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홍경래의 난

구름위 2013. 8. 2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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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1811-1812년)은 1811년(순조 11년) 12월에 홍경래가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인하여 극도로 부패한 조선 말기의 생활 불안과 서북인에 대한 차별대우, 그 억울함에서 오는 위정자들에 대한 민중의 반항을 대변하여 평안도 서해안 일대에서 일으킨 난(조선왕조에 일어난 민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난)이다.
 
홍경래(1780-1812년)는 평남 용강군 다미면에서 진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남양이다. 그는 외숙인 유학권에게 글을 배워 과거에 여러 번 도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1798년(정조 22년)에 사마시에 또 낙방하자 그는 조정에서의 평안도 출신에 대한 배척, 제도적 모순, 안동 김씨에 의한 세도정치, 그들의 심한 횡포와 매관매직, 그로 인한 암담한 시국을 개탄하고서 과거를 통해 출세하겠다는 뜻을 아예 단념해 버렸다.
 
당시 사마시에 합격된 자들은 모두 귀족의 자제들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화가 난 그는 산에 들어가 한동안 독서를 하면서 지냈다. 그러면서, 그는 정권 쟁탈의 꿈을 키워갔다.
 
그 후, 그는 풍수 지사로 자처하면서 각지를 유랑하며 뜻을 같이 하고자 하는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그는 각지의 부호, 명사들을 찾아 다니며 인재들을 찾았다.
 
그는 1800년(순조 즉위년)에 평안도 가산군에 있는 청룡사라는 절에서 재략이 풍부하고 풍수지리에 밝은 서자 출신 우군칙(홍경래보다 5살 아래, 당시 16살)을 만나 시국을 논하던 중 서로 의기 투합하여 반란을 일으키기로 약속했다.
 
그런 후, 평안도 내의 향리층 중에서도 부농층을 주요 포섭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외 장사들도 포섭해 나갔다. 그러던 중에 만주의 마적단 두목인 정시수와 가산의 부호로서 무과에 급제한 뒤 가산역의 관리로 있던 이희저, 문재가 뛰어난 곽산의 진사 김창시 등도 포섭되었다.
 
이희저의 경우 우군칙의 아내가 이희저의 처에게 먼저 접근하여 손금을 봐주면서 대길할 운이라고 귀뜀을 해준 다음, 지사인 척하는 우군칙이 이희저를 찾아가 부친의 묘자리가 명당이라고 침이 마르게 칭찬해 주었다.
 
이 때문에 기분이 좋아 있던 이희저에게 도사복을 입은 홍경래가 야밤에 몰래 찾아가, 거사 계획을 확신 있는 목소리로 밝혔다. 그러자 이희저가 혼쾌히 거사 동지가 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이어 그들은 태천의 김사용(우군칙의 제자), 개천의 이제초, 곽산의 홍총각 등도 거사 동지로 합류시켰으며, 한양에 있는 전좌의정 김재찬(그는 1805년 우의정 임명을 거절했다가 황해도에 유배된 적이 있었다)에게도 접근하여 거사 준비금 2천냥을 빌렸다.
 
이외에도 정주의 부호 김약하, 의주의 인삼상인 임상옥을 비롯한 여러 상인들도 동지로 끌어들였다. 그런 후 그들은 가산의 다복동(청천강 이북 지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임과 동시에 평양과 의주로도 통하는 교통 요충지)에 있는 이희저의 집을 비밀 아지트로 삼고, 거사하기 전부터 이곳에 옮겨와 운산 촛대봉의 금광 채굴을 구실로 각지(곽산, 정주, 선천, 안주, 철산, 개천, 태천, 박천, 영변)의 유랑민, 기인, 도사, 술사 모사 및 문인들을 꾀어 장정을 끌어 모은 다음 이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일정 수준을 넘으면 이들에게 돈과 의류를 나눠주고 이들을 10명 1조로 만들어 각 마을로 잠입케 했다.
 
그리고 거사일에 일제히 봉기하도록 서로 굳게 밀약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천문을 살피고 도창, 조총, 연환 및 각색 기치를 준비하고, 곽산 출신 김창시로 하여금 각 읍에 요언을 퍼뜨리게 하여 민심을 선동하도록 하였다.
 
이런 식으로 거사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해가면서 기회를 노리던 중 1811년(순조 11년)에 종래에 만나볼 수 없는 큰 흉년이 들게 되었다. 민심이 흉흉해진 틈을 타서 궁민들까지 끌어들인 다음 12월 15일에 무리를 이끌고 평양으로 들이닥쳐 대동관에 불을 지르고 그때의 혼란한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차질이 생겨 연기하고 말았다.
 
