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갑신정변

구름위 2013. 8. 22.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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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은 1884년 12월에 박영효, 김옥균,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을 중심으로 한 혁신파인 개화당이 수구당의 여섯 거두 윤태준, 이조연, 한규직, 민영목, 조영하, 민태호를 제거한 뒤 그 일파를 몰아내고 혁신정책을 위해 일으킨 정변이다.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이 크게 대립되자, 이를 반영하여 조선의 정계도 두 갈래로 갈라져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일찍이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하던 민비는 이제는 청국에 기대는 보수세력이 되었다. 보수세력의 대표적 인물로는 척족의 민영익과 민승호 등과 정계의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이었다. 이들 일파를 일컬어 사대당이라고 하였다.

 

한편 이와는 달리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받아 개혁을 단행하려는 사람들을 개화당 또는 독립당이라 하였는데, 그 대표적 인물로는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등 소장파였다.

 

1884년 11월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일본 정부의 훈련을 받고 다시 내한했다. 그는 입경한 첫날부터 청국을 비난 또는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김홍집을 만나 이렇게 공박하였다.

 

"귀국 외아문에 청국의 노예 노릇을 하는 자가 몇 사람 있다. 고 들었소. 나로서는 그 따위 인물과 상대하여 주선하기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소." 또한 그는 김윤식에게 노골적으로 다음과 같이 면박을 주었다.

 

"그대가 한학에 능할 뿐 아니라 청국에 내부할 의사까지 가지고 있다던데, 아예 청국으로 가서 벼슬살이를 하지 그러시오?"

 

일본공사의 이러한 거만하고 무뢰한 일련의 언행에 대해서 홍영식은 매우 염려하였다. 그러자 김옥균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것이 도리어 복이 될지 어찌 알 것인가? 우리는 좌우를 돌아볼 것 없이 오로지 변혁을 도모할 뿐이다."

 

이때부터 독립당의 거사 계획은 한층 더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김옥균은 11월 14일에 미국공사와 만난 뒤 독립당의 계획에대해 양해를 구한 뒤, 그 이튿날 다시 다케조에를 찾아가 상의하였다.

 

그런 다음 입궐하여 고종에게 시국이 불안한 책임이 청국군대와 사대당에게 있다고 아뢰었다. 이에 고종은 김옥균의 말을 믿고, 그 뒤부터는 청국 군대와 사대당측에 대해 오히려 불만을 품게 되었으며, 반면에 개화 독립당의 개혁안을 신임하게 되었다. 그러자 개화당 요인들은 오래 전부터 계획해 온 국정 개혁을하루 속히 행동에 옮기기로 하였다.

 

11월 25일에 김옥균은 다시 다케조에 공사를 단독으로 방문하여 재정적 문제뿐만 아니라 군사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지원을 해 줄 것을 확약받았다.

 

그런 뒤, 11월 29일에는 고종을 알현하여 현정세와 국가의 위기에 대해 상주하면서, 간신들이 청국의 세력을 빌어 왕권을 농락하는 것은 통타할 일이라고 고변하였다.

 

이에 고종은 "국가 대계가 위급한 때의 임기 조처는 경의 생각과 계획에 맡기겠다."는 "친수 밀칙"을 그에게 내렸다. 국왕에게 신임을 받고 있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그는 그 이튿날 동지들과 만나 대략 거사 계획을 세운 다음, 12월 1일 밤에 박영효의 집에서 만나 우정국 개설 축하 피로연이 열리는 날을 이용하여 사대당의 거물급 요인들을 암살하고 국정 개혁의 대과업을 일거에 단행하자는 최종 합의를 보았다.

 

"맨먼저 연료를 가득 채운 포대 수십 개를 준비해 놓았다가 피로연이 열리는 초저녁에 별궁 북문을 넘어 들어가 별궁 정전안에 쌓아 놓고 불을 지르자. 이 일은 이인종의 지휘 아래 이규완, 임은영, 윤경순, 최은동 등이 맡기로 하자. 그 불길이 퍼질때를 기다려 미리 장치해 두었던 동서 행랑의 폭발물에도 불을 질러 화세를 돕도록 하자. 이 혼란스러운 때를 틈타 윤경순과 이은종은 민영익을, 박삼룡과 황용택은 윤태준을, 최은동과 신중모는 이조연을, 이규완과 임은명은 한규칙을 각각 맡아 살해할 것, 그리고 만일의 실수에 대비하여 한복으
로 변장한 일본인 1명씩을 추가 배치해 두자. 이때 모든 지휘 임무는 연장자인 이인종과 이희정 두 사람이 맡도록 하고, 신호는 방포로 하여, 통신연락과 정찰은 유혁로와 고영석 두 사람이 맡기로 한다.

