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임오군란

구름위 2013. 8. 22.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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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1882년)은 1882년(고종 19년)6월에 구식 군대인 무위영 소속의 구훈련도감 군졸들이 군료지급에 대한 불만을 품고 일으킨 병란이다.

 

대원군의 실각 이래 1876년(고종 13년) 한일 수호조약(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1882년 4

월에는 한미, 한영의 수호조약이, 그리고 5월에는 한독 수호조약이 체결되어 구미 제국에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종래의 대원군의 쇄국주의 정책이 완전히 붕괴되어 버리고 국왕을 비롯한 민씨 세력이 개국, 개화에로 매진하게 되었다.

 

그러자 배외사상을 가진 유림들과 수구파(보수세력)는 국왕과 척족에게 불평불만을 품고, 대원군을 앙모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 무렵 민비의 국고 낭비는 극에 달했다. 민비는 정권을 손에 넣은 후 세자 책봉을 위해 많은 경비를 썼다.

 

세자 책봉 문제가 해결된 뒤에도 유공자들에 대한 포상금, 청국 정부에 보내는 예물, 그리고 축하 사절의 왕복 비용으로 수백만금의 국고 낭비를 아끼지 않았다. 그 밖에도 어린 세자가 조금이라도 탈이 나거나 왕실에 어떤 변이 나기라도 하면, 전국의 명산, 대천을 찾아다니며 기도 드린다거나 궁중으로 무당, 복술, 맹인 등의 잡배들을 끌어들여 굿, 불공, 치성을 를이는 데 엄청난 비용을 함부로 지출했다.

 

한번은, 금강산 1만2천봉의 봉우리 마다 돈1천냥과 쌀 1석, 베 1필씩 바쳐 세자의 장수를 빌기도 했다. 하루는 당시 창우로 유명했던 김몽룡이 민비를 위해 춤을 추어주자 그에게 선뜻 3천금을 주기도 했다.

 

또한 점장이로유명한 이유인이 점 한번 치는 데 비단 1백필과 금 1만냥을 상으로 내리기도 했다. 이렇듯, 민비는 대원군이 집권 10여 년 동안 모아놓은 국고를 불과 몇 년 만에 모두 탕진해 버렸다.

 

이렇게 하여 국고가 바닥나 버리자, 그녀는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하거나 매관매직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자 때를 만난 듯 그녀의 척족들은 그 과정에서 중간 이익을 톡톡히 챙겨 재미를 보았다.

 

그 중에서도 영의정 이최응은 특히 뇌물을 좋아하여 곳간10개에 봉물을 가득 채워두었는데, 미처 손을 대지 못해 이것들이 그대로 썩어나가곤 했다. 그리하여 이렇듯 산더미처럼 많이 쌓여 처치 곤란한 산해진미를 가축에게 줄 정도였다.

 

그래서 당시 항간에는 이런 말들이 널리 유포되었다. "홍인군 댁의 생선 썩은 냄새에 이웃집 사람들이 코를들 수가 없다."
"혜당 댁 당나귀는 약식을 잘 먹는다."

"호판댁 큰 말은 약과를 싫어한다."

 

게다가 당시 간리배들마저 경성으로 운송되는 각지의 세납을 중간에서 얼마씩 횡령해 먹었다. 이렇게 되자, 백관들의 봉급을 5-6년 동안이나, 군인들의 급료도 13개월씩이나 지불하지 못하는 형편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나 관료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배를 채울 수 있었으나, 군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배만 곯았다. 게다가, 1881년(고종 18년)4월에 일어난 군제 개혁은 구식군인과 훈련도감 소속의 군졸들 사이에 큰 불만을 자아냈다.

