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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영의 난(1817년)은 1817(순조 17년)에 채수영이 김계호, 안유겸, 성문, 김맹억 등과 공모하여 전라, 충청의 두 감영을 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당대 권세도가들에 대해 반기를 든 난이다.
채수영(?-1817년)은 1817년(순조 17년)에 김맹억의 집에 모여, 김계호, 안유겸, 박충준, 신성문, 김맹억 등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모반을 모의하였다.
그들은 모두 왕의 외척 및 몇몇 권세가들이 정권을 쥐고 흔드는 것에 매우 분개하며 그들을 제거하고자 반기를 들기로 했다.
그들은 매약상 또는 행상으로 가장하여 다니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비어를 널리 퍼뜨렸다.
"외국군의 배가 들어오고 있다,"
"홍경래가 아직 살아 있다."
"이희선도 아직 살아 있다."
이런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심을 선동한 뒤, 그들은 군사를 모아 전라, 충청의 두 감영을 습격하여 관군을 바짝 긴장시켰다.
이후, 채수영은 동지들과 함께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기고자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기고자 하였다.
"앞으로 군사를 더 끌어모은 다음 상경하여 부원군 김조순(김조순은 1802년에 자기 딸이 순조의 비로 봉해지자 영돈령 부사가 됨과 동시에 영안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철종 때는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장본인), 판서 박종경(박종경은 1800년 순조가 즉위하고,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이듬해 부수찬으로 기용되었다.
1809년 병조판서, 그 이듬해 이조판서와 훈련대장을 거쳐, 1812년 호조판서가 되었는데, 이때 대사헌 조득영으로부터 왕의 인척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음탕과 뇌물만을 탐낼 뿐 아니라 사사로운 감정으로 살인을 저지르는등 행패가 많다는 탄핵을 받아 양주 목사로 일시 좌천되었다가 다시 어영대장, 판 의금부사를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으며, 순조와 순정왕후의 총애를 받아 군국기무로부터 공부까지도 장악하고 권세를 부렸던 당대 세도가), 판서 심상규(심상규는 1800년에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어 벽파가 득세하자 시파로서 유배를 당했다.
1802년에 풀려나와 이조참의, 대사간, 비변사 제조, 호조판서, 양관 대제학 등을 거쳐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두루 역임한 세도가)등등의 비판 대상인 당대 세도가들을 쳐죽이고, 강화도로 귀양 가 있는 은언군 이인(사도세자의 서자요 영조의 손자인 은언군 1771년 상인들에게 진 부채가 영조에게 알려져 직산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대정현에 안치되었으며, 1774년에 풀려났으나, 그의 아들 상계군 이담이 홍국영에 의해 모반죄로 몰려 자살하자 명에 의해 다시 강화에 유배당했다.
그는 1797년에 강화에서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 그의 처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청나라 신부 주문모에게 영세받은 천주교인으로 순교하자 함께 유배소인 강화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는 1849년 그의 손자 이원범(철종)이 즉위한 뒤 신원되었다.)의 아들 이철득을 왕으로 추대하자."
그러나 이 거사 계획은 한때 같은 동지로 활약한 바 있는 박충준의 고발로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발각되어 채수영을 비롯하여 김맹억. 김계호, 안유겸, 심성문 등 모의에 가담했던 동지들 모두 참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고발자 박충준은 상을 받는 대신에 감 1등되어유배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