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이시애의 난 ,

구름위 2013. 8. 22.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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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애의 난(1467년)은 판회령부사를 역임한 지방 호족 출신 이시애가 지방적 세력을 배경으로 북도의 수령을 남도 인사로써 삼는 것이 부당하다고 북도인을 선동하여 그의 아우 이시합과 더불어 1467년(세조 12년) 5월에 일으킨 난이다.
 
이시애(?-1467년)는 검교 문하부사 이원경의 손자요 함경도 첨절제사 이인화의 아들로 길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함경도 지방 호족 출신이었다. 당시 그 집안이 함길도의 각 읍에서 모두 잘 살고 있었다.
 
그는 조선 초 조정의 북방인 회유정책에 의해 중용되어 1451년(문종 1년)에 호군이 되었고, 1458년(세조 4년)에 경흥진 병마절제사가 되었으며, 이어 첨지중추부사, 판회령부사의 직을 각각 역임했다.
 
세조는 왕권을 확립한 후, 차츰 북방민의 등용을 억제하고 지방관을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여 임명하고 북도 출신의 수령을 점차적으로 줄여가는 등 중앙집권 정책을 강화하였다.
 
그러자 북도인들은 이에 심한 불만을 품게 되었다. 더욱이 조정에서는 1458년에 호적을 개정하고, 그 이듬해 2월부터 새로 호패법을 시행하여 지방 실력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인력이 군대로 편입되어 버리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던 지방 토호들은 중앙의 일련의 행정조치를 매우 못마땅히 여겼다.
 
또한 중앙에서 임명되어 파견된 수령들은 대부분 무인 출신들이어서 행정적인 차원에서의 통치보다는 무력을 통한 독재적인 방법으로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농민들에 대한 착취 수탈을 자행하여 북도인들의 원성을 크게 사게 되었다.
 
이 무렵(1467년 봄) 이시애는 모친상을 당하여 판회령부사의 직을 사퇴하고 집에 들어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시애의 아우 이시합과 매부 이명효 등이 조정의 일련의 행정 조치에 대해 불평 불만을 터뜨리면서 이시애의 심기를 자꾸 자극하였다.
 
자연스레 그들은 마음을 합하여 머리를 맞대고 모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들은 1467년(세조가 죽기 1년 전) 5월에 드디어 반란을 일으켰다. 이시애는 반란을 일으킴과 동시에 유언비어를 널리 유포시켰다.
 
그는 자기 족당들을 북방 각 지에 보내 처음에는 다음과 같은 소문을 퍼뜨렸다. "충청, 전라, 경상 하삼도의 군사들이 바다와 육지 양면으로 쳐들어와 북도의 군민들을 죽이려 한다. 조정에서 평안도와 황해도 병사를 보내 설한령을 통해 북도로 들어오게 하여 장차 이곳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 한다."
 
그런 다음, 이번에는 함길도 병마절도사 강효문을 다음과 같이 모함하면서 민중을 선동했다.
"함길도의 절도사란 자가 모든 진장들과 함께 반역을 음모하고 있다."
 
이 즈음 강효문은 각 진을 순찰하던 중에 이시애의 고향인 길주에 와 있었다. 이시애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밤중에 숙소를 급습하여, 병마절도사 강효문, 길주목사 설징신, 부령부사 김익수, 판관 박순달, 군관 성이건, 김수동 등 중앙 출신 관리들을 붙잡아 모두 칼로 베어 죽여 버렸다. 이 암살 사건은 1467년 5월 10일에 일어났다.
 
한편 이시애는 조정에는 자기 측근인 이극기를 보내 다음과 같은 거짓 상소를 올리며 자신이 강효문을 죽인 것은 반란이 아니라 의거라는 뜻을 전달하였다.
"병마절도사 강효문 등이 중앙의 한명회, 신숙주 일파와 결탁하여 함길도 군대를 이끌고 올라가서 모반하려 했사옵니다."
 
이와 동시에 이시애는 `지금 함길도에서는 각 읍의 백성들이 화를 입을까 봐 두려워하며 별별 소문을 다 퍼뜨리고 있으며, 북도의 민심이 대단히 동요되고 있는 중이니, 속히 북도 출신 인사를 함길도 내의 각 읍 수령으로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후에도 이시애는 몇 번 더 상소를 올려 중앙 정부가 혼란에 빠지도록 고도의 심리전을 구사하였다.
 
이시애는 이런 식으로 교묘히 유언비어를 퍼뜨려, 당시 지방의 각 유향소(지방 군현의 수령을 보좌하는 자문기관)의 불평불만 및 농민들의 관리에 대한 증오심에 호소하여 스스로 반란에 동조 또는 직접 참여하게 만들었다.
 