 

얼마 전 정부는 강화도 조약체결 당시의 일본의 근대적 군대에 자극되어 1881년 4월 일본의 후원으로 별기군이라 칭하는 신식 군대를 조직하고 그 이듬해 1월에 6영을 개편하여 무위, 장어의 2영을 두기로 하였으므로, 2영의 군관과 군졸은 대우가 후한 별기군을 시기 또는 미워하게 되었으며, 특히 훈련도감 소속 군졸간에는 심상치 않은 불온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그런데다가, 날마다 궁궐 안에서 들려오는 난잡한 굿소리와 웃음소리는 군졸들의 심기를 더욱 자극하였다.

 

1882년 6월 5일 아침에 선혜청 도봉소 앞에 무위영에 소속된 군졸들이 속속 모여 들었다. 그 전날, 군졸들의 불평을 살펴 한달치 군료만이라도 지불하겠다는 조정의 포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3달 만에 1달치 군료밖에 안 준단 말이야?" 라고 불평하면서도, 그것이나마 타가기 위해 그들은 줄을 섰다. 그런데 선혜당상 민겸호 집 하인으로 있는 창리가 곳간문을 열고 정작 배포한 쌀은 대부분 물어젖어 썩은 것이었고, 게다가 그것은 겨와 모래가 절반 이상이나 섞여 있는 것이었으며 양도 턱없이 모자랐다.

 

러자 여기저기서 분개한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포수 김춘영이 먼저 큰 목소리로 항의했다.
"아니, 이런 것을 사람더러 먹으라는 것이냐?"
그러자 유복만, 정의길, 강명준도 덩달아 한마디씩했다.
"누굴 놀리느냐?"
"나쁜 자식들!"

"어떤 놈들의 농간이냐?"

 

그러자 창리가 권문세도가인 주인의 후광을 등에 업고 깔보는 말투로 그들을 나무랐다. 이에 군졸틀의 분노가 일시에 폭발하고야 말았다.
"저놈부터 때려 죽여라."
이런 외침 소리와 함께, 군졸들의 주먹질과 발길질이 한꺼번에 창리에게로 쏟아졌다. 그리하여 도봉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 소식은 이내 궐내로 전달되었다. 선혜당상 민겸호는 노발대발하여 즉시 포교를 풀어 주모자를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이윽고 김춘영 둥 주모자 4-5명이 붙잡혀 들어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런데 그 중 2명은 가까운 시일 안에 사형에 처해지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장안에 확 퍼졌다.

 

이에 무위영의 군졸들은 한편으로는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젠가는 자신들도 주모자들과 똑같은 운명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강박관념 때문에 동지의식 을 갖고 서로 뭉치게 되었다.

 

6월 9일에. 김춘영의 부친 김장손과 유복만의 동생 유춘만 등이 서로 상의하여, 투옥된 군졸들의 구명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들은 먼저 통문을 돌려 무위영 소속 구훈련 도감 군졸을 소집한 다음, 그들과 함께 당시 직속상관인 무위대장 이경하(이경하는 대원군에게 발탁된 무장이었다)의 집으로 대거 몰려가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그러자 이경하는 자신은 급여에 관한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고 변명한 뒤석방을 호소하는 간략한 편지 한 장을 써주면서, 민겸호 대감을 직접 찾아가 보라고 하였다. 이에 군졸들은 이경하의 편지를 들고서 안국동에 있는 민겸호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렇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민겸호는 집에 없었고, 그 집 문지기에게 모욕만 당했을 뿐이었다. 이에. 화가 난 군졸들은 대문을 강제로 밀고 들어가 집안의 사치한 집기들을 모조리 때려부숴 버렸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군졸들은 이왕 감옥에 끌려가 죽을 바에야 차라리 군민의 원한 대상인 척족이나마 쳐죽이고 죽자는 각오 아래 우선 대원군을 찾아가 진정이나 해보기 위해 운현궁으로 몰려갔다. 찾아온 군졸들의 호소와 사정을 듣고 난 대원군은 겉으로는 군졸들을 달래는 척하면서도, 주동자인 김장손, 유춘만 등에게는 은밀히 모종의 방책을 일러주기까지 하면서 격려해 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그의 심복 허욱으로 하여금 군복으로 갈아입게 하여 군졸을 지휘하도록 했다. 이에 사기가 크게 앙양된 군졸들은 운현궁을 나오는 길로 동별영으로 몰려가서 무기고를 부수고 병기를 탈취하였다.

