 것이었다.
동쪽 동하로부터 캠로, 로크파일로 연결된 카 루는 케산으로부터 북동쪽 18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페가수스 작전의 보급기지 역할을 맡게될 카 루에서의 C-7A, C-123 수송기 운용은 필수로 생각되었다.
케산 공중 보급의 어려움을 경험한 쿠스먼 해병 중장은 악천후에 관계없이 보급품을 투하할 수 있도록
카 루에 레이더 설치를 건의 하였지만 적의 저항이 적어 거의 쓸모가 없게된다.
제1기병사단 8공병, 해병제11공병대대와 해군 건설대는 길이 800m 활주로 건설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페가수스 작전 중 총 5개의 발진 거점 건설을 책임졌다.
아울러 차량과 전차가 기동할 수 있도록 교량과 수로를 복구할 책임이 있었다.
3월 16일부터 시작된 공사였지만 3월 29일에는 C-7A 캐리보우 이착륙이 가능할만큼 건설하였으며
4월 7일에는 C-123 프로바이더 수송기 운용이 가능할 정도로 완성되었다.
카 루에 건설된 이 활주로는 육군 헬리콥터의 주요 발진기지가되며, 랜딩 존 스터드(LZ-STUD)로 명명되었다.
그리고 후속 전진 LZ 구축을 위해 밀림에 지연 신관 폭탄들이 투하되었다.
육군의 병참부대들이 다낭으로 전개되어 임시 군단 지원 임무를 개시하였으며
그들은 카 루에 5일간 사용분량의 물자를 비축해야했다.
3월 25일부터 LZ스터드에서 발진한 제1기병사단 헬리콥터들이 악천후 속에서 서쪽 지역에대한 정찰비행을 개시하였다.
페가수스 작전은 4월 1일 07시에 개시될 예정이었다.
작전 개시일이 다가오자 3월 30일 제3해병사단과 여기에 배속된 남베트남 1연대가
동하에서 양동작전을 시작하여 북베트남군의 시선을 끌었다. 그러는 사이 제1해병사단,
남베트남 제3공수부대(기동대), 제1기병사단의 총 20개 보병대대가 공격 태세에 들어갔다.
케산 기지의 제26해병연대장 론스 대령도 작전 개시가 임박하자
자체적으로 작전 계획을 마련, 3월 30일 새벽부터 역습에 들어갔다.
1대대 B중대는 북베트남군 진지 공격에 나서기에 앞서 포격과 공중지원을 요청하였다.
B중대장 케네스 파이프 대위는 어둠과 짙은 안개를 방패삼아 참호를 빠져나온 뒤 중대를 적진지의 왼쪽 측면에 대기 시켰다.
제13해병포병연대 1대대는 정오까지 거의 2,600발 이상의 지원 포격을 실시하게되며,
로크파일에서도 장거리 포격 지원을 하였다.
아침 7시 55분 B 중대는 북베트남군 벙커를 급습했다.
수류탄, 기관총, 화염방사기로 무장한 해병들이 벙커로 들이닥쳤다. 공
병들은 폭약으로 벙커를 폭파시켰다.
불시의 일격을 얻어맞은 북베트남군은 벙커를 버리고 탈출했다.
그러나 북베트남군의 박격포탄에 중대 지휘소가 직격당해 3명이 전사하고 중대장 케네스 파이프 대위가 부상을 입었다.
B중대는 벙커들을 순차적으로 파괴하고 15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4월 1일 오전 7시, 계획된 시간에 맞춰 제1해병사단 1연대는 공병대대와 함께
지뢰를 제거하고 파손된 다리를 복구하며 9번 도로를 따라 진격해 나갔다.
1대대는 LZ 스터드 방어를위해 카 루에 잔류하였다.
그러나 제1기병사단은 악천후 때문에 헬기를 띄우지 못한 채 기상이 좋아지기만을 기다려야했다.
오후 1시부터 기상이 좋아지자 제1기병사단장 존 톨슨 소장은 3여단에게 작전 개시를 명령하였다.
