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스크랩] 조선의 만주 출병 - 여진에 대비하는 조선 (3)

구름위 2012. 10. 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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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이 기미책을 써서 여진을 다독거리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힘을 길러 침략에 대비하는 자강책도 실시했다.
여진의 침략 근성은 버리지 않은 상황에서 유연하게만 대처할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런 방어대책을 세우려면 적을 알아야 했다. 손자병법에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누르하치 진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은 다양했다.

반 누르하치 부족에게 면포 등을 공급하여 환심을 산 뒤 정보를 수집했고, 여진어 역관등을

양성하여 적절하게 첩자로 써먹었다.

여진땅에 억류되었다가 풀려 나온 역관 하세관을 관직을 주어 후금에서의 경험을 활용했고,

명을 돕기 위해 참전했다 패전하고 후금에 항복한 강홍립을 이용하여 후금 내부 사정을 파악하기도 했다. 강홍립은 탈출하는 조선군 포로를 통해 광해군에게 밀서를 보내 정보를 알려줬던 것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역관을 양성하여 이들을 첩자로 쓰는 동시에 수시로 누르하치 영토로 들여보내 그들과의 연락을 취했고 , 그 과정에서 여진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힘을 썼다.

이렇게 정보를 수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정보 유출을 차단하는 것도 신경을 써 야 했다.

조정의 중요한 결정 사항을 조보( 나라가 발행하는 신문)에 싣지 못하게 했고, 변경지역의 여진인들을 엄중히 감시하고, 조선에 망명온 여진인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만주의 귀환을 막았다.
당시 여진인들은 생산기반이 없기 때문에 약탈과 수렵으로 먹고 살기 때문에 생존의
차원에서 정보가 필요했다. 그때문에 여진인들의 첩보와 간첩 활동은 명나라 인사들까지 인정하는 높은 수준이었다.

그것을 아는 광해군으로써 정보 유출을 그렇게 막는 것이었다.

이런 정보전을 바탕으로 광해군은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여 군사적인 대책을 세웠다.

국왕 자신부터 국방문제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여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에 관련된

사항이 있으면, 밤이나 낮이나 상관없이 아뢰도록 했고, 군사관계 행사를 수시로 열었다.

즉 진법 연습장면을 참 관하고, 관무재( 병사들의 무예 실력을 점거하는 시험)을 열어

직접 병사들의 훈련 상태를 점검했다. 강화, 수원, 죽산, 용인등 서울 주변의 요충지에

수시로 어사를 파견하여 방어태세를 점검했다.

무기 확보에도 열을 올랐다. 누르하치 기마병들을 막는데, 화포가 제일이라는 인식 아래,

그것을 제작하고, 사격술을 연마하는데, 주력했다.

당시 여진군들은 명과의 전투에서 지금까지 보여줬던 북방민족의 공격 방식에서 탈피하여

평원에 있던 성들을 공략했다. 즉 선두의 기마대가 돌이나 흙을 담은 자루를 들고 질풍같이

달려와 성 밑에 그것을 쌓는다. 그것을 반복하여 어느 정도 높이에 이르면, 본대의 기마대가

그것을 밟고 성을 넘어 들어가 공격하는 방식이다. 지금까지 훈련해온 농성법으로

저항했던 명군은 새로운 방식이 나타나자, 적응도 못하고, 그 위력앞에 무너져, 결국 평지에

있는 성들을 하나 둘씩 무너졌던 것이다.물론 평원에서 전면전은 더 말할 필요는 없겠다.

그런 관계로 조선의 전략은 평원에서 맞서는 작전보다는 산성에 들어가 화포로 쏘아 제압하는 것이 최선의 결론이다고 광해군은 결론을 내려던 것이다.

조선은 1613년에 조총청을 화기도감으로 확대, 개편한 뒤 다른 비용을 줄여가면서 파진포등

각종 화포를 생산하게 했다.
화포에 중요한 화약을 많이 생산하기 위해서 조선은 염초를 명에

연례로 가는 사절단을 통해 대량수입해 갔다. (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지속적으로

염초 제조법을 알려고 했지만, 명의 통제로 알지 못했다. 당시 조선이 염초를 생산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급할 수준은 아니였다. )

화포외에도 활, 화살, 창검등 재래식 무기의 제작과 확보에 열을 올렸고, 조총도 대량 생산했다.

일본에 통해서도 일본산 장검과 조총을 수입했다.

이런 무기 제작과 확보 이외에도 우수한 장수와 충분한 병력을 확보하는데 노력했다.

임진왜란의 의병장 출신의 곽재우를 발탁하여 북병사로 올려 보냈고, 변방 수령의 대부분을

무인으로 교체했으며, 내수사(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관청) 소속의 노비들을 정식 군인으로 선발하고, 승군을 정비했으며 수시로 무과을 실시하여 합격자들을 변방에 나아가도록 했다.

이런 광해군의 노력들은 왜란 직후 광해군 시대의 국가목표가 무엇보다도 생존문제에

맞추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출처 : 역사 속의 전쟁사
글쓴이 : mok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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