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세유럽

[스크랩] [멘엣암즈]중세 프랑스 군대[남프랑스]

구름위 2012. 10. 7.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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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의 서번트를 뽑아버렸다...OTL

 

 

남프랑스의 군대

 

 

 남부 프랑스의 역사는 북부 프랑스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10세기에 툴루즈 백작이 세력을 얻기 시작하더니 그 지역에서 매우 강력한 군사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11세기에 이르러 이 강력한 귀족들은 통제력을 잃기 시작했고 평화를 지키기 위한 교회의 시도들은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반면에 새로운 군사 계급인 밀리테스(평기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10세기 후반만 해도 낮은 지위였지만 지방의 영주들을 위해 검을 휘둘렀다. 11세기 중반에 이르러 밀리테스들은 지역의 실력자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북프랑스와 비교하면 남프랑스에서 영주와 기사들 사이의 봉건 관계는 훨씬 덜 '봉건적'이었다.


 1180년경, 남부의 밀리테스와 상급자인 caballarois는 북프랑스의 기사들보다 좀 더 전문적인 전사들이었으며, 그들의 지위는 오로지 전투 기술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나 12세기가를 거치며 그들 또한 고상하고 우아한 사람을 영유하기 시작했고, 이는 남프랑스의 음유시인들인 트루바두르(troubadours)들의 노래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북부의 네 종류의 기사가 있었던-강력한 귀족/영지 기사/보조 기사/용병 기사-것에 반해 남부에서는 미니스테리알레스(ministeriales)같이 영주의 궁정에서 생활하는 예속기사들은 드문 편이었다. 이들 역시 북프랑스처럼 강력한 기사와 귀족들과 그 봉신 기사들은 봉건 의무에 의해 전투에 나섰지만, 단기 전역이든 장기 전역이든 봉건 기사들보다 용병 기사들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이 전사는 전쟁용 롱소드를 포함해 전형적인 13세기의 무기와 갑옷을 갖추고 있다.


 군사적 관계는 북부의 그것에 비해 훨씬 평등했으며 작은 봉토를 소유했든, 큰 성을 소유했든 기사들은 "봉건 의무"보다는 "상호 보조의 협약(convenientiae)"에 의해 그들이 섬기는 영주를 위해 전투에 나섰다. 성들은 다양한 용어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자유소유권(freehold property)같이 소유되었다. 12세기에 들어서 남프랑스에서 교류가 확대되었고, 그 대부분은 툴루즈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모든 도시들이 똑같이 이득을 본 것은 아니었고, 몇몇 도시는 타 도시보다 훠린 호전적이었다. 예를 들자면 크라카송은 12세기에 강력한 군사 중심이었다. 도시나 마을에 기반을 둔 기사들 역시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이 기사들은 도시 지배를 부유한 상인들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고, 이 경우에 도시는 더 큰 자치권을 얻을 수 있었다.


 12세기 중반에 이르러 성이 없는 봉건 영지들 역시 프랑스 남부에서 곧잘 발견된다. 반면에 시장이나 상단의 봉건 권리는 토지보다 더욱 중요시될 수 있었고, 수입 역시 농업보다는 상업이 벌어들이는게 더 컸다. 11세기에 이르러 사람들은 군역에 나서는 것보다 보답으로 받는 토지를 빌려줘버렸다. 그러한 소유지는 상속되는 것은 아니었고, 대여자가 죽으면 원래 소유주에게 돌아갔다. 사실 남프랑스 사회에서 봉건 의무와 성은 북부 사회에서처럼 기본적인 형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남부 사회의 관리 구조는 고대 로마의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남부의 사회 운영 방식의 결과, 13세기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귀족" 지위를 손에 넣었을 수 있었다.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매우 적은 토지를 소유하거나, 혹은 아예 토지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1259년에 이르러 아젠(Agen)의 작은 지역에서는 150명의 하급 기사와, 여기에 더해 좀 더 높은 지위의 평기사와 남작까지 있었다.