 

그때서야 황급히 달려온 이경하가 이들을 무마하려고 애를 썼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총검을 손에 넣은 군졸들은 시위를 벌이면서 종로 대로를 지나 포도청으로 쳐들어가. 갇혀 있던 동료 김춘영, 유복만, 정의길, 강명준 등을 석방시킨 다음 다시 의금부를 습격하여 백낙관 등과 같은 정치범들을 풀어주었다.

 

이후부터 난군들은 군졸을 2대로 나누어, 제1대는 서대문 밖의 경기 감영을

향하여, 제 2대는 척신들의 저택을 향하여 각각 돌격해 갔다.

 

제1대가 경기 감영에 도착해 보니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이 자리에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무기고를 파괴하여 총기를 탈취한 다음, 일본인 3명을 죽여 버리고, 천연정의 일본 공사관 쪽으로 진격해 갔으며, 제2대는 강화 유수 민태호를 비롯한 척신들의 집들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는가 하면, 하도감의 왜별기를 습격하였다.

 

그러자 별기군 소속 군인들이 난군에 호응하여 가담해 버렸다. 이때 일본인 교관 공병 소위 호리모또가 도망쳤으나 이내 붙잡혀 다른 일본인들과 함께 끌려와 처단당했다.

 

그날하루는 이렇게 저물어갔다. 그런데 해질녘부터 먹구름이 하늘을 덮는가 싶더니, 그날 밤 오랜 가뭄 끝에 한바탕 단비가 쏟아졌다. 그러자 난군들과 주민들온 "하늘도 우리를 돕는다" 고 크게 기뻐했다.

 

더욱 더 사기가 오른 난군들은 척족들과 대신들의 저택뿐아니라, 한양 주변의 사찰, 치성터, 놀이터 등도 모조리 파괴해 버렸다.

 

그런 후, 난군들은 난민들과 합류하여 서대문 밖에 있는 일본 공사관 쪽을 우르르 몰려갔다. 일본 공사관 하나부사는 이미 낮에 폭동 소식을 전해 듣고서 공관원들로 하여금 공관 안팎을 엄중히 경계하도록 지시했다.

 

이윽고 난군들이 무리지어 공사관 주위에 몰려들어 일본 침략 행위를 규탄하면서 처음에는 공관에다 기왓장, 돌멩이 등을 날려 보냈다가, 이윽고 활과 총을 쏘아댔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불을 질러라" 하고 외치자, 몇 명이 달려가 공사관 옆에 위치해 있는 민가에 불을 질렀다. 곧이어 그 불길은 반접관 출장소와 차비관의 숙사까지 널름 삼켜 버렸다.

 

사태가 이처럼 점점 긴박해져가자, 하나부사는 공관원 전부를 본관으로 집합시킨 후, 조선 정부의 구원병을 기다리며 잠시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 되어가자, 하나부사는 공관을 버리고 피난하기로 결정하고서, 스스로 공사관에 불을 지른 다음에 무장한 28명의 공관원들과 함께 신속히 정문을 뚫고 탈출하였다.

 

난민들은 순식간에 일어난 이들의 결사적인 탈출을 막지 못하고 말았다. 한편, 난군들은 불타는 일본 공사관을 보며 환호성을 올린 후, 발길을 돌려 여러 척신들의 집들을 차례차례 파괴하고 불태워 버렸다.

 

영돈녕 부사 홍인군 이최응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죽여 버렸으며, 호군 민창식을 길바닥에서 때려 눕혀 살해했다. 그리고 민치상, 민영주, 민영준, 민영소, 민영익 등 민씨 척신의 저택과 김홍집, 윤웅렬, 한성근, 윤자덕, 홍완, 이민

하 등의 세도가의 저택 등 40여 채를 모조리 파괴하거나 불태워 버렸다.

