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이괄의 난

구름위 2013. 8. 22.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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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1624년)은 1624년에 인조반정 때의 공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관직이 높지 않은 데 대한 불만과 무능하고 의심증 많은 공신들에 대한 적개심을 평소 품고 있던 이괄이 자기 외아들 이전이 반역자로 몰리자 아들과 가족을 구하기 위해 일으킨 난이다.

 

이괄(1587-1624년)은 참판 이육의 후손으로서 그의 자는 백규, 본관은 고성이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선조 때 형조좌랑, 태안 군수를 역임했다.
 
1622년(광해군 14년)그는 함경북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부임하기 직전에 난에 가담하여 거사 당일에 작전 지휘를 맡아 인조반정을 성공으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정사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판윤이라는 관직이 내려졌다. 반면에 도감대장 이수일에게는 공조판서의 관직이 내려졌으며, 기회주의자인 김류가 정사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가 그에게는 몹시 못마땅하였다. 그러나 그는 도원수 장만의 추천으로 부원수가 되자 이에 다소 위로를 받았다. 1623년 후금과의 마찰로 북쪽 변방의 분쟁이 잦자, 5월에 도원수인 장만이 먼저 평양으로 출발하였고, 이괄은 8월 17일에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서 근무지인 영변을 향해 떠났다.
 
떠나기 전에 그는 인조에게 이렇게 하직 인사를 올렸다.
"전하께서 소신의 재주 없음을 아시면서도 분에 넘치는 중차 대한 북방 경계 임무를 맡겨 주시니, 성은이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그후, 그는 평안도 영변에 부임한 뒤, 변방에 성책을 쌓거나 보수하여, 또한 철저히 군사 훈련을 시키고, 국경의 경비를 강화하는 등 부원수로서의 직책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런데 1624년(인조2년)그의 아들 이전이 당시의 일부 지식층과 교유하며 횡포로 인한 시정의 문란을 개탄한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과장되어 그가 반역을 꾀하였다는 무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1624년(인조2년) 1월 17일에 전교수 문회, 허통, 이우, 전 첨사 권진 등이 다음과 같은 상소하였다.
"이괄과 그의 아들 이전 및 순변사 한명련, 안주 목사 정충신등이 결탁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인성군 이공이 그들과 내통하고 있사옵니다."
상소자들은 겉으로는 이괄과 이전의 모반을 겉에 내세우고는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과거에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던 문신들과 무신들을 모두 한꺼번 제거하고자 이러한 엉뚱한 누명을 씌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괄, 이전, 한명련, 정충신에 그치지 않고 이외에도 정인영,정찬, 성백구, 성철, 한준철, 한창국, 한흥국 등 총 40여 명을 무더기로 무고하였다.
 
더욱이 정찬이 "이괄이 이달 1월 그믐께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고 보다 구체적으로 고변하는 바람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이내 상당수가 붙잡혀와 갖은 문초와 고문을 당하였고, 이 중 정인영, 한창국, 한흥국 등은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여 숨을 거두고 말았다.
 
불상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이괄과 내응할 혐의가 있다고 판단되는 전 우의정 기자헌도 잡아들여 옥에 가둬 버렸다. 그리고 1월 21일에는 단지 모반의 사실 유무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이괄의 아들 이전을 한양으로 압송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선전관 심지수와 의금부 도사 고덕상과 심대림이 영변의 진영으로 급파되었다.
 
의금부 도사와 선전관의 갑작스런 방문을 받은 이괄은 배우 당황하였다. 더욱이 자기 외아들이 모반 혐의를 받고 있으며, 그 때문에 그를 압송하기 위해 그들이 왔다는 사실을 알고 난 이괄은 솟아오르는 분노를 도저히 삭힐 수 없었다.
 
더군다나, 평소 자신이 인조반정의 공신인데도 관직이 높지 않는 데 대한 불만과 무능하고 의심증 많은 공신들에 대한 적개심이 일시에 폭발하여 견딜 수 없었다.
 
안절부절하던 이괄은 마침내 칼을 빼어들고서 그의 부하인 이수백과 기익헌 앞에서 이렇게 외쳤다.
"내게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데, 그가 잡혀 들어가서 곧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사태가 매우 급하게 되었다. 사내가 어찌 앉아서 죽음만을 기다릴 것이냐?"
 