홍경래는 다시 12월 20일에 거사하기로 작정하고, 각처의 동료들에게 무기 및 깃발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거사 소문이 너무 빨리 퍼져 나가, 선천 부사 김익순(김삿갓의 조부)이 이희저의 일가족을 체포하려 하자, 홍경래는 거사 예정일을 이틀 앞당긴 1811년 12월 18일에 2천여 명의 반란군으로 드디어 난을 일으켰다.
 
그는 스스로 평서대원수라 칭하고, 김사용을 부원수, 우군칙을 선생, 이희저를 도총, 김창시를 모사, 홍총각과 이제초를 선봉장으로, 김희연과 이성항을 참모로, 그리고 박성간을 병참장으로 삼았다.
 
홍경래는 봉기군을 크게 2군, 즉 북진군과 남진군으로 나눠, 남진군은 자신(총지휘권자)과 홍총각(선봉장), 윤후겸(후군장),이희저(도총) 등이 맡고, 북진군은 김사용(대장), 이제초(선봉장), 김창시(모사), 김희연과 이성항(참모) 등이 맡게 하였다.
 
그런 다음, 출병에 앞서 김창시로 하여금 격문을 써서 봉기군 앞에서 읽게 한 다음 이를 각 관서에 보냈다. 그 격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무릇 관서 지방에서는 오래 전부터 특출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다시 세웠으며, 정묘의 변에는 양무공 정봉수(정묘호란 때 철산의 의봉장)와 같은 충신이 있었다. 그리고 둔암 선우협(성리학자), 월포 홍경우(성리학자)와 같은 재사가 이곳에서 났는데도 조정에서 이를 돌보지 않고, 심지어는 권문세가의 노비까지도 서북인을 평안도놈이라고 멸시하니 어찌 분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막상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우리 서북인의 힘을 빌리면서도 4백 년 동안 우리가 조정에서 혜택을 입은 것이 과연 무엇이 있단 말인가. 지금 조정에서는 어린 왕 주위에 있는 김조순, 박종경 같은 간신배들이 권력을 쥐고 흔들고 있기 때문에 하늘도 재앙을 내려 이처럼 흉년이 들게 하였도다.
 
그러나 다행히 세상을 다스릴 이가 청북 홍의도에서 나셨으니, 우리는 총궐기하여 부정 부패를 척결하자. 그러나 이곳 관서 땅은 성인께서 나신 고향이어서 차마 다치게 할 수 없어서, 먼저 관서의 호걸들에게 기병할 것을 명하여 도탄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구하도록 하였노니, 의로운 뜻이 일어난 곳이 바로 참 임금을 기다린 명소가 아니겠는가.
 
이에 격문을 띄워 각 지역에 알리노니, 절대로 요동하지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만약 반항하면 용서치 않겠다."
 
홍경래는 이희저와 홍총각에게 병력 50여 명을 주어 12월 18일 밤에 가산 군청을 제일 먼저 습격하도록 했다. 그들은 그곳 이속들의 도움을 받아 쉽게 군청을 점령할 수 있었다. 이때 군수 정저와 그의 부친 정노는 홍총각에게 사로 잡혀 끌려나와 봉기군들에게 맞아 죽었다.
 
그리고 김사용, 김창시 등이 이끄는 북진군을 곽산으로 보내 그곳을 치도록 했다. 그러자 곽산 군수 이영식은 겁을 집어먹고 벽장 속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었으며, 군수의 아우는 반항하다가 칼에 맞아 죽었다.
 
김사용은 북진군을 이끌고 능한산성으로 진격하여 점령한 뒤 임해진을 거쳐 정주성으로 향했다. 김사용은 12월 19일에는 집사 이침, 좌수 김이대와 김이천, 중군 이정환, 칙고도감 홍하진과 이미 내통하여 어느 정도 그곳 사정을 간파한 후 그날 정오에 최이륜, 정진교 등으로 하여금 정주를 치도록 하였다.
 
이때 목사 이근주는 당황하여 향교로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이침 등이 끝까지 뒤쫓아가 목사를 붙잡아 인부를 빼앗은 뒤 개 쫓듯 내쫓아 버렸다. 그리하여 김사용이 이끄는 북진군은 정주성을 무혈 점령하게 되었다.
 