 

그러자 고종은 무위대장 이경하를 동별영으로 급파하여 사태를, 수습토록 했으나, 수행원 1명의 목만 날아갔을 뿐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자 왕은 도봉소 당상 심순택과 선혜당상 민겸호, 그리고 무위대장 이경하를 파면시켜 버리고, 무위대장 후임 자리에 이재면을 대신 앉혔다.

 

난군들은 한밤중부터는 왕궁을 포위하기 시작했다.(이 무렵, 고종은 대원군에게 청하여 즉시 입궐하라고 했다. 대원군은 그즉시 입궐하였다) 난군들은 이태원과 왕십리 일대의 주민들까지 선동시켜 입성시킴과 통시에 장어령과 별기군의 군졸들까지 합류시켜 6월 10일 새벽에는 창덕궁 돈화문을 일시에 공략하였다.

 

그러자 수문장과 문지기틀은 기겁을 하여 도망가 버렸다. 돈화문이 열리자, 난군들과 수천의 난민들이 물밀듯이 쳐들어갔다. 그때 그들은 입궐해 있던 민겸호와 김보현 등을 끌어내어 뜰에다 내동댕이친 다음 난도질을 하여 죽여 버렸다.

 

난군들은 이들의 시체를 금천교 밑에다 갖다 버렸다. 그런 후, 난군들은 중전 민씨(명성왕후)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들은 그녀를 없애 버려야만 후환을 없앨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악착같이 그녀를 찾아 헤맸다.

 

이때 중전 민씨는 재빨리 궁녀의 모습으로 변장하고서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대원군과 함께 궁궐로 입궐한 부대부인 민씨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자기가 방금 타고 온 4인교 속에다 재빨리 그녀를 숨겨 주었다.

 

그러나 난군의 정의길에게 그만 발각되고 말았다. 정의길은 민비의 얼굴을 모르고 있던 터라 4인교에서 그녀를 끌어내면서 대뜸 물었다.
"너는 누구냐?"
이때였다. 그 곁에 서 있던 무예별감 홍재희가 기지를 발휘하여 이렇게 말했다. "내 누이 동생 홍상궁이다!"

 

이렇게 하여 간신히 위기를 넘긴 중전 민씨는 무사히 궁궐을 빠져 나갈 수 있었다. (그녀는 그 길로 화개동의 윤태준의 집으로 가서 은신해 있다가, 거기서 민영위 등과 연락을 취하여, 그들의 도움을 받아 여주의 민영위의 깁으로 일단 갔다가, 다시 충주 장호원에 있는 충주 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가서 몸을 숨겼다.)

 

6월 10일 아침에 고종은 다음과 같은 자책하는 교서를 발표 하였다.
"오늘의 사변을 어찌 상서로운 일이라 하겠는가, 생각하건대 짐이 덕이 없음에도 왕업을 계승하고자 탐하였으나, 이미 백성을 편안하게 따르게 할 능력이 모자라는 탓으로 이처럼 전례 없는 변란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모두를 누구의 탓으로 돌리리요. 첫째도 나의 허물이요, 둘째도 나의 허물이로다,"

 

그리고는 사태 수습의 책임과 대소 정권을 모두 대원군에게 맡겼다.
"이후부터는 적고 큰 공무 일체를 대원군 앞으로 품결하라."
이에, 수습책에 나선 대원군은 스스로 정면에 나서 난군들과 난민들을 달래며 이제 그만 해산하라고 분부했다. 그러나 그들은 대원군을 열렬히 지지하면서도 즉각 해산하는 데는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것은 민비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부르짖었다. "민 중전을 기어코 잡아 없애버려야 후환이 없다. 중전이 살아 있는 한, 우리 목숨이 위태

롭다. 중전을 잡을 때까지 해산해서는 안 된다."

 

그러자 대원군은 임시방편으로 다음과 같은 교지를 내렸다.
"왕비께서는 오늘 정오에 이미 승하하셨다. 다만 그 시신만은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였으니 그리 알고 물러가라."