 

궐내는 전영 소대장인 윤번이 맡기로 한다. 고대수라는 궁녀로 하여금 포발약을 준비하게 하였다가 궐 밖의 불길을 신호 삼아 통명전에서 이를 폭발시키게 한다.

 

일본인 4명을 궐내 으슥한 곳에 매복시켰다가 독립당 장사들이 실수할 경우에 그들의 임무를 대행하게 한다. 일본인 30명으로 하여금 금호문과 경우궁 사이의 왕래를 막아 뜻밖의 사고에 대비한다."

 

1884년 12월 4일 저녁 여섯시에 예정대로 전동 우정국에서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연회 시간이 되자, 귀빈들이 속속 도착했다. 미국공사와 서기관, 영국 총영사, 청국 영사와 서기관, 일본 공사와 서기관, 홍영식, 박영효, 김홍집, 한규직, 민영익, 이조연, 서광범, 민병석, 윤치호, 신낙균, 김옥균 등 20여 명이 연회에 참석하여 대화를 나누며 술과 음식을 들었다.

 

그런데 별궁에 방화하기로 한 계획이 사대당측의 경계 철저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김옥균은 그러면 이웃집이라도 방화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것도 불가능하다는 통보가 왔다. 이에 당황한 김옥균은 "그러면 포졸들의 경계가 미치지 않는 곳을 택하여 방화하게 하라"고 하였다.

 

바로 이때였다. 우정국 북창에서 돌연 "불이야!"하는 소리가 났다. 김옥균이 자리에서 일어나 북창을 열어젖히자, 맹렬한 불꽃이 하늘을 찌를 듯 피워 올

랐다.

 

이와 동시에 우정국 안 연회석은 일대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이 무렵, 연회도중 개화당의 이상한 기미를 미리 눈치채고 재빨리 도피하려던 우영사 민영익이 누군가의 칼에 맞아 피를 흘리며 연회석으로 되돌아와 픽 쓰러졌다. (그는 묄렌도르프의 주선으로 미국인 의사 알렌의 치료를 받아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이때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은 북창 밖으로 뛰어 나와 일본 공사관에 가서 일본 공사관측의 태도가 변함없음을 확인한 다음, 김봉균 등을 인정전 밑 화약을 묻어 놓은 곳으로 보내어 30분 이내에 폭발시키도록 지시한 다음 왕의 침전으로 향하였다.

 

그들은 합문 밖에 윤경완이 이미 50명의 병졸을 거느리고 대기 중인 것을 확인한 다음, 침전으로 올라섰다. 김옥균이 사태에 대한 설명을 막 하려고 할 때. 동북쪽에서 굉장한 폭음이 하늘을 울릴 듯 진동하였다.

 

이에 몹시 놀란 국왕은 후문으로 급히 피난하였다. 이때 윤경완이 거느린 군졸들이 국왕을 호위하였다. 대피하는 중에 김옥균은 사태가 위급하니 일본군의 보호를 요청하자고 국왕에게 두세 번 주청하였다.

 

그러자 왕이 이를 윤허하면서 "일본공사는 와서 짐을 보호하라"는 친수 칙서를 내려 주었다. 박영효는 이 칙서를 가지고 즉시 일본 공사관으로 급파되었다.

 

그리고 국왕 일행은 경우궁 뒷문에 도착하여 굳게 잠긴 자물쇠를 깨뜨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경우궁 정전에 이르렀을 때 다케조에 공사와 함께 일본군 2백명이 벌써 도착해 있었다.

 

이윽고 독립당 요인들은 국왕과 비빈을 경우궁 정전에 모시고, 궁문 안팎의 경계를 강화하였다. 전정 안팎은 윤경완이 지휘하는 병졸들이 맡았고, 전상에는 서재필이 지휘하는 정난교, 박응학, 정행징, 임은명. 신중모, 윤영관, 이규완, 하응선, 이병호, 신응희, 이건영, 정종진, 백낙운 등의 소장 정예 사관 생도

13명이 지켰다.

  

그리고 전문 밖에는 이인종, 이창규, 이규정 등이 이은종, 황용택, 김봉균, 유경순, 최은동, 고영석, 차홍식 등의 장사패들을 거느리고 삼엄한 경비를 섰다. 김옥균이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무감10여 명을 선발하여 궁문을 지키게 한 다음, 입시하려던 후영사 윤태준, 좌영사 이조연, 전영사 한규칙을 먼저 살해해 버렸다. 윤태준은 자객의 칼날이 내리치려 할 때 이렇게 애걸했다.

 

"나를 살려두고는 왜 일을 치르지 못하는가."
그와는 대조적으로, 이조연은 김옥균 일파를 심히 매도하면서 죽어갔다. 이때를 전후하여 김옥균 등은 어명을 빌어 민영목, 조영하, 민태호 등 사대당 거두들도 급거 입궐하라고 하였다.