 

 

완화와 현실주의

 

 

 남부의 전사들은 다른 방식으로 조직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과 군사적인 삶에 대한 태도도 달랐다. 도시의 기사들은 요새화된 성벽 안에서 살며 영지를 받으면서도 돈이 되는 사업에 즐거운 마음으로 뛰어들었다. [chevalier a coite]라는 기사들은 아마도 덜 군사적인 보충원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단지 도시 기사들과 똑같은 일을 하는 다른 지위였을 수도 있다. 기사들이 조직되는 좀 더 흔한 방법은 [maisnade]라는 것으로, 주로 영주의 친척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aisnade]는 용병을 받아들여 힘을 키웠다. 남프랑스의 기사들에게 있어 "영광"은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이었다. 남프랑스에서는 '야만적인' 북프랑스의 여러 덕목들이 시큰둥하게 취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북프랑스의 기사도는 남프랑스의 것에 별로 영향을 준 것이 없었고 토너먼트도 그다지 활성화되지 못했다. 심지어 adober, 즉 수여식을 받은 기사라는 단어도, 이것이 시행된 11세기에 들어서도 약간 신비한 의식을 일컫기 보다는 '고유의 군사 장비로 무장한'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1228년경에 건축된 앙제 성. 중앙의 아성이 없다. 대신에 수많은 탑들이 있는 성벽이 도시를 감싸고 있다. 벗겨진 장식은 아마도 십자군의 결과로 시리아의 영향을 받은 형태였을 것이다.


 반면에 남부에서는 좀 더 평화적인 [궁정식 사랑]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이슬람 세계나 스페인의 기독교도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북부로 퍼져나가 루아르강 북부의 사나운 기사들을 "길들였다". 남부의 기사들은 좀 더 잘 교육받았으며 상인들과 함께 다녔고, 새로운 사상에 더 열려있었다. 불행하게도 미디(Midi-주로 남동부의 프로방스 지방과 남서부의 랑그도크·아키텐 지방을 가리킨다)의 특별한 도시화는 카사르(Cathar)파와 같이 특별한 종교적인 믿음을 동반하고 있었다. 카사르파는 기사 뿐만 아니라 귀족들의 지지도 받았으며 13세기에 이르러 북프랑스는 대규모의 알비주아 십자군을 일으켜 남프랑스를 공격한다.


 남프랑스의 무기는 북프랑스와 비교해봐 크게 다르지 않다. 이에 관해 1170년 아르노 길뎀 드 마산(Arnaut Guilhem de Marsan-_-;;)이 묘사한 것이 남아 있다.


"좋은 말을 가지고나서, 나는 당신에게 어떤 종류인지 말할 것이네. 이것은 바람처럼 달리고 무기에 익숙해져 있지. 다음은 당신의 갑옷과 창, 칼, 그리고 서코트가 덮여 있는 사슬갑옷 차례네. 말을 훌륭하게 테스트해보고 나쁜 것이 아니면 좋은 안장을 얹고 고삐를 채우고 peitral[말의 앞가슴을 가리는 갑옷]을 입히세. 그리고 안장과 안장 모포에는 똑같은 문장을, 안장과 방패에는 똑같은 색을 칠하고 창대 위에 휘날리는 창기(槍期)에도 같은 색을 칠하게. 짐말에게 당신의 훌륭한 체인 메일을 운반하게 하고, 무기를 높이 쳐들어 좀 더 훌륭하게 보이게 하고, 언제나 종자들을 가까이에 두게.]


 남부와 북부에서 종자들의 지위도 달랐다. 12세기에 군사적 지위인 [escudiers]는 귀족이 아니었다. 그들은 주인의 말과 안장, 갑옷을 손질하고 전마를 끌고 다녔다. 다른 사람들에게 메세지를 받기도 하고, 심부름을 다녔으며, 전역 중에는 식량과 마초를 구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종자는 또한 짐수레를 지키는 역할도 맡았다. 그래도 식탁에서는 조금 높은 자리에 앉았다. [escudiers]라는 용어는 [sirven]이나 [donzel]과 공통점이 있다. [sirven]은 요새화된 도시 내에 다수가 거주했는데, 북부의 [서전트]와 비교할만 하다. 반면에 [donzel]은 비록 귀족출신이라 할지라도 기사의 종자나 하인처럼 행동했다. 13세기 들어 [donzel]은 기사의 갑옷을 입고 전투에 나서거나, 식탁에서 음식을 서빙하고, 기사들이 씻도록 도와주며, 주인의 말보다는 갑옷을 담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onzel]이 북부의 야망을 품은 젊은 [juvene]과 유사한지는 불분명하며, 어쩌면 가난한 몰락 기사의 자손들일 수도 있다. 12세기 부터 [escudiers]의 주위는 변하기 시작했고, 13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경무장 했을지라도 전투에 나서야 했다. 그들은 여전히 기사가 될 가능성이 있었고, 최신 유행을 따르지는 못할 지언정 "깔끔하고 말쑥하게" 단장하라는 충고를 들었다. 기사의 부하로 살며 종자들은 금전적으로도 기사들에게 의존했다.

 

*'헤롯과 그 근위병들' 남프랑스의 조각으로 13세기 초의 것이다. 체인 메일을 입은 전사들의 코이프는 갑옷과 분리되어 있으며, 칼의 코등이는 약간 굽어있다.


