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세유럽

[스크랩] [멘엣암즈]중세 프랑스 군대[전략과 전술]

구름위 2012. 10. 7.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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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과 전술



 서유럽에서의 전략, 전술은 비잔틴과 이슬람 군대의 그것에 비해 뒤떨어졌지만 군사 지도자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은 보여주었다. 프랑스에서 광범위한 전략은 전투에서의 전술보다 우선시되었다. 이는 지휘관의 근시안적인 판단보다는 정보 교류와 통제의 한계가 더 심각했던 것을 반영한다. 11세기에서 13세기까지 군사 지도자들은 이득보다 손해가 많았던 큰 전투를 피하는 경향이 짙었다. 대신에 프랑스에서는 요새의 기능과 방어 기술이 크게 진보되었다. 상대 영역을 침공하는 목적은 주로 경제적 피해를 주기 위함이었고, 침입과 공성전, 그리고 영토를 유지하는것이 중요했다. 이러한 점에서, 중세의 전쟁은 전투를 역사의 "전환점"으로 보는 수많은 역사가들에게 무시당했다. 의식적으로든 그렇지 않든, 중세 지휘관들은 후기 로마의 전술가인 베게티우스의 저서 '군대[De re militari]'와 그 전술을 참고로 했다.


*(A)-둔덕과 외벽이 있는 페레(Peray)성. 1090-1100년 마이네 백작의 공격을 방어했다.
  (B)-[Houdan]성의 원형 던전. 1137년.
  (C)-부삭(Boussac)성의 창문 업는 던전. 가장 오래된 석조 성이다.
  (D)-라발(laval)성으로 원형 탑은 12세기의 것, 성벽은 13세기에 추가된 것이다.
  (E)-[Villandraut]성으로 1306-7년에 건축된 이탈리아 양식.
  (F)-포아(Foix)의 요새로 수직의 바위 절벽이 감싸고 있다. 직사각형의 던전과 12세기의 홀, 큰 원형 탑과 15세기에 추가된 성벽, 그리고 이후에 세워진 외부 성벽이 특징이다


 침입에서는 부대별로 연략이 잘 되는것이 필연적이었고, 뒤따라오는 무리들이 군대의 보급을 책임졌다. 이 때 가장 두려운 적은 전염병, 그리고 적들이 군대의 연락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적은 가도를 가로막고, 다리를 파괴하고 음식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는 침략자의 소규모 부대를 공격하고, 나아가 적의 퇴로를 막는 수단으로 맞섰다. 양쪽은 서로 적의 도시들의 충성심에 대해 정보를 필요로 했다. 예를 들자면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와의 충돌에서 방법이 성공적으로 사용되었다. 파리에서 영국 소유의 노르망디까지 흘러가는 세느강 하류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점이었다. 존엄왕 필리프는 이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고 세느 강을 회복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다음 인용문은 13세기의 로렌의 샹송(Chansons deds Lorrain)은 영국 영토를 향해 진군하는 프랑스 군대의 묘사이다.


 "행군은 시작되었다. 가장 앞에는 정찰병과 횃불이 있었다. 그 뒤에는 전리품을 노획하고 그것들과 함께 긴 행렬을 이루는 약탈자들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시끌벅적한 혼란에 빠진다. 방금 밭에서 뛰어나온 농부들은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달아난다. 양치기들은 가축들을 살리기 위해 양 떼를 모아 근처의 숲으로 달아난다. 방화꾼들은 마을에 불을 놓았고 약탈자들은 집을 뒤졌다. 겁에 질린 주민들은 불 태워지거나 몸값을 받고 싶어하는 자들 손에 끌려갔다. 어디서나 경고하는 종이 울렸고 두려움에 찬 울음이 온 나라를 휩쓸었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투구와 미풍에 나부끼는 깃발, 그리고 온 평원을 뒤덮은 기사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재물과 성, 노새, 양, 그리고 모든 것이 약탈될 것이다. 연기가 흘러 퍼질 것이고 화염이 타오를 것이다. 농부와 양치기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난다."