3여단은 케산과 9번 도로의 중간에 위치한 각각의 LZ로 3개 대대병력을 전개시켰다.
7연대 5대대가 9번도로 남쪽의 LZ 케이츠(Cates)에,
1대대와 2대대는 9번도로 북쪽의 LZ 마이크(Mike)로 포와 함께 공수 되어 화력 지원기지를 구축하였다.
해가 지기 전까지 모든 포들이 정위치에 전개되어 다음날의 화력지원 준비를 마쳤다.
북베트남군 제320사단 병력들은 9번 도로를 차단하려 애를 썼으나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제1기병사단은 비교적 가벼운 저항만을 만났을 뿐이었다.
북베트남군은 "공중 이동하는 미군을 막아내기에는 우리의 전력이 부족했다"고 공식 기록하였다.
붙잡힌 포로 심문 결과 북베트남군 제304사단 66연대 및 325C사단 29연대 병력이
여전히 케산에 잔류하고 있다는 정보가 사실임이 밝혀졌다.
4월 2일부터 4일까지 제1기병사단 2여단과 3여단은 4개 대대를 케산 인접 지역에 공수하였다.
케산 기지 남쪽 9번 도로상의 옛 프랑스군 기지 남동쪽에 위치한
LZ 와튼(Wharton)에 2여단 5연대 1대대와 12연대 2대대가, LZ 탐(Tom)에 5연대 2대대가 공수되었으며,
그로부터 더 동쪽에 위치한 LZ 토(Thor)에는 3여단 7연대 2대대가 공수되었다.
케산 인근에 전개된 대대들은 북서쪽 방면 공략에 들어갔다.
페가수스 작전 개시에 발맞춰 케산 기지에서도 역습이 실시되었다.
9연대 1대대는 케산 활주로 남쪽 2.5km 지점에 위치한 471고지를 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케산 마을과 인접한 이 고지는 9번 도로를 감제할 수 있는 요충이었기 때문에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1대대는 새벽 2시 30분에 공격 대기선을 출발하여 새벽 6시에 체 리엔 산마루를 따라 안개에 싸인 471고지를 공격했다.
장거리포 집중 포화를 받은 471고지 북베트남군의 저항도 약해졌다.
북베트남 제66연대 8대대는 격렬히 저항하였지만 1대대는 저녁 무렵에 고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 전투에서 1대대는 10명이 전사하고 56명이 부상 당했고, 북베트남군은 16구의 시신을 남기고 퇴각했다.
그러나 북베트남군은 고지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1대대가 고지를 완전 장악한 직후 북베트남군의 로켓 탄이 쏟아졌다.
밤 동안 거의 190발 이상의 로켓을 발사한 북베트남군은 고지 탈환에 들어갔다.
새벽 4시 30분, 2개 중대가 언덕 동쪽 산허리에 포진한 1대대 C중대를 공격했다.
C중대는 다른 중대로부터 지원받지 못한 채 중기관총탄과 RPG 세례를 받았다.
적이 해병대 참호로부터 20m지점까지 접근했을 때 13해병포병연대 1대대가 지원 포사격을 하였다.
하지만 북베트남군은 박격포로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새벽이 되자 북베트남군은 물러났으며 1대대는 1명 전사, 28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한편, 제1기병사단 1여단은 라오스 국경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지점에 새로 마련된 LZ 스내퍼(Snapper)로 공수되기 시작하였다.
LZ 스내퍼는 케산 마을과 옛 랑베이 특수부대 캠프 사이의 9번 도로 남쪽에 위치했다.
4월 6일, 제26해병연대 2대대 G중대는 케산 정면에 위치한 558고지와 861고지를 잇는 산마루 공격을 감행했다.
이 작전은 대단히 위험한 작전으로 예상되었던 만큼 위장된 벙커로부터 맹 공격을 당했다.
벙커들은 교차 정확한 사격으로 해병들을 쓰러뜨렸다.