 남부의 군사 귀족들은 결집력이 부족했고, 이 때문에 알비주아 십자군 당시 북프랑스의 군대에게 패배하였으며 결국 남부의 군사 제도가 붕괴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반면에 남부의 군대는 때때로 성공적으로 싸웠는데 알비주아 십자군 이후, 미디 지역이 북프랑스의 손에 들어간 이후로도 그랬다. 이후 남프랑스는 북부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지역과 영국의 지배를 받는 지역으로 분리되었다. 1294-98년 사이, 단려왕 필리프가 영국 영토를 공격했을 때, 그가 패배시킨 군대는 대부분이 가스코뉴 출신 기사나 용병, 서전트들이었고, 단지 소수만이 영국에서 온 병력이었다. 그러나 바욘(Bayonne)은 여전히 영국령으로 남았고 가스코뉴의 귀족들은 나중에 못 믿을자로 악명을 뒤날렸지만, 당시에는 아니었다.


 남프랑스에서 돈을 받는 병사인 [soudadier]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용병과 봉신 기사의 차이는 불분명했다. 고급 용병들은 피레네 산맥에서 온 산악인들이었다. 가스코뉴, 나바레와 바스크는 12세기부터 14세기까지 뛰어난 보병들을 양산했고,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 중 [dard], 즉 무거운 투창은 매우 인상적인 무기이다. 그들은 이 무기를 '야만적인 아일랜드인이 쓰는 것처럼' 사용했다. 다른 이들은 궁수로 싸웠는다. 그러나 알비주아 십자군 와중에 북프랑스에 대항하여 그들을 괴롭히거나 기습하며 가장 잘 싸운 군대는 투창병들이었다. 아라곤이나 스페인쪽 피레네 산맥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12세기 후반부터 용병으로 싸웠다. 일부는 기사나 경기병으로 싸웠지만 가장 두려운 존재는 [almogaver](아랍어로는 al mughawir/'침략자')들이었다. 이들은 창이나 석궁으로 무장했다.
남부의 기술자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바가 없지만, 미디 지역은 공성전에 매우 뛰어났다. 한 가스코뉴의 기술자는 1254년 기사로 임명되었으며 사보이 백작까지 출세했다.

 

-_-;;;

 

출처 : THIS IS TOTAL WAR
글쓴이 : 게이볼그 원글보기
메모 :

남프랑스의 군대

 

 

 남부 프랑스의 역사는 북부 프랑스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10세기에 툴루즈 백작이 세력을 얻기 시작하더니 그 지역에서 매우 강력한 군사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11세기에 이르러 이 강력한 귀족들은 통제력을 잃기 시작했고 평화를 지키기 위한 교회의 시도들은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반면에 새로운 군사 계급인 밀리테스(평기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10세기 후반만 해도 낮은 지위였지만 지방의 영주들을 위해 검을 휘둘렀다. 11세기 중반에 이르러 밀리테스들은 지역의 실력자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북프랑스와 비교하면 남프랑스에서 영주와 기사들 사이의 봉건 관계는 훨씬 덜 '봉건적'이었다.


 1180년경, 남부의 밀리테스와 상급자인 caballarois는 북프랑스의 기사들보다 좀 더 전문적인 전사들이었으며, 그들의 지위는 오로지 전투 기술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나 12세기가를 거치며 그들 또한 고상하고 우아한 사람을 영유하기 시작했고, 이는 남프랑스의 음유시인들인 트루바두르(troubadours)들의 노래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북부의 네 종류의 기사가 있었던-강력한 귀족/영지 기사/보조 기사/용병 기사-것에 반해 남부에서는 미니스테리알레스(ministeriales)같이 영주의 궁정에서 생활하는 예속기사들은 드문 편이었다. 이들 역시 북프랑스처럼 강력한 기사와 귀족들과 그 봉신 기사들은 봉건 의무에 의해 전투에 나섰지만, 단기 전역이든 장기 전역이든 봉건 기사들보다 용병 기사들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이 전사는 전쟁용 롱소드를 포함해 전형적인 13세기의 무기와 갑옷을 갖추고 있다.


