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패전속 승리학 / 발칸전쟁

구름위 2013. 9. 26.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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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의 발칸반도는 제1차 세계대전을 예고하는 일촉즉발의 화약고였다. 오스만튀르크의 오랜 지배구도가 붕괴되면서 생겨난 신생독립국들과 이들에게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강대국들 모두 서로를 견제하며 헤게모니 강탈에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오늘날의 편견과 달리 당대 발칸 신생국들은 상당한 군사적 역량을 갖추고 있었으며 세르비아·몬테네그로·불가리아·그리스는 발칸연맹을 결성, 오스만튀르크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들 왕국들은 마침내 1912년 10월 8일 선전포고와 함께 일제히 오스만튀르크를 침공, 제국 영토 뜯어먹기에 나섰다.

이 제1차 발칸전쟁에서 발칸연맹은 거의 두 달 만에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 지방 대부분을 석권했고 오스만튀르크는 이듬해 5월 런던조약을 통해 유럽의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는 굴욕을 겪었다.발칸연맹국들 가운데 불가리아는 대단히 우수한 동원체계를 갖췄으며 현대적인 동력 수단이 없음에도 상당한 기동력을 구사했다. 500만 명이 채 안 되는 인구로 2주 만에 40만 병력을 동원, 4주 만에 250㎞ 이상 진격하며 오스만튀르크군을 연파한 실력은 열강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불가리아는 이를 바탕으로 곧바로 발칸반도의 맹주로 올라서려는 욕구를 표출했다. 연맹이 쟁취한 마케도니아 지역 전유를 주장하는 불가리아에 맞서, 이를 견제하려는 세르비아·그리스는 일부 지역만을 내주려고 했다.결국 6월 16일 밤 불가리아는 군사 행동에 돌입해 4개 야전군을 대 세르비아 전선에, 1개 야전군을 대 그리스 전선에 투입했다. 불가리아군은 우세한 기동력을 살려 세르비아·그리스의 교통로를 우선 절단하고자 했으나 악시오스 강 전선에서 세르비아군 격파에 실패하며 정지했다.

콘스탄티노스 국왕이 이끄는 8개 사단의 그리스군은 6월 19일에 킬키스를 향해 전면 공격을 펼쳤다. 불가리아군은 고지의 참호군을 장악해 방어에 유리했으나 두 배 가까운 수적 우위를 앞세운 그리스군의 포위 위협에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대 그리스 전선의 교란으로 인해 불가리아군은 대 세르비아 전선에서도 수세에 몰려 브레갈니카에서 연파당하고 말았다. 이 틈을 타서 다시 루마니아와 오스만튀르크까지 연합해 불가리아를 공격하자 불가리아는 두 달 만에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2차 발칸전쟁의 전투마다 불가리아군은 전장에서 우수한 도보 기동력을 바탕으로 한 연이은 과감한 공격으로 초전의 기세 장악에는 계속 성공했으나 이를 효과적으로 이용해 수적으로 앞서는 적을 패배로 몰고 가는 데는 실패했다. 공용화기의 발달과 함께 기동력이 우세하더라도 충분한 파괴력을 갖춘 기동화력이 수반되지 않았을 때 노정되는 한계가 극명해진 것이다. 발칸전쟁에서 불가리아의 고전적인 보병 기동은 성공과 좌절을 동시에 겪었지만 결국 당대의 소모적 진지전으로의 퇴행조류에 무의미하지만은 않은 교훈을 던졌다고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