전사자 회수에 나선 해병들도 사상당하자 중대장 리 오버스트리츠 대위는 항공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타격기 숫자도 많지 않은데다 다른 지역을 지원하는 타격기의 안전 비행을 고려하여 포격도 종종 제한되었다.
승산이없다 판단한 중대장은 적 방어선 내에 쓰러진 6명의 실종자 구출은 야간에 실시하기로 결심했다
중대장은 중대원들에게 558고지로 철수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G중대는 전사 4명, 부상 47명에 실종 6명이라는 피해를 당했다.
북베트남군 전사자는 48명으로 확인되었고, 실종자 6명은 나중에 회수되었다.
제1기병사단이 케산 남동쪽에서 진격하는 동안 제1해병사단은 9번도로를 따라 진격해오고 있었다.
옛 프랑스군 기지 남동쪽 LZ 와튼에 전개되었던 2기병여단 5연대 1대대는 옛 프랑스군 기지에 포진해있던
북베트남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 상당히 고전했지만 2대대의 지원을 받아 물리쳤다.
6일 이날은 육군과 케산의 해병대가 처음으로 연결되는 날이기도했다.
12기병연대 2대대병력 571명이 아침 일찍 헬리콥터 강습작전을 실시하여 케산 기지의 9해병연대 1대대와 연결되었다.
증원군이 도착하자 9연대 1대대는 육군에게 방어책임을 인계하고 즉각 서쪽의 689고지 공격에 착수하였다.
대대의 공격 예정표는 689고지 평정 후 곧바로 그 북서쪽에 위치한 758고지를 공격토록 되어있었다.
대대는 4월 7일 오후에 아무런 저항을받지 않고 552고지를 점령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689고지를 공격했으나 박격포 공격으로 9명이 전사하고 27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게된다.
증원군이 도착하기 시작하자 케산의 제26해병연대 1대대 D 중대는
2월 25일부터 회수하지 못하고 방치되어있던 실종자 시신 회수 작전에 들어갔다.
이미 3월 30일 B중대가 시신 회수 작전을 실시하였다가 실패를 경험한 1대대는
D중대를 남쪽 방면에 투입하여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D중대는 하루종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21구의 시신을 간신히 회수할 수 있었다.
남베트남군 제8공수대대 84중대도 헬리콥터 강습으로 케산 기지 동쪽 끝단을 방어하고 있던
남베트남군 제37 레인저 대대와 연결 되었다.
이렇게 증원군이 속속 케산에 도착하여 서로 악수를 나누었지만 "드디어 구원되었다!"는 느낌을 받은 해병은 거의 없었다.
9해병연대 1대대는 오랜동안 자신들을 감제하고 있었던 552고지를 장악하였지만
689고지를 공격하는 동안 순전히 박격포 공격으로만 전사 9명, 부상자 27명이라는 피해를 입었다.
이어 남베트남군 기동부대 제3공수연대가 랑 베이 인근 LZ 스네이크(Snake)로 공수되어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9번 도로 장악에 나섰다.
라오스 방면으로 밀고들어간 남베트남군 공수부대는 마침내 랑 베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게되었다.
4월 9일에는 단 한발의 포탄도 케산 기지로 날아들지 않았다.
카 루에서부터 9번 도로 14km 구간의 파괴된 9개 다리를 복구하고 지뢰를 제거하는 등
복구작업을 펼친 제11공병대대가 4월 11일 마침내 케산에 도달했다.
이로서 1967년 7월부터 외부와 단절되었던 케산이 다시 열렸다.
그동안 지긋지긋한 포위망에 갇혀있었던 제26해병연대는 철수 준비에 들어갔다.
케산으로의 통로가 열리자 제1기병사단장은 아 샤우 계곡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이동 명령에따라 제1기병여단과 남베트남군 제37 레인저 대대가 케산을 떠났다.
외부와 이어져 포위망이 풀리긴 했지만 해병대는 케산 고지의 적을 소탕해야했다.