한편 홍경래는 20일 새벽에 홍총각을 선봉장으로 내세운 남진군 3백여 명을 직접 이끌고 박천읍으로 쳐들어갔다. 그러자 그곳 군수인 임성고는 어디론지 줄행랑을 쳐버렸다. 홍경래는 군수의 노모를 일부러 감금하고서 겁을 주자 서운사에 숨어 있는 군수가 스스로 항복하여 왔다.
 
이런 식으로, 홍경래는 봉기군을 남북 2대로 나눠 본거지인 다복동을 중심으로 각 군읍을 하나둘씩 차례차례 공략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김사용, 이제초, 김창시, 김희연, 이성항 등이 이끄는 1대(북진군)는 곽산, 정주, 선천, 이서의 여러 고을을 차례로 점령하였으며, 홍경래, 우군칙, 홍총각, 윤후겸, 이희저 등이 이끄는 2대(남진군)는 박천 등지를 점령하였다.
 
홍경래는 점령지마다 곡창을 풀어 궁민들에게 나눠 주어 인심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김사용도 정주성을 점령하고 나서 그곳의 지식층들, 즉 좌수, 풍헌, 별감, 별장, 천총 등을 설득하여 봉기군에 편입시키는 노력을 기울여 봉기군의 탄탄한 교두보를 확보해 나갔다.
 
남진군도 박천을 점령한 뒤 기수를 남쪽으로 돌렸다. 남하하기 위해서는 제일 관문인 안주를 공략해야 했다. 그러나 안주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해우와 목사 조종영이 이끄는 1천여 명의 관군이 버티고 있었다.
 
게다가 곽산 군수 이영식이 이끄는 관군이 측면 지원해 주고 있었다. 그래서 안주 침공에 대한 의견이 봉기군의 지도자들간에 엇갈리게 되었다.
 
우군칙 등은 영변을 치자고 한 반면에 김대련과 이인배는 영변보다는 안주를 먼저 치자고 주장했다. 결국에는 영변을 먼저 치자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이 때문에 절망한 김대린과 이인배는 봉기에 동참한 것 자체를 후회하더니, 급기야는 홍경래의 목을 베어 버리고 자수하자는 쪽으로 결심을 굳혔다.
 
그들은 야밤에 몰래 홍경래의 숙소로 숨어 들어가 칼을 휘둘렀다. 이때 홍경래는 잽싸게 몸을 피하고서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곧바로 우군칙과 부하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이에 김대련은 암살 계획이 실패했음을 알고 자결하고 말았으며, 이인배는 부하들의 칼에 맞아 죽었다. 이때 홍경래는 이마를 다쳐 피를 많이 흘렸다. 그래서 그는 진격일정을 바꿔 상처를 치료할 겸하여 12월 21일에 다복동으로 일단 후퇴하였다.
 
그러자 북진군도 의주성에 대한 공격 시기를 며칠 늦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2월 24일 밤 홍총각의 선봉부대가 먼저 송림리로 진격하였고, 되이어 홍경래, 우군칙의 부대가 12월 26일에 송림리로 가서 합세하였다.
 
이와 발맞춰 김사용의 북진군도 12월 24일 정주를 떠나 선천으로 향했다. 한편, 이 무렵 안주 목사 조종영은 헤이된 군대 기강을 바로잡고자 명령을 위반한 군졸 3명을 즉결 처형한 후, 성문을 굳게 닫아 걸고 봉기군의 공격에 철저히 대비하였다.
 
영변에서도 부사 오연상이 전열을 가다듬으면서 봉기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춰 나갔다. 12월 22일에 운산 군수 한상묵과 개천군 염백관이 증원군을 이끌고 영변으로 와서 합류했다.
 
이때 한상묵과 염백관은 오연상에게 성 내에 첩자들이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러자 오연상은 가산과 박천에서 온 피난민들을 모두 성밖으로 내쫓아 버렸으며, 첩자 색출 작업을 벌여 19명이나 체포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리하여, 첩자를 모두 잃어 버린 봉기군은 영변의 점령을 포기한 채 안주 쪽으로 기수를 돌려 곧바로 남진 할 수밖에 없었다. 평안 감사 이만수는 12월 22일에 순영중군 이정희를 안주로 출동시키고 영변 약산산정과 자산 자모산성 등지에 병력을 배치하여 반란군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만수가 반란군 토벌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그를 파면시켜 버리고, 대신 병조참판 정만석을 관서위무사 겸 감진사로 임명하여 내려보내 반란군의 투항을 권고토록 하였다.
 
