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박원종의 난(중종반정)

구름위 2013. 8. 22.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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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종의 난(1506년)은 1506년에 박원종이 유순정, 성희안, 신윤무, 박영문, 장정, 홍경주 등과 함께 연산군의 실정과 학정에 반기를 들어 일으킨 난이다.
 
박원종(1467-1510년)은 판중추부사 박중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순천, 자는 백윤이다. 그는 특히 무술에 뛰어나 음보로 무관직에 기용되었으며, 1486년(성종 17년)에 선전관으로 있을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내승이 되었다.
 
이후 그는 오랫동안 왕을 측근에서 모시게 되었다. 1492년 성종의 특지로 동부승지에 발탁된 후 공조 참의, 병조 참의를 거쳐 연산군 때에는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한때, 그는 재정 문제에 대해 연산군에게 직언을 하다가 1500년에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좌천되기도 했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1506년에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연산군의 눈 밖에 나서 다시 실직당하고 말았다. 그랬다가 다시 함경북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이어 평성군에 봉해져 도총부 도총관의 직에 올랐다.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조선왕조 10대왕)에 오른 연산군은 즉위 초에는 왜구 및 여진, 야인들의 침입이 잦은 것을 염려하여 백성을 변경에 이주시켜 채우는 조치를 취했으며(1499년), 비융사를 두어 병기를 제조하게 하는(1500년) 등 다소의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어머니 윤씨가 사사된 후 세자 시절을 불우하게 보낸 탓으로 이상 성격이 형성된 탓인지 점차 향략과 횡포를 일삼아 많은 실정을 저질렀다. 무오사화(1498년)와 갑자사화(1504년)가 거듭되는 동안에 그의 실정과 학정은 한층 더 심화되었다.
 
1498년에 학문을 싫어하는 연산군의 성격을 교묘히 이용한 훈구파의 유자광, 이극돈 등의 사주를 받은 연산군은 김종직이 지은(조의제문)을 구실 삼아 무오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대량으로 숙청해 버렸으며, 1504년에는 친어머니 윤씨 사사 사건의 전말을 듣고 갑자사화를 일으켜 그와 관련된 후궁들을 살해한 뒤 김굉필 등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을 학살하는 등 비극적 상황을 연출했다.
 
그 후 왕을 비방하는 한글로 된 투서를 빌미로 삼아 한글 사용을 금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글 관계 서적을 닥치는 대로 불태워 버렸다. 또한 그는 충언하는 신하를 처형시켜 버리거나, 관직 박탈 또는 유배를 보내 버렸으며, 경연과 대제학 제도도 폐지해 버렸고, 사간원의 기능도 중지시켜 버렸다.
 
또한 그는 성균관에서 유생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유흥터로 삼았으며, 원각사에 장학원을 두어 기녀들을 양성시켰고, 전국에 채청녀사, 채홍준사를 파견하여 미녀와 양마를 징발해 오도록 하였다.
 
일반 사대부이 집 안에서 뛰어난 미녀들을 모조리 적발하여 궁중에 끌어들여 이를 속홍이라 하였고, 아직 시집 가지 않은 여자들을 궁중에 불러들여 이를 청녀라 하였다.
 
그 중에서 뽑힌 기녀 3백명을 궁중에 상주시키면서 자신의 정욕과 쾌락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궁궐 내외를 수시로 잠행하면서 연일 향락과 음행을 일삼았다. 심지어 그는 궁중 연회에 초대된 사대부의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등 방탕과 육욕에 가득찬 생활에 젖어 지냈다.
 
이렇듯 이미 비정상적인 인간이 되어 버린 연산군은 온갖 횡포를 자행했고, 국고를 탕진하였으며,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그러자 자연히 정치는 그의 손에서 떠나, 숙원 장녹수, 내시 김자원, 외척 신수근, 간신 임사홍 등에게 맡겨져 그들 마음대로 주물러지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중신들은 오히려 왕의 외도를 방관 또는 조정했다. 이에 박원종은 크게 분개하였다. 그는 한 동네에 살고 있는 부사용 성희안(성희안은 이조참판으로 있었을 때 양화도 놀이터에서 연산군의 횡포와 방탕적인 생활에 대한 풍자시를 지어 올렸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사서 무관의 말단직인 종 9품에 해당되는 부사용 직으로 좌천되고 말았다)과 함께 모반을 모의 했다.
 