해병들은 버려진 100구의 북베트남군 시신과 차량, 탄약 등을 발견하였다.
그동안 케산 기지를 지켜왔던 데이비드 론스 대령은 새로 부임한 브루스 메이어즈 대령에게
4월 12일자로 제26해병연대의 지휘권을 인계하고 케산을 떠났다.
제26해병연대장 데이비드 론스 대령은 1967년 8월부터 1968년 3월까지의 케산 공방전에서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부대를 지휘한 공로로 해군 십자장을 수여 받았다.
비록 포위망이 풀리고 공격의 강도도 약해졌으나 케산 활주로에 대한 위협은 아직 남아있었다.
4월 13일, 착륙하던 C-130 수송기가 로켓 공격으로 활주로를 이탈하여 소실되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승무원들은 전원 비상 탈출에 성공했다.
이틀 후 페가수스 작전이 종료되는 4월 15일에도 케산 기지에는 306발의 포탄이 날아들었다.
포탄이 작렬하자 C-130 수송기 조종사는 황급히 활주로를 질주하여 수송기를 이륙시켰다.
4월 13일 밤, 제26해병연대 3대대는 881S 고지를 빠져나와 881N 고지의 남쪽 비탈로 접근, 습격을 준비하였다.
해병대는 케산에 마지막으로 남은 위협을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대대는 케산 기지 및 카 루의 곡사포 지원과 함께 자체적으로 881S 고지의 105mm 곡사포 지원을 받게된다.
그리고 중화기 중대는 화력 지원을 위하여 881S 고지에 잔류하였다.
곡사포와 박격포탄이 881N고지를 밤새도록 강타하여 만신창이를 만들어 놓자
3대대는 새벽 5시 30분을 기하여 공격을 시작했다.
881S 고지에서는 연대장 메이어즈 대령과 데브니 대위가 공격을 지켜보고 있었다.
치열한 881N 고지 쟁탈전이 벌어졌다.
대대는 포격 지원을 받으며 벙커와 참호로 돌진하였다.
881N 고지 전투는 오후 2시 30분에 끝났다.
K중대장 폴 스네드 대위는 고지 정상에 성조기를 올렸다.
3대대는 전사 6명, 부상 21명의 피해를 입었으나 고지를 사수하던
북베트남군 325사단 29C연대 8대대 병력 100여명이 전사하고 3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881N 고지 전투는 페가수스 작전의 마지막 전투가 되었다.
케산 포위망이 풀리자 웨스트모얼랜드 사령관은 대단히 기뻐했다.
이때 제3수륙양용군 사령관 쿠스먼 해병중장과 제1기병사단장 존 톨슨 육군소장은 계획된대로
케산 병력 철수준비를 하였으나 웨스트모얼랜드는 작전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웨스트모얼랜드는 쾅 트리 지역에서 일련의 작전을 준비하는 동안 케산에는 약 1천명의 병력을 잔류 시킬 계획이었다.
만약 적의 활동이 누그러들면 그 때 전원 철수시킨다는 생각이었다.
4월 1일부터 15일까지 실시된 페가수스작전의 피해는 육군 42명, 해병 51명, 남베트남군 33명 전사였다.
그리고 육군 207명, 해병 459명, 남베트남군 187명이 부상을 입었다.
북베트남군은 21명의 포로, 전사자 1,304명(추정치 3,500에서 5,000명)으로 확인되며,
트럭 4대, 전차 1대를 비롯한 수많은 무기들을 노획 당했다.
스코틀랜드 II 작전
페가수스 작전은 1968년 4월 15일 아침 8시를 기하여 종결되었지만 웨스트모얼랜드가 마련한
지속적 케산 방어작전인 스코틀랜드 II 작전이 시작된다.
스코틀랜드 II 작전은 단순한 방어차원을 넘어 케산 주변의 적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같이 섬멸작전에 집착한 사령관의 결심때문에 병사들은 더 많은 피를 흘리게될 운명에 처했다.
