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스크랩] 조선의 만주출병- 여진에 대비하는 조선.(1)

구름위 2012. 10. 7.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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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이전부터 조선정부는 평안도 국경지대에서 보내오는

장계를 통해서 여진의 급격한 변화를 알기 시작했다.

하지만, 왕을 포함하여 조선대신들은 여진의 변화에 그렇게 주목하지는

않했다. 다만, 율곡 이이만이 조선의 앞날에 대비하여 10만 양병설을 주장

할 뿐이었다. 실상 10만 양병설은 남쪽 일본보다는 북쪽의 여진 오랑캐에

더 뜻을 둔 시책이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고 조선 조정은 의주로 피난가서 그 곳에서 임시수도로

정하고 對日 전쟁을 수행했다.

그런 국경도시에 뜻하지 않는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누르하치가 보낸 사신인 것이다. 누르하치는 조선 조정에 원병을

파견하겠다고 제안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의주에서 나라가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여진이

병력을 파견하겠다고 스스로 자청하니 국왕 선조는 어떤 기분일까?

결국 조선이 거부하면서 사건은 일단 끝나지만, 이때부터 선조는 여진을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조선 사대부처럼 성리학적인 명분론에

빠진 사람이 아닌 현실의 눈으로 여진을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의주라는 곳이 국경도시인 만큼, 이러 저러한 계기를 통해 선조는

물론이요, 세자 광해군 까지 여진의 힘에 감을 잡게 되었다. 특히 명나라 장수들과의

교류를 통해 여진 문제에 대해서는 조선 제일이 아니지라도, 손에 꼽는

전문가가 되었다.

그 때문에 여진의 문제로 조정 대신들과의 대책회의 때마다, 신하들 보다

뛰어난 식견으로 회의를 주도했다니 충분히 공감가는 사실이다.

선조 국왕은 임진왜란부터 자신이 죽는 그 날까지 여진의 침략에 대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선조는 여진과 조선 사이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여진족들을 회유

하고 달래는 정책을 썼다. 국경을 넘어 산삼을 캐러 오는 여진족들을 조선인들이 전부 살해

하는 것이 관례였지만,지방수령에게 죽이지 말라고 지시를 했고, 국경지역의 여진족에게 면

포같은 생필품을 선사하는 등 여진과의 마찰을 되도록 피했다.

피하는 것외에도 여진의 정보를 캐기 위해서 건주 여진으로 들어가는 명나라 사절단에

조선인 역관을 동행시키기도 했고, 직접 사절단을 파견하여 여진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기도

했다. 이때, 무관 신충일이란 인물은 조선 국경부터 그들 지역에 이르는 지리적 개황과

생활상을 지도에 곁들인 상세한 보고서로 작성해 올렸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건주기정도기이다.

임진왜란 직전의 대일외교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아픈 경험을 했기 때문에, 또 다른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자기

반성에서 나온 결과가 아닐까?

마찰을 피하고, 정보도 수집하는 것외에 여진 침략에 대비하여 방어하는 대책도 세웠다.

" 그들은 막강하므로 우리의 정예병 10만으로는 맞받아 칠 수 없다"고 신하들에

설파하는 선조는 여진이 쳐들어 오면 청야작전을 쓰고 산성에서 저항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진군에게 평원에서 정면충돌을 해봐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조총을 잘 쏘고, 칼을 잘 쓰는 항왜들을 북방에 배치시켜,

유사시 그들과의 전투에 대비하기도 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는 혼란의 와중에도 선조는 일본군과의 싸우는 남쪽 전선에 도체찰사( 민

과 군을 총괄했던 벼슬)을 파견하는 동시에 북쪽에도 야인들의 침략에 대비하여

도체찰사를 파견했다.

평소에 우리가 생각했던 선조의 모습이 아니였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략가이자, 군사 전문가로 변신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출처 : 역사 속의 전쟁사
글쓴이 : mok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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