그리고 12월 24일에는 금위영에 순무부를 설치하고, 이요헌을 양서순무사로, 박기풍을 순무사 중군으로. 그리고 서능보와 김계온을 종사관으로 삼았다.
 
그러나 12월 26일에 자산부사에 임명된 김처한이 겁을 먹고 출정을 거부하므로 그를 소환하여 처형시켜 버린 후. 그를 대신하여 순무사 중군 박기풍을 내세워 12월 27일에 토벌군 선봉대를 파견하였다.
 
홍경래가 이끄는 남진군은 첩자인 좌수 김윤해와 변대익의 도움을 얻어 12월 25일 밤 남 창읍 안으로 들어가 점령했으며, 김사용이 이끄는 북진군은 12월 24일 선천으로 진격하여, 첩자 최봉관과 유문제의 도움을 얻어 쉽사리 선천을 점령하였다.
 
이때 선천 부사 김익순(김삿갓 김병연의 조부)은 측근과 군졸 몇 명만 데리고 검산산성으로 도망가 버렸다. 그러자 김사용은 아장을 그곳으로 보내 회유 또는 협박하여 김익순으로부터 기어코 항복을 받아냈다. (이 항복 사건으로 인해 김익순은 나중에 죄인으로 몰려 죽었으며, 그의 자손은 대대로 벼슬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벼슬길이 막힌 김익순의 손자 김삿갓은 젊어서부터 세상을 풍자하는 시를 지으며 전국을 방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 다음 김사용은 북진군을 2군으로 재편성하여, 1군은 신덕관에게 맡겨 구성 쪽으로, 2군은 김사용 자신이 맡아 철산 쪽으로 각각 진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철산의 첩자인 좌수정대성의 도움을 받아 철산 역시 힘 안들이고 점령해 버렸다.
 
이처럼, 봉기군은 봉기한 지 5-6일 만에 청천강 이북의 가산, 박천, 곽산, 정주, 선천, 태천, 철산, 용천 등 8읍을 비롯한 평안도 서해안 일대를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
 
이 무렵 황해도 황주 사람 노인담, 곽성집 등이 수백명의 난민을 모아 폭동을 일으켰으나 12월 28일에 황해도 병마절도사 조계에게 잡혀 처형되고 말았다.
 
한편, 홍경래는 박천의 송림동에 8백여 명의 봉기군을 집결시켜 평양을 치러 떠날 채비를 서눌렀다. 12월 29일 아침 홍경래는 봉기군을 3군으로 나누어 관군을 공격해 들어갔다. 관군도 역시 3군으로 나눠 봉기군의 공격에 맞섰다.
 
이 날 박기풍이 이끄는 순무영의 중앙 군도 개성에 도착하여 토벌군을 지원했다. 전투 초기에는 토벌군이 봉기군에게 밀렸다. 그러나 평안병사 이해우가 병력 1천여명으로 하여금 봉기군의 후방을 치게 한 이후로는 전세가 역전되고 말았다.
 
한때 홍총각이 후방을 지원하면서 봉기군 쪽의 전세가 다시 호전되는가 싶더니, 평안도 병마우후 이해승, 함종부사 윤욱렬, 순천 군수 오치수 등이 거느린 토벌군이 3면에서 총공격해 오는 바람에 다시 봉기군 쪽이 불리하게 되고 말았다.
 
그러자 봉기군은 중과부적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승기를 잡은 토벌군은 도망가는 봉기군을 쫓아가 닥치는 대로 무찔렀다. 그리하여, 송림전투에서 홍경래는 1백 30여명의 봉기군을 잃어 버리고 정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퇴각중에 4백여 명에 이르는 봉기군이 흩어져 버려, 홍경래는 2백여 명의 잔여 봉기군만을 이끌고 정주성으로 되돌아가 그곳을 거점으로 하여 장기전을 벌이며 북으로 진격한 북진군의 지원을 기다렸다.
 
이 무렵 황주에서는 김덕춘, 김사옥 등이 마장리, 용암리 등 12포구를 습격하여 민가 300여 채를 불태우는 등 폭동을 일으켰다. 경기, 황해, 평안 3도에서 징집된 관군 및 의병으로 결성된 토벌군의 주력부대가 1812년 1월 3일에 정주성 아래에까지 도착하였다.
 
그 사이에 곽산읍에서의 싸움에서 관군은 또 한 차례 이겨 박천과 가산이 회복되었다. 그리하여, 평안도 여러 읍 중 정주, 태천, 곽산, 용천 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회복되었다.
 