제3해병사단장 레스본 맥콜 톰킨즈 소장은 스코틀랜드 II 작전 지휘관에 부사단장 야콥 그릭 준장을 임명하였다.
이때까지 그릭 준장은 케산 철수 준비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으나
웨스트모얼랜드의 작전 연장 지시에따라 "그릭 기동대"를 편성하게된다.
그릭 기동대는 1, 26해병연대와 9연대 1대대, 그리고 제1기병사단 2여단으로 편성되었다.
작전 지시에따라 제1해병연대는 카 루에서 케산으로 공수되었다.
제26해병연대장 메이어즈 대령 또한 스코틀랜드 II 작전의 주요 책임자였으며,
제9해병연대 1대대장 존 카힐 중령은 케산 689고지 남서쪽에서 차후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4월 16일부터 작전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6일 이른 아침, 제9해병연대 1대대 A중대는 689고지 남서쪽 작은 언덕을 순찰했다.
오전 10시, 중대장 핸리 뱅크 대위는 코키리 풀이 무성히 자란 지역으로 2개 정찰분대를 내보냈다.
접근하던 분대를 향해 박격포탄와 총탄이 날아왔고, 선임하사를 비롯 2명이 그 자리에서 전사하였다.
분대가 공격 당하자 중대장은 1, 2 소대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2소대장 마이클 헤이든 중위는 산마루 북쪽의 북베트남군 벙커를 향해 접근해들어갔다가 총탄 세례를 받았다.
소대는 즉각 대응사격에 들어갔지만 적 벙커는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벙커 공격을위해 접근하던 화기소대도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강력한 반격에 A중대의 사상자는 빠르게 증가하였다.
중대장 뱅크 대위는 대대장 카힐 중령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카힐 중령은 후퇴하지 말도록 지시한 후 C, D중대에게 비상대기하라고 지시하였다.
정오쯤에 뱅크 대위로부터 다시 구원 요청이 있자 대대장은 C중대와 함께 출발했다.
현장에 도착한 대대장은 거의 30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낸 A중대가 산마루 북쪽에 고립된 것을 알게되었다.
대대장은 C중대장 로렌스 힘머 대위에게 남쪽으로 공격토록 명령했다.
C중대가 측면을 타고 접근하자 은폐된 벙커에서 화기가 불을 뿜었다.
순식간에 중대장과 소대장, 중대 선임하사 등이 쓰러졌다.
중대장이 쓰러지자 윌리엄 코넬리 중위가 쓰러진 힘머 대위 대신 중대를 지휘하였다.
한편, 케산 연대 지휘소에서 무전을 청취하고 있던 연대장 메이어즈 대령이
카힐 중령에게 지원이 필요하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지원이 필요하지 않다고 응답했다.
설상가상으로 1대대와 너무 근접한 지점에 지원 포격되는 오발 사고도 발생하는 등 A, C중대는 곤경에 빠져 있었다.
2개 중대는 풀 속에 몸을 숨긴채 총탄과 박격포탄 세례를 받고있었다.
대대장은 D중대장 존 카길 대위에게 A중대 쪽으로 접근한 후 북서쪽으로부터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D중대도 너무나 정확하고 조밀한 공격 때문에 접근에 무척 어려움을 겪어야했다.
D중대가 공격을 시작했을 때 A중대장은 사상자 구출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적 저격병 때문에 접근이 쉽지않았다.
오후 5시가 훨씬 지난 시각, 대대장은 모든 중대에게 퇴각을 명령했다.
퇴각도 쉽지 않아 새벽 3시 쯤에야 마지막 병력들이 안전지대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다음날 아침, 몇 명의 해병들이 전투가 벌어졌던 산마루 부근 계곡에서 허버트 허니컷 상병의 고함 소리를 들었다.
2개 분대가 그를 찾기위해 출동했다. 분대원들은 정확한 위치를 찾기위해 고함을 지르도록 하였다.