그러자 이괄의 부하 기익헌이 침착하게 말했다.
"만약 거사하고 싶으시면, 한양에서 내려온 저 자들을 죽인 다음 군사들을 위협하여 모두 군소리 없이 따르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괄은 기익헌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기회를 포착하여 한양에서 파견된 의금부 도사와 선전관의 목을 모두 베어 버렸다. 그리고 그 머리를 들어 보여 부하들에게 자신의 확고한 결심을 보였다.
 
그는 부패한 공신들을 제거해 버리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마침내 난을 일으켰다. 그는 때마침 반역 음모에 관련된 혐의를 받고 한양으로 압송되고 있던 구성 부사 한명련을 날쌘 항왜병(임진왜란 때 항복한 왜병)을 보내 기습 구출하여 그와 함께 군사 1만 2천여 명을 거느리고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이때가 1624년 1월 24일이었다. 그는 항왜병 1백 30여 명을 앞세우고, 막강한 군대를 탁월한 작전으로 이끌며 곧장 한양을 향하여 진군해 나갔다. 그는 가능한 한 빨리 궁궐을 점령하기 위해 쓸데없이 전투력을 소모하는 작전을 피하며 신속히 남하하였다.
 
이때 도원수 장만은 평양에서 이괄의 반란군이 진격해 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자신의 휘하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아 크게 당황하면서도, 조정에 사람을 보내어 증원 병력을 요청하는 한편 근처의 각 읍에 통보하여 군사들을 급히 모았다.
 
그러나 갑작스레 군사를 모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괄은 반란군을 이끌고 곧바로 개천으로 해서 한양으로 진격할 태세여서 사태는 더욱 암담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이괄이 이끄는 반란군이 빠른 속도로 진격해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영의정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형조판서 이시발과 대사간 정엽을 부사로, 그리고 최현과 김시양을 종사관으로 각각 임명하고 사태를 수습토록 했다.
 
그리고 그 이튿날인 1월 25일에는 이괄과 내통할 혐의가 있다고 판단되는 성철, 성준길, 이시언, 성백구, 한준철, 신영남, 현즙 등 35명을 미리 체포하여 죽여 버린 후, 왕은 강화로 피신을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장유의 간곡한 만류로 그냥 한양에 눌러 앉은 왕은 1월 28일에는 이괄의 처족 및 친척과 그밖에 이괄과 친근한자들까지 모조리 잡아들였다.
 
그 사이 도원수 장민은 이괄의 진영에서 도망쳐 나와 투항하는 자들에게 벌 대신에 "이괄의 목을 베어오는 자에게 후한 상을 주겠다."고 하며 오히려 그들을 격려하였다.
 
1월 28일에는 이괄의 부하 유순무, 이윤서 등이 장만의 회유를 쫓아 반란군 진영에서 도망쳐 나와 관군에 투항하는 사건이 생겼다. 그 통에 이괄의 반란군 중 4천여 명이 별안간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그러나 이괄은 이 사태를 속히 수습하고서 나머지 8천여 명의 반란군을 이끌고 강동(평남)을 거쳐 빠르게 남하하였다. 이때 장만은 이괄의 반란군이 평양을 칠 것으로 내다보고, 안주목사 정충신을 전부대장으로, 박영서를 전봉장으로, 유호걸과 장돈을 좌우 협장으로, 그리고 남이홍을 계원장으로 삼아 이들에게 군사 1,800명을 주어 1월 29일 이른 새벽에 대동강을 넘게 하여 평양으로 들어가 그곳을 사수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괄은 평양을 치지 않고, 그곳을 우회하여 곧바로 황해도로 내려가 2월 1일에 수안에 이르렀다. 여기서 이괄은 새장을 넘어 남하하려 하였으나, 황해 감사 임서의 병력이 그곳을 지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그곳을 피해 산산으로 일단 물러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평양의 관군이 뒤쫓아 내려오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황주로 급히 군사를 이끌고 갔다. 그러다가 2월 2일에 황주 근교의 신교에서 정충신, 남이홍 등이 이끄는 관군과 맞붙어 첫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때 이괄은 관군을 정면 돌파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여기고, 그의 부하 허전과 송입을 거짓 항복시켜 관군의 동태를 살피기로 작전을 바꿨다.
 