 이것이 "기사도의 시대"의 진정한 전쟁 모습이며 번쩍이는 무거운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할일은 거의 없었다. 대신에 그런 침입은 약탈과 이득을 노리는 일반적인 병사들에 의존했다. 이러한 양식은 13-14세기에 성곽을 쌓은 도시가 늘어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소규모 침략부대는 공성 병기를 갖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큰 전투가 벌어져 패배한다면, 온 국가는 적의 침략에 시달릴 것이다. 쿠르트레(Courtrai) 전투 이후, 승리한 플랑드르인은 아르투아(Artois) 방면으로 재습격에 나섰고 방어가 약한 성채들을 손에 넣었으며 시골을 황폐화시켰다. 단지 이탈리아 용병 수비대가 있었던 Therouanne같이 프로 군인들-밀리샤와 대비되는-이 주둔하고 있었던 도시들만이 저항할 수 있었다.

*Royat의 교회. 13세기 초의 것으로, 다시 복구된 것이긴 해도 여전히 남아 있는 두꺼운 벽과 총안은 요새화된 프랑스 교회의 특징이다.


 방어 전략 또한 깊은 숙고를 거친 후 짜여졌다. 중세의 가장 큰 성들은 적의 침입에 용이하게 대처할 수 있는 지형에 위치해 있고, 다른 요새들도 공격해온 군대를 물리치고, 적의 보급선을 끊을 수 있는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13세기에 프랑스에서 성채들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특히 영국령 가스코뉴는 더욱 그랬는데, 단려왕 필리프가 호시탐탐 이 지역을 집어삼키려고 얼쩡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 왕을 엿먹이기 위해 전방에 각종 요새와 성채들을 쌓았다.


 반면에 프랑스 군대는 점점 몸집이 불기 시작했다. 14세기에 들어 단려왕 필리프는 두 전선을 유지해야 했다. 주요 전선은 플랑드르로 이 전선에 주력을 집중하고, 가스코뉴의 전선을 따라서는 성채를 짓고 수비대를 배치했다. 필리프의 군대는 아마 30,000명에 달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중 야전군은 5,000에서 10,000 수준으로 추측된다. 평화시에 수비대는 이름만 있다시피 했다. 예를 들자면 "릴(Lille)"은 겨우 네 명의 기병과 보병이 어슬렁거리며 도시를 방어했다. 반면에 위기시에 보르도는 네 명의 배너릿 기사, 23명의 기사, 227명의 종자와 192명의 서전트, 정확한 숫자가 밝혀지지 않은 지역 민병대가 적의 습격에 대비했다. 기병은 보병들보다 빨리 소집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군대에서 보병의 숫자는 기병을 훨씬 능가했다.(당연하잖아-_-;;) 1303-4년의 프랑스 동부에 있는 메이컨(Macon) 지역의 작은 도시의 기록을 보면, 민병대는 아홉명의 경찰대가 있었고, 여기에 100명의 전문 [서전트]와 소수의 용병 기병이 있었다. 1312년까지 독일의 점령하에 있던 리옹에 대항하여 메이컨이 동원한 군대는 17명의 기사와 113명의 기병, 2,188명의 보병이 있었고, 기병과 보병의 비율은 1:17이다.


 이러한 지역 부대는 일반적으로 왕족이나 혹은 왕과 혈연관계에 있는 백작이나 공작의 지휘를 받았다. 이들은 또한 군대 소집과 세금을 책임져야 했고, 이 세금으론 용병들을 긁어모았다. 그러나 왕족들은 그다지 장군 리스트에 언급된바가 없는데, 그러한 리스트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단려왕 필리프의 치하에서 상설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실의 총사령관(Royal Constable)은 언제나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두명의 원수(元帥)과 석궁 대장(Master of Crossbowman)은 보병들을 통솔했다. 이외에 왕실은 여러 대신들을 거느렸다. 이들은 하루 종일은 아니었지만 많은 시간을 군사적 문제를 처리하느라 애썼다. 총사령관과 원수와 비교해보자면, 석궁대장은 정치적 영향력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이들의 명령은 왕족들마저 능가하곤 했고, 반면에 남부의 귀족인 [senschals], 즉 지역의 수장은 그 지역의 군대에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좀 더 낮은 지위로는 하위 귀족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명예를 위해 참전했으나 세 번 이상의 전역에 참가하는 일은 드물었다. 기병과 보병은 일반적으로 서로 다른 명령 계통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기병의 높은 지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기병과 보병의 부조화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문제가 되었다.