분대가 허니컷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지점 가까이 접근했을 때 두발의 총성이 울렸고 고함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허니컷은 아직 죽지 않았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그 것은 다른 병사의 고함 소리였다.
공격 중 부상 당한 C중대원 허니컷 상병은 부상자들과 함께 포탄 구덩이에 고립되어 있었다.
적의 사격이 계속되자 허니컷은 해가지면 빠져나가 위생병과 구조대를 데려올 생각이었다.
해질 무렵 구덩이를 빠져나와 낮은 포복으로 나아가던 도중, 심하게 부상당한 중대장 힘머 대위를 발견했다.
중대장의 상처를 돌보다 다시 총상을 당한 허니컷은 수류탄을 투척하여 사격을 멈추게하였다.
새벽녘에 중대장을 엄폐지로 옮긴 다음 지원요청을 위해 협곡으로 향했지만 출혈이 너무 심해 쓰러져 버렸다.
이날 관측기의 적 벙커 50m부근에서 생존자를 발견 보고를 접한 대대장 카힐 중령은
메이어즈 연대장과 그릭 준장에게 구출 작전을 실시하겠다고 보고하였다.
1대대는 구출 작전에 참가할 자원자를 모집하였다.
자원자들은 2대의 CH-46 씨 나이트 헬리콥터에 탑승했다.
1대의 헬기에는 전투팀이, 또 한 대에는 생존자 회수팀이 탑승했다.
산마루에 착륙한 1번 헬기에서 뛰쳐나온 전투팀이 북베트남군을 향해 사격을 개시했다.
4명의 북베트남군을 사살한 해병들은 즉시 생존자를 찾아봤지만 주위에는 온통 시신만 널려있었다.
총탄과 박격포탄이 헬기 바로 옆에 떨어졌고, 헬기 사수들은 50구경 기관총 사격으로 대항했다.
구조대는 즉각 위험지대를 벗어나야만 했다. 그러나 한 대의 CH-46 헬기가 엔진에 20발의 총탄을 맞고
689고지 후방 1km지점에서 강착하는 등 구조 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뒤이어 무장 헬기의 엄호하에 구조에 자원한 육군 헬기가 벙커 부근에서 1명의 생존자를 구출해냈다.
더 이상의 구조 작전 계획은 없었지만 8일 이른 아침,
해병들은 다시 한번 방어선 인근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허니컷의 목소리를 듣게되었다.
카힐 중령은 즉각 구조에 들어가겠다고 보고하였다.
제26연대장 메이어즈 대령은 북베트남군이 미끼로 사용할 지도 모르니
각별히 주의할 것과 방어선으로부터 500m 범위를 벗어나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허니컷 구조에 나선 육군 헬기가 정오쯤에 허니컷을 구조하여 전방응급구호소로 후송했다.
허니컷은 중대장 힘머 대위가 17일까지 생존해있었다고 보고하였다.
22일 회수작전에 나선 해병대는 3구의 시신을 제외한 나머지를 회수하였다.
9연대 1대대는 전사 41명, 부상 32명, 3명이 실종되는 피해를 입었다.
힘머 대위는 죽었지만 부상 당한 지휘관의 목숨을 구하려했던 허니컷 상병에게 해군 십자장이 수여되었다.
전우를 꼭 회수한다는 것이 미 해병대 전통이지만 위험한 때 무리하게 회수하려다가는
오히려 더 많은 피해를 당할 수 도있었기 때문에 신중하여야 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북베트남군이 전사자나 부상자를 미끼로 사용한 경우도 허다했다.
제3해병사단장 톰킨즈 소장은 원인 규명을 명령, 대대장 존 카힐 중령을 일시 해임하였다.
그러나 카힐 중령은 후일 대령으로 승진하고 1978년에 전역한다.
4월 18일부로 제26해병연대장 메이어즈 대령은 케산 방어 지휘권을 제1해병연대장 스탠리 휴즈 대령에게 인계하였다.
26연대와 9연대 1대대 해병들은 5일간의 휴식을 위해 쾅 트리시와 동하로 공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