때마침 이때 군자부정의 직에 있던 신윤무가 찾아와 들려준 다음 말은 그들을 크게 고무시시켰다. "지금 중외에 원한을 품은 이가 많소이다. 좌우의 친신하는 사람들도 거의 다 왕 곁을 떠나가 버렸습니다. 곧 무슨 일이 있을 듯합니다.
 
또 용맹과 지략을 겸비한 이장곤이란 자가 이미 도망쳐 버린 상태입니다. 그가 골짜기에 떨어져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무리를 모아 군, 현에 격문을 보내 군사를 일으켜 한양으로 한양으로 쳐들어오면, 조정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이리하여, 박원종과 성희안은 당시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을 설득하여 호응을 얻은 다음, 장정 등과 모의하여 난을 일으키기로 했다. 김종직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유순정은 활도 잘 쏘아 문무를 겸비한 강직한 인물로서 당시 여러 문신, 무신들에게 두루 존경을 받고 있었고, 장정은 창성부사로 있다가 장녹수가 부당한 방법으로 빼앗은 토지를 원래의 소유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가 그 일로 인하여 파직당했다.
 
거사일은 연산군이 장단의 석벽으로 유람하는 때에 맞춰 1506년 9월 1일 저녁으로 정했다. 박원종은 신윤무를 비롯하여 수원부사 장정, 군기시 첨정 박영문, 사복시 첨정 홍경주등과 함께 무사를 모아 거사일에 훈련원에 모두 모이기로 했다.
 
여기에 성희안뿐만 아니라 김수동, 김감, 유자광, 등도 가세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돌연 연산군이 석벽으로의 유람 행차를 취소해 버렸다. 그러자 박원종은 다시 모의하여 거사일을 연기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때 뜻밖의 격문 한 장이 한양으로 날아들었다. 그것은 전라도에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유빈(형조참판의 직에 있을 때 갑자사화로 인하여 모함에 걸려 전라도로 유배당했다)과 이과(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을 때 연산군에게 후원에서 활을 쏘며 노는 것을 자제해 달라고 충언하다가 전라도로 귀양가게 되었다)가 보낸 거사 격문이었다. "전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유빈, 이과, 김준손 등이 군사를 일으켜 거사를 일으키려 한다"는 격문 내용은 박원종 일파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때문에 박원종 일행은 거사 연기 계획을 백지화하고 무사들을 긴급히 훈련원에 집결시켰다. 그들은 진성대군에게 먼저 거사 계획을 알린 다음, 신윤무, 박영문, 홍경주, 장정 등과 함께 무사들을 이끌고 난을 일으켰다.
 
박원종은 장정으로 하여금 진성대군의 사저를 경비하도록 지시한 다음, 신윤무를 보내 신수근, 신수영, 임사홍을 먼저 살해하라고 지시했으며, 개성에도 무사들을 보내 신수근의 아우인 개경유수 신수겸을 베어 죽이도록 지시했다. 신윤무는 그 즉시 무사들을 데리고 가서 수각교에서 신수근의 목을 베어 버렸으며, 이어 신수영과 임사홍도 차례로 사로잡아 때려 죽여 버렸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사람들이 박원종의 무리 쪽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러자 박원종은 부서를 정하여, 용구의 말을 끌어내어 나눠 주어 각각 군사를 이끌고 궁궐을 에워싸도록 지시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주어 함께 종군하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윤형로를 진성대군에게로 보내서 이번 거사의 이유를 설명하도록 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운산군 이계에게 무사 수십 명을 딸려 보내어 진성대군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그 이튿날인 9월 2일 새벽에 성희안 등의 봉기군이 포위하고 있는 돈화문 쪽으로, 궁궐 안에서 거사 소식을 듣게 된 장사들과 시종들이 서로 다투어 추항해 와서 봉기군에 대거 가담하였다.
 
