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세유럽

[스크랩] [멘엣암즈]웨일즈 전쟁

구름위 2012. 10. 7.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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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전에 DC 역갤에 3부작으로 올렸던 글입니다;;;

너무 딱딱한 것 같아서 좀 가볍게 써보려고 했는데 더 읽기 난감해져버렸다는(...)

그래도 귀찮아서 수정 안했으니까 뭐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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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웨일즈 전쟁-1277 

 

1066년 9월 28일, 그 유명한 노르망디의 정복왕 윌리엄은 영국에 상륙해서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해럴드 왕하고 맞짱 뜨기 위해 근처 헤이스팅스에 진을 쳤어.
그리고 10월 14일에 두 군대는 여섯 시간동안이나 치열하게 싸웠지. 그 결과는 ?O들도 알다시피 앵글로-색슨족의 참패였어. 해럴드는 전사하고 군대는 흩어졌지.
이들 중 일부가 비잔틴 제국으로 가서 바랑기안 친위대(Varangian Guard)로 근무했다가, 노르만 군대와 싸울 때 열 받아서 마구 돌진했다가 전멸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제껴 두고, 좀 더 이야기를 진행시키면 이 전투 이후 영국은 다시는 대륙에게 점령되지 않았지.
노르만인들의 5,000명(아마도 과장)의 기사와 수천 명의 대륙 출신 어중이떠중이들은 돌아가긴 했어도 노르만인들이 수립한 강력한 정부는 잉글랜드를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어.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에 성들이 세워져 앵글로색슨족을 통솔했고, 영국의 전체 영주 중 4/5가 물갈이 됐어. 이 때 허물어진 성들도 적지 않았지.
어쨌든 이런 시원한 물갈이 결과로 프랑스어가 영국의 왕실에서 쓰이게 되고, 영국 왕은 프랑스 왕의 봉신이 되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지.


근데 이게 전부가 아니었던 고야. 앵글로색슨족에게 쫓겨났던 켈트족이나, 상당히 오래 전부터 잉글랜드로 들락거리던 스코트족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지.
바로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였어.
결국 앵글로-노르만계의 왕들은 이들과 싸우는데 골머리를 앓을 수 밖에 없었지. 결국 영국은 통일되었지만, 웨일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전부 통치하는데는 엄청난 시간이 소비되었고, 통일된 뒤에도 월드컵 축구팀은 따로따로 출전할 정도니까.

 

근데 웨일즈에 있던 ?O들은 스코틀랜드처럼 오래 버티지는 못했고, [브레이브 하트]에 나오는 악당 에드워드 1세가 왕이 된 1272년 전부터 잉글랜드의 세력권에 있었어.
웨일즈의 영주들(Lords Marchers)은 이미 영국 왕의 봉신(vassal)이었고, 이들이 웨일즈의 넓은 영토를 통치하고 있었지. 이들의 힘은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은 성채와 이 성에 떡 버티고 앉은 중세의 로망, 바로 기사들이었지.

 

클레어인(Clares), 모티머인(Mortimers),보훈(Bohun), 피챌런(Fitzalan), 브라오스(Braos), 초워스(Chaworth), 지파드(Giffard), 기타 등등의 지방에서 온 기사들이었지. 영주와 기사들의 영향력은 한정되어 있었어. 바로 북부, 서부 웨일스에 있던 무정부 상태의 켈트인들과 항상 티격태격 했던고야.


잉글랜드가 인정해 준 웨일즈의 영토는 앵글시(Anglesea) 섬을 포함해서, 스노든 산(Snowdon), 메리오네스(Merioneth)의 울퉁불퉁한 산지, 그리고 디의 계곡(valley of the Dee) 정도였지.
이걸 보면 ?O들도 알다시피 평지는 별로 없고 전부 험준한 산악지대야.
영국에서 가장 높은 산이 스코틀랜드의 벤네비스산(1,343m)인데, 앞에서 나온 스노든 산도 1,085m나 되지. 결국 이 험하고 척박한 산지에 사는 웨일즈 인들도 그들이 사는 땅을 닮을 수 밖에 없었어.
웨일즈인들은 계절에 따라 떠돌아다니는 부족민들이었지. 반은 농사꾼이었지만, 반은 전사였으니 마음먹고 농사 지어 먹기 살기도 힘들었고, 소나 양이나 치면서 천 년 동안 무미건조하고 때로는 좀 가난한 삶을 살았지.
물론 이들이 전사로서의 본성을 발휘해서 적대 부족에 쳐들어가 깽판치고 약탈하며 뼈와 살을 분리시킬 때에는 전혀 무미건조하진 않았지만.