허전과 송입이 말을 타고 관군 쪽으로 향해 달려 갔다. 그런데 이들을 본 관군은 오해하여 "적이 쳐들어온다."면서 모두 겁을 집어먹고 와르르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괄은 반란군을 재빨리 돌진시켜 관군의 방어망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관군의 전봉장 박영서를 사로잡아 죽이고, 별장 안늑, 척후장 오섬 등을 사로잡았다.
 
이괄은 그 여세를 몰아 삼등을 거쳐 상원으로 군사를 몰아 계속 남하하였다. 그러자 도원수 장만은 별장 박상에게 군사 약간을 주어 상원으로 보낸 다음, 그는 관군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황주로 가서 평안감사 이상길의 군사 1천여 명과 곽산군수 민여검과 삭주부사 민인걸 등의 군사 6백여 명까지 모두 끌어모아 황주에 집결시켰다.
 
그런 다음, 2월 5일에 황해 병사 변흡과 방어사 김완 등에게 군사를 주어 반란군을 추격하게 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이 무렵 이괄의 처와 이괄의 아우 이돈, 그리고 이전의 처 계이, 이괄의 장인 이방좌 등을 처형시켰으며, 2월 5일에는 좌의정 윤방을 유도대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2월 6일에는 어영사 이귀가 임진강의 여울에 병력을 배치해 놓은 다음 자랑 삼아 왕으로 하여금 친히 사열토록 했다.
 
2월 7일에는 체찰부사 이시발, 종사관 김시양, 독전어사 최현, 황해 감사 임서 등이 평산에서 군사를 이끌고 마탄으로 가서 그곳에서 있던 정충신의 부대와 합류하여 공동작전을 펼쳤으며, 장만은 부원수 이수일과 함께 병력을 이끌고 평산으로 향했다.
 
이즈음, 이괄은 전탄을 건너 샛길을 이용하여 기린으로 내려오다가 포도대장 이중로와 연안 부사 이인경과 평산부사 이곽 등이 이끄는 관군이 마탄에 진을 치고 잇는 것을 보고 낮은 여울을 건너 급습하여 격퇴시켜 버렸다.
 
이때 이괄은 관군의 장수들의 목을 베어 매달아 정충신(이괄의 친구)이 이끄는 관군의 부대로 보냈다. 이를 본 관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고 말았다.
 
이때 이곽민은 시쳇더미에 파묻혀 간신히 목숨을 건질수 있었다. 이후, 이괄은 반란군을 이끌고, 경기 감사 이서가 지키고 있는 송도의 청석골로 향했다. 송도에 거의 이르렀을 때 이괄은 밤중에 항왜병들을 미리 보내서 청석골의 관군을 놀라 흩어지게 한 다음, 반란군을 이끌고 송도를 거쳐, 수원부사 이홍립과 파주목사 박효립이 지키고 있는 임지강 여울 쪽으로 곧장 내려갔다.
 
러자 임진강 여울을 지키고 있던 관군들이 반란군의 당당한 위세에 기가 질려 제대로 한번 싸워 보지도 않고 앞다투어 달아나 버렸다.
 
이처럼 관군의 최후 방어선이 무너지고, 반란군이 임진강을 건너 벽제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접한 왕은 2월 8일 해질녘에 말을 타고 궁궐을 빠져 나가려 했으나, 숭례문이 닫혀 있었다.
 
그래서 돌로 자물쇠를 부수고 나갔으나, 한강에 닿았을 때는 배가 한 척도 눈에 띄지 않았다. 강 건너편에는 배가 몇 척 있었지만, 사공들이 배를 숨겨둔 채 이무리 불러도 건너와 주지 않았다.
 
그러자 무사 우상중이 칼을 빼어들고 강을 헤엄쳐 건너가 사공들 중 하나를 죽여 위협하여 배들을 끌어 왔다. 이리하여 왕의 일행은 배를 타고 간신히 한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으며, 과천을 거쳐 수원으로 내려갔다.
 
가는 도중 왕은 신경진, 윤숙 등에게 나가 싸워 반란군을 격퇴하라고 지시했으나, 이들은 "관군들이 투지가 없어서 불가능하다"고 변명하며 왕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괄은 반란군을 이끌고 별 저항 없이 한양 근교에 이르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왕이 궁궐을 빠져 나간 뒤였다. 이 사실을 한양의 주민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괄은 기병 30여 명을 미리 한양으로 들여 보냈다. 그들은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이렇게 외쳐댔다.
"도성 안의 사람들은 동요하지 마시오. 이제 곧 새 임금이 즉위하게 될 것입니다."
 