스스로 함길도 절도사라 자처하고, 지방 세력가들의 근거지인 각 읍 유향소를 중심으로 총궐기하여 타도 출신 수령들을 습격하고 살해하는 등 함길도 일대가 삽시에 혼란에 빠뜨리도록 유도하였는데, 이 작전은 예상대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이 반란에 야인들(여진족)까지 끌어들이는 등 치밀한 전략을 펼쳐나갔다. 이시애의 반란군은 점점 확대되어 한때 북방 곳곳을 휩쓸고 다니며 조정에서 파견한 북도 수령 및 관리를 모두 살해해 버리는 등 그 기세를 크게 떨쳤다.
 
이시애의 반란군 속에는 각 진영의 정규군도 포함되어 있는 데다 여진족이 보낸 증원군도 합세해 있어, 토벌군이 쉽사리 제압하지 못했다.
 
이시애는, 세조에게 반란군의 동향을 알리면서 먼저 마운령을 점령할 것을 건의한 바 있는 신면(신숙주의 아들)을 살해하고 나서 태연히 세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신면은 역적 신숙주의 아들로서 모반하여 남도의 군사를 이끌고 북도의 백성들을 살육한 후 다시 대군을 이끌고 상경하여 반역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죽이고 또 그에게 동조 한 체찰사 윤자운도 잡아 가두었나이다."
 
한편, 세조는 처음에 멋 모르고 이시애의 말을 성급히 믿어 버리고 신숙주를 잡아들여 투옥시키는 등 일시 실수를 저질렀으나, 곧 사태를 직시하고서, 즉시 남도에서 징병하여 토벌군을 편성한 다음, 조카인 귀성군 이준을 함길, 평안, 강원, 황해 4도 병마도총사로 임명하고, 호조판서 조석문을 부총사로, 허종을 함길도 병마절도사로, 그리고 강순, 어유소, 남이를 대장으로 각각 임명하여 토벌군 3만여 명을 1467년 5월 18일에 출동시켰다.
 
그 중 조석문이 이끄는 토벌군이 먼저 영흥으로 북상하며 진격하였으나, 그 뒤를 따르던 구성군은 토벌군의 주력부대를 거느리고도 철원에서 한동안 늑장을 부렸다. 그것은 최윤손 때문이었다. 토벌군이 출동하기 앞서 조정에서는 단천 사람인 최윤손을 이시애에게 보내 회유하도록 했으나, 그가 이시애 쪽에 붙어서 오히려 `조정은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다.
 
이러한 기세로 밀고 들어가면, 넉넉히 승리할 수 있다. 중앙의 한명회, 권남, 신숙주 등도 이시애의 편이다. 라고 거짓 선전을 해댔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섣불리 반란군을 대적했다가는 어떤 망측한 일을 당할지 몰라 겁을 집어먹고 그처럼 고의로 토벌군 주력부대의 진군을 늦추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무렵 이시애는 길주에서 단천, 북청, 흥원으로 남하하면서, 중앙 출신 관리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거나 사로잡아 그 기세를 더 한층 올리고 있었다. 전세와 상황이 이처럼 여의치않자, 세조는 각 도에서 군사를 더 징발하여 도총관 강순을 진북대장으로 임명한 뒤 평안도 병 3천명을 주어 평안도 경계 지역에 위치한 영흥으로 진격하게 함과 동시에, 병조참판 박중선을 평로장관으로 삼아 황해도병 5백명을 주어 문천으로 쳐들어가게 하였다. 장군 어유소에게는 경군 1천명을 주어 도총사 이준을 돕도록 하는 등 반란군에 대한 다각적인 공격을 시도하면서, 동시에 반란군 일당을 체포할 경우 후한 상금을 주겠다고 선언하여 토벌군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북방 지역의 각 유향소와 육진에도 밀사들을 보내 반란에 동요하지 말고 반역자를 체포하는 데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하였다. 병마도총사 이준은 토벌군을 이끌고 함길도 경계지역에 도달해서 주둔하면서, 허종을 선봉장으로 내보내 반란군을 공격하도록 했다.
 
그러자 허종은 선봉부대를 이끌고 안변에 도착하여 머물면서 함길도 출신 병사를 보내 포섭 작전을 펼쳤다. 그러자 반란군에 억지로 참여한 차운혁이 포섭되어, 토벌군을 도와 홍원의 파탄동부근에서 이시합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이시합은 교묘히 속임수를 써서 미꾸라지처럼 빠져 달아나고 말았다. 그러자 이준이 이끄는 토벌군의 주력부대는 철령을 넘어 안변으로 전진하여 반란군에 대한 포위망을 점점 좁혀 나갔으며, 허종의 선봉부대는 함흥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이 무렵 세조는 신숙주를 옥에서 풀어줌과 동시에 반란군을 회유하는 식의 온건책을 철회하고 직접 토벌에 나서겠다는 의사를 밝힌 뒤 강경책으로 선회하였다.
 
그러자 이시애는 겁을 집어먹고 반란군을 후퇴시켜 본거지를 함흥에서 북청으로 옮겼다. 그 해 6월 19일에 토벌군의 주력부대는 함흥을 점령한 뒤 홍원까지 진격하였다. 이준은 강순으로 하여금 종개, 산개에, 어유소와 허종과 박중선으로 하여금 북청 근처의 평포에 각각 진을 치게 하고 대처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2만여 명의 반란군은 이미 북청을 빠져 나간 뒤였다.
 