 

 

자, 땅에서 별로 나는게 없어 입은 많은데 먹을게 부족하면 어떻게 될까? 수많은 역사의 비슷한 처지의 군상들이 그래왔듯이 웨일즈 인들도 가만히 굶어 죽지는 않았어.
이들은 악기 연주스킬을 익혀 음유시인(bards)처럼 떠돌아다니면서 마을을 숨기다가 꽃피는 봄 이오면 전사로 돌변해서 자기 영역권 안의 마을로 쳐들어가 스매쉬를 날리고 윈드밀을 돌면서(...) 삥을 뜯었지.

 


이게 웨일즈인에 대한 "자비로운" 잉글랜드인의 평가였어.
얼마나 웨일즈인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냐면, 잉글랜드 코  앞의 웨일즈의 성 다비드 성당으로 두 번 순례 여행을 떠나는 건 그 위험하고 악독한 사라센들이 설쳐대는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던가.

 

 


어찌 되었건 웨일즈에 있는 ?O들은 일단 영국에 복속되어 있었지만 결코 만만하지는 않았어.
프랑스하고 싸움이 났을 수도 있고, 왕이 영향력이 낮거나(...) 7성짜리 암살자를 컨트롤 하느라 신경이 없던(...)간에 조금 느슨해졌다 싶으면 마쳐(Marchers)를 치고 체셔(Cheshire)와 슈롭셔(Shropshire)까지 침입해 분탕질 쳤지.
1257년에는 심지어 카디프(Cardiff)와 헤리퍼드(Hereford)까지 공격했어. 잉글랜드인에게는 다행스럽겠지만, 전통인지 몰라도 시간이 좀 지나면 켈트인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다 제풀에 지치기 일쑤였어.

 

 

이럭저럭 아웅다웅하던 1274년 8월 2일, 영국 왕 에드워드는 4년 동안 길었던 십자군 원정을 마치고 돌아왔지. 우트르메르에서 삽질하는 동안 자기 아버지는 이미 땅에 묻혔고, 자기는 2년 전에 폴쎄 왕이 되어 있었던고야.
근데 이번에 왕이 된 에드워드씨는 플랜테저넷 왕조 출신 답게도, 강철의 동명이인과 비슷하게 별로 성격 좋은 왕은 아니었지. 다른 말로 하면 용감한 전사도 되지만 말이야.

다행스럽게 이번 에드워드씨는 동명이인과 다르게 키가 무려 189cm나 되고

아주 뛰어난 창기병이자 사냥꾼, 거기에 더해 레슬링 선수였으니 전사로서도 아주 훌륭했지.
하지만 에드워드는 싸움만 아는 뇌까지 근육으로 찬 사람은 아니었어.
시야가 넓은데다 곧 아주 뛰어난 전술가가 되지. 살면서 무수한 전쟁을 치루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이 인간이 최초로 웨일즈 인이 쓰던 롱보우의 활용에 주목 했다는고야.
물론 요즘 판타지 소설 주인공들처럼 군대만 맡겨주면 처음부터 알아서 기상천외한 작전으로(사실 주인공 혼자서 날뛰면서) 척척척~ 적을 쓸어버리는 천재는 아니었지.
왕자 시절부터 전장을 누비며 1264년 루이스 전투(Battle of Lewes)에서 하마터면 죽을 뻔도 했고, 십자군 원정 때는 하이파 전투에서 사라센을 물리치기도 하는 등 전투에 숙련된 왕이었어.

