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선 아르헨티나는 계속된 경제 침체와 정치 불안으로 위기를 맞았다. 81년 대통령 직무대행에 취임한 갈티에리 중장은 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과 같은 민족주의적 이벤트로 민심을 돌려놓을 기회를 모색했다.
이에 칠레와의 영토 분쟁과는 별도로 포클랜드 제도 등 남대서양의 영국령 섬들에 대한 전격 침공을 기획했다.아르헨티나 군부도 영국과의 정면 승부는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영국의 허술한 방위태세를 이용한 전격 점령으로 선전 효과를 거둔 뒤 본토로 다시 퇴각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역시 경제난으로 허덕이던 영국이 수천 마일이나 떨어진 작은 영토 분쟁에 과감히 대응하지 못하리라고 오판했다.82년 3월 19일부터 남 조지아 섬에서 아르헨티나 민간인들의 무단 상륙을 둘러싸고 벌어진 분쟁에 이어 4월 1일 밤부터 아르헨티나 해병 특수부대 병력이 포클랜드에 상륙했다. 100명도 안 되는 해병이 방위하던 영국 총독부는 다음날 아침 중과부적으로 항복했다. 분노한 ‘철의 여인’ 대처 행정부는 즉각 강경 대응을 선언했으며 영국군은 항모 2척을 중심으로 한 해군전단과 상륙부대로 해병 제3코만도여단을 급파했다.
사태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아르헨티나 군부는 계획을 바꿔 포클랜드 주둔군을 강화하고 적극 방어를 시도했다. 한편 아센시온 섬에 기지를 설치한 영국 공군은 포클랜드의 비행장을 폭격하면서 아르헨티나 공군을 압박했고, SAS 특수부대 병력은 4월 25일 남 조지아 섬을 탈환했다. 5월 2일 영국 핵추진 잠수함 컹커러 호에 의해 아르헨티나 경순양함 벨그라노장군 호가 격침당하면서 아르헨티나 해군은 철수해 수세로 전환했다. 아르헨티나는 4일 프랑스제 쥐페르 에탕다르 전투기와 엑조세 미사일로 구축함 쉐필드 호를 격침시켜 세계를 놀라게 했으나 점증하는 손실을 무릅쓰고 반격에 나서기에는 미흡했다.
마침내 5월 21일, 영국 해병대는 동 포클랜드 섬 서쪽 끝단에서부터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특수부대를 이용해 섬 서부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한 영국군은 6월 1일까지 제5보병여단을 상륙시키며 사단급으로 증강한 뒤 총독부가 있는 섬 동쪽의 핵심 요지 스탠리 항으로 진격했다. 6월 11일 밤부터 스탠리를 둘러싸고 전개된 치열한 시가전에서 영국군이 아르헨티나군을 무력화하고 핵심 지구를 장악, 14일 아르헨티나군 9800명은 패배를 시인하고 항복했다. 이어 20일에 남 샌드위치 제도까지 탈환한 영국은 이로써 74일간 벌어진 전쟁의 승리를 선언했다.
포클랜드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최대급의 해상전이라는 군사적 의미와 냉전 막바지에 점증해 가던 지역 분쟁의 정치·경제적 의미를 확인시킨 중요한 이정표였다. 아르헨티나는 내정의 활로로 전쟁을 선택했으나 국력을 넘어선 과욕의 결과는 막대한 전비로 인한 경제 파탄과 정권의 퇴조였다. 애초의 의도처럼 무리한 충돌을 자제하고 상징적 효과에만 군사 행동을 한정했더라면 얻을 수 있던 효과조차 모두 날려버렸던 것이다. 영국도 명예를 얻었으나 기나긴 보급선과 전비 조달로 휘청대면서 강대국의 군사 행동도 점점 둔중해지면서 실익을 얻기 어려워지는 조류를 확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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