이시합은 북청 근처인 여주을현에 진을 치고, 이시애는 북청 어소에 각각 진을 치고서 토벌군과의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 드디어 6월 24일에 반란군이 먼저 야음을 틈타 토벌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포위당한 토벌군은 성문을 굳게 닫아 걸고 일체 대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반란군은 일단 후퇴를 하였다가 다시 새벽에 쳐들어왔다. 그리하여 마침내 10차례의 치열한 공방전이 치뤄지게 되었다. 이때 남이 장군은 몸에 서너 발의 화살을 맞고서도 용감히 전투에 임하여 토벌군들의 사기를 한껏 올려 주었다. 그날 반란군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이후 이명효는 홍원과 북청 사이에, 이시합은 마어령 근교에, 그리고 이시애는 대문령을 넘어 열여문평에 각각 반란군의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때 강순은 홍원으로, 이준은 함흥으로 토벌군의 주둔지를 각각 옮겼다. 토벌군의 1진은 강순, 남이, 박중선이, 2진은 허종, 어유소가, 그리고 3진은 이준, 오장경이 각각 이끌고 있었다.
 
7월 22일에 김말손이 이끄는 반란군 2백여 명이 석장현(북청과 함흥 경계 지역)을 점령한 것을 필두로 다시 토벌군과 반란군은 대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7월 25일 야밤을 이용하여 강순은 토벌군 1진을 이끌고 산개령을 넘어, 어유소는 2진을 이끌고 종개령을 넘어 각각 진격해 들어갔다.
 
그 결과 남이의 부대는 종개령의 반란군을, 이숙기의 부대는 산개령의 반란군을 각각 물리치는 등 이명효가 이끄는 반란군 대부분을 격파하였다. 그러자 이시애는 1만여 명의 반란군을 이끌고 북청에서 동쪽으로 68리쯤 떨어져 있는 만령에다 15리에 걸친 진을 쳐서 토벌군의 진격에 철저히 대비했다.
 
그 해 초가을에 토벌군은 1천8백여 명으로 구성된 총포 부대를 앞세워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준은 토벌군을 4개 편대로 나누어, 1군은 허종에게 맡겨 서쪽으로, 2군은 박중선, 김교에게 맡겨 우회하여 북방에서, 3군은 어유소에게 맡겨 배를 타고 만령 뒤로 돌아가 후위에서, 그리고 4군을 맡은 자신은 강순, 남이와 함께 정면에서 각각 진격해 들어갔다.
 
이에 이시애는 중봉을 거점으로 하여 3중으로 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토벌군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8월 4일에 어유소의 군대에 의해 좌측 허리가 공격당한 후 열세에 몰린 반란군은 이성 쪽으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8월 5일에 이성마저 점령당하자, 북으로 도망치던 이시애는 잔류 반란군을 모아 단천에다 진을 치고 일시 저항하다가 다시 길주로 달아났다.
 
이시애는 자기 집 창고에 있던 곡식을 인근 농민들에게 나눠 주고, 이명효로 하여금 의복을 경성으로 옮기게 한 후, 의복 및 재물을 여진족에게 주어 환심을 사서 여진족을 규합하고, 그와 동시에 6진의 군사 및 잔류 반란군을 끌어 모아 전열을 가다듬으려고 경성으로 향했다.
 
이때 이시애는 만약 이것도 저것도 뜻대로 되지 않으면 배를 구하여 재화를 싣고 멀리 여진족의 마을로 도망치려는 계획까지 세워 놓았다. 이무렵 길주 출신으로 사옹별좌에 있던 허유례(이시애의 처조카)가 세조에게 간청하여 이시애 일파를 회유하러 나섰다.
 
당시 허종의 휘하에 있던 그는 위장하고서 이시애의 진중에 들어 갔다. 당시 자기 아버지가 이시애의 수하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거짓 항복하는 척하며 적의 진중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먼저 이시애의 부하들 중 이주, 황생, 이운로 등을 설득하여 마음을 돌려 놓은 다음 그들과 함께 8월 12일에 천막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이시애, 이시합 형제를 사로잡아, 영동역에 주둔하고 있던 토벌군에 넘겨 주었다.
 
도총사 이준은 반란군 수괴인 두 형제를 문초한 뒤 목을 베어 죽인 다음, 그들의 목을 한양으로 올려 보냈다. 세조는 그들의 머리를 확인한 후 3일 동안 거리에 내걸어 사람들에게 구경시키도록 명했다.
 
이로써 약 4개월간에 걸친 이시애의 난은 마침내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후, 조정에서는 길주를 길성현으로 강등시켰으며, 북도 유향소를 폐지하고 함길도를 좌도와 우도로 나누어 통치책을 한층 더 강화했다. 그리고, 이 난에 관련된 자들을 모두 원변으로 귀양 보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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