 

 

에드워드가 돌아오자 전통에 따라 웨일즈의 왕자였던 르웰린(Llewellyn-ap-Graffyd)이 새로운 국왕 앞에 소환을 명받았지만, 이번 웨일즈의 왕자는 이를 거절했어.
에드워드의 선왕이던 헨리 3세는 내부 분열로 골머리를 앓다가 웨일즈에게 사실상 자치권을 부여했는데(슈루즈버리 조약-1267) 에드워드는 이를 다시 뺏으려 한 거지.

 


르웰린은 자신을 웨일즈를 다스리는, 즉 잉글랜드를 다스리는 에드워드와 동등한 지위라고 주장하며 이리저리 충성 서약을 회피해보려고 했지.
교회까지 동원해서 협상에 나섰지만 르웰린은 끝내 에드워드를 주군으로 모시는걸 거절했어.
에드워드는 얼씨구나하고 당장 이 기회에 웨일즈를 무장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웨일즈의 또다른 세력이던 영국에 충성을 맹세한 영주들(Lords Marchers)은 당연히 영국 편을 들었지. 결국 세 세력간의 공존 관계는 깨져버렸어.

 

 

좋은 기회를 맞은 에드워드는 웨일즈의 영주들과 함께 웨일즈를 공격하러 나섰지. 자신만만했던 노련한 지휘관 에드워드는 순식간에 이 야만족들을 박살내버릴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결코 쉽지는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
위에서 말했지만 웨일즈 인들은 뛰어난 전사였고, 험준한 산악지대는 좋은 방어 요새였어.

 


거기에 켈트인들이 자기들끼리 싸운다고 했지? 그 와중에 이 녀석들은 전투 경험도 풍부했지. 
뿐만 아니라 부족법에 따라 웨일즈인들은 매년 여름, 여섯 주동안 약탈하러 돌아다녔고, 족장은 무기를 들 수 있는 젊은이들을 소집할 수 있었지. 거기에 아예 모든 물품을 가지고 가기에 웨일즈 전사들은 보급도 필요 없었어. 이 정도만 되도 쉽게 뭉개기 어려운데, 웨일즈인들은 여기에 쓸 만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지.


바로 롱보우야. 노르만 출신의 웨일즈의 성직자이자 역사가였던 기랄두스 캄브렌시스(Giraldus Cambrensis)는 이 무기를 이렇게 혹평했어.

'야생 느릅나무로 만들었는데 조낸 투박하고, 거칠고, 간지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안 보입니다. ㄳ'

 

이런 혹평에도 불구하고 무기를 간지로만 파악 하는건 여물지 않은 풋사과들이나 할 짓.
롱보우의 화살은 일반 석궁보다 훨씬 빠를 뿐만 아니라 체인 메일, 안장 정도는 별 무리 없이 관통할 수 있지. 어떤 경우에는 핀 꽂듯이 기사의 다리를 뚫고 말의 옆구리에 박혔다던가.

 

 

훌륭한 발사무기와 뛰어난 개인 실력, 험준한 지형, 보급의 불필요. 이런 조건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두 말 할 것 없이 게릴라지.
웨일즈 인의 전투는 전형적인 게릴라 방식이었어. 이들은 계곡이나 산악 지대에 쥐죽은 듯 숨어 있다가 잉글랜드의 병사들이 지나갈 때 화살비를 퍼부어댔고, 적의 전열이 다음에 칼과 창을 들고 언덕 아래로  워크라이를 지르면서 달려가 기세를 타고 나머지를 뭉개버렸지.

 

이 강건한 전사들은 쉽게 거친 지형을 타고 이동할 수 있었고, 얘네들이 입은 주황색 플레이드(빗살무늬의 모직물)가 보일 때면 잉글랜드 군대도 적지 않은 피해를 각오해야 했지.
짧지만 격렬하고 치명적인 스커미쉬 작전 후에 열받은 잉글랜드 군대가 안개 낀 산지 속으로 따라가다가 되레 매복에 걸려 개관광 당하고 쫓겨 가는 일도 드문 일이 아니었고.
앵글로-노르만 귀족들은 계속해서 원정에 나섰지만, 웨일스의 내륙지방에서 게릴라에 지치고 보급은 끊겨 굶주리고 지치고 많은 사상자를 남겨두고 "두고 보자"를 연발하며 엉망진창이 되어 돌아오는 일도 드물지 않았지.

