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패전속 승리학/중.월 전쟁

구름위 2013. 9. 26.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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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이래 공산 진영의 맹주 소련과 중국은 노선 차이로 대립각을 세우며 잦은 충돌을 벌여 왔다. 75년 중국과 마주한 북베트남(월맹)이 인도차이나 공산화를 이뤄 내자 소련은 베트남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며 중국 고립을 획책했다.

중국은 거꾸로 미국과의 화해를 추진하고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 정권을 지원해 소련과 베트남을 견제했다.78년 12월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전격 침공, 크메르 루주 정권을 전복시키자 중국의 긴장은 극에 달했다. 덩샤오핑의 뜻에 따라 중국 중앙군위는 중·소 국경지대 군구에 비상령을 내리고 이어 남부의 광저우군구와 쿤밍군구에 군사작전 준비 명령을 내렸다.

문화대혁명의 후유증에서 간신히 벗어나 전면전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던 중국은 베트남에 대한 제한적인 군사작전으로 소련에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는 방법을 선택했다.광저우군구와 쿤밍군구는 79년 1월 중으로 급히 작전안을 마련하고 국경지대에 병력을 전개했다. 양 군구가 집결한 전력은 9개 군에 29개 보병사단, 2개 포병사단, 2개 고사포사단 등 56만 명에 이르렀다.

외국의 전문가들은 한국전쟁에서 19병단을 지휘한 쿤밍군구 사령관 양더즈(楊得志)가 한국전쟁같이 침투 후 포위전 형태로 작전을 펴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양더즈는 의외로 대규모 전차와 야포 지원을 받는 정면 공격을 선택했다. 중국군은 국경의 20개 지점에서 돌파해 베트남의 주요 변경 도시들을 향해 포위망을 좁힐 계획이었다.

2월 17일 ‘자위반격전’이라는 미명 하에 침공을 개시한 중국군은 베트남군 주력을 끌어들여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미군과의 전쟁으로 단련된 베트남군은 훨씬 주도면밀했다. 베트남군 6개 정규 보병사단은 후위에서 수도 하노이로의 돌발 공격에 대비하고 16개 지방 국경수비대 10만 명만을 주요 방어전에 투입했다. 캄보디아에 투입된 주력 15만 병력도 요지부동이었다.

중국군은 압도적인 전력을 자랑했지만 정작 초전부터 고전을 면치 못했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베트남 국경수비대는 포위망에 걸려들지도 않았으며 예리한 역습으로 중국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중국군은 4개 주요 지방 도시를 장악하고 베트남 영내로 최대 40㎞까지 진출했지만 대부분 실속이 없었으며 최대의 격전지 랑손에서 체면치레를 위해 3월 2일부터 벌인 공격도 무위로 돌아갔다. 의외의 피해에 놀란 중국은 3월 6일 일방적 철군을 시작하고 16일까지 퇴각을 완료, 한 달간의 중·월전쟁은 막을 내렸다.

중국은 베트남에 본때를 보여 준 승리라고 선전했으나 실상은 적군 주력을 끌어내지도 못했으면서 졸전 끝에 불과 17일 만에 2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낸 명백한 패배였다. 인상적인 물량의 대규모 전차와 포병을 투입했음에도 운용기술은 40~50년대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고 계급제 폐지로 전투 현장의 통제도 엉망이었다.

문화대혁명의 교조적인 혼란 속에서 군 현대화를 게을리한 결과 인력·장비 등 모든 면에서 중국군이 질적으로 형편없이 낙후됐음이 드러난 것이다. 중·월전쟁은 많은 부분이 오랫동안 비밀에 부쳐졌으나 결국 중국군 변혁의 주요 동인으로 작용하며 현대 군 개혁의 지향점을 제시한 전쟁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