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이귀의 난

구름위 2013. 8. 22.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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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귀의 난(1623년)은 1623년 3월에 이귀가 김자점, 김류, 이괄, 신경진 등과 함께 모의하여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인조)을 즉위시키고자 일으킨 난이다.
 
이귀(1557-1633년)는 이정화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옥여이며 호는 묵제이고, 본관은 연안이다. 그는 이이, 성혼 등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으며, 1582년(선조 15년)에 생원이 되었고, 강릉 참봉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 삼도 소모관, 삼도 선유관으로 임명받아
 
소와 말, 군졸, 대두 등을 징발하여 도체찰사 유성룡에게 이를 수송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1593년에는 장성 현감을 거쳐 군기시 판관, 김제 군수를 역임했으며, 1603년(선조 36년)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형조 좌랑이 되었으며, 이어 안산 군수, 양재도 찰방, 배천 군수 등을 역임했다.
 
1606년 계비 인목왕후에게서 영창대군이 탄생하자 서자이며 둘째 아들이라는 결함이 있는 광해군의 즉위를 앞에 놓고, 소북은 영창대군을 옹립하고자 했고, 대북은 광해군을 지지하여 그를 옹립하고자 하여, 이는 급기야 당쟁으로 확대되었다.
 
1607년 10월 선조는 자기 병이 매우 위중하다는 것을 깨닫고서 영의정 유영경, 좌의정 허욱, 우의정 한응인 등을 불러 전위의 뜻을 밝혔다.
"지금 전위가 안 된다면, 세자에게 섭정이라도 시켜야겠노라."
 
그러나 세 정승은 이를 극구 만류하고 물러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은 왕비에게 전위의 말을 언문으로 받아쓰게 하여 유영경에게 전하였다.
 
그런데 소북파인 유영경은 이 중대한 전지를 받고도 광해군과 어울리는 대북파가 득세할까 봐 두려워 왕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그 전지를 묵살해 버렸다.
 
그러자 1608년 1월에 정인홍 등의 대북파가 유영경의 불충에 대해 집중 공략했다.
"전하께서 세자에게 섭정을 시키거나 전위하려 해도 영상 유영경이 원로 대신들을 시기하여 전하의 뜻을 어기고, 중전마마의 언문 하교도 전하지 않고 있소. 무슨 무서운 흉계로 이런 짓을 하는 것이요. 유영경은 광해군과 종사를 위태롭게 하고, 전하를 고립시키려 하고 있소."
 
이렇게 정인홍의 탄핵으로 유영경의 음모가 들통나 버려 위기 의식을 느낀 소북파는 일대 반격에 나섰다. 그들 중 대사간 이효원, 정언 구헌 등이 선조에게 나아가 아뢰었다.
"군부의 지친을 이간하려는 정인홍의 흉모는 이이첨, 이경전 등이 짜낸 것이옵니다."
 
왕위를 광해군 쪽보다는 영창대군 쪽에 넘겨 주고자 하는 마음이 더 강했던 선조는 소북파의 주장이 옳다고 여겨,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을 영해로, 이이첨을 갑산으로, 그리고 이경전을 강계로 각각 유배시켜 버렸다.
 
그런데 이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인 1608년 2월에 아무런 유고도 내리지 못한 채 선조는 갑작스레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자 당시 34세의 세자 광해군이 조선왕조 15대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그러자 대북파인 정인홍, 이이첨 등이 잇달아 상소를 올렸다. 그래서 광해군은 할 수 없이 임해군을 유배시키고 유영경을 사약을 내려 죽었으며, 원로대신 이원익을 영의정에 임명하고 정인홍, 이이첨, 이경전 등의 대북파를 대거 중용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후 초당파적인 정책을 구현하여 당쟁을 종식시키고자 애를 썼다. 그러나 정인홍, 이이첨 등의 대북파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1611년 정인홍이 이언적, 이황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다가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유적에서 삭제당하자 유생들을 모조리 퇴관시켜 버렸으며, 그 이듬해 김직재의 무옥이 일어나자 이에 관련된 많은 학자, 문신들을 추방해 버렸다.
 
