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은 대한제국이 끝내 일본의 마수에 넘어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한편으로 20세기 전쟁의 새로운 변화를 예고했다는 의의도 매우 큰 전쟁이었다. 이 격렬했던 전쟁의 최고조에 벌어진 최대 규모의 지상전이 바로 봉천(奉天)전투였다.
1905년 1월, 일본군은 뤼순을 간신히 점령한 3군을 뒤로한 채 동청철도 남만주 지선을 따라 전력을 북상시키고 있었다. 1월 25일, 만주지구 러시아군 총사령관 쿠로파트킨 대장은 헤이커우타이에서 러시아 1·2·3군으로 맹공을 퍼부어 일본군을 위기에 빠뜨렸으나 결정타를 날리는 데는 실패하고 봉천 남방의 방어선으로 퇴각했다. 쿠로파트킨은 결전을 회피하고 일본군을 만주 깊숙이 끌어들여 고사시킬 요량이었다.
러시아군은 2월 말에 다시 일본 2군에 대한 역습을 기도했다. 그러나 1·11사단으로 편성된 일본 압록강군이 좌익을 파고들자 방어로 전환했다. 기회를 엿본 일본 만주군 총사령관 오야마 대장은 북상하는 3군이 러시아군 우익으로 진출해 후위를 위협하는 동안 중앙에서 총공세를 펴 봉천을 함락시킬 계획을 세웠다. 37만 병력의 러시아군에 대해 25만 일본군은 1000여 문의 야포를 동원, 2월 25일 정면 공격을 개시했다.
양측은 모두 동토의 대지에서 야포 위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가운데 접전을 벌이며 격심한 피해를 입었다. 중앙 공격이 지지부진하자 오야마는 3군의 선전을 기대했으나 3군도 뤼순 전투의 후유증으로 병력이 3만8000명에 불과했고, 러시아군의 역습에 허덕이며 한계에 봉착했다. 쿠로파트킨은 이때 치명적인 오판을 내렸다. 뤼순 전투의 주역 일본 3군의 전력을 10만 수준으로 과대평가하고 러시아군의 핵심 보급선인 동청철도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3월 6일, 러시아군은 봉천 방어선에서 병력을 빼내어 일본 3군 전면으로 증원하기 시작했다. 이어 9일에는 봉천까지 포기하고 하얼빈 방향의 티에링에 새로운 방어선을 수립하라는 전면 퇴각 명령이 내려진다. 결국 다음날인 10일에야 일본군은 봉천에 입성했으나 그간 발생한 7만5000의 막대한 사상자로 인해 제대로 추격할 여력도 없었다.
일본은 3월 10일을 육군 기념일로 제정할 만큼 봉천 전투의 표면적 승리에 고무됐으나 실상은 훨씬 참담했다. 러시아군의 손실은 4만여 명의 포로를 제외하면 사상자 5만 정도로 오히려 양호했으며, 쿠로파트킨의 원래 의도대로 일본군은 보급과 충원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쿠로파트킨의 문제는 전략 방향보다 그의 전략을 지탱하기 곤란한 혁명 전야의 러시아 정치 상황을 안이하게 바라봤다는 점이었다. 굳이 장기 청야작전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도 봉천 전투에서 좀 더 과감하게 수적 우세를 살려 공세를 밀어붙였다면 충분히 일본 만주군을 붕괴시킬 수 있었다.
전략적 방어와 퇴각은 때로 결정적 반격의 중요한 밑거름이다. 하지만 봉천 전투 이후 무력감에 지쳐 스스로 붕괴된 러시아군의 사례에서 보듯이 지휘관의 정확한 정세 판단 없이 남발된다면 아군의 전의 상실만을 불러 일으킬 치명적인 독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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