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세유럽

[스크랩] [멘엣암즈]중세 프랑스 군대[남프랑스 민병대]

구름위 2012. 10. 7.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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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후속편이 있었을 줄은...OTL...히틀러의 보구는 역시 타이가;;)

 

민병대

 

 

 민병대 역시 남부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민층에서 소집된 도시 민병대는 북부의 것보다 훨씬 중요한 전력이었으며, 12세기까지 요새화된 도시에서 활, 도끼, 귀자름같은 무기로 싸웠으며 큰 돌을 던지기도 햇다. 전역에서 민병대는 동정심 없는 트루바두르들에게 손에 활을 들고 뿔피리나 파이프를 불며 수레의 짐을 안내하는 정도로 묘사되었다. 침략이 벌어지면 그들은 적의 성벽을 공격하는 역할도 맡았다. 만약 민병대가 사로잡히면, 시민[bozeis]이나 [sirven]같은 민병대는 손이나 발이 잘려질 수도 있었다. 반면에 기사는 단지 귀나 코 정도를 잃는 것 뿐이었다.(이것만 해도 덜덜덜이네-_-)


 12세기 중반에 이르러 법과 질서가 무너지고 툴루즈 백작령에서는 평화 운동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교회는 이들을 이끌었으며 '주교의 민병대'나 지방의 주교 휘하의 코뮌들을 조직했다. 반면에 마을 사람들은 성벽을 증축하기 위해 [tallage]라는 세금을 내야 했다. 반면 성당기사단(Order of Templars]은 각 마을에서 바친 곡식을 받고 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력을 파견했다. 만약 민병대가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1192년 리모주 사람들이 난동을 부리는 브라반트 인들을 쫓아버렸던 것처럼, 성당기사단은 민병대를 잘 통제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도적들을 처리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고 지방에서 법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낳았다. 그리고 민주적인 지역 집회에서 시민들은 모든 군사적 문제들을 토의하여 결정하는 일도 많아졌다. 대부분의 집회는 알비주아 십자군 와중에 사라졌고, 교황의 사절[Papal Legate]들 역시 이단자들이 바글댈 수 있는 집회 장소를 무너트려 버렸다.

 

*1308년 건축된 Pont Valentre.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요새화된 다리로 3개의 탑이 보호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알비주아 십자군 와중에서도 살아남았다. 1286년에 영국왕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와 으르렁대고 있었다. 이 때에 에드워드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아젠의 공동체 총회]가 열렸다. 시민군은 이미 1255년 말썽많은 가스코뉴의 귀족들을 박살내버렸고, 프랑스 지배지역에 서 단려왕 필리프가 모은 군대 역시 1294년 전쟁이 터진 후 매년 이어지는 전쟁 와중에 해체되어 버렸다. 민병대는 봄 늦게 소집되어 여름에 집결했다. 그들은 북쪽의 [Rheim]이나 [아라스Arras]까지 진군하거나, 아니면 영국령 가스코뉴의 전방으로 갔다.


 민병대들이 자기 도시를 위해 싸울 때, 그들은 다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다양한 전열을 짰다. 민병대들이 절정기에 올랐을 때, 그런 임무는 [gach]혹은 [gag]((북부의 [guet]과 유사하다))라는 것으로 거리를 정리하는 것, 성벽과 성벽 위의 군사들을 점검하는 것, 잠자다 걸린 새퀴의 무기를 압수하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gach]나 [reyregach]는 일반적으로 밤에 했으며, [garde]혹은 [garde des portes]는 낮에 도시 성문을 관리하는 임무였다. 1315년 바용에서, 결혼한 남자는 일주일에 한 번 범죄자의 상태를 관리해야 했다. 시민들은 일반적으로 당번에 따라 소집되었고, 해질녘에 트럼펫이나 종이 울리면 집합했다. 밤에는 두 감시대가 있었고, [capitan]의 지휘를 받았다. [capitan]은 주로 외부인이었는데, 시장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바용같은 전략적인 위치에 있는 도시는 시장의 역할도 우선 군사적인 것이었다. 이를 비롯해 중요한 도시들은 뛰어난 수비대가 있었고, 특히 수확기에는 용병들을 소집했지만 대부분은 그 지역 사람들에 의존했다. 각 가정에는 무기가 있었고, 항상 좋은 상태로 유지해야 했다.