 일반적은 침략과 공성전은 11세기부터 14세기까지 군사 전문가나 요새 수비원 중 정예들을 선발했다. 이 군대는 기술자와 석궁병, 방화범이나 선동자, 약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부분은 보병이었고, 기병의 역할은 정찰과 순찰, 군대의 진군을 안내하거나 약탈자들이 눈이 멀어 지나치게 멀리 흩어지는 것을 방지했다. 비록 이 시기에 보병이 옛 로마나 비잔틴에 비해 형편없이 질이 하락했다고 할지라도, 기사들로만 벌어지는 전투는 드물었다. 11세기 말부터 보병들이 기병을 보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정면을 향해 전열을 짜고 기병을 감쌌다. 전투가 벌어지면 보병들은 즉시 자율적인 몇 가지의 대열로 조직되었다.

*말에 올라타는 기사. 13세기 중반의 프랑스 작품. 기사의 체인 두건은 뒤로 넘겨져 있고, 그 밑에는 리넨 두건을 썼다. 그가 입고 있는 체인 메일은 사슬로 된 벙어리 장갑도 포함되어 있지만, 쇼셰는 오래된 타입의 것으로 장딴지가 노출되어 있다.

 


(***중요!!!***)
 중세의 지휘관들이 전략적 능력이 부족했다거나, 중세 전쟁이 오로지 개인적인 용맹에만 의존했으리란 구식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성공적인 서유럽의 지휘관들은 한 번 전투가 벌어지면 그들의 통솔력에 한계가 있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만약 큰 전투가 벌어지면 그들은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이에 가장 맞는 진형으로 군대를 배열했으며, 전투가 벌어지기 전 공격 지점와 부대의 행동을 세밀하게 결정했다. 13세기에 들어 프랑스에서 베게티우스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는데, 고풍스러운 로마인의 개념은 "현대적"인 것으로 교체되었다.


 프랑스 군대 배치에 대해 가장 초기의 것 중 하나는 1114년 루이 6세의 것이다. 기병 연대는 큰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아마 60,000명(명백히 과장이다)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군대는 Rheim과  샬롱에서 왔고, 그 다음은 라옹과 수아송에서 도착했으며 세 번째는 오를레앙과 에탕프와 파리, 생 드니의 수도원 출신이었다. 네 번째로 대열은 티보 드 샤르트르(Thibaoud de Chartres)와 휴즈 드 트로아(Hughes de Troyes)를 따르는 자들이었다.


 10년 후, 루이는 Rheim 근처에서 호시탐탐 프랑스를 노리는 황제 헨리 5세의 군대에 맞서 거대한 군대를 동원했다. 이 군대는 헨리 5세의 기세를 꺾어놓았는데, 부르고뉴 공작과 느베르 백작이 이끄는 선봉, 베르망두아 백작이 이끄는 우익, 아미앵의 퐁티유 출신과 보베 출신으로 이루어진 좌익, 방어 태세를 취한 중앙은 Rheims-샬롱-라옹-수아송/오를레앙-에탕프-파리/샤르트르-블루아-브리-트로아-샹파뉴/출신의 민병대 보병, 후위는 플랑드르-아퀴탱-브르타뉴-앙주의 네 지역에서 온 부대로 구성되었다.


