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임꺽정의 난

구름위 2013. 8. 22.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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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의 난(1559-1562년)은 임꺽정이 당시 유랑민들과 도적들 및 불평분자들을 규합하여 1559년(명종14년)부터 1562년(명종 17년)까지 무려 3년 동안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일대를 중심으로 일으킨 난이다.
 
연산군 이후, 중앙의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지방에서 관리들의 횡포가 극심해지자, 차츰 민심이 악화되어 갔다. 그러다가 명종 조에 들어와 명화적(강도단)이 날로 창궐하였으며, 1541년(중종 36년)부터는 대규모로 횡행하게 되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각 리에 내금위, 겸 사복, 한량을 모두 무관 출신인 포도대장으로 충당하게 하는 등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46년에 명화적은 다시 충청, 전라, 경상도에서 출몰하여 극성을 부렸다.
 
그렇지만 조정에서는 윤원로(윤원형의 형)등을 몰아내는 일에 몰두하느라 명화적은 중앙에까지 횡행하여 장안이 모두 공포에 떨게 되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적을 잡지 못한 포도대장과 부장 및 군관들을 잡아들여 처벌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조용하지 않았다. 1551년에도 여전히 도적들에 의한 살인, 약탈 등이 난무하였으며, 심지어 대낮에도 도적들이 설치고 다닐 정도로 민생치안이 엉망이었다.
 
조정에서는 다시 무관들을 보내는 등 사태를 수습하고자 하였으나, 전국 각지의 도적들을 도저히 잠재울 수 없었다. 게다가 1553년에는 윤대비가 승려 보우 등을 비호하자, 각처의 승려들 중 상당수가 살인, 약탈을 자행하는 등 혼란이 가중되었다.
 
게다가 1555년에는 황해도 일대에 오연석등이 이끄는 도적 떼가 무리 지어 다니며 관군을 공격하고 살인, 약탈을 일삼았다. 이때 신계현령 이흠례가 주민들의 협조를 얻어 도적의 괴수 오연석을 생포하여 처형했지만, 도적들의 횡포는 여전했다. 특히 경상도 예천을 본거지로 활약하는 50여 명의 무뢰배들은 다른 지역의 도둑 떼들과도 내통하여 크게 세력을 떨쳤다.
 
이 무렵, 임꺽정의 이름이 서서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임꺽정은 양주의 백정으로 정치의 혼란과 관리의 부패로 민심이 혼란해지자, 기존의 유랑민들과 도적들 및 불평분자들을 규합하여, 1559년(명종 14년)봄에 황해도, 경기도 일대를 중심으로 난을 일으켰다.
 
그는 특이하게도 관군과의 전면전보다는 게릴라전을 펼쳐 그 동안 백성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어온 권문세가들이나 부패한 관리들의 재산을 털어 양민들에게 나눠주는 식의 일종의 의적 행위를 펼쳐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냈다. 그는 무리를 이끌고 주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곡식을 빈민에게 나누어주었다.
 
게다가 대낮에도 관문을 포위하여 부패한 수령 및 나졸들을 쳐죽이고, 옥문을 부숴 자기 일당들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갇힌 일반 죄수들까지도 탈출시키고, 대낮에도 공물을 싣고 가는 수레를 털어 내는 등 과감한 짓도 불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만약 그의 종적을 관가에 밀고하는 자가 있을 시에는 반드시 그 배신자들을 잡아 죽여 버리는 보복 행위를 철저히 시행하였다.
 
그러자 아전과 백성들은 한편으로는 그 의적 행위를 지지하여, 한편으로 그의 보복이 두려워, 임꺽정의 무리에 편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1559년 3월에 황해도 일대의 관리를 대부분 무관으로 바꾸고 그들로 하여금 임꺽정의 무리를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해 4월 21일에 임꺽정은, 관군 20여 명을 데리고 추격하던 개성부 포도관 이억근을 오히려 역습하여 살해해 버린 후 바람처럼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1560년(명종15년) 8월 20일에, 예전에(5년 전에)전라 좌도 방어사로서 왜구를 토벌한 적이 있는 포도대장 남치근을 이몽린과 함께 파견하여 임꺽정의 무리를 토벌케 하였다.
 
개성부 유수와 수령들에게도 도둑잡기를 게을리 하면 엄벌에 처하겠다는 전교를 내렸다. 그러나 남치근은 경성의 장통방에 와서 모야 놀고 있는 임꺽정의 일당을 거의 다 포위해 놓고도, 임꺽정이 활을 쏘며 달아나는 바람에 놓쳐 버리고 말았다. 관군은 이때 겨우 임꺽정이 첩 3명과 졸개 몇 명만을 포로로 잡았을 뿐이었다. 조정에서는 임꺽정의 첩들을 모두 형조 소속의 종으로 삼게 하였다.
 