1613년 대북파가 박응서, 양갑 등의 강도 사건을 악이용하여 영창대군을 추대하려고 했다고 무고하자 김제남을 사사하고, 이어 영창대군을 인으로 강등시켜 강화에 귀양 보내 버렸다.
 
같은 해 인목대비 폐모론이 대두되자, 일단 덮어두고, 이듬해 영창대군을 죽여 버렸다. 1615년에는 이원익을 파직시켰으며, 대북의 음모로 능창군 이전의 추대 사건이 일어나자 또 다시 많은 학자, 문신들을 추방해 버렸다.
 
1617년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가 폐모론을 재차 건의하자, 이듬해 계모인 인목대비를 삭호하여 서궁에 유폐시켜 버렸다.
 
1609년(광해군 1년)에 이귀는 함흥 판관을 거쳐 1616년에 숙천 부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 무고로 수감되어 있던 해주 목사 최기를 만나 본 것이 죄가 되어 그는 이천으로 유배당하고 말았다.
 
그 후 복직되어 평산 부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개탄하여 그는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특히 광해군의 `살제폐모(살제폐모의 패륜`(그의 형 임해군과 그의 아우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사건)과 `편혹 정책`(친족이나 대북파에 지나치게 치우쳐 다른 당파 및 백성을 학대한 정책)은 그 동안 대북파에 눌려 지내고 있던 다른 당파, 즉 서인들을 매우 분개시켰다.
 
사실상 이귀는 그가 함흥 판관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때부터 무력 정변을 꿈꾸었다. 그는 같은 서인이며 이이와 성혼의 제자인 유생 김자점(이귀의 딸이 김자점의 아우인 김자겸의 부인이었다)과 사귀면서 함께 모의하여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대신 능양군을 옹립한 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러한 모의 기밀에 대해 낌새를 챈 대북파에서 들고 일어나 이를 크게 문제 삼았다. 그러자 김자점은 이귀의 딸(김자점의 제수)을 궁중에 들여보내서, 광해군이 가장 총애하는 상궁 김씨를 뇌물로 포섭했다. 그 후, 예상대로 한유상, 정언 등이 후원에 가 있던 광해군에게로 가서 아뢰었다.
 
"이귀, 김자점 등이 오래 전부터 서궁과 내통하며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합니다. 장차 무슨 화근이 될지 알 수 없으니, 미리 단속하도록 해야 하옵니다."
그러자 김자점으로부터 이미 뇌물을 받은 바 있는 김상궁이 왕 곁에서 대뜸 한 마디 했다.
"김자점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오."
 
이에 광해군은 김상궁의 말이 옳다고 여겨,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버렸다. 그런데 얼마후 이귀, 김자점 등의 음모설이 또 누설되자, 대사헌 남근, 대사간 유대건 등이 이를 다시 문제삼아 왕에게 나아가서 그 두 사람을 당장 잡아들여야 한다고 간곡히 아뢰었다.
 
. 이때도 왕은 김상궁의 말에 넘어가 또 다시 그 음모설을 덮어 버리고 말았다. 1622년 평산부사에 오른 이귀는 효성령 별장으로 있는 신경진과 함께 거사 모의를 하였다. 때마침 평산 일대에 호랑이의 폐해가 많았다.
 
그래서 이귀는 함정을 파서 호랑이를 잡아 왕에게 바치며 이렇게 건의하였다. "호랑이들이 황해도와 경기도의 경계를 제멋대로 왕래하며 폐해를 끼치고 있으니, 평산, 장단, 송도 등지에서 힘을 합쳐 호랑이를 잡게 해주십시오."
 
이에 대한 왕의 윤허가 떨어지자, 이귀의 군사는 평산뿐만 아니라 장단, 송도 일대까지 도 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보다 용이하게 군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밀고 들어가 거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판단한 이귀, 김자점 등은 장단부사 이서도 끌어들여 함께 거사 모의를 했다.
 