 

하지만 에드워드는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의 악명 높은 플랜태저넷 왕가의 기질-헨리 2세나 사자왕 리처드나 모두 한 성깔 했지-은 완전히 불타고 있었지만, 에드워드는 불타는 의지와 근성만으로 승부를 걸지는 않았지.
대신 웨일즈를 정복하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작전을 짰지. 마쳐의 영주들(Lords Marchers)이 포이슬랜드(Powysland)와 카디건셔(Cardiganshire)를 치는 동안, 에드워드는 가장 수가 많고 정예인 부대를 편성했어.
한 마리에 100파운드(약 8,400만원)나 하는 최고급의 프랑스 군마들을 구입했고, 봉건 징집 부대와 천 명이나 되는 중무장 기사들이 모였지. 물론 언제나 그렇듯 중세에 대부분의 전투원은 보병이었지만.

 

잉글랜드군은 체셔(Cheshire)와 랭커셔(Lancashire), 더비셔(Derbshire), 슈롭셔(Shropshire), 우스터셔(Worcestershire), 러틀랜드(Rutland), 레드노어(Radnor), 브레콘(Brecon)등 잉글랜드 각지의 기사와 보병들이 참전했어.
상당수는 봉건 의무 덕분에 모이기는 했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야전 베테랑은 훨씬 전, 에드워드가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와 박터지게 싸울 때나 십자군에도 따랐던 사람들이지.
예를 들자면 레지날드 드 그레이(Reginald de Grey), 오토 드 그랑송(Otto de Granson), 노섬브리아의 존 드 베시(Nothumbrians John de Vesci)와 로버트 티보토(Robert Tybotot)등.

 

이럭저럭 해서 에드워드의 군대는 크고 아름다운 15,000명의 보병을 거느릴 수 있었고 무섭게도 이들 중 절반 이상은 "웨일즈 인"이었어.
하지만 만족 못한 에드워드는 군대의 화력을 높이기 위해 용병 부대를 고용했지. 가스코뉴의 석궁병, 메이클즈필드(Macclesfield)의 궁수......
에드워드는 이를 바탕으로 엄청난 화살비를 쏟아 부을 수 있는 커다란 군대를 만들었지만, 대부분 중세 군대가 그렇듯 얘네들끼리 손발도 안 맞을 뿐더러 경험도 없었어.
12년 동안 적어도 영국 안에선 전쟁이 벌어진 적이 없었거든.

 

 

자, 비록 이럭저럭 작은 문제는 있었지만 에드워드의 강력한 군대와 보급 부대는 편성이 끝났지.
에드워드는 르웰린을 평지로 끌어내거나, 아니면 아예 웨일즈에 죽치고 앉아서 적이 굶주림에 제발로 지쳐 기어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어.
아무리 웨일즈 군대가 보급이 필요 없다고 하더라도 안 먹고 싸울 수는 없잖아. 거기에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지.
시몽 드 몽포르와 싸우면서 분열되어 있던 잉글랜드의 귀족들이 왕의 깃발 아래 모였고, 공통된 적인 웨일즈 촌놈들을 작살낼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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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 웨일즈에 트집을 잡아 반란군으로 선포하고, 반란군 머리통을 부사버리기 위해 군대를 모은 에드워드.
에드워드가 군대를 모으는 동안 마처의 영주들(Lords Machers)은 벌써 두 갈래의 군대를 이끌고 웨일즈에 쳐들어갔어.

