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패전속 승리학 / 발라클라바 전투

구름위 2013. 9. 26.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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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 노쇠해 가는 오스만튀르크 의 영토를 둘러싼 유럽 열강들의 각축이 격화됐다. 호시탐탐 계속되는 러시아의 남진에 불안을 느껴 온 영국·프랑스는 1854년 9월 투르크와 함께 6만 명의 연합군을 상륙시킴으로써 유명한 크림전쟁의 막이 올랐다.

핵심 전장은 곧 크림 반도 최대의 군항 세바스토폴로 옮겨갔다. 포위망을 좁혀 오는 연합군을 향해 러시아군은 흑해함대의 전함들을 자침시키고 함포와 수병들을 육상전에 투입하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러시아군은 육군의 주력 다수가 오스트리아의 견제에 묶여 있었고, 이스탄불로부터 해상 보급을 받는 연합군에 비해 보급선도 길어 불리했다.

격렬한 포위전에서 소모돼 가는 농성군을 구원하기 위해 러시아군은 멘쉬코프가 지휘하는 2만5000 병력을 투입했다. 이 병력은 세바스토폴 남쪽에 위치한 영국군 주요 보급항의 하나인 발라클라바의 연합군을 가격해 포위망을 뒤흔들 요량이었다.10월 25일 아침, 러시아군은 상대적으로 약한 튀르크군 진영에 선공을 퍼부었다. 일격을 당한 튀르크군은 예상대로 패주하기 시작했고 이어 공격의 칼날은 영국군을 향했다.

러시아군은 발라클라바 남북의 고지를 따라 영국군 진지를 공략해 포병진지 일부를 탈취하는 성공을 거뒀다. 다급해진 영국군 사령관 라글란 백작은 5개 연대로 구성된 중기병여단에 반격을 명령, 가까스로 기세를 꺾었다.순간 러시아군은 탈취한 대포를 갖고 보다 안전한 위치로 물러서려는 듯 보였다. 멀리서 상황을 파악 중이던 라글란은 이를 방치할 수 없다고 보고 기병사단 사령관 루칸 백작에게 경기병여단을 이용, 이들을 저지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정작 전령이 전달한 명령에는 정확히 적진 어느 부분을 공격할지가 불분명했다. 라글란은 경기병여단 좌측 고지 후면 보루에 대한 반격을 원했으나 경기병여단의 주둔 위치에서는 시야가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공격 목표가 적진 깊숙이 2㎞ 가까이 떨어진 보루의 적이라고 오해했다.능동적인 판단이 전혀 없이 카디간 백작이 이끄는 673명의 경기병여단은 고지 사이의 평탄한 분지를 통해 압도적인 적을 향해 맹목적으로 내달렸다. 이 정신나간 영국군 기병 돌격에 러시아군은 50여 문의 포로 응사했다.

영국 경기병들이 추풍낙엽으로 쓰러지며 실책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만신창이가 된 경기병여단은 345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했다. 그나마 프랑스 기병대의 구원으로 전멸을 모면할 수 있었다.단순한 해프닝이라고 치부하기에 현장의 영국군 고급 지휘관들은 너무나도 무책임한 모습으로 일관했다. 사전에 지형을 숙지하고 전황을 능동적으로 파악해 상하간에 임무에 대해 명쾌하게 이해하는 것이 기본임에도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영국 지휘관들은 판단 책임을 회피하고 맹목적인 자세로 일관해 애꿎은 병사들만 큰 희생을 가져왔다.같은 날 ‘씬 레드 라인’(thin red line)이라 불린 2열 횡대의 변칙 전열까지 써가면서 러시아군 기병 돌격을 막아낸 93연대의 분전과 너무도 대조되는 사건이었다. 결국 이 ‘경기병대의 돌격’은 오늘날까지도 세인들에게 무모하고 맹목적인 군사 행동의 상징으로 전해지면서 후세 지휘관들에게 권계의 의미로 널리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