 

그리고 도승지 조병호에게 명하여 왕비의 국상을 반포하라고 했다. 그러나 조병호는 "중전이 승하하신 것을 확인해 보지도 않고 국상을 반포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중대한 일을 결코 소흘히 거행할 수 없다"고 하면서 거절했다.

 

이에 대원군은 다른 승지로 하여금 왕비의 국상을 반포하게 하였다.그런 다음, 정부 기구를 개편함과 동시에 인사를 단행하였다.

 

무위영을 훈련도감이라 부르게 하고, 통리기무 아문을 폐지하고 3군부와 5영군문 전부를 옛과 같이 복귀시켰다. 그리고 신응조를 우의정에, 이재면(대원군의 큰아들)을 훈련대장 겸 호조 판서 겸 선혜당상에, 신정희를 어영대장에, 조희순을 금위대장에, 임상준을 총융사에, 이회정을 예조판서에, 조경호를 내의제조에 각각 앉히고, 영의정 홍순목은 그대로 유임시켰다.

 

외에, 각 부서 및 지방관에도 새로운 인물들을 대거 기용하였다. 그리고 금부와 형조의 죄수들 및 정치범들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그런 다음, 당시유배 중이던 이휘림, 정현덕, 조채하, 이만손, 이원진, 김평묵, 강진규 등을 모두 석방하였다.

 

이리하여 총 1천여 명이나 되는치범들이 풀려나게 되었다. 그러자 난군들과 난민들은 난을 일으킨 지 이틀만인 6월 11일에 자신 해산했다. 이로써 살륙과 방화와 파괴로 점철된 임오군란은 막을 내렸으며, 대원군과 보수세력(수구파)은 힘 안 들이고 개화세력 (개화파)을 몰아내고 재집권하게 되었다.

 

그러나 민씨 일파는 매우 기민하게 움직여, 천진에 가있는 김윤식 등에게 통지하여, 청나라의 원조를 요청했다. 그러자 김윤식은 청나라에 조선왕조에서 있어서의 대원군 존재의 위험성을 강조하면서 속히 파병하여 국왕을 돕고 난당을 소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청나라는 그렇지 않아도 조선에 파병하여 일본을 견제할 필요를 느끼고 있던 터라, 김윤식의 청원을 기꺼이 받아들여 파병하기로 하였다. (일설에는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주일본 청국공사 여서창의 전보를 받은 서리 북양대신 장수성이 즉각 이 사실을 총리아문에 보고하였고, 통령수사제독 정여창에게 군함과 군사를 즉각 출동준비토록 명한 다음 보다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김윤식을 만났다고 한다.)

 

어쨌든, 오장경, 정여창, 마건충, 오조유, 황사림, 원세계 등은 쾌선 2척과 군함 1척과 육해군 수천 명을 이끌고 와서 조선에 주둔하면서 조선 의 제반 사태를 감시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오장경은 한양근교에 주둔하면서 조선의 정치에 일일이 간섭하고, 임오군란의 선동 책임을 대원군에게 돌리고, 조선을 청나라의 속방이라고 선언하여 정치적 물의를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한편, 인천으로 갔다가 제물포를 거쳐 ,영국 선박 편으로 6월 15일에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한 일본공사 하나부사는 조선 군인들의 폭동으로 8명의 일본인이 희생되었으며 일본 공사관이 불타버렸다고 외무경 이노우에에게 즉각 보고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부산과 원산에 있는 일본 거주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군함을 파견해야 한다고 간청하였다. 그러자 일본 정부에서는 긴급회의를 열어 신중히 검토한 후 군함 4척과 보병 1개 대대를 급파하였다.

