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세유럽

[스크랩] [멘엣암즈]중세 프랑스 군대[기술자와 병참, 그리고 말]

구름위 2012. 10. 7.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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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자와 병참

 

 

비록 몇몇 도시들이 광부들과 공병들 덕분에 공성 기술로 명성을 휘날렸지만, 전문 기술자는 용병들과 비슷한 지위에서 고용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존엄왕 필리프 2세의 치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시몽 드 몽포르의 거대한 트레뷰셋 투석기를 만든 기술자들은 하루에 21 리브르의 봉급을 받았다-물론 이 금액은 총합이지만, 각자 나눠가지더라도 막대한 금액이다. 필리프는 적의 성벽 밑으로 땅굴을 팔 수 있는 광부들에게는 하루에 18 데니어를, 탐험가나 석공, 노동자에게는 15 데니어를 지급했다.


이러한 보조병들은 일반적으로 군 병참병의 일부로 간주되었는데, 12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고도로 치밀하게 조직되었다. 필리프 2세 휘하의 프랑스의 군사 관료들은 왕의 성에 있는 각종 장비들을 정리해 놓았다.

예를 들자면 [노르망디의 Pacysur-Eure]에는

 

26개의 등자가 달린 석궁, 38개의 양발로 쏘는 석궁, 그리고 이보다 큰 석궁(ad tornum) 5개, 체인 메일(호버크mail hoberk) 11벌, 23개의 'doubled' 투구(각각의 투구는 사슬 두건이나 천으로 된 완충재를 포함하고 있다.), 23개의 일반 투구가 등록되어 있다.

 

이에 반해 [Illiers L'Eveque]에는 단지 2개의 고정된 석궁만 있었다.

 

요새화된 마을 안의 무기고에도 유사하게 다양한 무기들이 존재했다.

 

[시농(Chinon)]

 

큰 석궁(ad tornum)4개, 양족식(兩足式) 석궁 3개, 13개의 등자 달린 석궁이 있었다. 다른 22개는 피에르 드 세인트 자일스(Pieere de Saint-Giles)의 손에 있었다.

 

ad tornum 석궁에는 2,000개, 양족식 석궁에는 10,000개, 등자식에는 33,000개의 쿼렐이 배당되었다.

 

이외에 20개의 날카로운 칼날, 3개의 십자가(crosses-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60의 큰 방패와 30개의 작은 방패, 투석기에 쓸 400개의 줄, 11개의 커다란 공성병기가 있었다. 이 중 하나는 스프링얼의 초기 형태를 하고 있다.

 

그 외의 물자로는 6개의 큰 수레와 26개의 작은 수레로 식료품과 와인을 나른다. 여기에 'doubled' 투구 4개, 사슬 두건(mail coif) 26개, colerias(목과 어깨 보호대) 10개가 보관되어 있었다.

 

 이보다 작은 [리용스-레-포레]에는 단지 5개의 체인 메일과 4개의 작은 사슬 셔츠, 9개의 투구만이 있었다.

 

(스프링얼sparingal-이것은 로마 시대의 '팔라리카(falarica)'의 변형으로서, 탄력있는 목재로 짧은 화살의 끝 부분을 찰싹 쳐서 날리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이 화살은 불을 지르기 위한 것이어서 수비군들이 불을 끄기에 바쁘도록 하였다.)

 

[상아로 만든 체스말(나이트). 12세기 남프랑스의 것이다. 추가 쇠테를 둘러친 투구에 주목하라. 아마도 초기 형태의 테두리가 있는 chapel-de-fer투구로 보인다.]



