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괴뢰국가 만주국은 1932년 건국 이래 몽골과 잦은 국경 분쟁에 시달렸다. 노몬한 일대의 국경선도 모호해 만주국은 할흐 강을, 몽골은 그 동쪽 약 20㎞에 위치한 구릉 지대를 국경으로 주장했다.
1939년 5월 11, 12일에 양측의 심화된 긴장은 국경수비대의 충돌로 이어졌다. 이에 후견국 일본과 소련은 지원군을 급파해 연대급 병력의 교전이 일어났고, 몽골 측이 먼저 승리를 거뒀다.
패퇴한 일본 관동군은 기존의 23사단에 7사단 병력을 증강해 할흐 강 동안 교두보의 소련·몽골군을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23사단 주력이 적진을 우회, 할흐 강을 도하해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사이에 2개 전차 연대를 갖춘 야스오카 지대(支隊)가 정면 공격으로 승부를 낼 요량이었다. 소련 측도 일본군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주코프를 지휘관으로 파견함과 동시에 대규모 증원 병력을 인근의 탐사크볼락에 집결시켰다.
7월 1일 아침, 일본군 23사단은 할흐 강을 넘어 공격을 개시했다. 처음에는 몽골군 6기병사단과 접전을 벌였으나 3일에 소련군 지원 병력과 맞닥뜨렸다. 전차여단의 지원을 받는 소련군에게 일본군 보병은 큰 타격을 입고 5일에는 다시 동안으로 쫓겨갔다. 정면 공격을 선택한 야스오카 지대 역시 89식 중(中)전차를 앞세우고도 조밀한 방어진지를 구성한 소련군에게 큰 피해를 입고 격퇴됐다.
일본군은 5000여 병력을 잃었지만 전력 보충은 지지부진해 병력이 3만 명을 밑돌았다. 반면 소련군은 신속히 전력을 증원해 5만7000명의 병력에 498대의 전차를 집결시켰다. 일본군은 이러한 위협을 파악하지 못하고 북익은 허술한 만주국군 기병연대가, 남익은 71연대가 담당하는 느슨한 방어선을 펴고 있었다.
8월 20일, 주력을 양익에 배분한 소련군은 취약한 일본군 측면을 손쉽게 돌파해 신속하게 배후로 진출했다. 포위당할 위기에 몰린 일본군은 24, 25일에 걸쳐 9개 대대를 동원해 반격을 시도했지만 혼란 속에 병력 집결도 제대로 못하고 산발적인 정면 돌격 끝에 막대한 손실만 입었다.
급기야 27일에는 후위의 포병부대까지 전멸당하자 일본군은 곳곳에서 포위돼 섬멸되거나 만신창이가 된 채 동쪽으로 퇴각했다. 31일에 이르자 전 일본군은 몽골이 주장하던 국경선 너머로 밀려났고, 소련군은 진격을 멈췄다. 분노한 관동군은 증원과 반격을 기도했으나 대본영이 개입해 추가 행동을 중지시킴으로써 9월 16일 정전협정이 발표됐다.
할흐 강 전투는 지엽적인 전술 변화를 넘어 기동력 혁신이 몰고 온 현대전의 대변혁을 예고했다. 작전 목표가 제한적이었기에 소련군은 애초부터 종심기동보다 대규모 전차와 포병 집결을 통한 양익 포위에 주력했다.
소련군은 시베리아 철도에서 700㎞나 떨어져 철도 종점에서 200㎞ 떨어진 일본군에 비해 크게 불리했음에도 대규모 자동차 수송부대를 운용해 빠른 집중을 가능케 했다. 철도에 의존하던 병참 기능이 대량의 자동차로 보완됨으로써 전혀 새로운 수준의 기동타격력과 주도권을 선보였다.
일본 육군은 전후 조사를 통해 이런 사실을 인지했음에도 체면 문제 때문에 개혁보다 진상 은폐에 더욱 신경을 썼다. 값비싼 전훈을 얻고서도 자기 개혁의 원동력으로 삼지 못함으로써 결국 일본 육군은 구태의연함 속에 패배로 치닫게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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