그러자 궁궐 안은 텅 비다시피 되었다. 이때 입직승지 윤장이 조계형, 이우 등과 함께 급히 입궐하여 변란 소식을 연산군에게 알렸다. 이때 연산군은 너무 놀라서 맨발로 달려나와 윤장의 손을 잡고서 부들부들 떨며 어쩔 줄 몰라했다. 이때 윤장 일행은 궁궐 바깥 정황을 살펴 봐야 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연산군의 손을 뿌리쳐 버리고 수채 구멍으로 도망쳐버렸다.
 
날이 밝자 박원종 일행은 궁궐 안으로 힘이 센 2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광화문을 거쳐 침전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연산군에게 아뢰었다. "전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천명에 따라 순순히 옥새를 내 놓으십시오." 그러나 연산군은 벌벌 떨면서도 끝내 옥새를 내놓지 않고 버텼다. 그러자 박원종의 호령이 떨어졌다.
"얘들아, 폭군 연산군을 끌어내라."
 
칼을 뽑은 군사들이 침전 안으로 들어가 연산군을 끌어냈다. 이때 박원종이 이렇게 꾸짖었다.
"12년 동안의 행적을 돌아보시오. 포악무도한 지난 날의 학정을 생각하면, 무딘 칼로 난도질을 하여도 한이 다 풀리지 않을 것이오."
 
모든 것을 자포자기한 연산군은 숙옹전에 사람을 보내어 옥새함을 가져오게 하여 상서원의 낭관에게 옥새를 내어 주었다.
 
이날, 박원종은 연산군으로 하여금 동궁으로 옮겨갈 것을 청한 다음, 전동, 심금손, 강응, 김효손 등을 잡아 죽인 후, 경복궁으로 찾아가서 성종의 계비이며 진성대군의 모친인 대비에게 " 연산군을 폐하고 대신 진성대군을 왕위(중종, 조선왕조 11대왕)에 앉힐 것"을 간청했다.
 
"주상(연산군)이 크게 군도를 잃어 버려 천명과 인심이다 진성대군에게로 돌아갔으므로 신하들이 뜻을 받들어서 진성대군을 옹립하여 하옵니다."
 
이윽고, 윤대비의 윤허가 떨어졌다. 그러자 유순정이 곧바로 진성대군의 사제로 가서 그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진성대군은 세 번이나 이를 거절했다. 그러다가 유순정의 간청에 못이겨, 진성대군은 할수없이 그 청을 받아들여 군사들의 호위를 받아가며 경복궁으로 들어갔다. 이때 길가에는 많은 백성들이 나와 기뻐하였다.
 
이 날 오후 4시에 진성대군은 근정전에 나아가 조선왕조 11대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진성대군(중종)은 문무백관의 하례를 받는 자리에서 선정을 베풀 것을 선언하였다.
 
9월 3일에 연산군은 군으로 강봉되어 강화 교동의 초가집에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그 해 11월 6일에 병 들어(일설에는 독살되어) 죽었다. 또한 폐비 신씨는 정청궁으로 옮겨갔으며, 그리고 폐세자 이황은 정선에 창녕대군 이인은 수완에, 양평대군 이성은 제천에 각각 유배당했다. 그밖에 횡포를 일삼던 나인, 흥청 및 그 족친과 노비, 수령등 1백여 명은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를 당하였다.
 
9월4일에는 지방에 파견 나가 있던 채청녀사와 채홍준사를 모두 소환 하였다. 9월 8일에는 함께 난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반정을 이룩하는 데 주동적 역할을 담당한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신윤무, 박영문, 장정, 홍경주, 유자광 등을 비롯한 1백여명이 정국공신으로 책봉되었다.
 
그와 동시에 박원종은 좌의정(영의정에는 유순, 우의정에는 김수동)이 됨과 동시에 평원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성희안은 창산부원군에 봉해짐 과 동시에 형조판서(이후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신윤무는 영천군에 봉해짐과 동시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이후 공조판서, 좌잠찬, 우참찬 병조판서)가 되었고, 유순정은 정천부원군에 봉해짐과 동시에 우의정이 되었다.
 
장정(그는 중종반정 직후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해 버렸다.)은 하원군에 봉해졌다. 박원종은 이후 좌의정을 거쳐1507년 유순정과 함께 이과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 1등이 되었고 그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06년 영의정에 오르고 이듬해 평성부원군에 봉해졌으나, 1510년에 44세로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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