 


키드웰리(Kidwelly)의 영주였던 페인 드 초워스(Pain de Charworth)는 카디건셔(Cardiganshire)에 있는 르웰린과 그 추종자들을 향해 위풍당당하게 공격에 나섰고.
로저 몰티머(Roger mortimer)는 마처의 귀족들과 함께 웨일즈 중앙으로 공격해 들어갔지.
이 두 군대가 진군하는 동안 르웰린을 따르던 수 천명의 웨일즈 부대는 부대를 떠나버렸어.
자기 마을이 위태위태하는데 목숨걸고 대장 곁에 남아 있기는 어렵잖아.
좀 악당스럽지만 효과적이고, 그만큼 많이 사용?榮? 전략 때문에 르웰린의 부대는 그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기네드(Gwynedd)인들밖에 남지 않았어.
1277년 7월, 마침내 에드워드와 잉글랜드군 본대가 우스터에서 작전에 나서게 됐어.
웨일즈의 성주들, 헤리포드 백작, 노포크 백작, 심지어 르웰린의 형제인 데이비드까지 있었어.
에드워드는 느릿느릿하게 세번(Severn)과 디(Dee)의 계곡을 따라 진군했어.


에드워드의 전략은 다음과 같았지.
우선 체스터에서 플린트까지 웨일즈의 북쪽 해안을 따라 진군하고, 다시 러들란(Rhuddlan)에서 콘웨이(Conway)의 어귀까지 단계적으로 진군하며 웨일즈의 목을 죄는 것이었어.
15,000명이나 되는, 중세의 경우에선 크고 아름다운 군대가 쉽게 행군하고, 화살 공격의 효과를 극대화 시키기위해서는 일단 빽빽하게 나무들이 들어찬 삼림지대를 통과해야 했어.
에드워드는 웨일즈인들의 게릴라에 대비해 병사들이 쉬는 지점마다 작은 성을 지어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했지.
나아가 에드워드는 예리한 전략가여서 르웰린의 약점도 꿰뚫어보고 있었어.
아무리 르웰린이 난공불락의 산악지대에서 버티고 있고, 웨일즈 군대가 대규모 보급이 필요없다해도 장기전으로 나가면 배가 고플것은 당연한 이치.
에드워드는 손책이 왕랑한테 했듯이 얘네들의 밥줄을 끊으려고 했지.
바로 웨일즈의 북쪽에 있는 비옥한 앵글시 섬이 목표였어.
이 섬에서 생산되는 곡물이 없다면 르웰린의 군대도 배가 고파서 제발로 기어나올것이 분명했거든.
문제는 배를 마련하기 어렵다는건데 다행스럽게도 에드워드는 봉건 군주였어.
봉건 의무에 따라 Cinque의 항구들(도버, 샌드위치, Hythe, 헤이스팅스, 롬니의 다섯 항구의 동맹) 배와 선원을 제공했고, 봉건 의무에따라 15일동안 자비로 돈 들여서 앵글시 섬을 고립시키기로 약속했어.

 


마침내 7월 26일, 잉글랜드 군대는 플린트까지 진군했어.
이 곳은 100년 전, 에드워드의 할아버지였던 헨리 2세(본문에는 헨리 3세라고 되어 있는데, 헨리 3세는 에드워드의 아버지엔데다가 100년 전인 1172년 헨리 2세가 웨일즈를 공격한바 있으니 아무래도 헨리 2세가 맞는 것 같아)가 기네드를 정복하려다 하마터면 죽을뻔 했던 곳이지.
그리고 3주후, 마침내 잉글랜드군은 러들란에 집결해서 그곳에 본부를 세웠고,
그 전인 7월 29일에는 Deganwy에서 출발한 의기양양한 영국 병사들이 컨웨이의 강어귀까지 진군했지.
그리고 드 베시와 오토 드 그랑송이 이끄는 선단은 메나이 해협(Menai strait)을 지나 앵글시섬에 상륙했어.
섬에 상륙한 잉글랜드 군대는 르웰린과 그 군사들이 겨울 나는데 필요한 곡식을 전부 뺏어버렸어.
나아가 앵글시 섬으로부터 컨웨이의 남쪽 강둑을 따라 웨일즈의 방어선을 협공할 수도 있었고.

