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2월 스페인에는 범 좌익 인민전선 정부가 수립됐다. 이에 반대하는 우익 진영이 7월 17일에 전직 참모총장 프랑코 장군 지휘 하에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다. 우파 반란군이 기선 장악에 실패하고, 좌파 공화군도 초기 진압에 실패하면서 내전은 장기전으로 치달았다.
정규군 위주로 독일·이탈리아의 지원을 받는 프랑코군은 시간이 지나며 우수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시민군 위주의 공화군을 압도해 갔다. 37년 프랑코군이 수도 마드리드를 위협하고 이어 바스크와 카탈루냐 지방으로 진공하면서 수세에 몰린 공화파 정부는 역전의 실마리 찾기에 고심했다. 소련 군사고문단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공화군은 마드리드 서쪽 25㎞에 위치한 작은 마을 브루네떼에서의 반격을 기획했다.
공화군은 미야하 장군 지휘 하에 5·18군단의 2개 군단 6만 병력과 전차 128대, 야포 102문 외에도 2만 병력의 예비대를 집결했다. 최고사령부는 수적 우세와 기습을 이용해 마드리드 방향으로 깊숙이 침투하는 기동 양익 포위작전을 주문했으나 기동 전 마인드가 부족한 미야하 장군의 참모부는 단편적인 공격으로 점철된 조악한 작전안을 마련했다.
마침내 7월 6일 아침, 공화군은 공세를 개시했다. 공화군 선봉 11사단은 브루네떼 남쪽에서 돌파구를 마련하며 마을을 포위해 들어 갔다. 기습을 당한 프랑코군 71사단은 당황하며 그날 낮 마을을 내주고 퇴각했으나 다른 공화군 사단들의 진격은 거센 저항에 부딪쳤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프랑코군은 7군단장 발레라에게 전권을 주고 1군단 병력과 독일군 콘돌군단을 증원했다.
미야하는 프랑코군의 저항에 맞서 과감한 전진을 명령하지 않았다. 11사단의 초기 성공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단들이 측면을 소탕하기를 기다리며 진격을 정지시켰고, 8일에는 진격을 보조해야 할 35사단마저 측면으로 빼돌렸다. 결국 공화군은 끼호르나를 점령했으나 귀중한 전차와 탄약을 소모한 사이 정작 주공 11사단의 돌파 기회는 프랑코군 증원부대에 의해 완전히 봉쇄됐다.
공화군의 공세는 방향을 잃었으며 그나마 곳곳에 산재된 프랑코군 소규모 거점 소탕에 낭비됐다. 프랑코군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해 가면서 보급로가 위협받자 7월 15일 공화군은 공격을 중지하고 수세로 돌아섰다.
마침내 18일부터 프랑코군은 콘돌군단의 지원을 받으며 6개 사단과 2개 여단을 투입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다시 1주일간의 격전 끝에 25일 공화군은 독일군 전차와 프랑코군의 공격에 브루네떼까지 내주고 2만5000명의 사상자를 남긴 채 패퇴하고 말았다.
적지 않은 전차를 운용하고도 패배한 스페인 공화군의 사례는 아이러니하게도 소련을 비롯한 여러 열강이 기계화부대로의 변혁을 추진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됐다. 대전차포로 무장하고 거점에 틀어박힌 부대에는 기갑부대가 취약하다는 잘못된 인식이 퍼졌기 때문이다.
정작 기동작전을 회피하다 공격이 좌절된 공화군의 패인과 소수의 전차나마 집중 운용한 콘돌군단의 승인은 독일만이 제대로 평가했다. 독일만이 기갑부대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했던 것이다. 브루네떼 전투는 공화군이 패배로 치닫는 전환점이었다는 사실 외에도 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 초반의 승패를 가른 핵심적 전훈의 원천으로 아직껏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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