그래서 토벌군은 태천, 곽산, 용천 등지에서 봉기군들과 전투를 벌임과 동시에 주력부대는 정주성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그러나 홍경래는 이에 굴하지 않고 항전을 계속하였다.
 
1월 5일에 토벌군은 봉기군을 맞아 전투를 벌였으나, 전사 3명, 부상 17명을 냈을뿐 별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 무렵 김사용은 북진군을 이끌고 용골산성을 점령한 후 이어 곧바로 용천읍을 점령하였다. 그런 후에 향반층과 각별히 신경을 쓰면서 군사를 모았다.
 
1월 8일 토벌군은 정주의 남진군과 용천의 북진군이 서로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해 후원장 이영식과 우영장 오치수에게 병력 2천여 명을 주어 곽산을 치게 하였다.
 
곽산의 북진군은 토벌군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고 혼비백산하여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선천으로 도망간 북진군의 박성신은 급히 김사용에게 패전 소식을 알렸다.
 
그러자 김사용은 이제초에게 기병과 군사 1천여 명을 주어 곽산의 토벌군을 공격하도록 했다.그리하여 곽산을 재탈환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윤욱렬이 이끄는 토벌군이 다시 곽산을 공격해 왔다.
 
이번 전투에서는 곽산이 토벌되어 북진군의 장수 이제초를 비롯한 6명의 장수와50여 명의 북진군 병사들이 사로잡혀 모두 효수당했고, 태천도 토벌군에게 진압되어 북진군의 장수 변대익이 처형당했으며, 이윽고 용천. 용골산성, 서림성에서도 연달아 봉기군이 패배당했다.
 
서림성이 토벌군에게 점령당했을 당시 동림성에 머물고 있던 김사용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중대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그는 야밤을 이용하여 정주성으로 들어가 홍경래를 도왔다. 그렇게 되자, 1월 10일경에 이르러서는 홍경래는 정주성안에 갇힌 채 완전히 고립된 꼴이 되고 말았다.
 
사태가 이지경에 이르자, 봉기군 중에는 관군에게 투항하는 자들이 자꾸만 늘어갔다. 게다가 양서순무사 중군 박기풍이 지원군을 이끌고 와서 정주의 토벌대와 함류하는 바람에 전세는 봉기군쪽이 더욱 불리하게 되었다.
 
그런데다가 1월 15일에 북진군의 장수 김창시가 선천, 철산 등지에서 관군과 싸우다가 패주하여 용천 동림섬과 서림성으로 쫓겨 갔다가 그 이튿날 붙잡혀 효수당하고 말았다. 이렇듯 사태는 점점 봉기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어갔다.
 
더욱이 성 안에서는 병력, 무기, 식량난에 대한 걱정이 나날이 증가되어 가는 반면, 토벌군은 날이갈수록 장비. 군사, 식량 면에서 더욱 우세해져만 갔다.
 
그러자 홍경래는 "싸우다 죽느냐, 아니면 항복하느냐" 를 놓고 한동안 갈등했지만, 결국에는 끝까지 싸우다 죽는 쪽으로 결심을 굳혔다.
 
1월 19일에 토벌군의 총공격이 다시 한번 가해졌으나, 그들은 완강한 봉기군의 저항에 부딪쳐 사상자 36명만 내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2월 초까지 토벌군의 4-5차례의 총 공격이 시도되었으나 번번이 실패만 하고 물러났다. 2월 12일 밤에는 성 안의 북장대에서 불이 났다.
 
이 틈을 타서 토벌대의 의병장 김견신이 성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으나 오히려 봉기군의 역습을 당해 실패하고 말았다. 이처럼, 봉기군의 저항이 의외로 거세고 끈질기게 이어지자, 조정에서는 2월 18일에 순무사 중군인 박기풍을 사직시켜 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 유효원을 앉혔으며, 신홍주를 병마절도사로 삼아 파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월 19일과 2월 23일 2차에 걸쳐 반란군은 오히려 토벌군을 역습하여 위협을 주며 포위망을 뚫고자 시도하는 등 몇 번의 역습을 감행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새로 부임한 유효원은 경향군 8천여 명을 이끌고 내려가 기존의 토벌군과 합세하여 2월 29일에 정주성을 향하여 총공세를 펼쳤으나,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3월 9일에 홍경래는 우군칙과 홍총각에게 장정 5백여 명을 주어 토벌군에 대한 역습을 과감히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했다. 이때 봉기군은 46명이 죽고 4명이 포로가 된 데 비해. 토벌군은 70명이 죽고 1백37명이 부상당했다.
 