 


이제 승리는 확정적이었어.
아니, 애초에 군대를 동원했던 순간부터 에드워드의 승리는 확실했지.
에드워드는 큰 전투없이 8주동안 르웰린의 산악 요새를 포위했고 굶주림에 지치고, 큰 전투는 없었어도 전략적으로 참패한 르웰린은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어.
1277년 컨웨이의 협약에 따라 르웰린은 기네드로 군대를 물려야 했고, 마처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해야 했어.
협약이 끝난 후 에드워드는 러들란에 성을 쌓았고, 르웰린은 결국 충성을 맹세하게되었지.
이렇게 해서 웨일즈는 잉글랜드에 귀속되었어.
하지만 웨일즈인들은 이대로 시시하게 물러나지 않았고, 재기를 노리고 있었지.
그리고 5년 후, 마침내 두 번째 전쟁이 벌어지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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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웨일즈 전쟁 1282


마침내 웨일즈인들이 굴욕을 참았던 5년 후인 1282년, 마침내 웨일즈인들은 산악지대를 벗어나서 다시 평지를 약탈하러 나섰지.
사실 척박한 산악지대에서 농경과 목축만으로 넘치는 입들을 먹여살릴 수는 없었고,
아마 5년 전의 뼈저린 패배와 굴욕감도 원인이 되었겠지.
그래도 이번에는 지난 번보다는 상황이 나쁘진 않았어.
5년 전, 잉글랜드의 편을 들었던 르웰린의 동생 데이비드가 이번엔 형제의 편을 들기로 했거든.
형제와 웨일즈 군대는 하워던(Hawardan), 플린트, 러들란성을 공격했고 심지어 브리스톨 해협까지 내려가 마처의 영주들을 ㄷㄷㄷ하게 만들며 잉글랜드 세력권을 약탈했지.
어디에 있던간에 선량한 잉글랜드인들은 칼침을 맞았고, 교회와 농장은 불태워졌으며, 천박하고 추악한 웨일즈 인들은 그 야만적인 찌질함을 만천하에 떨쳤다-라고 잉글랜드인들은 울부짖었어.

 


그런데 에드워드는 자기가 1차 웨일즈 전쟁에서 충분히 자비심을 베풀어 죽어 마땅한 웨일즈인들을 살려줬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로서는 자비심을 베풀어줬는데 야만스러운 반란군들이 머리통을 부사달라고 날뛰는거야.
당연히 플랜태저넷 왕가 출신답게 성질 더러운 에드워드는 이번에야말로 저 야만인들의 머리통을 부사주는건 물론, 독립은 꿈도 못꾸게 해주겠다고 이를 갈았지.

 


에드워드는 1차 웨일즈 전쟁에서 효과를 발휘했던 밥줄 끊고 굶겨 죽이기를 다시 한 번 시행하려고 했지만,
르웰린의 본거지인 기네드로 들어가기 전에 웨일즈 인들이 새로이 정복한 남서부를 되찾겠다고 계획했지.
그리고 1282년 7월 초, 잉글랜드는 웨일즈 북쪽으로 쳐들어가 해안선을 따라 플린트와 러들란성의 포위를 풀었어.
그리고 그레이경과 서레이 백작(Earl of Surrey)은 클루이드(Clwyd)의 골짜기를 향해 행군하며 데이비드의 본거지를 위협했고, 데이비드는 할 수 없이 군대를 물렸지.
데이비드가 갑작스럽게 후퇴함에 따라 르웰린의 군대는 측면이 노출되었어.
할 수 없이 르웰린도 중앙과 남서부 웨일즈에 진출했던 군대를 물려 자기 영지를 지키기 위해 달려갔지.

 