 만약 마을이 공격 받는다면 18세부터 60세까지의 시민들은-여성까지 포함하여-가용 인원이었다. 여성들은 무기와 음식, 마실 물을 가져왔고 상황이 심각해지면 아이나 사제, 수도사도 도왔다. 종교계를 제외하면 단지 거지와 외국인만 제외되었다. 귀족들은 [gach]나 [garde]의 임무를 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아마도 이는 귀족들이 [reyregach]가 이뤄지는 동안 말을 타고 성벽의 약한 부분을 보강하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가장 중요한 성문 관리는 문지기가 계속 관리했으며-교대하는게 아니라-가장 믿을만한 시민이나 용병의 고위층에서 임명되었다.
경보는 종이나 깃발, 트럼펫, 봉화등이 사용?怜?, [efrei]라는 용어,즉 위급한 상황에는 시민들의 전체 동원이 이루어졌다. 민병대는 작은 여러 조로 나뉘었는데, 다섯 명씩 대략 50명 정도였다. 만약 마을이 공격을 받는다면 민병대는 성벽에 늘어서서, 때로는 가족들의 도움을 받았다. 궁수나 석궁수들은 성벽의 총안에서 활을 쐈다. 기술자는 부서진 무기를 수리했다. 망꾼은 언덕 주변에서 망을 봤고 밤이 되면 정찰병들이 자리를 교체해서 조심스럽게 소리를 들었다. 시장은 사자나 스파이를 보내 도시 바깥쪽의 소식을 들었다.

 

*'이스라엘 인들이 패배시키는 모압인들'/1250년. 양쪽 무장은 비슷하지만 그레이트 헬름(양동이-_-;;)은 이스라엘인들만이 쓰고 있다. 한 기사가 사용하는 단검과 보병이 쓰는 도끼, 두 보병이 입고 있는 솜옷[갬버슨], 두 종류의 chapel-de-fer(케틀 헬름)에 주목하라.

 

 이외에 민병대는 왕이나 지역 영주들의 군대 규모가 적다 싶을 때도 소집되었으며 이 때는 무예나 기타 군사 기술을 기준으로 선발되었다. 도시 바깥쪽에서 일하는 민병대는 주로 가난한 장인이나 기능공으로 보이는데, 높은 지위의 시민이나 용병 대장들의 지휘를 받으며 도시 깃발과 트럼펫 악사뒤에서 진군했다. 이들이 본대에 합류하면 작은 조로 쪼개져 분산 수용되었다.


 남부의 민병대가 사용할 수 있는 무기는 북부만큼이나 다양했다. 13세기 바용에서는 부유한 시민이나 선원이 체인 메일을 지급했고, 솜으로 누빈 조끼와 남은 철제 투구등이 바용 민병대의 갑옷 수준을 반영해 줄것이다. 13세기 말기 아젠 근처의 [Lectoure]의 복장은 시민들이 자신의 무기로 무장했음을 암시하며, 적어도 검과 창, 방패와 솜으로 누빈 두건 정도는 가져와야 했다. 물론 이게 실제 현실을 반영하는지, 아니면 단지 이상적인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무기값은 결코 싸지 않았으니까. 평화로운 시기에 시민들은 무기를 팔아야 했다. 이 시기에 공공 장소에 무기를 가져오는 것은 금지되었고, 중요한 무기는 전문 군대들에게 지급되었다. 좀 더 부유한 마을은 반면에 위험해 지면 무기를 대량으로 사 가장 믿을만한 시민들에게 지급했다. 남부의 도시들은 일반적으로 무기 창고가 있었지만, 북부의 것과 마찬가지로 작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1317년의 법령에 의하면 마을의 모든 무기고는 왕실이 보낸 관리들이 관리해야만 했다.

출처 : THIS IS TOTAL WAR
글쓴이 : 게이볼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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