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소련의 붕괴와 함께 체첸공화국에도 민족주의 열풍이 몰아닥쳤다. 이곳은 예로부터 체첸인들이 오스만투르크와 제정 러시아를 상대로 끈질기게 저항하며 민족적 자긍심을 높여 온 지역이었다.
91년 10월 체첸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한 두다예프는 93년 독립을 선언하고 비 체첸계 주민들을 학대하며 추방하기 시작했다. 체첸의 유전지대와 송유·정유 시설은 포기할 수 없는 중요 시설이었기에 러시아는 체첸의 분리 독립을 결코 용인하지 않았다.
94년 8월이 되자 핍박받던 비 체첸계 주민들의 무장 저항운동이 벌어지자 러시아는 이들에게 무기를 지원하며 두다예프 정권 전복을 기도했다. 러시아 대통령 옐친은 사태가 악화되자 한발 더 나아가 러시아군의 직접 침공으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했다. 94년 12월, 체첸 국경에 집결한 3만8000명의 러시아군은 전격적으로 체첸 수도 그로즈니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쉽게 그로즈니를 장악하고 두다예프를 축출하리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12월 31일 그로즈니에 진입한 러시아군 6000명은 건물 곳곳에 숨어 RPG 대전차로켓을 활용하는 체첸 병사들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 선봉에 선 제131 ‘마이코프’여단은 단 3일 만에 투입된 전차 26대 중 20대, BMP 보병 전투차 120대 중 102대를 잃었다. 기갑 전력을 이용해 단시간에 중심가를 장악한다는 전술은 비현실적이었음이 드러났다. 체첸군은 처음에는 저항 없이 철도역 등 요충을 내줬지만 나중에 거리를 따라 늘어선 러시아군 기갑 차량 종대를 앞뒤에서 급습, 고립시키고 하나하나 격파해 나갔다.
러시아군은 시가전에 대비한 훈련·장비는 물론 작전 전체에 걸쳐 준비가 엉망이었다. 전차는 고각 사격이 안돼 건물 고층에 위치한 적을 제대로 상대하지 못했다. 지도조차 소축척 지도뿐이어서 단위 부대들은 시가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저격병과 부비트랩의 희생양이 됐다. 부대 간 지경선은 복잡한 시가에 모호하게 그어졌고, 인접 부대 사이에 통신 수단도 부족해서 오인 사격과 오폭이 잇달았다.
겨우 2월이 돼서야 러시아군은 시가를 통제하기 시작했으나 체첸군은 외곽으로 밀려가서도 게릴라전을 통해 끊임없이 저항하며 테러로 맞섰다. 결국 1년 반만인 96년 8월, 바사예프의 지휘 하에 체첸 반군들은 그로즈니 시가에 주둔한 3000명의 러시아군을 완전히 포위하는 대역습에 성공했다.
구원군 파견도 어려운데다 냉소적 여론의 압박에 몰린 옐친은 결국 휴전에 동의했으며 러시아군은 11월부터 철군에 들어가며 패배를 인정했다.80년대까지 냉전 속에서 대규모 정규전에 초점을 맞춰 오던 강대국들은 체첸 전쟁을 통해 기존의 군 조직이 새로운 지역분쟁과 시가전에 얼마나 취약한지 뼈저리게 깨닫게 됐다.
지역 주민들을 적으로 돌릴 수 있는 무분별한 화력 남발을 억제하고 여러 병과의 단위 부대들이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인구 밀집지대용 전술체계 개발과 편제 개편 필요성이 시급히 부각됐다. 사태 발발 후 10년이 지나도록 체첸 문제로 시달리는 러시아의 현실이야말로 뚜렷한 전선이 사라지고 정보화시대의 여론 압박에 시달려야 하는 21세기 전장 환경을 보여 주는 교과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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