큰 전투없이 르웰린과 데이비드 형제를 몰아낸 에드워드는 다시 한 번 바닷길을 사용하기로 했어.
지난 번 전쟁에서 효율성을 입증한대로, 에드워드는 런던과 Cinque 항에서 40척의 배를 징발했고,
윈첼시(Winchelsea)와 롬니(Romney)에서 두 척의 커다란 전선도 뜯어냈어.
잉글랜드 군대가 북 웨일즈의 해안선을 따라 진군하는 동안 가스코뉴의 장관(Seneschal of Gascony)인 루크 드 타니(Luke de Tany)는 함대를 편성해 앵글시 섬을 압박했어.
한 달 후에 이들은 다시 한 번 앵글시 섬을 정복했고 웨일즈군은 다시 한 번 밥줄이 끊기게 되었지.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어.
루크는 먼 옛날 다리우스가 스키타이에 맞서 보스포루스 해협에 했던 것과 비슷한 짓을 하기로 한거야.
기술자들을 불러모아 메나이 해협에 배다리를 놓아 버린거지.  
그리고 르웰린이 있는 펜메인모어(Penmaenmawr)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지.
이 공격을 받으면 웨일즈의 왕자님은 측면이 위협받게 되고, 그의 방어 전략은 붕괴될 수 밖에 없었어.
남쪽에서는 루틀린(Rutlin)과 덴비(Denbigh)가 잉글랜드 군대에 함락되었고, 에드워드의 군대는 컨웨이 강을 장악하고 목을 죄고 있었거든.
세 방면의 적으로부터 공격받으며 최악의 상황에 놓인 르웰린은 급히 남부로 보냈던 원정군을 불러들여 고향을 지키기 최후의 각오를 하고 결전에 나서게 되었지.

 


하지만 에드워드의 군대는 이 때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어.
혹시라도 자기가 도착하기 전에 웨일즈 군대가 전멸해버릴까 걱정도 팔자였던 루크경이 좀 더 기다리지 못했거든.
루크 경은 간조를 기다려 배다리를 건너 웨일즈 해안으로 돌격해들어왔어.
하지만 웨일즈 군대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
게릴라에 능숙한 군대답게 이들은 뱅거(Banger)근처에 완벽하게 매복했어.
성급하게 달려든 루크 경은 제대로 매복에 걸렸고 언덕 위의 웨일즈인들은 화살비를 퍼부었어.
루크 경의 잉글랜드 군대가 공황상태에 빠지자 웨일즈인들은 언덕을 타고 내려왔지.
그리고 루크 경과 그 군대를 대부분 학살해버렸어. 
간신히 살아남아 퇴각하던 군대는 최악의 상황에 걸리고 말았지.
썰물 때를 골라 쳐들어 왔었는데 밀물이 몰려오는거야.
결국 살아남은 자들도 대부분 물에 빠져 죽고 말았어.

 


에드워드는 길길이 날뛰었지만 포위를 풀어낸 웨일즈인들은 간신히 한숨을 돌렸지.
치명적인 배후 공세를 막아낸 이상,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버티는 웨일즈 군대를 몰아내기란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르웰린은 다시 마처로 군대를 보내 침략과 약탈을 반복했어.
하지만 에드워드는 만만한 남자는 아니었어.(우홋, 좋은 남자...도 아니지만-_-;;)
이를 갈면서도 그는 긴 겨울 전쟁을 시작하며 웨일즈 인의 목을 조를 준비를 했지.
잉글랜드군은 러들란 성으로 후퇴했지만 전쟁 준비도 시작했어.
하지만 중부 웨일즈에서 벌어진 일이 모든 전황을 바꿔버렸지.

 


1282년 12월 11일, 르웰린이 웨일즈의 족장들을 끌어모으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존 지파드(John Giffard)와 에드문드 모티머(Edmund Mortimer), 그리고 다른 두 마처의 영주가 이끄는 소수의 군대에게 기습을 받았어.
르웰린이 다른 곳에 가있는 동안 웨일즈 군대는 오르윈 다리(Orewin Bridge)에서 잉글랜드 군대와 마주친거야.
언제나 그렇듯 다리는 좋은 방어물이야.
이쪽이 건너가기도 어렵지만 방어만 하려면 강을 건너는 소수의 군대를 더 많은 군대로 요격할 수 있으니까.
...이야기가 좀 새는데 미디블 토탈워에서도 공격하는데 다리가 있고 상대편이 뒤에서 대기 중이면 공격하기 싫어-_-;;
하지만 다리가 두개 있다면 또 달라.
한참 싸우고 있는데 다른 쪽 다리를 건너온 군대가 측면을 들이박아 버리면 순식간에 붕괴되어 버리기 일쑤.