이윽고, 2월 10일 아침 이괄과 한명련이 이끄는 반란군의 주력부대가 주민들과 각 관청 관리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한양을 무혈 점령하게 되었다.
이괄은 반란군을 경복궁 옛 터에 주둔시킨 후, 부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단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선조의 열째 아들 흥안군 이제(온빈 한씨의 소생)를 왕으로 추대하고 전권을 장악했다.
흥안군은 원래 성품이 호협하여 평소 엉뚱한 짓을 잘하기로 소문 나 있었다. 그는 한때 이괄과 내통하고 있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인조가 선처하여 한양을 떠나 피신할 때 그와 함께 동행하여 길을 떠났다.
그런데 흥안군은 중간에 도망하여 기어이 이괄과 합류하게 되었던 것이다. 왕위에 오른 흥안군은 제법 임금 행세를 하며 반란군의 지휘자들에게 벼슬을 내려주고, 군사들에게는 술과 고기를 배불리 먹게 하였다.
그런 후 각 처에 방을 붙여 백성들이 각자 생업에 충실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런데 반란군이 궁궐로 입성한 다음 날인 2월 11일에 도원수 장만은 그의 휘하의 관군을 총동원하여 이끌고 한양 근교인 파주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는 즉시 피난길에 있는 왕에게 종사관을 보내 문안 인사를 올린 다음, 부하 장수들과 의논하여 한양의 북쪽에 위치한 길마재에 정부군의 진을 쳤다.
그것은 정충신의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 그 이튿날, 이 사실을 알게 된 이괄은 "적을 쳐부수고 밥을 먹자"하면서 성문을 열고 한명련의 부대를 선봉으로 내세우고 그 뒤를 반란군의 주력부대가 따르게 하여 길마재로 나가 전면전에 돌입했다.
그런데 이때 돌연 풍향이 바뀌는 바람에 반란군은 바람과 먼지를 안고 싸우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반란군은 활과 총을 제대로 쏘지 못해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사태가 이처럼 불리하게 전개되자, 이괄은 전투 진영을 바꾸기 위해 몸을 뒤로 움직였다. 그에 따라, 대장기도 함께 움직였다. 그때 이를 본 정부군의 남이홍이 "이괄이 패했다"고 크게 외쳤다.
그러자 반란군의 병사들은 그말이 사실인 줄 알고 앞다투어 우르르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에 사기가 오른 정부군이 반란군의 주력부대를 일시에 공겨해 들어갔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반란군은 오합지졸이 되어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괄은 겨우 수백의 패잔병을 이끌고 수하 참모들과 함께 수구문(광희문)을 빠져 나가 삼전도를 거쳐 광주 방면으로 달아났다.
이때 일일천하의 새임금 흥안군도 곤룡포를 벗어 던져 버리고 줄행랑을 쳐 버렸다. 한편, 이괄은 2월 12일에 광주에서 목사 임회를 쳐죽인 후, 그날 밤 이천으로 도망을 쳤다가 2월15일 밤에 다시 묵방리로 은둔처를 옮겼다.
그런데 이때 이괄의 부하 장수 기익헌, 이수백 등이 더 이상 도망해 봐야 소용 없다고 판단하고서 함께 모의를 했다. "기회를 보아 방심한 틈을 타서 이괄과 한명련의 목을 베어 조정에 바칩시다. 그게 우리가 사는 유일한 길이오."
그리하여, 결국 이괄 및 한명련을 포함한 9명의 장수가 배신자들에 의해 목베임을 당했다. 그러자 나머지 반란군들은 모두 관군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이윽고 이괄의 목은 정부군에게 넘겨졌으며, 광주 소천으로 도망간 흥안군도 그곳 현감인 안사성에게 붙잡혀 도원수 장만에게 인계되었다가 곧 처형당했다.
이로써 이괄의 난은 일어난 지 22일 만에 평정되고 말았다. 2월 15일에 이괄과 한명련 등의 반란군 괴수들의 머리는 공주에 있는 왕에게 보내졌다. 2월 22일에 인조는 궁궐을 떠난 지 보름만에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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