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스크랩] 조선의 만주출병- 여진의 성장(2)

구름위 2012. 10. 7.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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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는 원을 세운 몽고족과 금을 세운 여진족때문에 漢족들이 가지는 중화라는 자존심이 깔아뭉게졌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크게 주목을 하여 이들 이민족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썼다.
대막의 몽고족들에게 강력한 국가가 출현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명나라는 자주 몽고 大漠으로 원정을 하는 무력 정책을 쓰거나, 책봉과 조공무역을 전개하는 유화정책을 동시에 썼다.
몽고의 분열과 자신들의 질서에 편입시켜 안보상의 안정을 확보하는 것이 자신들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강경책과 유화책 모두 명나라는 실패를 보았다.
명나라 최고의 황제 영락제는 자신의 쿠데타의 정당성을 조금이라도 입증하기 위해서 몽고에
수차례 원정을 갔지만, 한고조, 한무제같은 역대 중국황제들처럼 효과를 보지 못했다.( 역대 한인 황제중에 당태종만은 유일하게 성공했다.) 오히려 마지막 원정 길에 가는 도중에 원정의
피로를 못 이기고 병사했다.
더구나 그의 손자 명나라 정통제 영종시기에는 몽고 사막에서 에센이라는 자가 원나라 황실 후예를 칸으로 추대하고 몽고전체를 지배하고, 만주까지 손을 뻗쳐 여진의 일부를 지배하더니
조공무역의 확대를 요구하여 명나라가 거부하자, 국경지대에서 약탈행위를 심하게 했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실권을 지고 있던 환관이 황제까지 강제로 친정시키면 몽고에 원정을 갔지만, 토목의 변을 당하여 명나라 군사들은 전멸당하고, 황제는 몽고군의 포로가 되는 치욕을 받았다. 그것을 계기로 명나라는 공세에서 수세로 바뀌어 명나라 수도 자금성이 포위당하는 위기까지 발생하였다. 그 후에 명나라는 청나라에 멸망당하는 그 날까지 몽고족에 의해서 국경은 빈번하게 약탈당했다.
조공무역이라는 다른 방식도 큰 효과도 보지 못하여 끝없이 요구해 오는 몽고족의 경제적 욕구를 채워주다 보니 재정약화가 왔고, 전부 들어주지 못하니 몽고족의 약탈도 전보다 더 심해졌다.
몽고족들은 잠시 뭉쳤다가 서로의 이익으로 흩어져 오래동안 분열되어 칭기스칸의 몽고처럼
명나라에 국운을 생각할 만큼의 위협을 주지 않았지만, 명나라의 대몽고정책은 전반적으로
실패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제는 여진족에 대한 명나라의 정책을 알아보자.
명나라는 분열된 여진에 대해서 손쉽게 지배를 했다. 다만 직접적인 지배를 피하고
간접 지배방식으로 여진족을 통제했다.
그 지배방식을 보자.
북쪽으로는 개원, 남쪽으로는 여순, 동쪽으로는 압록강에 서쪽으로는 산해관에 이르는
요동과 요서를 직할령으로 삼아 요동도사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고,
여진족의 출입을 막았다. 여진족의 경제적 욕구를 통제하기 위한 정책이며
약탈을 막기 위해서다.
그 요동도사의 동쪽의 만주지역은 노아간도사라는 것을 두어 여진족을 간접 지배했다.
즉 노아간도사 아래에는 위소라는 행정기구를 두어 위소의 우두머리를 여진족으로 임명하고
자치를 허용했다. 다만, 관원의 임명, 여진족 사이의 분쟁에는 직접 개입하여
아골타 같은 대세력가가 나타나는 것을 막았다.
.노아간도사 휘하의 여진부족은 해서, 건주, 야인 여진으로 나우어 진다.
한마디로 여진족은 명나라에 의해서 분할되어 간접지배를 받았다
조선과 맞대은 여진은 평안도에 건주이고, 함경도는 야인여진이다.
대체적으로 해서 여진은 몽고와 가깝기 때문에 몽고족과의 혼혈이 있어 순수한 여진족이 아니면 여진 세력중에 가장 호전적이며 反明 감정이 가장 심하다.
건주여진은 명나라와 자주 조공무역을 했기 때문에 명나라에 대한 반감이 심하지 않은 편이며
수렵과 농사를 같이 겸하고, 문화적으로도 발전된 부족이다.
야인여진은 명나라와 멀리 떨어져 있고, 북쪽에 위치한 관계로 중국문화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채 농사도 짓지 않고 순수하게 수렵생활을 하며 가장 야만스럽고 원시생활을 하던 부족이다.
명나라 초기에는 농경에 서툴렀던 여진은 곡물이나 소금 면포 농기구등의 생필품을 자급하지
못하여 명에게 의존을 하였다.
당시 여진은 백두산 일대에서 캔 산삼과 수렵생활을 통해 얻은 모피, 연해주 지역의 담수호에서 양식한 진주로 명나라 상인들과 조공무역이라는 형태로 문물교환을 한다.
그것도 명나라 황제가 인정하는 무역증서를 통해서만 교역을 하는 제한된 무역이었다.
무역증서를 가진 여진족들은 누구겠는가? 명나라에 아부하는 여진의 유력자들이다.
결국 이런 조공무역은 명나라가 여진인들을 통제하려는 명 정부의 통제장치였다.
여진족 세력가가 만일 명나라의 말을 안 들으면 무역을 폐지시켜 여진족의 생사를 알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명나라 조정은 이런 여진족들을 길들였다
초창기에는 명나라의 여진족에 대한 정책은 성공을 했다.
하지만, 몽고와의 전쟁에도 여진족들을 동원하기도 했던 명나라는 그 후, 몽고족에 의한 국경지대의 혼란과 내부 사정으로 점차 여진족에 대한 통제가 느슨해지기 시작한다.





출처 : 역사 속의 전쟁사
글쓴이 : mok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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