반란군은 3월 15일과 20일에도 성에서 나와 재차 토벌군을 공격하여 토벌군의 의병장 허항을 비롯하여 22명을 죽였으나, 이때 장수 김사용을 비롯하여 50여 명의 병력을 잃고 퇴각하였다.
 
3월 22일에도 봉기군은 또 한 차례 역습을 감행하여 토벌군의 병사 17명을 죽였으나, 자기 편은 69명이나 죽고 1백여 명이 포로로 잡혀 대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식량이 부족해져 가기 때문에 봉기군은 어떻게 해서라도 토벌군의 포위망을 뚫고 자 여러 시도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즈음 홍경래는 그를 배반한 집사 이침이 쏜 총에 맞아 죽을 뻔했으나,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때 암살미수 사건에 연루된자들은 모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이런 일로 충격을 받아서인지, 홍경래는 관군의 복병장 정의진과 협상을 시도하여싱 내의 여자 60여 명, 남자 병약자 및 어린애 7명을, 그리고 3월 26일에는 남녀 1백61명을 각각 성 밖으로 내보냈다.
 
이 무렵 성 안에는 먹을 것이 없어, 사람들은 소나 돼지뿐만 아니라 전투에 쓸 말까지도 거의 다 잡아 먹어 버린 상태였다. 심지어 소나 무 껍질까지 벗겨 먹어야 했기 때문에 성 안의 소나무들은 모두다 하얗게 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버드나무 잎사귀, 풀잎까지도 뜯어 먹을 정도로 식량난이 극심하였다. 그런데도, 홍경래는 항복하지 않고 항거를 지속하였다.
 
이에 유효원은 그 동안 4월 3일부터 보름 동안 정주성 북장대 밑까지 파들어간 땅굴에다 4월 18일 밤에 화약 1천8백근을 묻어 놓고 4월 19일 새벽에 이를 폭파시켜 북장대 쪽 성벽 10여 칸을 파괴해 버렸다.
 
그런 다음 토벌군 중 의병들을 먼저 돌진시키고 그 뒤를 따라 관군 수천명으로 하여금 쳐들어가게 했다. 이에 맞서 홍경래는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결국 토벌군의 총과 칼에 맞아 죽고 말았으며, 봉기군의 장수 홍총각, 김이대 등은 포로로 붙잡혔다. (홍총각, 김이대는 한양으로 곧바로 압송되어 그로부터 4일 뒤인 4월 23일에 처형당했다.)
 
그 외 포로로 붙잡힌 봉기군 1천9백17명도 모두 효수되었으며, 여자 8백42명과 남자 아이 2백24명만이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우군칙과 이희저는 성에서 일단 도망치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그로부터 사흘 뒤인 4월 22일에 붙잡힌 후 대역죄로 처형당했다.
 
결국. 총 2천여 명의 봉기군들이 죄인으로 몰려 목베임을 당해 죽었. 그리고 봉기군에 항복했던 지방 수령들은 파직 또는 처형을 당했다.
 
이로써 홍경래의 난은 정주성 안에서 항거한 지 1백여 일 만에(거사한 지 4개월 만에) 마침내 평정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토벌군은 4월 24일에 본래의 근무지로 각각 귀환하였다. 이후로도, 1813년(순조 13년) 11월에 제주도에서 양제해가 반란을 도모하다가 잡혀 죽었으며 , 1814년과 1815년에 걸쳐 전국적으로 도둑떼가 횡행하여 민심을 혼란스럽게 하였고, 1815년 10월에는 용인의 이응길이 송지팽, 최한갑(뿔&매) 등과 함께 모의하여 병력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그리고 1816년 10월에는 성천의 승려 학상이 자칭 "홍경래 일파 라고 하며 민중을 선동하고 다니다가 붙잡혀 효수당했으며, 1817년 1월에는 유칠재가 홍찬모 등과 함께 조정의 중신들을 모함하려다가 유배당했고, 같은 해 3월에는 채수영등이 "홍경래가 살아 있다" 고 민심을 동요시키며 전라, 충청 2도에서 무기와 병력을 모아 상경하여 박종경, 김조순, 심상규 등을 죽이고 강화에 유배되어 있던 은언군 이인의 아들 이철득을 옹립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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