그런 후 당시 인망이 높던 전 부사 김류도 끌어들여 거사를 모의하였다. 그 중에서 특히 김류에게는 봉기군의 총지휘 책임을 맡기기로 하였다. 이 무렵 문신 최명길, 장유, 심기원 등도 설득하여 반란군에 가담시켰다.
 
이 즈음, 이귀가 정변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자 조정의 대신들은 다시 들고 일어나 이귀에 대한 탄핵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광해군은 할 수 없이 이귀를 파직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뒤이어 조정에서 이귀를 잡아가려 한다는 말이 전해졌다. 이에 당황한 이귀는 그의 거사 동지들에게 신속히 연락을 취하여 거사 날짜를 정하고, 선조의 후궁 인빈이 낳은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 이종을 옹립하기로 하였다. 거사일은 1623년(광해군 15년) 3월 13일 밤으로 잡혀졌다.
 
이귀는 그 시각에 동지들과 군사들을 모두 홍제원에 모이게 했다. 그런데 이귀가 심기원, 최명길, 김자점, 장유 등과 함께 시중의 불량배 1백여 명을 데리고 홍제원에 도착해서 보니, 반란군의 주력부대인 장단부사 이서의 부대와 반란군 대장을 맡기로 한 김류도 아직 도착해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반란군의 수도 이괄의 부하 20여 명까지 몽땅 합쳐도 도합 6백여 명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장유가 헐레벌떡 뛰어와, 이미 조정에서 반란군에 대비하여 창의문에 군사를 집결시키고 있으며 모반자들에 대한 일제 검거령이 내려졌다고 알려주었다.
 
반란군의 거사를 뒤늦게야 알게 된 광해군은 도승지 이덕형, 병조판서 권진 등을 불러 밤새워 침전을 지키게 했으며, 도감대장 이흥립으로 하여금 궁궐을 수비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흥립은 이때 이미 그와 사돈간인 장유에게 설득을 당해 이귀의 봉기군을 돕기로 밀약되어 있었다. 이때 이귀는 매우 암담했다. 이와 같이 적은 수의 반란군으로 거사하자니 실패할 것이 뻔했고, 그대로 해산하자니 모두 붙잡혀 처형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고심 끝에 이귀는 반란군의 대장직을 이괄에게 맡기고 반란군을 출동시키기로 결심을 굳혔다. 뜻밖에 반란군 대장을 맡게 된 이괄은 우선 반란군들에게 `의`자를 쓴 표지 수백 개를 나눠 주어 각자 군복 뒤에다 붙이게 했다. 이는 관군과 반란군을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이괄은 반란군의 전열을 수습한 뒤, 각 지휘 군관들에게 수십 명씩 군사를 주어 궁궐을 향해 진격 명령을 내리려고 말에 올라탔다. 바로 그때였다. 김류가 보낸 전령이 급히 뛰어와 `김류가 부하들을 이끌고 와서 합류하겠다`는 내용을 전했다. 이때 이괄은 화가나서 소리쳤다.
"그런 배신자와는 합류할 수 없다."
 
그러자 이귀가 나서서 간곡히 말렸다.
"김류를 받아들이자. 그의 부대와 연합하여 공격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승산이 없다."
 
김류는 거사에 출정하기 위해 나오다가 거사 모의가 조정에 이미 알려졌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만 맥이 빠져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 주저앉아 버렸었다. 그러나 그의 측근들이 간곡히 설득하는 바람에 다시 마음을 바꿔 먹고 출정을 서둘렀던 것이다.
 
이괄이 화를 풀고 양보하게 되어, 김류가 반란군에 합세하게 되었다. 때마침 이서가 반란군의 7백여 명을 이끌고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김류의 총지휘하에 이괄, 이서, 이귀 등이 이끄는 반란군은 창의문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이윽고 반란군의 선봉부대가 관군이 굳게 닫아 걸고 지키고 있는 창의문을 부수고 돌격해 들어가자 그 뒤로 반란군의 주력부대가 북을 앞세워 둥둥치며 물밀 듯이 쳐들어갔다.
 