수레는 병참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로 존엄왕 필리프 치하에는 40-50명의 서전트당 수레 하나가 필요했다. 텐트 역시 중요했다. 이들의 다양한 이름은 아랍-이슬람의 영향을 크게 받은 듯 한데, 아마 스페인이나 십자군 전쟁을 경유해 들어왔을 것이다. 텐트를 만드는 방식 또한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다른 서유럽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이슬람 세계와 큰 교류가 있었으니 바로 말(馬)이다. 중세 기사들의 전마인 데스트리에(destrier)에 대해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이 수두룩 하다. 그러나 중세 시대에 "차가운 피(cold blooded)"가 흐르는 힘센 말이 필요했던 것은 무거운 기사들을 싣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거운 짐을 끌기 위해서였다. 기사들을 태우는 말은 굳이 힘이 셀 필요는 없었다. 중세 유럽의 전마는 둔한 "힘센 말"이 아니라 콥(Cob)이라고 알려진 종이다. 이 종은 현재 서퍽 콥(Suffolk Cob)이나 펀치(Punch)가 된 듯 하다. 단지 중세 후기나 르네상스 시대에 무거운 플레이트 아머가 채용되면서 현대의 페르슈롱(percheron), 아르덴(Ardennes)종처럼 힘센 말이 군마로 자리잡게 되었다. 전마로서 데스트리에는 10세기 후반부터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의 여러 기록을 보면, 말들은 속보(trot)로 뛰기보다는 그냥 걷도록(walk) 훈련받았다. 당시 갑옷 입은 기사들이 사용하던 "뾰족한" 안장으로는, 이 말들이 빠르게 달릴 때 엉덩이가 견딜 수 없이 아팠기 때문이다. 단지 랜스 차지가 이루어지기 직전에야 속도를 높이도록 훈련받았는데, 그 순간에도 갤롭(gallop:전력질주)보다는 구보(cater:트롯보다는 빠르고 갤롭보다는 느림)로 돌진해 들어갔다.

 

[카르카송의 성벽. 알바주아 십자군 직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바깥쪽의 해자와 두겹의 성벽, 반원 형태의 탑에 주목하라.]


데스트리에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하고, 이제 "차가운 피"에 대해서 이야기 할 차례이다. "뜨거운"과 "차가운"피는 여전히 널리 오해되는 대상 중 하나이다. 이 구분에는 어떠한 유전적인 요인도 적용되지 않는다. 이는 단지 말의 기질과 교배 장소에 따라 결정된다. 중세시대에 콥과 같은 말은 푸르른 풀과 클로버가 가득한 풍요로운 지역에서 길렀다. 이전에 로마 기병의 군마가 그랬고, 이는 러시아 남부의 스키타이 유목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형태는 아랍 종 말에서 잘 드러난다. 반면에 중동의 말은 현대의 바르바리 말(Barb)종의 조상같아 보인다.(*비잔틴 제국의 말은 자유롭게 방목했지만, 사산조 페르시아에서는 마굿간을 짓고 집단적으로 키웠다.) 서유럽에서 군마의 질은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크게 약화되었다. 샤를마뉴와 그 후계자들 시기에 기사들이 썼을 대부분의 말은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다. 반면에 유럽을 침략해온 마자르인들은 훨씬 빠르고 거친 초원의 조랑말을 사용했다. 그럼에도 중세 초기에도 고대 로마 군마의 품종은 남쪽에 남아 있었다. 지중해 남부와 아랍종은 매우 유사하다.


13-14세기에 이르러 중동이나 아랍-이슬람의 기마 전통은(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이슬람의 것과는 구분된다.)로마인의 것과 기본적으로 흡사하며, 등자의 추가와 안장의 발달은 아랍인들을 더욱 강력하게 해주었다. 그들이 영향을 준 중세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아랍 전사들 역시 전투 직전에야 말에 올라탔다. 이동할 때 기사들이 펠프리(palfrey-전투마와 구별되는 의미에서 승용마)를 타고 다녔던 것처럼, 아랍인들은 노새나 당나귀, 낙타를 사용했다. 사실 중세의 승마법은 고대 로마와 아랍의 영향을 모두 받은 것이었다. 서유럽의 안장은 결과적으로 중동의 가벼운 형태와 차이를 보였다. 그것은 펠트로 완충재를 댄 목재 골격을 가진 형태의 발전형으로, 유럽이나 아랍인들도 중세 초기에 이를 도입했다. 로마인들이 고심해서 만든 안장의 커브 각도는 대부분의 유럽에서 사라지고 뾰족한 안장이 이를 대신했다.