 

이들도 경우궁 안으로 들어서다가 모두 저격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사대당의 거두 6대신을 모두 제거한 독립당 요인들은 보국 이재원을 어명으로 불러들여, 그에게 이번 거사의 취지를 설명하고는 같이 함을 합하여 국사를 처리하자고 요청하였다.

 

재원이 이에 동의하자, 그들은 신내각의 인물 배정을 꾀하는 한편, 각국 공사관에 사신을 파견하여 우정국의 사태와 소란에 대해서 변명하고 양해를 구하였다.

 

12월 5일에 독립당의 기밀을 눈치 챈 민비가 서둘러 환궁할 것을 요구하자, 일시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그러자 독립당 요원들은 분위기를 일소하기 위하여, 환관 유재현을 결박하여 정전앞에 꿇어 앉히고 죄목을 따져가며 난도질을 하여 죽여 버렸다.

 

그러자 소란스러움이 가라앉고 분위기가 다시 숙연해졌다. 이때 독립당 요인들은 환관들과 궁녀들을 전부 밖으로 내쫓아버렸다. 그런 후에, 이재원을 수반에, 홍영식을 부수반에 각각 앉힌 다음 신내각을 조직하여 12월 5일 아침에 반포하였다.

 

"영의정에 이재원, 좌의정에 이재선, 우의정에 홍영식, 전후 영사에 박영효, 외무독판 겸 좌우영사에 서광범, 좌찬성에 이재면, 이조판서에 신기선. 예조판서에 김윤식, 병조판서에 이재완, 형조판서에 윤웅렬, 공조판서에 홍순형, 호조참판에 김옥균, 병조참판에 서재필, 도승지에 박영교..."

 

이리하여, 군사, 경찰, 내무, 재무의 실권을 모두 휘어잡게 된 독립당은 14개 혁신정책을 국민에게 반포하였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을 확립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한다. 대원군의 송환을 요구하고 청국에 대한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내시부, 규장각 등 불펼요한 관제를 없애고 세법을 개선하여 재정을 호조에서 총괄한다. 4영을 1영으로 통합하고 근위대를 설치 한다."

 

그러나 이같은 개혁 조치는 청병의 무력 간섭으로 이내 저지되고 말았다. 12월 6일 오후 3시경 원세개는 청군 8백명을 이끌고 선인문 방면으로, 오조유는 청군 5백명을 동원하여 북문 방면으로 우회하여, 그리고 나머지 청군 2백명은 후위를 담당한채 궁궐로 쳐들어와 창덕궁과 창경궁을 호위하고 있던 전후영 조선군사들을 공략하였다.

 

이때 신복모가 이끄는 군대가 날이 저물도록 저항하였을 뿐 나머지 군대가 지키는 1차 방어선은 힘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전투가 한창일 때 민비는 대왕대비와 세자를 데리고 청군 진영으로 도망쳐 버렸다.

 

1차 방어선을 무너뜨린 청군은 이어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그러나 일본군이 전투도 제대로 해보지 않고 철수해 버리는 바람에 중간 방어선도 의외로 쉽게 무너져 버렸다.

 

이제는 충의계 50명의 장사와 사관생도로 편성된 3차 방어선만이 남았으나, 이 수로는 막강한 청군을 도저히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러자 김옥균 등은 고종을 모시고 연경당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후원 태극정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그곳도 안전한 곳은 못 되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김옥균은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고, 홍영식, 박영교 등에게 고종을 맡기고는 서광범, 서재필 등과 함께 궁궐을 탈출하여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홍영식, 박영교, 신복모 형제이하 사관생도 7명은 고종을 호위하고 북묘까지 갔으나,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사대당과 청군 병사들에계 생포되어 모두 참살당하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일본 공사관은 조선병과 난민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김옥균 등은 다케조에와 협의하여 중요 서류를 소각한 뒤 관원 전원을 인솔하여 휘하 군대와 토목공인들의 호위아래 공사관을 탈출하였다. 그리하여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신응희, 이규완, 정난교, 유혁로, 변수 이하 독립당 요원들은 마포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그 이튿날 아침, 인천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인천에서 그들은 일본 기선 천세환에 탑승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갑신정변은 기껏 "3일 천하" 로 끝나 버리고 말았다. 이후 독립당을 일소하고 다시 집권한 사대당은 더욱 보수적인 인사개편을 단행하여, 영의정에 심순택, 좌의정 겸 외무독관에 김홍집, 우의정에 김병시, 이조판서에 이재원, 호조판서에 김영수, 예조판서에 김만식, 병조판서에 김윤식, 형조판서에 홍철주, 공조판서에 김유연. 호조참판에 남정철 등을 앉혔다.

 

그리하여 조선은 더욱 외세의 자주권 침해에 시달리게 되었고, 정치 체제개편 및 혁신정책은 다시 답보 상태에 빠져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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