 


마침 잉글랜드 군대에 있던 웨일즈 인이 그 비밀을 가르쳐줘 버린고야.
이번엔 다리는 아니었지만, 근처에 얕은 여울이 있어서 군대가 건널 수 있는 곳이었어.
존은 일부 군대를 그 여울로 보내 강을 건넌 후, 우회해서 웨일즈 군대의 측면을 공격해버렸어.
당황한 웨일즈 군대는 허둥지둥 달아나 언덕 위로 올라갔지.
그리고 잉글랜드 군대의 공격에 대비했지.
당시 잉글랜드 군대의 주력은 다른 중세 국가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기병 돌격이었어.
기병이 없을 때 기병을 상대하는건 역시 창병.
웨일즈 군대는 언덕 위에 밀집해서 창병들 위주로 견고한 방어진을 짰어.
뒤따라 오던 존과 잉글랜드 군대가 언덕 위를 쳐다보니 웨일즈 인들은 그럭저럭 대열을 정비하고 기병 돌격에 대기 중이었지

.


존은 이대로 기병 돌격을 실시한다면 잉글랜드군의 피해도 결코 적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차렸어.
그래서 기병 돌격은 뒤로 미뤘지만 동시에 좋은 생각을 해냈지.
뭉쳐 있으면 화살비를 퍼부으면 되잖아?
잉글랜드 궁수들이 호출되어 언덕 위를 향해 마구 화살을 날려댔어.
밀집 대형을 취하고 있던데다 치명적으로 경장이던 웨일즈의 창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고
여기 저기에서 대열이 무너지기 시작했지.
틈을 잡은 잉글랜드 기사들이 마침내 돌격을 개시했어.
르웰린의 부재 때문에 격렬한 전황에 유연한 전술을 취하기 어려워진 웨일즈 군대에게 기사들의 파도가 밀려왔고 웨일즈 군대는 더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마침내 붕괴해버렸어.

 

 


족장들을 만나고 있던 르웰린이 당황해서 돌아왔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지.
군대가 무너지는 와중에도 르웰린은 용감히 전장에 뛰어들었어.
결국 전투의 막바지에 르웰린은 한 전사와 일 대 일로 싸우다 패해서 죽었지.
그는 바로 슈롭셔 병사들의 대장인 스테판 드 프랭크톤(Stephen de Frankton)이라는 인물이었고, 르웰린 사후 전투, 아니 전쟁은 사실상 끝나버렸어.

 


한 때 고귀한 지도자였던 웨일즈 왕자의 시신은 목이 잘렸고, 머리는 런던으로 보내졌어.
이 목은 런던을 한바퀴 돈 뒤 끝내 창 끝에 꿰여 성벽 위에 매달렸지.
허무하게도 그가 죽자 웨일즈 인들은 붕괴되어 버렸고,
독립을 향한 웨일즈인의 치열한 투쟁도 끝나버렸어.

 


사실 이 이후에 일화가 하나 더 있어.
에드워드 1세는 웨일즈로 가서 자신을 왕으로 섬기라고 으름장을 놨지.
하지만 웨일즈 족장들은 쌩까면서 이죽거렸어.
"웨일즈 본좌는 웨일즈에서 태어나 웨일즈 말을 쓰는 ?d만 가능하3. ?d은 자격이 업ㅂ으3."
하지만 에드워드는 쉽게 이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버렸지.
임신 중이던 며느리를 웨일즈로 불러버린고야.
그리고 며느리는 웨일즈의 카나번에서 아들을 낳았고, 이 아들이 에드워드 2세가 되었지.
웨일즈인들은 한대 먹었지만 어쩌겠어.
에드워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할 수 없이 웨일즈 인들은 웨일즈에서 태어나 웨일즈 말을 하는 어린 왕자에게 머리를 박았지.
이후로 영국의 왕권 계승자는 웨일즈의 왕자(Prince of Wales)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해.
그리고 지금도 그 전통은 전해 내려와 웨일즈의 왕자는 영국 왕실의 계승자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아들 찰스 왕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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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토마토주스를 먹으면서 지냈더니 갈수록 멍해지는군요

(...사실 재수하기 전에 최후의 발악...OTL)

출처 : THIS IS TOTAL WAR
글쓴이 : 게이볼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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