게다가 창의문 근처에 배치되어 있는 이확이 이끄는 관군들은 봉기군에게 싸움을 걸지 않았으며, 궁궐 외곽 수비를 맡고 있던 이흥립의 관군도 봉기군과 맞서 싸우기는커녕 길 양 옆으로 비켜 서서 오히려 봉기군의 진격을 도와주었다.
 
이렇게 되자, 봉기군은 별 어려움 없이 인정전을 지나 창덕궁 금호문까지 순조롭게 진격할 수 있었다. 봉기군이 금호문에 이르자, 관군의 수문장 박효립이 사전 약속이 되어 있던대로 문을 활짝 열고 봉기군을 맞아 들였다.
 
그러자 김류는 돈화문에 쌓아둔 나무에 불을 질러 궁궐 안이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 놓은 다음, 무사들을 거느리고 광해군이 머물러 있는 침전 쪽을 돌격해 들어갔다.
 
이때 광해군은 사태가 위급하다는 것을 감지하고는 내시 몇 명 만을 거느리고 북문으로 빠져나가 의관 안국신의 집으로 도망가서 숨어 버렸다.
 
이리하여, 봉기군의 거사는 성공리에 끝났다. 이튿날, 이귀, 김류 등의 봉기군 지휘부는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 김씨에게 찾아가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인목대비는 크게 기뻐하고 윤허하였다. 그러자 봉기군의 지휘부는 이튿날인 3월 14일 아침에 능양군을 궁궐로 모셔왔다. 능양군은 돈화문 안으로 들어 서서 백관들의 하례를 받았다. 그런데 도승지 이덕형만은 좀처럼 능양군에게 하례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자 이귀가 나서서 변명하듯 말했다.
"인목대비의 명령으로 우리는 반정을 했던 거요."
 
그제서야 이덕형은 고개를 숙여 능양군에게 하례를 하며 한마디했다.
"옛 임금을 죽이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이후, 이귀는 군사를 풀어 광해군을 찾아 사로잡은 후, 연금을 시켰다. 그리고 3월 17일 밤에 대비로부터 옥새를 받아 능양군을 즉위시켰다. 이로써 능양군은 29세의 나이로 조선왕조 16대 왕위에 올랐다.
 
이 인조반정으로 대북 일파는 소멸의 길로 치달았다. 영의정 밀양부원군 박승종은 그의 아들 박자흥과 함께 과천 삼막사로 피해 내려가서 자살하고 말았다. (박승종은 전날 이이첨과는 달리 인목대비의 폐위나 시해 등에 적극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제되지 못했다.) 세도가였던 유희분, 이이첨, 정인홍, 유인몽 등 수십 명은 붙잡혀 처형되었고, 그밖에 2백여 명의 대북파가 유배당했으며, 그들과 그 가족들의 재산이 모두 몰수되었다.
 
인조는 즉위하자 여주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이원익을 불러들여 영의정에 임명하고자 했다. 이때 이원익은 영의정의 직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광해군의 사형을 면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광해군 밑에서 영의정을 했기 때문에 광해군을 죽인다면 자기도 조정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의 말에 감복한 인조는 봉기군 지휘부를 설득하여, 광해군을 죽이지 않고 귀양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도, 이귀 및 인목대비 등은 계속하여 광해군을 처형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이덕형, 이원익 등의 간곡한 만류로 광해군은 사형을 면하고 군으로 강봉되어 강화에 유배되었다.
 
또한 왕비 유씨, 폐세자, 폐세자비 박씨 등도 강화로 유배당했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폐세자는 유배지에서 탈주하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광해군은 그 후 태안, 교동 등의 유배지로 전전하다가, 제주에서 1641년(인조 19년에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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