 1214년 부빈 전투에서 존엄왕 필리프는 영국과 독일 연합군을 대패시켰는데, 때때로 '전형적인' 중세의 들이박기식 진형으로 여겨진다. 양군의 두 날개는 사실상 난투에 가까울 정도로 제멋대로 뒤엉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필리프와 그의 적은 전투 전 부대를 배치를 아주 철저하고 세밀하게 실시했다. 뮈레 전투에서 시몽 드 몽포르의 북프랑스 출신의 알비주아 십자군은 스페인 북부에서 온 대규모의 아라곤 군대를 대파했다. 이 전투는 이례적으로 기병들끼리 충돌한 전투인데, 이는 양쪽 보병들이 기병들과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예전에 초딩?O이 이 전투 사망자를 적었던 것 같던데;; 아라곤 기병 500이 죽어나갈 때 프랑스 기사 사망자가 아홉명이었나? 가물가물;; 초딩?O 립흘 달아줘;;)


 아라곤의 페드로 2세는 여전히 소규모 지역적 특성을 활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작은 강과 늪지대가 그의 적을 막아주고 영토를 보존해 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지형 지물은 몽포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몽 드 몽포르는 기병 부대를 셋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세 번의 강력한 기병 돌격을 시도했고 아라곤 군대는 이 기사들의 돌격을 저지하는데 실패했다. 아라곤 기사의 전열은 두 번째 열의 종자들 사이로 후퇴했고, 곧 혼란에 빠졌다. 프랑스 기사들의 돌격은 보병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페드로의 군대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몽포르의 보병은 근처의 마을에 주둔 중이었는데, 이들은 툴루즈 민병대와 아라곤 보병들에게 공격당하고 있었다. 아라곤인들을 개발살내고 쫓아버린 뒤, 프랑스 기사들은 되돌아와 툴루즈 민병대를 학살했다. 이 전투에서 최후의 부대인 툴루즈 백작 레몽의 군대는 페드로의 전술이 캐ㅂㅅ같다는 것을 깨닫고 근처의 언덕애서 대기 중이었다.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은 다양한 방면에서 서유럽 전장에 있어 가장 강력한 '발사무기'였다. 이 강력한 충격 기병 전술은 11세기부터 14세기까지 전장을 군림했는데,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큰 변화는 없었다. 어마어마한 기병 부대가 지축을 울리며 돌격할 때 보병들에게 안겨주는 어마어마한 심리적 중압감은 실제 충격력보다 더욱 중요했다. 기병의 전열은 빽빽한 밀집 대형이었다. 비록 이들의 속도는 느리더라도 적의 전열을 붕괴시킬만큼 강력했다. 이러한 전술에서 예비대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는데, 적진을 붕괴시키며 뚫고 지나갈 때와 후위 공격에 큰 도움이 되었다. 측면 공격은 기병들이 맡았는데, 주로 고정된 보병들이 상대였다. 그리고 기병은 아군 보병들이 반대로 측면 공격당할 때, 이를 막아야했다.


 프랑스에서 가장 큰 전술 단위 부대는 [바타이유bataille]였다. 이 부대는 [conrois]로 구성되었는데, 이 부대는 2열, 혹은 3열로 이루어진 기병부대(일반적으로 20-24명)로, 기병들의 등자는 자기 옆에 있는 동료의 등자와 맞닿을 정도로 밀집해야 했다. 일반적으로 12-13세기의 전열은 기사들로 구성된 [conrois]가 담당했고, 나머지는 서전트들로 구성되었다. 비전투원인 종자들은 후위에서 대기 중이었다. 가장 작은 부대는 [echielle]라 불리는 것으로, 이들이 실제 전투 부대인지 아니면 행정 관료 집단인지는 불명확하다. 일반적인 횡대보다 세련된 원뿔형이나 화살 형태의 기병 대열은 10세기 중동과 비잔틴 제국에서 사용되었고, 14세기에 스페인에서도 쓰였지만 프랑스에는 기록이 없다. 특히 경기병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데, 13세기에 들어 카탈루냐의 경기병들은 프랑스 군대의 중무장한 기사들에게 충분히 맞설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14세기 초에는 프랑스 보병의 가장 큰 부대는 바타이유였다.  



*세느강의 순례자 지도자. 13세기 말-14세기 초의 것이다. 아마도 성 조지를 묘사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1248년 '장 드 몽포르의 문장'. 화려한 성장(盛裝)과 초기 형태의 그레이트 헬름, 마의를 입혀 머리를 보호한 말이 보인다.

 

(누가 이길까요;;;)


출처 : THIS IS TOTAL WAR
글쓴이 : 게이볼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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