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스크랩] 조선의 만주출병- 여진의 성장(3)

구름위 2012. 10. 7.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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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중반부터 여진족에 대한 명나라의 통제가 점차 느슨해지기 시작하면서 여진족들의
국경 침략이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명나라의 대책은 국경을 강화하고, 무역에 대한 통제 강화 및 군대를 보내 자주 토벌작전을 벌이는 것이다. 또한 이이제이라는 원칙을 이용하여 조선을 통해 여진을 압박하기도 했다.
(* 조선시대 세조, 성종시대에 여러 차례 명나라는 조선정부에 건주여진을 치게 군대파견을 요청했고, 이에 조선은 군대를 보내 명나라군과 연합작전을 벌여 여진을 토벌했다.
형식상 조선과 명의 연합작전이지만, 실상은 조선군의 단독작전이었다. 이때 여진의 토벌로
용맹을 떨친 사람은 태종의 외손자 남이장군이었다.)
하지만, 이런 대책들도 여진의 국경 침탈을 막지 못했다.
그 후 100년의 세월이 지났다.
16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여진족 사회에서는 서서히 커다란 변화가 조금씩 불기 시작했다. 그 변화의 중심은 바로 건주여진의 누르하치였다.
그는 1559년에 건주여진에 속하는 어느 여진족 부족에서 타쿠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어버지 교창가는 그 당시 부족을 이끄는 수장이었고, 타쿠시는 그의 후계자였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형제들이 많기 때문에 부족을 이끄는 차세대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경쟁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뛰어난 머리와 용맹으로 할아버지의 인정을 받으면서
타쿠시의 뒷을 이을 제 3의 후계자가 된다.
누르하치가 속한 부족은 명나라의 통제하에 용병으로 먹고 사는 부족이었다.
누르하치의 조부와 부친은 그 지위에 만족하며 살지만, 누르하치 본인 자신은
그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누르하치에게 인생이 바뀌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해서여진의 아타이가 명나라에 반항을 하면 반란을 일으키자, 명나라는 이성량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토벌케 했다.
이성량은 누구인가?
바로 임진왜란때 조선에 원정간 이여송의 아버지였다.
이성량의 조부는 본래 조선인이었지만 죄를 짓고 명나라로 도망가 그 곳에서 명군에 들어가 활동을 한 자였다.
그런 관계로 이성량 집안은 요동에서 군대 밥을 먹는 무인집안이 된 조선족 출신의 가정이었다.
그 이성량은 조정의 명을 받들어 그 반란군을 치기 위해서 명군 뿐만 아니라 건주여진 출신
용병들도 이끌고 출전했다. 당연히 누르하치를 포함하여 그의 아비, 조부까지 끼었다.
명과 건주의 연합군은 승리를 거두어 아타이를 거의 생포하기 하는 직전까지 갔었다.
거의 승리가 다 되어가는 순간에 사건은 발생했다.
당시 누르하치의 조부 교창가는 같은 여진족 출신의 아타이에게 동정심이 생기게 되었고,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직접 항복을 설득하기로 마음을 먹고 그의 아들 타쿠시하고 같이 반란군 진영으로 찾아갔다.
그렇지만, 설득하는 과정에서 명군은 이들을 무시하고 반란군을 공격하여 이들 부자는그 과정에서 사망했다.
명군때문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잃은 누르하치의 속마음은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는 대놓고 명군사령관에게 도전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였다.
난감해진 것은 이성량도 마찬가지였다. 이성량은 미안한 마음에 누르하치에게 무역 증서
60통을 주었다.
보통 유력 여진족 세력가들이 갖은 무역 증서는 1장내지 2장 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한
수치였다.
이 무역증서는 명 정부의 통제장치로써 작용도 하지만, 거꾸로 이것을 소지한 여진족은
떼돈을 벌 수 있었다. 60 통이나 되는 무역증서를 갖게 된 누르하치는 건주여진과
명나라 상인들간의 교역을 독점할 수 있게 되었다.
명과의 무역에서 그는 경제적인 이익을 많이 챙겼다. 이렇게 얻은 엄청난 부로
인해서 주변의 여진부족들은 자발적으로 누르하치의 지배에 들어갔다.
또한 경제적인 부로 인해서 군사력도 강해지니, 누르하치는 무력으로 또는 회유 작전으로
1583년경부터 건주 여진부족들을 공략하기 시작하여 1588년 정도에는 건주 여진 대부분을
통일했다.
잠깐 사이에 누르하치가 큰 세력가로 성장하자, 명나라는 깜작 놀랐다.
이에 명나라는 강경 토벌책보다 회유책을 써 그를 견제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즉 건주위도독첨사라는 벼슬을 내려 명의 관료 체계 안에 묶어둠으로써 누르하치를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꼴밖에 안되어 누르하치는 오히려 이 직함을
이용하여 다른 여진부족이 갖지 못하는 정치적 우세를 획득하여 더욱 세력을 확장했다.
1589년에는 이렇게 커진 자신의 세력을 믿고 그는 스스로 왕이라 칭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명나라의 관심이 조선으로 돌리자, 그 틈에
누르하치는 주변세력을 공략하는데 박착을 가했다.
그에게 임진왜란은 분명 호기였다. 이런 그의 자신감은 곧 조선에게로 전해졌다.
1592년 9월 , 1598년 1월 에 두차례 걸쳐서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여 원병을 파견하겠다고
제의를 한 것이다. 조선 조정은 두번 다 거절했지만, 여진족들은 자신들의 무좀으로
여겼던 조선으로써 큰 충격이었다.
(* 무좀이라는 표현은 16세기 전반기에 어느 사대부가 자신의 저서에서 했던 말이다.