 군사적 관계는 북부의 그것에 비해 훨씬 평등했으며 작은 봉토를 소유했든, 큰 성을 소유했든 기사들은 "봉건 의무"보다는 "상호 보조의 협약(convenientiae)"에 의해 그들이 섬기는 영주를 위해 전투에 나섰다. 성들은 다양한 용어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자유소유권(freehold property)같이 소유되었다. 12세기에 들어서 남프랑스에서 교류가 확대되었고, 그 대부분은 툴루즈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모든 도시들이 똑같이 이득을 본 것은 아니었고, 몇몇 도시는 타 도시보다 훠린 호전적이었다. 예를 들자면 크라카송은 12세기에 강력한 군사 중심이었다. 도시나 마을에 기반을 둔 기사들 역시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이 기사들은 도시 지배를 부유한 상인들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고, 이 경우에 도시는 더 큰 자치권을 얻을 수 있었다.


 12세기 중반에 이르러 성이 없는 봉건 영지들 역시 프랑스 남부에서 곧잘 발견된다. 반면에 시장이나 상단의 봉건 권리는 토지보다 더욱 중요시될 수 있었고, 수입 역시 농업보다는 상업이 벌어들이는게 더 컸다. 11세기에 이르러 사람들은 군역에 나서는 것보다 보답으로 받는 토지를 빌려줘버렸다. 그러한 소유지는 상속되는 것은 아니었고, 대여자가 죽으면 원래 소유주에게 돌아갔다. 사실 남프랑스 사회에서 봉건 의무와 성은 북부 사회에서처럼 기본적인 형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남부 사회의 관리 구조는 고대 로마의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남부의 사회 운영 방식의 결과, 13세기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귀족" 지위를 손에 넣었을 수 있었다.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매우 적은 토지를 소유하거나, 혹은 아예 토지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1259년에 이르러 아젠(Agen)의 작은 지역에서는 150명의 하급 기사와, 여기에 더해 좀 더 높은 지위의 평기사와 남작까지 있었다.

 

 

완화와 현실주의

 

 

 남부의 전사들은 다른 방식으로 조직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과 군사적인 삶에 대한 태도도 달랐다. 도시의 기사들은 요새화된 성벽 안에서 살며 영지를 받으면서도 돈이 되는 사업에 즐거운 마음으로 뛰어들었다. [cheval‍ier a coite]라는 기사들은 아마도 덜 군사적인 보충원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단지 도시 기사들과 똑같은 일을 하는 다른 지위였을 수도 있다. 기사들이 조직되는 좀 더 흔한 방법은 [maisnade]라는 것으로, 주로 영주의 친척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aisnade]는 용병을 받아들여 힘을 키웠다. 남프랑스의 기사들에게 있어 "영광"은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이었다. 남프랑스에서는 '야만적인' 북프랑스의 여러 덕목들이 시큰둥하게 취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북프랑스의 기사도는 남프랑스의 것에 별로 영향을 준 것이 없었고 토너먼트도 그다지 활성화되지 못했다. 심지어 adober, 즉 수여식을 받은 기사라는 단어도, 이것이 시행된 11세기에 들어서도 약간 신비한 의식을 일컫기 보다는 '고유의 군사 장비로 무장한'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1228년경에 건축된 앙제 성. 중앙의 아성이 없다. 대신에 수많은 탑들이 있는 성벽이 도시를 감싸고 있다. 벗겨진 장식은 아마도 십자군의 결과로 시리아의 영향을 받은 형태였을 것이다.


 반면에 남부에서는 좀 더 평화적인 [궁정식 사랑]을 발전시켰다. 이것은 이슬람 세계나 스페인의 기독교도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북부로 퍼져나가 루아르강 북부의 사나운 기사들을 "길들였다". 남부의 기사들은 좀 더 잘 교육받았으며 상인들과 함께 다녔고, 새로운 사상에 더 열려있었다. 불행하게도 미디(Midi-주로 남동부의 프로방스 지방과 남서부의 랑그도크·아키텐 지방을 가리킨다)의 특별한 도시화는 카사르(Cathar)파와 같이 특별한 종교적인 믿음을 동반하고 있었다. 카사르파는 기사 뿐만 아니라 귀족들의 지지도 받았으며 13세기에 이르러 북프랑스는 대규모의 알비주아 십자군을 일으켜 남프랑스를 공격한다.


 남프랑스의 무기는 북프랑스와 비교해봐 크게 다르지 않다. 이에 관해 1170년 아르노 길뎀 드 마산(Arnaut Guilhem de Marsan-_-;;)이 묘사한 것이 남아 있다.


