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스크랩] 조선의 만주 출병- 여진에 대비하는 조선(2)

구름위 2012. 10. 7.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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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견제와 정실 소생의 동생 영창대군의 탄생, 명의 딴지 걸기, 反광해군파 신하들의

공격으로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는데 시련이 많았다.

결국 선조의 갑자스러운 죽음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이이첨, 정인홍이 이끄는 대북파들의 도움

으로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선왕이 남긴 과제는 그를 왕위 기간내내 힘들게 했다.

임진왜란을 겪어 황폐해진 조선을 어떻게 복구할 것인가와 북방에서 불고있는 여진의 위협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가 부왕 선조가 남긴 대표적인 과제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광해군을 힘들게 만든 것이 바로 여진의 위협에 대한 대책이었다.

광해군이 누르하치의 여진에 취했던 대응책은 기본적으로 기미책이었다.

쉽게 말한다면, 변변치 못한 오랑캐와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견제하되, 정복하거나 지배하는 것과 같은 적극적인 대응을 피한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지 얼마 안 지난 시점에서 전후복구에도 힘들 판인데, 사나운 후금과 일일이

맞대응할 여력이 없었데서 나온 고육지책이기도 했다.

그런 관계로 광해군은 신하들이 모르는 후금과의 연락망을 갖추었다.

당시 일부 소수의 신하들만 광해군의 외교 노선을 찬성 할 뿐, 조정에서 대다수의 신하들은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우리가 배우는 교과서에는 대북파는 후금과 명에 대해서 중립외교선을 했다고 배웠지만,

실상은 광해군과 일부 소수의 사람들만 고분분투 했지, 대북파의 대부분은 인조시기의

서인의 강경파들과 별다른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인조시기엔 서인들 중에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자는 온건파들이 있어, 대북파보다는 어쩌면 서인들이 실리적일

수 있었다. 광해군의 충신 이이첨은 외교 라인에서만 앞장 서서 광해군의 반대편이 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런 관계로 광해군은 후금과의 비밀 연락망을 갖추어 명나라와 후금과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게 적절하게 이용했다. 의주부윤이 후금과의 연락을 취하고, 그것을 평안감사에 보고했고, 평안감사는 다시 광해군에게 보고하는 이 형태은 광해군의 대외 정책을 일선에서

실천했던 시스템이었다. ( 물론 역으로 할 수도 있다.)

명의 요구로 어쩔수 없이 조선이 만주로 병력을 파견했다가 명군과 함께 대패를 하고

조선군은 후금에 항복하는 최악의 상황에 빠졌을 때도, 광해군은 강홍립을 통해서

후금과 연락을 취해 적절히 타협을 봐, 관계를 유지하는데 성공을 했다.

또한 모문룡이 이끄는 명군이 조선 내륙에서 활동을 하면서 후금을 긴장시켰을때도,

광해군은 그를 평안도 앞바다에 있는 조그만한 섬 가도에 물러나게 만들었다.

또한 후금 사자가 조선에 방문했을때의 극진한 대접, 무역을 통해 여진의 욕구 충족,

후금에 보낼 국서의 형식을 놓고 신하들과의 논쟁, 명의 재징병 요구 거절등

광해군은 후금과의 관계 약화를 피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런 관계로 명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조선은 후금과도 일정한 관계를 맺어 어느

쌍방에 원한을 맺지 않고, 그들과의 전쟁에 휘말리지도 않아 조선은 한동안에

평화를 지속했다.



출처 : 역사 속의 전쟁사
글쓴이 : mok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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