[카르카송의 요새. 13세기에 대대적으로 재건축되었음에도, 이 방어는 초기 건축물에 비해 떨어진다. 목재로 만든 판장이 있는 탑에 주목하라.]


중세 프랑스에서 전마를 교배시키는 방법 또한 아랍인들에게서 배우다시피 한 것이다. 아랍인들은 로마인이 만들었던 교배법을 되살리는 대신, 그들 고유의 것을 창안해냈다. 아랍인들은 선배인 로마인과는 다르게, 말의 양보다는 질을 우선시하여 교배시켰다. 최초로 나타난 교배 지침서는 785년의 것으로 인공 수정법 또한 늦어도 1286년 이전에는 발명되었다. 아랍마는 이르면 9세기부터 스페인을 경유하여 수입되었는다. 12세기에 이르면, 아마도 1차 십자군의 영향으로 비잔틴이나 페르시아 타입의 강한 말들 또한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프랑스 십자군들은 이 힘센 말들이 '작은 사라센의 말들을 굴려버릴거라고' 기대했었다. 아랍의 영향은 중세의 말 교배법에서 사용되는 전문 용어에서도 드러난다. 바르도[bardot]이라는 단어(종마와 엉덩이...라는 말이 합쳐진 결과)는 아랍의 [birdhawn]에서 나왔다. [birdhawn]은 딸 혹은 짐말이란 의미이다.

 


프랑스인들의 말 사육법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곳은 이슬람 지배 하의 스페인이었다. 8세기 부터 코르도바에는 아주 유명한 목장들이 설립되었다. 이 남부 스페인에서 유명한 안달루시아 종(Andalusian breed)이 나왔다. 기본적으로는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르종에서 나왔지만, 안달루시아 종은 아랍종의 기본적인 특징도 가지고 있다. 안달루시아종은 우선 동양종이 서유럽에 알맞게 변형된 것이다. 노르망디의 윌리엄은 헤이스팅스 전투 전에 2마리의 안달루시안 종을 가지고 있었고, 이 말은 "뜨거운 피"를 가졌다고 일컬어져 11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대량으로 수입되었다. 이 말들은 불가피하게 전마들이 사육되는 장소의 영향도 받고, 프랑스 전마로서의 특징도 갖추게 되었다. 남부 노르망디의 페르슈 지역에서 길러진 말은 페르슈롱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12세기 초반에 페르슈 백작 로트루 3세는 스페인의 레콩키스타에 참가하여 사라고사와 투델라를 점령하는데 일조했다. 백작 로트루가 그 곳에서 말을 키우는 방법을 배워 페르슈로 돌아왔을까? 그리고 그 종이 이후에 페르슈롱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일까?


12세기 말에 이르러 [루이의 대관](Couronnement de Louis)이라 알려진 무훈시(Chanson de Geste)가 작성되었을 때, 이상적인 기사는 밧줄로 동물을 훈련시킬 수 있어야 했다. [루이의 대관]에 따르면 말의 구성은 데스트리에와 짐말, 승용마, 노새, 그 외에 짐 나르는 동물 한마리가 필요했다. 데스트리에는 매우 가치있는 것이었지만(*역겔에 아주라햏이 올린 자료에 의하면 6720만원 이상) 펠프리(승용마 588-840만원) 역시 잘 훈련된 동물이었다. 펠프리는 측대보(側對步 같은 쪽의 앞 뒷 발을 동시에 내딛는 느린 걸음걸이)로 걷도록 훈련받았는데 현대에 이런 종류는 길들여진 말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측대보는 트롯으로 뛰는 말에 비해, 특히 장거리 여행을 할 때는 훨씬 승마감이 좋았다. 그러나 펠프리에게 반드시 측대보를 가르칠 필요는 없었다.

 

 

{참고-중세 물가 자료. 아주라햏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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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THIS IS TOTAL WAR
글쓴이 : 게이볼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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