 

나부사는 군함을 이끌고 7월 3일 조선으로 돌아와, 7월 7일 고종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강경하게 난의 책임을 물어 9개 사항을 들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문서에 의해 사죄할 것, 위자료를 지급할 것, 범인을 체포하여 처형할 것, 정부 당국자가 교사한 경우에는 강제 배상할 것, 조선 정부의 책임이 중대할 경우에는 거제도 또는 울릉도를 할양 할 것, 일본 공사관의 병력을 보호해 줄 것, 함흥, 대구, 양화진을 개시할 것, 일본 공사 및 영사관원의 대륙 여행 자유를 보장해 줄 것."

이후 3차에 걸친 회담 결과 제물포 조약 6조가 마침내 조인되었다.

 

"20일 이내에 수괴를 체포하여 중벌로 다스릴 것, 피해 입은 일본인을 융숭한 예로 장사 지내 줄 것, 일본인 피해자 유족들에게 5만원을 지급할 것, 폭거로 입은 손해 배상금 50만원을 5년거치로 1년에 10만원씩 청산할 것, 일본 공사관에 군사를 두어 경비하게 하고, 그 경비를 부담할 것, 조선은 대관을 특파하고 국서를 보내어 일본에 사죄할 것."

 

이 굴욕적인 조약 체결과 청군의 간섭으로 임오군란에 참여했던 군민 1백70명이 체포되었고, 그 중 손순길, 공치원, 최봉규 등 11명이 참수되었다. 그리고 이어 대원군은 납치되었다.

 

7월 12일 막강한 육해군을 거느리고 입성한 청군의 장군들은 그 이튿날 운현궁을 방문하여 대원군에 경의를 표한 다음, 마건충이 정중히 이렇게 말했다.

"군무에 대해 상의할 것이 있으니, 청진까지 왕림하여 주십시오."

 

그러자 대원군은 7월 13일 오후 4시경 이용숙, 이조연 등 관료 몇 명과 호위기병 수십 명 만 데리고 황사림의 청진으로 찾아갔다. 처음에는 약속대로 오장경, 마건충 등과 더불어 군무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다. 그런데 얘기 도중 마건충이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국왕은 청의 황제가 책봉한 것이 아니오?" 이에 대원군은 다소 당황했으나 태연스레 대답했다. "그렇소!"
"그렇다면, 모든 정령은 황제가 책봉한 국왕으로부터 나와야 하거늘, 당신은 어찌 변을 틈타 당신 마음대로 정권을 장악하고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불한당을 끌어들인 거요?"
"아니, 그건..."
"태공은 외교가 서투른 듯싶소이다. 오늘밤 남양만에서 배를 타고 천진으로 가서 청나라 황제의 유지를 받음이 어떠하시오?"

 

오장경이 막사에서 나가는 것을 신호로, 마건충과 그 부하들 이 미리 준비하여 놓은 보교에 대원군을 강제로 태워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들은 대원군을 남양만으로 곧장 데려가 배에 태워 청국으로 납치해 갔다. 대원군은 7월 20일에 천진에 도착하였다. 그 달 29일에 이홍장은 대원군을 죄인 다루듯 심문하면서 임오군란에 대한 모든 책임을 물었다.

 

그런 후 대원군은 8월 16일에 보정부로 호송되어 연금되고 말았다. 이로써 재집권한 홍선대원권의 통치는 불과 33일 만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충주 장호원에 그때까지 숨어 있던 민비(명성왕후)가 한양으로 돌아와 다시 정권을 잡은 후 대원군파를 대거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 청군 3천명, 일본군 1개 대대가 조선에 상주하면서, 본격적인 내정 간섭을 시작하는 바람에 조선은 그들의 속국이나 다름 없는 위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후 대원군은 4년간 유폐되어 있다가, 1885년에 풀려나 귀국하여 운현궁에 칩거하던 중 1887년 원세개와 협력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이재황을 옹립하려다 실패하였다.

 

1895년 재집권을 위해 일본공사 미우라와 결탁하여 을미사변을 일으켜 일시정권을 잡았으나 1898년에 79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그와 사이가 악화된 그의 아들 고종은 끝내 그의 장례식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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