"좋은 말을 가지고나서, 나는 당신에게 어떤 종류인지 말할 것이네. 이것은 바람처럼 달리고 무기에 익숙해져 있지. 다음은 당신의 갑옷과 창, 칼, 그리고 서코트가 덮여 있는 사슬갑옷 차례네. 말을 훌륭하게 테스트해보고 나쁜 것이 아니면 좋은 안장을 얹고 고삐를 채우고 peitral[말의 앞가슴을 가리는 갑옷]을 입히세. 그리고 안장과 안장 모포에는 똑같은 문장을, 안장과 방패에는 똑같은 색을 칠하고 창대 위에 휘날리는 창기(槍期)에도 같은 색을 칠하게. 짐말에게 당신의 훌륭한 체인 메일을 운반하게 하고, 무기를 높이 쳐들어 좀 더 훌륭하게 보이게 하고, 언제나 종자들을 가까이에 두게.]


 남부와 북부에서 종자들의 지위도 달랐다. 12세기에 군사적 지위인 [escudiers]는 귀족이 아니었다. 그들은 주인의 말과 안장, 갑옷을 손질하고 전마를 끌고 다녔다. 다른 사람들에게 메세지를 받기도 하고, 심부름을 다녔으며, 전역 중에는 식량과 마초를 구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종자는 또한 짐수레를 지키는 역할도 맡았다. 그래도 식탁에서는 조금 높은 자리에 앉았다. [escudiers]라는 용어는 [sirven]이나 [donzel]과 공통점이 있다. [sirven]은 요새화된 도시 내에 다수가 거주했는데, 북부의 [서전트]와 비교할만 하다. 반면에 [donzel]은 비록 귀족출신이라 할지라도 기사의 종자나 하인처럼 행동했다. 13세기 들어 [donzel]은 기사의 갑옷을 입고 전투에 나서거나, 식탁에서 음식을 서빙하고, 기사들이 씻도록 도와주며, 주인의 말보다는 갑옷을 담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onzel]이 북부의 야망을 품은 젊은 [juvene]과 유사한지는 불분명하며, 어쩌면 가난한 몰락 기사의 자손들일 수도 있다. 12세기 부터 [escudiers]의 주위는 변하기 시작했고, 13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경무장 했을지라도 전투에 나서야 했다. 그들은 여전히 기사가 될 가능성이 있었고, 최신 유행을 따르지는 못할 지언정 "깔끔하고 말쑥하게" 단장하라는 충고를 들었다. 기사의 부하로 살며 종자들은 금전적으로도 기사들에게 의존했다.

 

*'헤롯과 그 근위병들' 남프랑스의 조각으로 13세기 초의 것이다. 체인 메일을 입은 전사들의 코이프는 갑옷과 분리되어 있으며, 칼의 코등이는 약간 굽어있다.


 남부의 군사 귀족들은 결집력이 부족했고, 이 때문에 알비주아 십자군 당시 북프랑스의 군대에게 패배하였으며 결국 남부의 군사 제도가 붕괴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반면에 남부의 군대는 때때로 성공적으로 싸웠는데 알비주아 십자군 이후, 미디 지역이 북프랑스의 손에 들어간 이후로도 그랬다. 이후 남프랑스는 북부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지역과 영국의 지배를 받는 지역으로 분리되었다. 1294-98년 사이, 단려왕 필리프가 영국 영토를 공격했을 때, 그가 패배시킨 군대는 대부분이 가스코뉴 출신 기사나 용병, 서전트들이었고, 단지 소수만이 영국에서 온 병력이었다. 그러나 바욘(Bayonne)은 여전히 영국령으로 남았고 가스코뉴의 귀족들은 나중에 못 믿을자로 악명을 뒤날렸지만, 당시에는 아니었다.


 남프랑스에서 돈을 받는 병사인 [soudadier]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용병과 봉신 기사의 차이는 불분명했다. 고급 용병들은 피레네 산맥에서 온 산악인들이었다. 가스코뉴, 나바레와 바스크는 12세기부터 14세기까지 뛰어난 보병들을 양산했고,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 중 [dard], 즉 무거운 투창은 매우 인상적인 무기이다. 그들은 이 무기를 '야만적인 아일랜드인이 쓰는 것처럼' 사용했다. 다른 이들은 궁수로 싸웠는다. 그러나 알비주아 십자군 와중에 북프랑스에 대항하여 그들을 괴롭히거나 기습하며 가장 잘 싸운 군대는 투창병들이었다. 아라곤이나 스페인쪽 피레네 산맥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12세기 후반부터 용병으로 싸웠다. 일부는 기사나 경기병으로 싸웠지만 가장 두려운 존재는 [almogaver](아랍어로는 al mughawir/'침략자')들이었다. 이들은 창이나 석궁으로 무장했다.
남부의 기술자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바가 없지만, 미디 지역은 공성전에 매우 뛰어났다. 한 가스코뉴의 기술자는 1254년 기사로 임명되었으며 사보이 백작까지 출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