이 때문에 남치근은 포도대장이라는 감투를 잃고 말았다. 1560년 9월초에 임꺽정은 자기 첩들을 구출하려고 무리를 이끌고서 대담하게도 경성의 전옥서의 옥문을 부수고 쳐들어 왔다.
 
그러나 그의 첩들이 모두 형조전복에 있었기 때문에 구출하지 못하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봉산에 소굴을 두고, 성천, 양덕, 맹산,이천 등지에 수시로 그의 무리를 출몰시켜 관군을 줄기차게 괴롭혔다.
 
그 해 11월 하순 경에 임꺽정의 심복인 서림이 엄가이라는 가명으로 경성의 숭례문(남대문) 밖에까지 가서 술을 먹고 놀다가 포도대장 김순고에 의해 붙잡히고 말았다.
 
포로가 된 서림은 임꺽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어 임꺽정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 이때 임꺽정의 무리가 11월 26일에 봉산군수로 새로 부임한 이흠례를 살해할 계획이라는 것도 조정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평산부사 장효범, 금교 찰방 강려 등으로 하여금 봉산군수 이흠례와 합세하여 임꺽정의 무리를 본격적으로 토벌하도록 명했다. 그러자 장효범, 이흠례, 강려는 군사를 이끌고 임꺽정 일당을 추격했으나, 오히려 부장 연청령 및 군사 수십 명만 잃어 버렸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게다가 서흥부사 신상보가 도둑의 무리의 처자 몇 명을 잡아 서흥 감옥에 가두어 두었는데, 이들마저 감옥을 습격한 임꺽정의 무장단에게 내어주고 마는 수모까지 당했다.
 
이때부터 임꺽정의 무리는 그 여세를 몰아 황해도, 경기도 외에 강원도 지방까지 그 활동 무대를 넓혀 더욱 더 극성을 부렸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이번에는 이사증을 황해도 순경사로, 김세간을 강원도 순경사로 각각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이 중 이사증은 그 해 12월 28일에 마침내 임꺽정을 사로잡았다고 조정에 보고를 올렸다. 그러나 조정에 올려보낸 포로를 의금부에서 취조해 본 결과 그는 진짜 임꺽정이 아니라 그의 형 가도치였다.
 
이 때문에 이사증은 파직되고, 추관 장려는 하옥되고 말았다. 서림과 가도치를 잃어 버린 뒤에도 임꺽정은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등지로 무리를 이끌고 종횡무진 휘젖고 다니며 여전히 관가 및 민가에 대한 약탈을 일삼았다.
 
1561년 9월에 또 한번 임꺽정이 잡혔다는 보고가 조정으로 올라갔다. 평안도 관찰사 이량의 보고는 이러했다. "의주목사 이수철이 임꺽정과 한온을 잡았나이다." 그러나 의금부에서 이들을 조사해 보니, 이번에도 사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해주 출신의 군사 윤희정과 윤세공이었다. 이들은 의주목사의 꾐에 빠져 거짓 자백했던 것인데, 서림에 의해 그만 들통이 나 버렸던 것이다. 의주목사 이수철은 그로 인해 파직당하고 말았다.
 
1561년 10월 초에 임꺽정의 무리는 대낮에 평산의 민가 30여 채를 불태우고,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또한 재물을 약탈한 다음 종적을 감춰 버렸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전 포도대장 남치근을 황해도 토포사로, 전 첨사 백유검을 강원도 순검사로 각각 임명하여 파견했다.
 
그러나 이 무렵 임꺽정은 경성에 잠입하여 머물고 있었다. 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관군들은 도성의 문들을 모두 닫아 걸고 철저히 수색해 보았으나, 임꺽정은 끝내 붙잡히지 않았다.
 
게다가, 백성들의 원성의 목소리가 드높아 조정의 중신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백성들은 오히려 도둑 떼들보다는 토벌군들에게 의한 폐해가 더 크다고 원망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그 해 12월에 황해도 토포사 남치근을 다시 한양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임꺽정의 무리를 황해, 강원 2도의 감병사로 하여금 잡도록 하였다. 그런데 남치근이 한양으로 돌아가던 중인 1562년(명종 17년) 1월 초에 뜻밖에도 임꺽정의 무리를 만나게 되었다.
 
치근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군관 곽순수, 홍언성, 윤림등과 함께 임꺽정을 끝까지 추격하였다. 그러자 임꺽정은 구월산으로 피신하여 끝까지 항전했으나, 줄기차게 조여오는 관군의 포위망에 걸려 마침내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로부터 15일 후에 임꺽정은 처형당했다. 이로써 3년간에 걸쳐 기승을 부리던 임꺽정의 난은 평정되고 말았다. 그러나 임꺽정을 생포하는 데 공을 세운 남치근은 아무런 상도 타지 못하고, 오히려 포도대장 및 토포사로 있을 때 민원을 샀다 하여 탄핵을 받았다.
 
반면에, 관군에게 정보를 주어 임꺽정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크게 기여한 임꺽정의 옛 심복 서림은 포도청에 속한 관리가 되는 등 후한 대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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