즉 무좀은 인간에게는 큰 병은 아니지만, 자주 가리우니 신경이 자주 가는 존재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진족은 조선에게는 큰 위협은 아니지만, 자주 국경을 넘어 약탈을

하니 귀찮은 존재였다.

그런 관계로 그 조선의 사대부는 여진족을 무좀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1599년은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더니 1605년에는 국호를 지명을 따서 건주국이라

칭했다. 여진족으로서 독자적인 자의식은 점점 커져가고 , 자신들을 교묘히 견제했던

명에 대해서 반감이 증폭되었다.

1607년에는 누르하치는 조선의 선조에게 국서를 보내와 " 천조와 너희 조선, 우리 달자 삼국" 표현을 써서 조선과 대등한 국가라는 인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얼마 전까지 조선조정에 벼슬을 내려 달라는 요구를 했던 누르하치가 이렇게 나가니

조선인의 심정은 격세지감을 느껼 수 것이다.

1616년에 완전히 아니지만, 거의 여진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옛 금국의 과거를

재현한다는 명분아래 나라 이름을 후금이라 칭하고, 칸의 지위에 오른다.

이것은 완전 명나라에 대한 대외적인 도전이었다.

이렇게 여진족들이 세력을 키워갔을 때 명나라는 도대체 무엇 했을까?

명나라는 왜란을 전후하여 당쟁이 격화되고 환관들은 미쳐 날뛰어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태였다. 그 전 시기보다도 더 혼란한 시기였다.

에스파냐 함대가 영국 함대에 패해 이후로 포르투칼과 스페인의 동양무역은 크게 쇠퇴했고,

그 시점으로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던 많은 은들은 크게 줄어들었다.

그 여파로 인해서 은에 의존했던 명의 경제는 심한 타격을 입었고, 임진왜란을 비롯한

대외 원정, 대화재 이후의 복구사업, 연례적인 국방비, 황태자의 결혼식등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 국가재정은 파탄이 났다.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명나라 조정은 결국 광세니 상세니 하고 불리는 세금으로 거두니 자연히 민심은 돌아서고, 조직적인 반란은 중원대륙을 휩쓸었다.
명 내부에서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가고 있으니 누르하치를 어떻게 신경을 쓰겠는가!







출처 : 역사 속의 전쟁사
글쓴이 : mok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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